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에는 이처럼 중간부류가 주도하는 대중정치가 엘리트정치의 바깥에 대체구조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대중정치의 대두에는문자해독이나 도로의 발달, 우편배달체제의 발달이 크게 기여했다.
부르주아 문화의 정수 중 하나가 신문과 정기 간행물이었다. 명예혁명의 결과 인허법이 폐지되어 (1695) 출판의 자유가 주어진 후, 일간신문 판매가 시작되었다(1702). 1760년이 되면 신문의 주당 총 판매부수는 20만 부 이상으로 급상승했고, 런던에만 12개의 신문이 발간되었다‘ 인쇄물 외에도 여론을 규합하는 공공장소로 커피하우스가 나타났다. 1740년에는 런던에 550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으며, 시장이 서는 읍과 도시들에 적어도 한 개씩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이제18세기 영국에서는 시민사회의 형성이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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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는 헨리 7세의 증손녀로 엘리자베스와는 오촌간이었으며,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 메리는 가톨릭 반체제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두 여인 사이에는 시기심도 작용했다. 메리는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한번도 메리를 직접 만나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자기와 메리 중 누가 더 예쁜가를 묻는 등여자다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1570년 교황이 엘리자베스를 파문하고, 그녀를 제거하면 신의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자사태는 심각해졌다. 메리는 유형생할 19년 동안 실제로 몇 차례 반역음모에 가담했지만, 그때마다 엘리자베스는 왕족의 처형을 거부했다. 그러나 1586년 또다시 반역음모가 발각되자 엘리자베스도 어쩔수없이 메리의 처형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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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에 대한 이상의 비판은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전부터 상공업이 발달했는데, 17세기 말부터 조직된 노동조합은 오랜 역사가 남긴 특권을 누려왔고 상당한 세력을 행사해왔다. 노사관계의 어려움은 노조 조직률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단체교섭이 이중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도 기인했다. 즉 노조가 기업단위나 산업단위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수공업 시대에 만들어진직능 조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한 직장에 많게는 수십 개의노동조합이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회사의 단체협상은 작업장과 전국적 차원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졌다. 1980년 2,000명 이상의 고용인을 가진 대규모 기업의 40퍼센트가 6개 이상의 노동조합들과 협상을 해야 했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가 노사협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거의 완전고용이 이루어짐에 따라 노동력 부족현상이 야기되고 노사 간 세력균형을 변화시켰다. 특히 숙련공을 확보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사용자는 해고를 노동통제의 무기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잦은 파업, 동조파업, 정치적 파업 등이 1970년대 영국 경제를 악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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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브의 목표는 한마디로 ‘국가적 효율성 national efficiency‘의 실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빈곤, 열악한 노동조건, 부적합한 주거환경과 위생, 낡은 교육제도, 구태의연한 의회와 관료제등 모든 것이 개혁되어야 했다. 단지 시의회에서의 활동에 만족하지않은 웨브 부부는 자신들의 목표를 진척시키기 위해서 공동작업 클럽 Co-efficient Club을 조직했다(1902). 이 클럽의 모토는 국내에서는 국가적 효율성을 증진시키고 해외에서는 문명화의 사명을 촉진하는 것이었는데, 리처드 홀데인, 에드워드 그레이, 허버트 웰스, 버트런드러셀, 버나드 쇼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중도노선을 추구하는 정당을 결성할 것을 계획했으나, 점차 활동이 시들해졌다. 어쨌든 웨브 부부는 국가적 효율성의 증진을 위해서 초기 복지국가의 기본을 다져놓은 사상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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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킨이나 모리스가 생각하기에 중세에도 물론 전쟁이나 절도가있었지만 점점 더 타락해가는 임금노예제, 사회적 속물근성, 비열함등은 없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토지를 교회로부터 빼앗아 욕심 많은 새 귀족들에게 넘겨주었고, 이들이 사유재산 보호를 주요 기능으로 하는 시민정부를 설립함으로써 사회와 정치는 물론 예술도타락시켰다. 뒤이어 산업혁명이 중간계급 민주주의, 공장제, 임금노예제와 싼 상품을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모리스는 산업사회에서 행해지는 거의 모든 노동을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생산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소용없는 것이고 노동자가 그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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