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시민의 조건 - 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
로버트 파우저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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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천년 왕조국가체제에서 지배자의 온갖 수탈을 받았던 민중은 근대화라는 달콤한 열매를 맛도 보지 못하고 일제 36년 긴 식민지배의 고통을 받고 다시 광복의 기쁨도 잠시 남, 북 분단에 이은 민족상잔의 비극과 군사독재라는 암울한 시대를 헤쳐 왔다. 그래서 자유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어찌 알 수가 있었겠는가? 누가 알려 주지도 않았고 알 방도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렇게 타율에 의한 억눌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짐승과 달리 사람은 본능적으로 타율과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비록 긴 시간 시행착오로 혼란과 그에 따른 고통이 있었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87 6월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세계 그 어디에 보여 주어도 부끄럽지 않은 아니 자랑스러운 민주화의 큰 물결을 이루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는 기초, 기본이 중요함을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었던 민주주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기본을 튼튼히 다지고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주지 않으면 민주주의라는 생물은 언제든지 퇴보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2016년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아도 이 말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수습과정에서 벌어 진 일련의 비 민주적 행동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에 대한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등,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문, 세계 경제불황으로 인한 경기침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외면한 현실 그것의 결과로 온갖 불법 비리가 판치는 불합리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소통과 화합의 정신은 사라지고 불통과 대립만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현실 지옥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파우저 교수의 [미래시민의 조건]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은 현재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조용히 되돌아 볼 수 있게  작은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한국, 미국, 일본 세 나라를 직접 경험하면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지금 당장 무엇이 필요한 지 객관적인 시각으로 지적하고 있다. 30년 가까운 시간을 한국에 살면서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서울대 국어교육과교수로 또 작은 시민단체의 중심으로 활동하며 느꼈던 저자의 소중한 경험이 이제껏 잊고 살았던 우리들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기회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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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교실 거꾸로 공부 - 왜 세계는 거꾸로 교실에 주목하는가
정형권 지음 / 더메이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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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이 평소 한국의 교육열을 따라 배우자는 취지의 말을 자주 한 것으로 안다. 그만큼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교육열은 한국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 아니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빈약한 자원, 좁은 국토 이 모든 제약을 뛰어 넘은 것이 사람에 대한 투자 곧 교육이었다. 그렇게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 존 스튜어트 밀의 배 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청소년 삶의 만족도, 청소년 자살율 등 세계에서 불명예란 불명예는 모두 다 가진 가장 불쌍한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어디에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까? 두 말 할 것 없이 교육이다. 교육으로 시작했으니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 백 년지 대계 교육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썩은 뿌리가 너무 깊어 단 시간 내에 뽑아 낼 수 없다. 혼자서도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이 합심하여 뽑아야 한다.

지금 세계에서는 기존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교육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비 교육 전문가들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효율적인 시스템을 개발 보급하고 있다. 물론 이런 방법들에 대해 다양한 검정들이 이루어 져야겠지만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봐서는 꽤 효과적인 시스템인 것 같다.

<거꾸로 교실 거꾸로 공부>는 우리 교육의 병폐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계에서 일어 나고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거꾸로 교실을 비롯해 배움을 스스로 조직하는 아이들’(수가타 미트라-인도), 세상에서 가장 큰 학교 칸 아카데미’(살만 칸- 미국), 기적의 교실로 불렸던 슬로 리딩’(하시모토-일본)

지금 학생들이 수업 받고 있는 교실을 둘러 보라.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한 채 획일화된 수업을 받고 있지 않은가. 개인의 차이를 무시한 채 선생님들은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아이들은 겨우 따라가기에도 힘에 벅차다. 이제 세상은 많이 변했다. 아이들도 변했다. 스마트 기기들로 인해 손쉽게 정보도 손에 쥘 수가 있다. 세상은 다양화되고 개별화 되었다. 교육도 거기에 맞는 방식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거꾸로 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방식에서 벗어나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단절된 것이 아닌 소통하고 협력해서 창의력이 살아있는 방식으로 변화해야 한다. <거꾸로 교실 거꾸로 공부>를 통해서 학교교실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 되었으면, 아이들이 행복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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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로부터 온 편지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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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로부터 온 편지>를 집어 들었을 때 20대 중반 선물을 받았던 <이방인>이 떠올라 책꽂이 이곳 저곳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 후 한쪽 구석에 꽂혀 있던 책을 뽑아 드니 그 시절이 눈 앞에 선명하게 되살아 난다. 나를 좋아해 주었던 후배가 준 세가지 선물 <녹색평론> 잡지1권 가수 이동원의 노래 테잎, 그리고 <이방인> 선물이라 어쩔 수 없이 읽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느끼듯 굉장히 어려워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작물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80년대 중 후반 값싼 저질 번역출판물이 무분별하게 발간되던 시기로 기억한다. 대중에게 조금만 이름이 알려지면 값싼 해적판 번역서가 출간 되곤 했다. 이런 번역물이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담보해 낼 턱이 없지 않은가? 이런 번역물의 영향으로 좋은 작가와 작품에 뜻하지 않게 거리를 두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카뮈로부터 온 편지>는 우리에게 번역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실제 자신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부딪쳤던 문제들을 글로 표현한 다큐멘타리 같은 이야기인데 묘한 끌림이 있다. 글의 내용은 지금까지 카뮈를 전공한 당대 최고의 전문가가 번역한 <이방인>이라는 작품이 실제 오역투성이 임을 카뮈가 쓴 원문을 싣고 그것을 하나하나 밝혀 나가는 형태로 소설은 이루어져 있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는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글로 인해 이해의 어려움이 있지만 페이지가 넘어 갈수록 큰 문제로 부각되지 않고 최고 전문가의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 오류를 바로 잡아나가는 작가의 행동이 더욱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몇 년 전 인기 있는 아나운서의 이름을 번역 출간 된 책과 관련하여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실제 자신이 번역하지 않았으면서 이름만 빌려 준 사건인데 이것이 번역과 관련한 우리 출판계의 행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고의 전문가라는 자부심이 이런 일을 행하지는 않았겠지만 실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대한민국 출판시장과 출판사들의 올바른 출판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어 이런 관행은 많이 사라 졌고, 번역가들의 능력도 많이 향상 되어 원 저자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좋은 번역서들이 꾸준하게 개선되어 나오고 있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말을 하지만 정말 좋은 번역은 원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에 충실한 번역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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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역사는 아주 작습니다
이호석 지음 / 답(도서출판)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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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핵심 3국 한국, 중국, 일본은 역사전쟁을 치루고 있다. 중국은 대륙굴기란 큰 그림 아래 서남공정을 통해 티베트의 역사를, 동북공정을 통해 만주를 호령하던 고조선, 발해, 부여, 고구려 등 한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역사왜곡을 일으켜 통일 다민족국가를 건설하려고 한다. 일본은 러시아, 중국, 한국과 영토분쟁을 통해 다시 한번 세계에 전쟁 가능한 나라로 나아가려는 야욕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떠한가 살펴보면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한 역사왜곡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또 한편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군사대국화 하려는 일본을 견제 하기 위해 기존의 고구려 연구재단을 동북아 역사재단으로 확대 개편해 많은 국민세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효과적인 대응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왜곡된 주장을 수용하고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세계에 선전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이덕일 한 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의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라는 책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런 자국의 역사 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불안한 시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모든 국민들에게로 확대되어야 한다. 물론 주류사학계의 전향적인 자세도 중요하지만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관심 있는 연구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역사연구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이호석의 [보이는 역사는 아주 작습니다]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껏 우리가 배워 왔던 역사는 어떠한가? 그저 연대순으로 일어 났던 순서를 외우고 왕들의 업적을 외우고 이 유물은 어떤 가치가 있고 제원은 어떻고 등등 우리 삶과는 동떨어진 역사를 배웠다. 그래서 역사는 따분하고 재미 없고 어려운 것으로 우리의 뇌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보이는 역사는 아주 작습니다]는 우리 역사에 스토리를 입히는 작업의 일환이다. 재미없는 역사에서 재미있는 역사로 어려운 역사에서 쉬운 역사로 이런 흐름이 사회 전반에 일어 난다면 동북아 역사전쟁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의도를 꺾을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다.

 한 민족이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었고 부끄러운 역사도 있었다. 그렇지만 부끄럽다고 역사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그런 부끄러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반성과 혁신만이 당당한 역사를 만들 수 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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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인가, 베이징인가?
김병기 지음 / 어문학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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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로부터 권력을 움켜 쥔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영원토록 유지하기를 바라며 백성들을 지배할 수단으로 우민화 정책을 사용했다. 따라서 우매한 백성들은 지배자들의 당근과 채찍에 길들여져 지금까지 사육되어 왔다. 대부분의 국민이 고등교육을 받은 현대 사회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우리 스스로는 무지하지 않고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는 행태로 보면 똑똑한 것 같지는 않다. 지배자들은 언론과 교육을 통해 교묘하게 대중들을 진실과 사실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다. 이런 사실은 동, 서양을 불문하고 공통된 현상인 것 같다.

 1446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후 무지한 백성들은 조금의 수고로움을 견디면 자기의 생각과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많지만….

 한글 창제이전까지 우리에게는 한자라는 표기수단이 있기는 했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 바쁜 가난한 백성들이 한자를 익혀 자기의 뜻을 펼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한자를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존재들은 먹고 사는 것에서 자유로운 양반 지배계층뿐이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의도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백성들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북경인가, 베이징인가?] 의 저자는 두 가지 과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첫 번째: 의사소통이 갈수록 중요해 지는 현대사회에서 한글전용만이 유익한 표기수단인가?

 두 번째: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표기하는 것에 있어 원음주의 원칙이 바람직한가?

 한글이 표기수단으로써의 편리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부족이 자신들의 고유어를 표기하는 공식문자를 한글로 한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2000년 가까운 긴 시간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표기수단이었던 한자는 결코 중국만의 문자가 아니라 우리 문자임을 주장해야 하고 또한 소리글자인 한글과 뜻글자인 한자를 조화로운 사용을 통해 우리의 언어 문자생활을 근원적으로 풍부하게 할 수 있다. 고 주장한다.

 중국의 인명과 지명에 대한 원음주의 표기 주장의 근거는 한자를 외국문자로 인식하는데 있다. 한자가 상층 지배계급의 표기수단으로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난 20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용해 오면서 하층 백성들의 의식 또한 깊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21세기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한글과 한자의 조화로운 사용을 모색해 볼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이 한글전용과 국한문혼용 주장이 대립하는 현재 무엇이 더 유리한가? 타인의 입장에 서서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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