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이빨 2
제이디 스미스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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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 보니까, 최근 읽었던 것들 중, 인류사회학적 흉내를 낸 것들, 다니엘 에버렛의 “잠들면 안돼, 거기 뱀이 있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또는 말로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의 공통된 화제는(각기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만), 종족사회, 글로벌화 되지 않은 사회, 다소 문명이란 단어에서 비껴있는 사회의 장점들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한다. 자연과 벗 삼고, 자연에서 배우고, 종족을 사랑하고, 비교할 불행이 없어서 행복한 삶, 바로 그 삶 말이다.

이건 아주 오래전이긴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서도 강조된 바, 모든 사회는 미개인가 문명인가에 구분 없이, 구조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회, 그리하여 독립된 구조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그 나름대로 포괄하고 있는 유기적 구조이며, 각기 문제해결의 독특한 문화적 모형을 가진 집합체라는 것이 아닐까? 한편, 레비 스트로스는, 르네상스로 시작된 휴머니즘이, 두 번째 19세기의 이문화를 포용하려했던 유럽의 부르주아 휴머니즘을 거쳐, 세 번째, 지구도처에 흩어져 있는 인류문명에 차이들을 존중하면서 각 문화에서 특질적인 인간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을 참고로 하여 인간적 선의와 각성을 돌아보는 20세기의 새로운 운동이란 마지막 휴머니즘으로 발전했다고 했다. 

결국, 모두의 세권의 책이든, “슬픈열대”든 간에, 시기적인 차이를 뒤로 하고 공통된 점을 다시한번 요약하라하면, 17세기 이후, 역사의 주도권을 유럽이 쥐면서부터 일어난 현대화로의 문명의 진보는 자본주의와 악수를 청하며, 특권계급과 특권적 사회을 유지하기 위해 도리어, 전쟁, 빈곤, 기아, 자연자원 남용, 환경 파괴, 인종차별, 왜곡된 민족주의, 양극화까지의 각종 현대적 재난을 막아 낼 수 없음에 이르렀고, 이 해답을 도리어 소위 비문명 사회(물론, 이것은 유럽의 관점에서 본 비문명이므로, 도리어, 동양과 중남미 또는 아프리카 등 소위 남반부 등의 저개발국가 및 지역에 대한 왜곡된 대유법이라는 것을 전제하자면)의 전통들, 예를 들자면, 생산된 가치를 사회적 도의적 가치로 전환하는 원리를 통해, 개인의 자기실현, 친족과 이웃 간의 상호 존경, 사람의 도의적·사회적 위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초자연과의 조화까지 가능하게 하자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유럽, 이문화와 공동체에 대한 소통의 실험장이 될 수 있는 있는 대표적인 국가로 영국이 있다. 사업혁명, 식민지, 그리고 양대전등 굵직한 세계사의 중심이 된 나라, 여왕의 온화한 미소 속에 자존심과 유럽식의 복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나라, 독일과 함께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왕성하게 제기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나라, 퀸과 비틀즈를 배출할 수 있는 나라(음, 갑자기 아일랜드 독립이 떠오른다), 그 화려했던 시기에 받아 들였던 많은 이민족, 이문화를 수용할 수 밖에 없는 나라, 영국 말이다. 

소설, “하얀이빨”은 이렇게 피부색이 다른 이민족과 이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을 적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 제이디 스미스의 천재적인 역량(25세때 쓰여진, 그러나 여성작가라는 표현으로 또 다른 남성우월주의의 오해는 벗어나야 할)이 곳곳에 배인 채, 통상 이민사회가 다룰 수 있는 주제, 핍박, 차별, 우월, 고립, 만용 등의 일반적 화두에서부터 비롯되는, 그리고 그 사회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성공하거나, 또는 왜곡된 꿈에 의해 타락하는 그런 독자의 선입감을 부수고, 여러 인종, 종교와 피부색이 다른 그러니까, 유난히 “하얀색이 두드러져 보일 수 밖에 없는” 유색인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영국, 런던, “웰레스덴 그린”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년대기를 통해 진정한 “유러피언 드림”에 대한 유럽사회의 대안을, 실천의지를, 그리고 그 현실을 보여 준 작품이다. 

소설 “하얀이빨”은 이 변두리 다소 꾀죄죄한 동네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 중, 두 집안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자랑스런 영국인 계보를 아치 존슨과 자메이카 모계를 가진 클라라 부부와 그의 딸 아이리, 인도, 정확히 말해 방글라데시 출신의 사마드 익발과 알사나 부부와 그의 쌍둥이 아들 밀라트와 마기드가 런던, 아니 영국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는 연대기이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족이 더 있다. 유태인 집안의 유전공학 박사 마커스 샬펜과 부인 조이스, 그리고 이들의 네 아들 중 조슈아 말이다. 

아치와 사마드는 2차대전 중 영국군에 편입되어 쓸데없는 작전에 투입되어 생사를 넘나든(?) 인연으로 40년이 지나 런던에서 다시 만난다. 클라라의 할머니는 식민지 자메이카에서 자신을 임신시키고 도망친 “영국인들은 책임칠 일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맡는 데 선수”로 인해 영국과 인연을 맺게 되고, 사마드의 할아버지는 식민지 인도의 저항정신의 모태가 되는 주인공으로써 영국과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이 들은 1970년, 할아버지에게 사형을 내린 사람의 동상이 서있는 런던에서 함께 조우한다. 

800여 페이지가 넘는 이 긴 소설에서 상기한 인물들은 살아가기 위해 종횡무진 뛰어 다닌다. 평생을 광고지 종이 접기와 웨이터, 성인용품 속옷 재봉질을 하며 그들에게 내린 운명을 저주하고, 좀 더 부유한 꿈을 위해 노력하며, 그들이 고향으로부터 짐에 넣어 온 종교와 문화와 음식을 런던데 펼쳐놓고도 충분히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답게 살아가고 있다. 정육점, 식당 등의 중동지역 사람들 까지, 그리고 글레나드 오크 공립학교를 통해 영국인, 유태인 등 피부색이 하얀 사람들과의 그럴싸한 소통과 동등한 우월감을 함께 누리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일찍이 다인종, 다문화 사회를 이루고 있는 런던의 타자들과의 행복한 포옹을 스스로 실천 하고 있으며, 이들은 타자이기 때문이 아닌, 능력 차이에 의한 빈부의 경계선만이 있을 뿐이었다. 

                                          “20세기는 이방인의 세기였다. 갈색인종, 황인종, 그리고 백인종, 
                                                            20세기는 이민자의 대규모 실험이 있었던 세기다. ”
 
이러한 실험의 장인 공동체 사회에서 동등한 우월감? 그건, 낯선 이국에서 강하게 뿌리내린 정신의 승계를 위해, 도리어 이 행복한 사회를 버리고 장남 마기드를 부인 몰래 고향으로 보내 버린 사마드의 걱정에서 잘 나타난다. 
 
                                                                           “ 이 나라에서 아이들은 너무 안전해요. 
                                             아이들은 우리가 만들어 준 플라스틱 거품속에서 살고 있어요. 
                                                                      모든 삶이 그들을 위해 지도로 그려져 있죠. 
                                                         도전을 받지 못하는 데, 어떻게 성인이 되겠습니까? ”
 
그렇듯이, 사회는, 부모는 보다 견고한 삶을 위해 고민하고 주력하고 있는 사이, 아이들은 마리화나와 성장기 유혹속에 빠진다. 사춘기적 방황을 일찌감치 졸업한 아이들은, 부모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보다 강력한 신념의 유혹에 빠진다. 고향으로 보내 났더니 도리어 더 영국사회의 일원으로 행동하기 위해 다시 돌아 온 아들이나, 이슬람 과격주의에 빠진 아들, 그리고, 이 둘의 아이를 동시에 임신한, 치과의사를 꿈꾸는 아이리, 과격한 동물보호운동에 빠진 조슈아 등 어찌보면 뒤죽박죽인 이 상황은(가끔식 작가가 이들의 신념을 희화한 속물주의적 표현의 중재는 또 어떤가?), 도리어 아이들의 미래를 보며 정체화 된 영국사회에 대한 도전을 야기한다. 

그럼, 이 다인종, 다문화가 소설 속에서 어떻게 굳건하게 통합하고 있는 가? 출세, 경제, 협력의 일상적인 소통의 완성 뒤에, 다인종의 진정한 화합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가? 작가는 아주 적절하게 그것을 온 인류의 고민으로 대체 시킨다. 그러니까 1992년 12월 31일 마커스 박사의 “유전자 쥐”의 기자회견장에서 이 훌륭한 유러피언 드림은 종결을 맺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마커스 박사와 아치 그리고 오래전 기억 마르크 피에르 페레 박사와의 관계를 조합한 작가의 익살이라니!)

1997년 자각적 행위를 하는 동물에 대한 보호를 조약에 포함한 유럽연합의 이상은 유전자 산업에 대한 회의로부터 기조한다. 신이 만들어 놓은 생태계에 저항하고, 피부재생, 삶의 연장, 의료 산업이라는 명분으로 신이 만들어 놓은 유전자를 마치 자기들의 업적인양, 상표등록을 하고, 이것이 신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신이란 말인가?라며 자화자찬에 빠져 있는 과학계에 대한 유럽의 자각을 바로, 이 이민자, 다양한 인종과 그들이 가진 종교 문화를 통해 대변하고 있으며, 그 실천마당을 통해 서로 통합한다. 클라라의 어머니 호텐스로 대표되는 여호와의 증인, 공동리더 죠엘리를 사모하는 바람에 더 급진적이 되어버린 조슈아가 가입한 동물보호조직 FATE, 밀라트가 선봉에 서서 자극하는, 이들의 골목길 상점들을 다 차지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모임 KEVIN 조직 등 소설 속에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 영국인, 유태인, 동양인, 중동인들은 모두 같은 목적, 유전자과학을 비웃거나, 방해하거나, 저항하기 위한 공동의 신념을 가지고 한자리에 모인다. 인류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최고의 고민, 이 걸 전 인류의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으로 (그것이 문화든, 종교든, 가족관계 든 각기 우스꽝스러운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막는 것을 보여 주는 것, 이 것 하나면, 이 소설이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지, 작가의 의지를 알아 차리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있는 소설 치고는, 소설은 또 다른 감동이 있다. 바로 장난스럽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작가의 전지적 작가 시각과 문체다, 번역소설이긴 하지만, 책의 곳곳에서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이끌고 있는 작가의 시각.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에피소드들, 청소년기의 고민들을 아주 디테일하게, 희화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길거리 언어들의 사용과 유머로서 도리어 더 진진한 그의 사색의 결과들이, 말 그대로 “톡톡 튀는 젊음의 냄새”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 점을 이 책을 흔쾌히 읽게 하는 또 다른 원동력이다. 
 
원주민 처녀를 임신시키고 도망친 선장이 런던에 이민자들을 위한 복지적 공장을 만든다고 해놓고는 이내 시들해 지는 과정을 “그의 속은 좁은 데가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고, 그 구멍을 통해 정열이 규칙적으로 새어나갔다라고 표현한다든지, 정육점 주인이 이슬람인이라는 것 때문에 영국인들에게 폭력을 당한 전력을 “모는 총 다섯 번 칼에 찔렸고(아!), 손가락 세 끝을 잃었으며(이씨!), 팔과 다리 모두 부러졌고(오이아우!), 발에 불이 붙었고(지익!), 이빨이 빠졌고(칵, 퉤!), 공기총 총탄 하나가 (핑!), 다행히도 살이 많은 그의 엉덩이에 박혔다(욱!)”라고 장난끼 다분한 익살스런 표현임에도 충분히 그 상황을 이해하게 만드는 작가의 해학력은 도저히 젊은 작가의 글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롭다. 뿐만 아니라, 다행히도 번역자가 친절하게 주를 달아 설명해 준, 영국 문화의 아이콘들,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다문화 코드까지 믿어지지 않는 자료조사와 경험을 소설 곳곳에 넣어두며 재능을 뽐냈는데, 이런 기법은, 읽는 독자로서 슬쩍, 최인훈 또는 서정인식 문장구성이 주는, 즐거움까지 누리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인들을 전시대에 세운 교만한 인도주의, 1924년 대영제국 박람회와는 결정적으로 다른영국의 사회제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민자들,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있는 빅밴의 역할을 과거를 잊으려고 미래에 의지하기 때문이야, 때로 영국인들은 안됐다는 느낌마저 갖는 이민자사회의 정착을 그린 소설 한 권을 읽으면서, 국부적으로야, 완성된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겠냐마는, 쫓기지 않는 “비문명사회”들 발전시키고자 하는, 그 공동체들의 장점과 통합하려는 노력을 적어도, 유럽은 그걸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미 충분히 다인종 사회로 진입하고 있으면서, 어설픈 조선시대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있는 한국사회, 과학적 개가라는 미명하에 어떤 연구도 허용되는 한국사회를 돌이켜 보게 되면 이 부러움은 더욱 배가 될 것이 분명히, 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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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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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쿠바 여행 중, 도시간 이동버스안에서, 유난히 수다스럽던 앞자리의 서양여행자가, 침묵을 지키더니, 슬그머니 책 한권을 꺼내 읽었다. 도대체, 나 버금가는 수다를 가진 이 친구가 읽는 두툼한 책은 어떤책일까 궁금해서, 목을 길게 빼고 확인했는데, 영어번역본 하루키 소설이었다. 잠시, 문학의 세계화, 동양권 소설이 영문판으로 여행지에서 읽히는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루키에게 묘한 부러움이 있었다. 정책적인 문학 선양사업외에도 이렇게 자연발생적으로 문화권을 넓힐 수 있다는 것, 그게 몹시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선인세의 경쟁으로 꽤 많은 인세를 치루었다는 신간, 정말 오랜만에 다시 하루키를 읽었다(하긴, 소설이란 장르를 멀리 했던 것이 꽤 오래이므로 하루키 자체도 시간적으로는 별 의미는 없다만...)  


빅 브라더의 통제사회가 등장한다는 1984년, 같은 시간적 배경 일본의 1984년 4월, 동경하늘에 두 개의 달이 뜬다. 그리고 이 또 다른 세계, 빅 브라더의 반대개념인가? “리틀 피플”로 통제하에 움직여지는 이 새로운 세계를, 도대체 어떤 세계냐라는 물음, Question의 "Q"를 삽입하여 1Q84년으로 부른다. 하루키가 드디어 판타지로까지 독자를 현혹하는 시점이다.


 

두 축, 아이스 픽을 가지고 혈흔하나 없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30세 여자 “아오마메”와 학원강사면서 소설을 쓰는 동갑내기 남자 “덴고”의 4월부터 9월까지의 이야기를 그린 “1Q84”는 하루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컨텐츠를 동원한, 그러니까, 현대 일본사회가 아니, 감성적이며, 혼란스러운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잠재된 욕망을 깡그리 드러내놓고, 그 고리 고리들을 작가의, 흉내낼 수 없는, 그 감각적인 문장(번역본을 읽으며 문장을 얘기한다는 것이 좀 그렇다만, 그렇다고 며칠 전 아트선재 로비에서 지나 친 사람처럼, 일본어 원본을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으로 완성한 소설이다.

 

“상실의 시대”에서부터 드러내 놓은 “욕망”을 지속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소설, 게다가 이번 소설에서 나오는 컨덴츠들, 신흥종교, 응징, 청부살인, 문단, 대필, 은둔, 신비주의, 사할린 조선인, 권총, 동성, 혼외정사, 애인, 섹스, 유니폼, 스와핑, 아동 등등으로 이 중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화제를 이끌 수 있는 단어들을 모두 꺼내 놓았는데, 권선징악과 또 다른 세계 즉 판타지라는 화두속에, 이것들의 아귀를 어찌나 잘 맞쳐 놓았는지, 역시 하루키가 가지고 있는 힘을 확인하게 했다. 더구나, 일본문화가 가지고 있는 서양문화에 대한 절제 없는 동경들, 그러니까 고전음악, 음식들, 외국작가들, 명품 옷들의 상표 등등까지 배합하고 있어, 서양인들도 흐뭇하게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거만함까지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대미는 역시 이제 고양이나라와 리틀 피플이라는 가공의 세계, 그 세계에서 조율되는 저항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세계로 끝을 내고 있는 점이다. 정말 갈 수 있는 곳은 다 닿은 듯한....

“마음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일 따위, 이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아”

- 본문 295P -

 


   그런데, 이 가벼운 대중소설이, 소설가로써 작가가 대중을 움직이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통찰력과 마켓팅에 있다. 책을 잡으면 평소에 겪고 보고 싶은, 로망인 것들에 대한 대리만족 너머, 뭔가 상대방에게 딱 집어 표현하고자 하는 감성들에 대한 언어구사, 그러니까. 이 사람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래, 이런 것을 해 보고 싶었지”, 또는 “그래 내가 그 때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것이었어.”라는 공감을 이끌어 낼 수 밖에 없는 감성의 포착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호환되면서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모양이다. 그것이 책을 한번 잡으면, 욕을 하면서도 끝내 마지막 면까지 놓을 수 없는 마술을 부리는 있는 거은 아닌가? 예언과 잠언이 아니더라도, 주인공들의 대화가 아닌, 마치 독자의 마음을 밖으로 불러 내 오는 그 마술이 무려 1,2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내쳐 읽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폭음처럼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대한 마술을 부린 하루키가 이번엔 다소 욕심이 과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2권 중간까지 딱 집어 골라낼 수 없는 긴장감을 가지고 적절할 때 두 주인공들을 교차하며 부렸던 만용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은밀하게 제시됐던 “판타지”로의 급작스런 전이와 함께 끝을 맺어 버렸다. 다소 황당하기도 했더 이 결말들이, (물론 끊임없이 암시를 하곤 있었다만, 그도 익숙하지 않는 분야에 대한 미흡한 정리들) 듣기로는 3권 집필을 계획중이라니, 만일 그 집필이 사실이라면 또 다른 평가로 매듭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가치이상의 가치로 포장된 채, 많은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는 소설가, 전편을 통해, 긴장속에 있는 장면마저도 “불균형적인 젖가슴”을 슬쩍 삽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설사, 그것을 두 개의 달과 상통하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강변한다손 치더라도) 이 작가가, 이 정도의 소재들을 가지고 마니아들을 몰고 다니는 그 흡인력, 소설가로서의 그 원천이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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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적 충동 - 인간의 비이성적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조지 애커로프, 로버트 J. 쉴러 지음, 김태훈 옮김, 장보형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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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반복된다. 단순히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때문이 아니라, 징글징글한 인간의 욕구때문인데, 이 욕망이, 교과서적으로 기대한다면,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인류을 위해 새롭게 태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늘 거꾸로 가는 기관차처럼 반복되는 자충수만 둘 뿐이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예수와 석가등의 선인을 제외한다면 대중은 눈앞의 이익이 더 중요하니, 그걸 굳이 “미시”와 “거시”로 구분하여 인간사회를 진단해 본들, 결론은 늘 인간이 본질에 의한 행동양식을 강력한 제도에 의해 조정하지 않고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할 뿐이라는 자괴감마저 생길 지경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가장 큰 덕목, 시장경제라는 전제로 필요한 자와 공급하는 자의 완벽한 조화속에 비자발적 실업이 없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로의 진입이 허울뿐인 것은, 굳이 이 경제학이 태동한 시기가 산업혁명과 식민지라는 힘 있는 것들이 무한이익을 남기기 위한 시기였다는 역사적 배경을 억지 부리지 않더라도, 그냥, 작금의 상황을 보면 된다. 갈수록 더 양극화되고 있는 사회, 소수민족처럼 구박과 체념이 익숙해지고 있는 계층이 점점 더 분포가 넓어지고 있는 이 사회를 말이다.

시장이 소비자가 원하는 좋은 제품을 가장 합리적인 단가와 가격으로 생산해 내는 기능만 가지고 있다면야 무슨 걱정이 있겠냐마는, 시장이 또한 별 필요하지도 않을 것들은, 자기가 생산해 낸 것들을 무조건 팔아 버리는 마케팅을 동시에 진행하는 한, 그러니까, 어떤 것이든, 이익이 있는 곳에 덤벼드는 승냥이의 속성을 깊게 지니고 있는 한, 세상은 더러운 진흙땅을 벗어나지 못 할 것이다. 왜 그럴까? 인간이 인간임을 서로 인정하고 배려하면, 위에 것을 조금만 덜어내면 밑에 것들이 부쩍 올라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속성을 버리지 못할까? 이 현상 때문에 걱정하고, 다시 반복하고 있는 많은 이론들과 행동들이, 이제 거듭에 거듭나서 충분히 준비되어 있음에도, 왜 여전히 이 명제는 고민에 싸여 있을 까?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쉴러가 공저한 “야성적 충동”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8가지 의문에 대한 현상을 거시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즉, “왜 경제는 불황에 빠지는 가?”, “왜 중앙은행이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는가?”, “ 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왜 물가상승률과 실업율은 장기적으로 반비례하는가?”, “왜 미래를 위한 저축을 비계획적으로 운용하는가?”, “왜 금융시장과 기업투자는 변동성이 심한가?”, “왜 부동산시장은 주기적인 부침을 겪는가?”, “왜 소수계의 빈곤은 계속 대물림 되는가?”라는 이 8가지 질문을 편하게 설명해 주었으며, 그것에 대한 주요 요인들 케인즈가 언급한 “야성적 충동”의 기조하에, “자신감, 그리고 상승효과”, “공정성”, “부패와 악의”, “화폐착각”, “이야기”라는 다섯 개의 부류로 전제했다. 

모처럼 각 장마다, 꼼꼼한 메모를 함께 한 것은, 처음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이론서라는 선입감이 주는 경직됨이었으나, 읽을수록 경제학 용어를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 나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명쾌한 내용들 덕에 어느덧 몰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음도, 각 장에 언급된 수많은 사례와 분석을 한 문단으로 요약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정당화 한 것은, 마지막 참고문헌 편에서 무려 24페이지에 걸쳐 소개된 목록 때문이었다. 평생을 읽어도 소화하기 힘든 참고문헌(질은 둘째치더라도 양만으로도)을 근거로 저자들의 학문적 성과까지 정리된 책을, 어찌 이 문외한이 전달을 하겠다는 과욕을 부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책이 지금, 세계화라는 우산 밑에서, 이익은 반드시 개인의 소유로 이전되고 손실은 모두 사회비용이 되고 있는, 엉성한 국가의 보호 하에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허물을 꼬집고 있다는 것은 말 할 수 있겠다. 부동산과 금융시장의 부침속에 숨겨져 있는 “감정적 반응 속에 경제적 진실은 쉽게 잊혀지는” 심리를 이용한 “합리적 기대와 효율적 시장의 방향에 경도되어 경제위기의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역동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야성적 충동을 이용하여 기업은 자본주의는 보다 더 극대화된 이익과 조직을 이뤄내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나눔을 통해 비자발적 실업을 막을 수 있음에도 임금삭감 대신 대규모 해고가 남발하고 있으며, 모기지등 불확실한 미래가치를 이용한 버블경제가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현상의 가장 든든한 뒷배경, 가장 믿음직한 보험, 늘 국민경제를 명분으로 나타나는 해결사 “예산”과 “사회기금”이 있으니 말이다. 결국 이익은 부자가 보고 손실은 대다수 “쉽게 잊어버리는” 중산층과 서민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하는 사이클이 계속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것, 이게 핵심인 모양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은, 어떤 정예한 경제학 이론도 “야성적 충동”을 배제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그런데, 이 심리적 요인조차 저자들이 진단하고 있는 현상을 훨씬 뛰어넘는 변이와 변형이 가능한 유기체라는 생각 때문이며, 결코 인간의 타자의 이익에 솔선수범 할 수 없다는 패배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우리가 모델로 삼고, 부러워하고 있는 국가와 체제들을 흉내라도 내어, 이 어깨위에 올려진 짐을 조금이라도 덜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일뿐이다. 국가의 역할, 제도의 정당성, 부패와 악의가 없는 제대로 된 준법정신과 일부계층이 아닌 전체 국민을 살필 수 있는 권력, “뱀기름 이라도 생산된 것을 무조건 팔아먹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일정 수준 골라내려고 하는, 그 제대로 된 힘의 올바른 사용이 그립다. 

아무튼, 각 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례들과 경제학 용어로 인해 책 읽는 시간이 행복했다라고 느낄 수 있었던, 최근에 너무 익숙하게 듣고 있는 경제에 관련된 갖가지 실태들, 적어도 이 현상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의 염려를 경청할 수 있었던 “행동경제학”의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정말, 시장경제라는 것이 온당하긴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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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하는 민주주의 - 서른 살, 사회과학을 만나다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5
손석춘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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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긴 쉬운데, 실천하기 어렵다? 어찌보면 참 지당한 말 같은데, 이 표현처럼 황당한 것이 없다. 물론 실행하고 있는 것만 말할 자격을 준다면 온 세상이 “묵언”의 경지로 들어서야 할 것 이므로,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야 싶다마는, 개인, 또는 조직, 아니 어떤 부류의 이익과 대치되는 정의가 요구된다면, 인간이라는 것이 어찌 정의의 길을 쫓을 수 있겠는가? 그랬다면 인류가 이 모양새를 갖추고 있진 않을 터이니....
 

조지프 히스의 주장을 우회적으로 얘기하자면, 우파라 지칭되는 보수와 가진자는 조금만 욕심을 버려야 할 것이고, 좌파는 좀 더 공부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극단적인 한 체제로 유지하고 있는 사회는 “불행”을 전제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유경쟁체제는 소외그룹을 양산할 것이며, 통제사회는 인간의 영혼을 잠식할 수 밖에 없다. 이 양자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정자본주의든, 수정공산주의든, 이 “수정”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 “의식의 전환”이 곧 사회정의,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살게 하는 진정성만 담보한다면, 세상은 아름다워 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아, 씁쓸히도, 7천년 인류역사 상, 글쎄다, 그게 만족스러웠던 시기가 있었는지....

핀라드 등의 북유럽 사회체제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사회체제 하에서도 얼마든지 경제적 부를 누릴 수 있다는, 그러니까 “경제발전”과 “복지”를 한몫에 쥘 수 있는 지혜가 부럽기 때문이다. 그걸 표본으로 삼아, 이미 수십년 틀에 박혀 선점한 지위를 내놓으라고 하면 될 성 싶겠나라는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소위 제국주의의 확대라는 것을 16세기 이후로 본다면 500년 역사고, 자유시장 등의 개념으로 본다면 100년 안팎이며, 세계인류의 재편성이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본다면 기껏 60년이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역사로 국한한다면 고작 30년 아닌가? 그렇다면 신석기시대까지 무리하게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문자시대 이후만 따져도 7천년인데, 7천분의 60을 하면 0.85%에 불과한 이 시기에 축적된 부와 권력과 이념을 되찾자고 한다면, 까짓껏 못 할 것도 없다고 본다. 
 

“재생프로그램”으로 돈을 지급하니, 술이나 먹는다고 상품권을 주자니, 당장 자녀 학비를 납부해야 하는 서민은 어쩌란 말이냐? 도시미관과 국가적 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사소한 지역 몇 명쯤 희생시키겠다는데, 대의를 위해 얼마든지 이정도의 희생은 감수해도 된다는 데, 왜 이리 딴지를 걸고, 국가경쟁력 제고에 방해하고 있단 말이냐? 이런 상반된 질타에 구심점에 “인간이인간을낳고또그인간이인간을낳는,그러니까인간이인간으로인간답게인간을구현하는”것에 최우선을 둔다면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후퇴하는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오늘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진단한 강연들을 묶은 책 한권을 읽으면서(아, 그간 읽었던 주석과 인용, 각주에 몸서리치던 책들에 비하면 얼마나 손쉬운 독서냐) 문득 말장난을 하고 싶었던 것은, 참으로, 이 가벼운 진리들이 그렇게 지켜내기 힘든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들끓었다가 바로 잠수타는, 그리고 부인하고자 해도, 이미 진보나 좌파(그 진정한 분류가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시되지만)마저도, 경제앞에서는, 아이들 교육문제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주류사회를 흉내내고 있으면서 “잃어버린 10년”을 반박하는 “잃어버린 60년”을 부르짖은 듯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 역시 포함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석춘의 강연으로 시작해서 하종강의 대담으로 끝나는 이 작은 책, 한권은 적어도 지금, 우리 한국이 안고 있는 불균형에 대한 힘없는 자들, 그러나 우리 사회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민의 결과이다. 이념, 노동시장, 주택, 교육, 재일조선인들의 실체 등 신자유자유에 올인하며 그 틈을 타, 상위 몇프로의 몰지각하고 염치없는 착취와 굳히기 및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귀찮니즘을 동반한 “나만 피하면 돼”식의 순응주의에 대해 분석과 비판하고 있는 이 책의 덕목은, 그 불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럼?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심, 학습, 실천의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는 이상사회, 소시민부터 지식인까지 진정으로 손쉽게 이념을 동반하지 않더라도, 그저 지극히 평범한 이웃에 대한 배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실천이 가능한 일부터, 이 사회에 뿌리 내리고 있는 각종 “극단적 이기주의”에 의한 “비타협”과 “순응주의”에 한발짝만 나서보면, 이 허당스러운 사회에 한번쯤 “씨익” 웃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마저도 용기가 필요하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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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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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가끔 나의 편견과 선입관 때문에 사과할 일이 생긴다. 다행히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참으로 쑥스러운 일이다. 이젠 정말 세월과 경험, 그리고 인품의 향기가 가끔씩 뻗어나가도 시원찮은 마당에 사과라니... 어디 될 일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그간 한비야 열풍에 대해서 살짝 삐딱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범상치 않은 이력이 그만한 칭송을 받아 마땅하건만, 다소 시선이 곧지 못했던 것은, 그 마음을 상술에 담는 것, 예를 들자면 “바람의 딸”이니 뭐니 하면서 미디어와 연결되거나, 티벳 등 오지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았다”는 식의 표현에 있었는데, 이런 식의 표현이 난무할 때마다, 나는, 도리어, 만일 잘 사는 나라의 사진작가가 서울의 저개발지역, 소위 “산동네”에서 시멘트담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손톱이 까만 아이 사진 찍어놓고 “지금 한국은 우리네 50년대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순수의 세계인가”라고 토를 단다면 과연 그것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이웃에 대한 평가는 그 이웃의 형편에서 중심을 담아야 한다는 지론이다. 그래서 한동안 한비야라는 이름 뒤에 붙은 수식어 때문에 불편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무릎팍도사”에서 그녀를 보았다. 매우 빠른 어조로 소개한 자신의 삶, 그리고 일터에서의 감성들, 비록 예능프로그램이긴 했지만,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간간이 그 자신이 찬 말투에서 진정성이 엿보였다. 그래, 네 이웃을 돌아보는 성자는 아닐지라도, 직업으로써, 난민과 오지에 이웃의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현장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살짝 과장된 포장이라도 충분히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슬쩍 한비야라는 사람에게 사과를 해야겠다. 내가 너무 편협되게 당신을 판단하고 있었다 라고....

 

책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이런 미안함을 줄이기 위해 구입했다. 4년동안 155쇄라니, 재빨리 인세계산이 앞섰지만, 이 세속적 부러움은,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세계 곳곳, 도움이 필요한 현장에서 생생하게 전달되어 오는 경험들이, 영화처럼 그렇게 펼쳐지면서 정신적인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그녀가 5년동안 경험한 구호팀장으로써의 일터, 아프가니스탄, 말라위, 잠비아, 이라크,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네팔, 팔레스타인, 쓰나미현장과 북한 등의 지명, 감히 언급하자면, 여타의 관련도서와 영상들을 통해 그 참상, 또는 안쓰러움이 이미 한가득 경험한 사례들이긴 했다만, 이렇게 우리나라 사람이 전한다는 것에서 또 다른 반성을 하게 되니, 어쩔 수 없는 소아적 인간인가 보다.


 

다국적기업과 권력자들을 보호하고, 세계화 질서를 유지하며,

자국 기업의 진출을 위한 지출 총액은 7,800억 달러,

기아 퇴치 프로그램에 190억달러,

난민정착에 50억달러.

 


 작년에 “탐욕의 시대”라는 독후감에서, 인용했던 책에서 소개된 통계의 일부다. “국익과 국민을 위한다는 말은 결국 상위 몇 퍼센트 밖에 안되는 소수 부유층과 재벌을 위한 것”인 세상, 세계평화유지는 유대인의 권위과 이익만을 위한 통념, 사람의 목숨도, 소위 인권도 스스럼없이 파괴할 수 있는 권위와 이익들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당당할 수 있는 가에 대한 물음 때문에 매우 가슴아팠던 기억이 있다. 말로는 내가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은 모두 남의 것을 대신 취하고 있는 것이라며 폼을 잡고는 있으나, 과연, 우리가 “네 이웃”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 책 "탐욕의 시대" 관련 포스팅  http://blog.naver.com/jjjang60915/100058972603

 

내 술자리에 60%이상을 동참하고 있는 친구집 거실, TV 위에는 아프리카 소녀 사진이 한 장 놓여있다. 남매를 두고 있는 친구는, 부부가 각각 만원, 남매가 각각 5천원, 모두 3만원을 이 소녀의 후원금으로 보내고 있다고 했다. 생협을 이용하고, 공동체를 꿈꾸며, 삭막한 도시생활에서 조금씩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참 고맙고 또 감사하다. 그런데, 이 기부와 나눔행위가 갈수록 늘어나고, 관심을 끌고 있는데, 어찌 통계숫자는 변하지 않는 지, 여전히 밀알규모의 선한 행동이, 포대자루만큼의 국가, 인종의 편견과 욕심 앞에서는 아무 힘을 못 쓰고 있는 지 사뭇 궁금하다.

 

테레사 수녀처럼 자신을 모두 버리고 봉사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인데, 어찌 너무나 인간적인 평강과 안위를 버리겠는가? 그저 조금만 덜어 보자는 것, 충분히 내가 쓰더라도, 한 술 정도는 한번 덜어 보자는 것이다. 아니면, 경제적이지 않더라도, 여타 민족과 국민, 다양성 앞에서 소위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심, 그리고 배려를 실천해 보자는 것이다. 아니 최소한 백인 거지 앞에서는 기죽고, 피부색이 어두운 학자 앞에서는 고개를 빳빳히 드는 몹쓸 편견하나만이라도 버려보자는 것이다. 사람은, 어디에 살던, 어떤 일을 하든, 무엇을 먹던, 어떤 옷을 입고 있던 모두 똑같다. 이 가장 보편적인,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배우고, 실천을 훈련받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진리가 왜 이렇게 지키기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이 책 한권을 읽고 이런 생각이라도 잠시 한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지금도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현장, 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한다. 한 발 더 내딪어 그들의 위한 구체적 나눔으로 나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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