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와 내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KBS<즐거운 책읽기> 프로그램을 봅니다. 언젠가 예고편에서 아니 에르노에 관한 책 소개가 나오길래 <칼같은 글쓰기>, <단순한 열정>, <집착>을 읽으면서 알게 된 아니 에르노에 대해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는 김별아 작가가 추천한 거였네.
사실 그 명성에 비하면 <단순한 열정>과 <집착>은 그다지 강렬하게 남지 않았었는데, 김별아 작가가 소개한 두 작품은 새삼 읽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애정이든 원망이든, 마음의 빚 하나쯤 가슴에 두지 않은 이가 있을까요.  

그랬는데, 아버지가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이야기를 할 때 먼 기억속에 잊혀져가던 내 할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나를 무척 예뻐하셔서 7살 나이에 먼 길 학교가는 것이 안스러워 자전거로 매일 데려다주셨던 분.

할머니도 생각났는데,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에 대한 글쓰기 방식 때문이었어요. 거의 엄마의 모습으로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 할머니가 노쇄해가면서 돌아가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어느 날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살면서 후회되는 건 없는지, 다시 산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러다가 할머니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묶어 기록으로 남겨드리고 싶단 생각을 했었죠.

 
아니 에르노는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을 그렇게 만들었는데, 나는 그녀의 글에서 내 할머니도 발견하고 할아버지와의 추억도 발견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런 추억의 조각들을 발견하는 이들은 비단 나 하나뿐만은 아니겠죠?

 

개인의 부모에 대한 사적인 기억일 것이라고 지나쳐버릴지도 모를 이들에게 <남자의 자리>는 담담한 필치로 지금의 나를 만든 부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감정의 과잉 없이. 그러나 그 여운은 몹시 길어요.

 

(원제는 그냥 <자리>였답니다.

그걸 우리나라 출판사가 처음에는 <아버지의 자리>로 제목을 붙이려고 했더니 작가가 싫어했다고.)

나와는 상당히 소원한 관계였던 아버지의 형님이 내 쪽으로 지그시 몸을 기울이더니 불쑥 말했다. "네 아버지가 널 자전거에 태워서 학교로 데려다주던 때가 생각나냐?"

부유함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부유함이 타인의 불행을 덜어 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주곤 했다. 빗속에서도 땡볕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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