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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필사북 - 이동진 평론가 추천!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역사, 건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6년 8월
평점 :

김승옥 작가님의 작품 가운데 제목 하나만 기억하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무진기행」을 떠올릴 것이다. 「서울, 1964년 겨울」, 「역사」, 「건」 역시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품들이지만, 「무진기행」은 유독 하나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아마도 안개 때문일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 안개 속에 감춰진 인간의 마음 때문이다.

젊은 시절 처음 읽었을 때의 「무진기행」은 단순했다. 고향에 내려간 한 남자가 옛 여인을 만나 흔들리다가 결국 현실로 돌아오는 이야기. 솔직히 말하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다시 읽은 「무진기행」은 전혀 다른 소설이었다.

이제 나는 윤희중을 비난할 수 없다. 오히려 그를 이해하게 된다. 좋은 직장, 사회적 성공, 안정된 생활을 얻었음에도 어딘가 공허한 사람.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 현실을 버릴 용기는 없지만 현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 그 모습이 낯설지 않다.

어느 나이가 지나고 나면 삶은 더 이상 무한한 가능성의 이름이 아니다. 직장생활의 시간, 가족에 대한 책임, 경제적 현실, 사회적 위치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삶은 점점 단단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의 나는 정말 내가 선택한 결과인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무진기행」은 바로 이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그래서 놀랍다. 스물세 살의 저자님이 어떻게 중년의 권태와 타협, 욕망과 자기기만을 그렇게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었을까? 나는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이 소설이 보이는 부분이 있다.

소설 속 윤희중은 "한적이 그리울 때 무진을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한적함이 그리울 때 말도를 떠올린다고. 좋은 독서란 아마 이런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 같다. 작품 속 무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기만의 무진을 발견하는 순간 말이다. 누군가에게 무진은 고향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바다일 수 있다. 잊고 지냈지만 문득 돌아가고 싶은 시간일 수도 있다. 윤희중에게 무진이 과거와 욕망, 회피와 그리움이 뒤섞인 공간이었다면, 나에게 말도는 삶을 잠시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장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진기행」은 공간을 다룬 소설인 동시에 내면을 다룬 소설이다. 안개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인물의 마음을 대신 말하는 거대한 은유다. 무엇 하나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안개 속 풍경처럼, 윤희중 역시 자기 마음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지만 끝내 자기 자신에게조차 솔직해지지 못한다. 그 모습은 어쩐지 현대인의 자화상 같다. 삶을 살아가고는 있지만 자신의 삶을 확신하지는 못하는 사람. 현실에 적응했지만 내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을 품고 있는 사람. 그래서 「무진기행」은 읽을수록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내 삶과 나 자신 사이에도 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에 김승옥저자님의 소설들을 다시 읽으며 필사의 매력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김승옥 저자님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건조하고 절제되어 있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 반복되는 표현, 감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풍경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식. 읽을 때는 스쳐 지나가지만 손으로 직접 따라 쓰면 문장의 구조가 보인다. 왜 이 단어를 선택했을까. 왜 여기서 문장을 멈췄을까. 왜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안개를 보여주었을까. 한 번 읽어서는 보이지 않던 문장의 이음새가 드러난다. 그래서 필사는 단순히 글씨를 베끼는 일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정중한 독서" 다. 독자가 작가를 따라 읽는 것을 넘어, 작가의 어깨너머에서 문장이 탄생하는 순간을 들여다보는 경험이다.

「서울, 1964년 겨울」을 초등학교 6학년 아이와 함께 읽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아이의 질문이 오히려 작품의 핵심을 건드렸다. "이 사람들은 왜 친하지도 않은데 같이 있어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작품 속 세 남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깊은 관계도 아니다. 그럼에도 함께 걷고, 술을 마시고, 밤을 보낸다. 어른이 되면 알게 된다. 사람들은 꼭 친해서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외로워서 함께 있기도 하고, 누군가가 필요해서 함께 있기도 하다. 때로는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서울, 1964년 겨울」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낯설지 않다. 서울의 어느 카페에서, 회식 자리에서,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대인의 풍경처럼 느껴진다.

결국 김승옥저자님의 소설들을 읽고 필사하는 일은 한 작가를 읽는 일이 아니라 자기 삶을 읽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인물과 사건을 따라가게 되지만, 지천명의 나이에 다시 읽으면 소설 속에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가지 않은 길, 선택하지 못한 삶, 그리고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 독서는 안개가 아름다운 소설을 읽은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를 조용히 되묻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무진기행」이 반세기가 넘도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남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안개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서 길을 잃었던 인간의 질문은 아직도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김승옥 작가님의 문장을 천천히 필사해 보려 한다. 한 줄 한 줄 따라 쓰다 보면 언젠가는 문장 속에 숨어 있던 작가의 마음뿐 아니라,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내 마음도 만나게 될 것 같다. 좋은 문학은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으로 걸어 나오는 것임을, 저자님은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들이 모여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된다. 하지만 가끔은 선택하지 않은 길들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무진기행」은 바로 그런 순간에 읽게 되는 소설이다. 안개는 걷히지 않았고 질문도 남아 있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그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일 또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만난 「무진기행 필사북」은 단순히 읽는 소설이 아니라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 같다. 한 줄 한 줄 필사하며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를 조용히 묻게 된다. 문장이 아름답다기보다 인간의 마음속 모순과 허무를 섬세하게 비춰주는,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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