이 경우 소설의 진실은 발언되고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 시선들 사이에서 마치 에피파니처럼 자신을힐끗, 보여주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이제 진실은 올바르거나 감동적이거나 잠언적인 문장으로 재현되지 않으며대표되지도 않는다. 진실은 언제나 1인칭이나 3인칭으로씌어진 문장 너머에서, 바깥에서, 심연에서, 건조하고 잔인하며 아름다운 방식으로, 우리를 습격한다.

하지만 다음 생과 달리 다음 소설은 가능하다. 어떻게해서든 다시 한 편의 소설을 살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문득 누군가눈을 뜨고 누군가 걸어 다니고 누군가 사라져버리는 세계를, 말하자면 매번의 사랑과 적의와 이별을, 또 사라질 에우리디케를, 다시 겪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인생이 커다란 전쟁터라면, 시인이란 이런 사람인지도모른다. ‘인생이 커다란 전쟁터‘라는 바로 그 은유를 파괴하는 사람. 삶을 구성하는 전제들 자체와 싸우는 것이 그의 일이므로.

하지만 영원과 무한에 정신을 헌납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기억할 것. 압생트를 마신 낭만주의 -상징주의자들의 탁자에서 밤하늘의 진실을 깨달았다고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시 쓰기는 우물에 가까울 것이다. 우물은계속 퍼내야만 물이 차오른다. 퍼내지 않으면 차오르지않는다. 그냥 두면 말라버린다. 그는 끊임없이 물을 퍼낸다. 초조하게 우물 바닥을 바라본다. 거기 해쓱한 제 얼굴이 보일 것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시 쓰기는 저수지와 같을지도 모른다.
오래 천천히 고이도록, 언어와 영혼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 내리는 비를 가만히 받아 모아야 한다. 오랜 시간이지난 뒤에 그곳에 차오르는 것이, 단지 흙탕물에 불과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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