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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이빨 2
제이디 스미스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가만 보니까, 최근 읽었던 것들 중, 인류사회학적 흉내를 낸 것들, 다니엘 에버렛의 “잠들면 안돼, 거기 뱀이 있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또는 말로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의 공통된 화제는(각기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만), 종족사회, 글로벌화 되지 않은 사회, 다소 문명이란 단어에서 비껴있는 사회의 장점들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한다. 자연과 벗 삼고, 자연에서 배우고, 종족을 사랑하고, 비교할 불행이 없어서 행복한 삶, 바로 그 삶 말이다.
이건 아주 오래전이긴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서도 강조된 바, 모든 사회는 미개인가 문명인가에 구분 없이, 구조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회, 그리하여 독립된 구조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그 나름대로 포괄하고 있는 유기적 구조이며, 각기 문제해결의 독특한 문화적 모형을 가진 집합체라는 것이 아닐까? 한편, 레비 스트로스는, 르네상스로 시작된 휴머니즘이, 두 번째 19세기의 이문화를 포용하려했던 유럽의 부르주아 휴머니즘을 거쳐, 세 번째, 지구도처에 흩어져 있는 인류문명에 차이들을 존중하면서 각 문화에서 특질적인 인간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을 참고로 하여 인간적 선의와 각성을 돌아보는 20세기의 새로운 운동이란 마지막 휴머니즘으로 발전했다고 했다.
결국, 모두의 세권의 책이든, “슬픈열대”든 간에, 시기적인 차이를 뒤로 하고 공통된 점을 다시한번 요약하라하면, 17세기 이후, 역사의 주도권을 유럽이 쥐면서부터 일어난 현대화로의 문명의 진보는 자본주의와 악수를 청하며, 특권계급과 특권적 사회을 유지하기 위해 도리어, 전쟁, 빈곤, 기아, 자연자원 남용, 환경 파괴, 인종차별, 왜곡된 민족주의, 양극화까지의 각종 현대적 재난을 막아 낼 수 없음에 이르렀고, 이 해답을 도리어 소위 비문명 사회(물론, 이것은 유럽의 관점에서 본 비문명이므로, 도리어, 동양과 중남미 또는 아프리카 등 소위 남반부 등의 저개발국가 및 지역에 대한 왜곡된 대유법이라는 것을 전제하자면)의 전통들, 예를 들자면, 생산된 가치를 사회적 도의적 가치로 전환하는 원리를 통해, 개인의 자기실현, 친족과 이웃 간의 상호 존경, 사람의 도의적·사회적 위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초자연과의 조화까지 가능하게 하자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유럽, 이문화와 공동체에 대한 소통의 실험장이 될 수 있는 있는 대표적인 국가로 영국이 있다. 사업혁명, 식민지, 그리고 양대전등 굵직한 세계사의 중심이 된 나라, 여왕의 온화한 미소 속에 자존심과 유럽식의 복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나라, 독일과 함께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왕성하게 제기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나라, 퀸과 비틀즈를 배출할 수 있는 나라(음, 갑자기 아일랜드 독립이 떠오른다), 그 화려했던 시기에 받아 들였던 많은 이민족, 이문화를 수용할 수 밖에 없는 나라, 영국 말이다.
소설, “하얀이빨”은 이렇게 피부색이 다른 이민족과 이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을 적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 제이디 스미스의 천재적인 역량(25세때 쓰여진, 그러나 여성작가라는 표현으로 또 다른 남성우월주의의 오해는 벗어나야 할)이 곳곳에 배인 채, 통상 이민사회가 다룰 수 있는 주제, 핍박, 차별, 우월, 고립, 만용 등의 일반적 화두에서부터 비롯되는, 그리고 그 사회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성공하거나, 또는 왜곡된 꿈에 의해 타락하는 그런 독자의 선입감을 부수고, 여러 인종, 종교와 피부색이 다른 그러니까, 유난히 “하얀색이 두드러져 보일 수 밖에 없는” 유색인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영국, 런던, “웰레스덴 그린”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년대기를 통해 진정한 “유러피언 드림”에 대한 유럽사회의 대안을, 실천의지를, 그리고 그 현실을 보여 준 작품이다.
소설 “하얀이빨”은 이 변두리 다소 꾀죄죄한 동네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 중, 두 집안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자랑스런 영국인 계보를 아치 존슨과 자메이카 모계를 가진 클라라 부부와 그의 딸 아이리, 인도, 정확히 말해 방글라데시 출신의 사마드 익발과 알사나 부부와 그의 쌍둥이 아들 밀라트와 마기드가 런던, 아니 영국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는 연대기이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족이 더 있다. 유태인 집안의 유전공학 박사 마커스 샬펜과 부인 조이스, 그리고 이들의 네 아들 중 조슈아 말이다.
아치와 사마드는 2차대전 중 영국군에 편입되어 쓸데없는 작전에 투입되어 생사를 넘나든(?) 인연으로 40년이 지나 런던에서 다시 만난다. 클라라의 할머니는 식민지 자메이카에서 자신을 임신시키고 도망친 “영국인들은 책임칠 일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맡는 데 선수”로 인해 영국과 인연을 맺게 되고, 사마드의 할아버지는 식민지 인도의 저항정신의 모태가 되는 주인공으로써 영국과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이 들은 1970년, 할아버지에게 사형을 내린 사람의 동상이 서있는 런던에서 함께 조우한다.
800여 페이지가 넘는 이 긴 소설에서 상기한 인물들은 살아가기 위해 종횡무진 뛰어 다닌다. 평생을 광고지 종이 접기와 웨이터, 성인용품 속옷 재봉질을 하며 그들에게 내린 운명을 저주하고, 좀 더 부유한 꿈을 위해 노력하며, 그들이 고향으로부터 짐에 넣어 온 종교와 문화와 음식을 런던데 펼쳐놓고도 충분히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답게 살아가고 있다. 정육점, 식당 등의 중동지역 사람들 까지, 그리고 글레나드 오크 공립학교를 통해 영국인, 유태인 등 피부색이 하얀 사람들과의 그럴싸한 소통과 동등한 우월감을 함께 누리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일찍이 다인종, 다문화 사회를 이루고 있는 런던의 타자들과의 행복한 포옹을 스스로 실천 하고 있으며, 이들은 타자이기 때문이 아닌, 능력 차이에 의한 빈부의 경계선만이 있을 뿐이었다.
“20세기는 이방인의 세기였다. 갈색인종, 황인종, 그리고 백인종,
20세기는 이민자의 대규모 실험이 있었던 세기다. ”
이러한 실험의 장인 공동체 사회에서 동등한 우월감? 그건, 낯선 이국에서 강하게 뿌리내린 정신의 승계를 위해, 도리어 이 행복한 사회를 버리고 장남 마기드를 부인 몰래 고향으로 보내 버린 사마드의 걱정에서 잘 나타난다.
“ 이 나라에서 아이들은 너무 안전해요.
아이들은 우리가 만들어 준 플라스틱 거품속에서 살고 있어요.
모든 삶이 그들을 위해 지도로 그려져 있죠.
도전을 받지 못하는 데, 어떻게 성인이 되겠습니까? ”
그렇듯이, 사회는, 부모는 보다 견고한 삶을 위해 고민하고 주력하고 있는 사이, 아이들은 마리화나와 성장기 유혹속에 빠진다. 사춘기적 방황을 일찌감치 졸업한 아이들은, 부모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보다 강력한 신념의 유혹에 빠진다. 고향으로 보내 났더니 도리어 더 영국사회의 일원으로 행동하기 위해 다시 돌아 온 아들이나, 이슬람 과격주의에 빠진 아들, 그리고, 이 둘의 아이를 동시에 임신한, 치과의사를 꿈꾸는 아이리, 과격한 동물보호운동에 빠진 조슈아 등 어찌보면 뒤죽박죽인 이 상황은(가끔식 작가가 이들의 신념을 희화한 속물주의적 표현의 중재는 또 어떤가?), 도리어 아이들의 미래를 보며 정체화 된 영국사회에 대한 도전을 야기한다.
그럼, 이 다인종, 다문화가 소설 속에서 어떻게 굳건하게 통합하고 있는 가? 출세, 경제, 협력의 일상적인 소통의 완성 뒤에, 다인종의 진정한 화합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가? 작가는 아주 적절하게 그것을 온 인류의 고민으로 대체 시킨다. 그러니까 1992년 12월 31일 마커스 박사의 “유전자 쥐”의 기자회견장에서 이 훌륭한 유러피언 드림은 종결을 맺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마커스 박사와 아치 그리고 오래전 기억 마르크 피에르 페레 박사와의 관계를 조합한 작가의 익살이라니!)
1997년 자각적 행위를 하는 동물에 대한 보호를 조약에 포함한 유럽연합의 이상은 유전자 산업에 대한 회의로부터 기조한다. 신이 만들어 놓은 생태계에 저항하고, 피부재생, 삶의 연장, 의료 산업이라는 명분으로 신이 만들어 놓은 유전자를 마치 자기들의 업적인양, 상표등록을 하고, “이것이 신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신이란 말인가?”라며 자화자찬에 빠져 있는 과학계에 대한 유럽의 자각을 바로, 이 이민자, 다양한 인종과 그들이 가진 종교 문화를 통해 대변하고 있으며, 그 실천마당을 통해 서로 통합한다. 클라라의 어머니 호텐스로 대표되는 여호와의 증인, 공동리더 죠엘리를 사모하는 바람에 더 급진적이 되어버린 조슈아가 가입한 동물보호조직 FATE, 밀라트가 선봉에 서서 자극하는, 이들의 골목길 상점들을 다 차지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모임 KEVIN 조직 등 소설 속에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 영국인, 유태인, 동양인, 중동인들은 모두 같은 목적, 유전자과학을 비웃거나, 방해하거나, 저항하기 위한 공동의 신념을 가지고 한자리에 모인다. 인류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최고의 고민, 이 걸 전 인류의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으로 (그것이 문화든, 종교든, 가족관계 든 각기 우스꽝스러운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막는 것을 보여 주는 것, 이 것 하나면, 이 소설이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지, 작가의 의지를 알아 차리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있는 소설 치고는, 소설은 또 다른 감동이 있다. 바로 장난스럽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작가의 전지적 작가 시각과 문체다, 번역소설이긴 하지만, 책의 곳곳에서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이끌고 있는 작가의 시각.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에피소드들, 청소년기의 고민들을 아주 디테일하게, 희화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길거리 언어들의 사용과 유머로서 도리어 더 진진한 그의 사색의 결과들이, 말 그대로 “톡톡 튀는 젊음의 냄새”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 점을 이 책을 흔쾌히 읽게 하는 또 다른 원동력이다.
원주민 처녀를 임신시키고 도망친 선장이 런던에 이민자들을 위한 복지적 공장을 만든다고 해놓고는 이내 시들해 지는 과정을 “그의 속은 좁은 데가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고, 그 구멍을 통해 정열이 규칙적으로 새어나갔다”라고 표현한다든지, 정육점 주인이 이슬람인이라는 것 때문에 영국인들에게 폭력을 당한 전력을 “모는 총 다섯 번 칼에 찔렸고(아!), 손가락 세 끝을 잃었으며(이씨!), 팔과 다리 모두 부러졌고(오이아우!), 발에 불이 붙었고(지익!), 이빨이 빠졌고(칵, 퉤!), 공기총 총탄 하나가 (핑!), 다행히도 살이 많은 그의 엉덩이에 박혔다(욱!)”라고 장난끼 다분한 익살스런 표현임에도 충분히 그 상황을 이해하게 만드는 작가의 해학력은 도저히 젊은 작가의 글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롭다. 뿐만 아니라, 다행히도 번역자가 친절하게 주를 달아 설명해 준, 영국 문화의 아이콘들,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다문화 코드까지 믿어지지 않는 자료조사와 경험을 소설 곳곳에 넣어두며 재능을 뽐냈는데, 이런 기법은, 읽는 독자로서 슬쩍, 최인훈 또는 서정인식 문장구성이 주는, 즐거움까지 누리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인들을 전시대에 세운 교만한 인도주의, “1924년 대영제국 박람회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영국의 사회제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민자들,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있는 빅밴의 역할을 “과거를 잊으려고 미래에 의지하기 때문이야, 때로 영국인들은 안됐다는 느낌”마저 갖는 이민자사회의 정착을 그린 소설 한 권을 읽으면서, 국부적으로야, 완성된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겠냐마는, 쫓기지 않는 “비문명사회”들 발전시키고자 하는, 그 공동체들의 장점과 통합하려는 노력을 적어도, 유럽은 그걸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미 충분히 다인종 사회로 진입하고 있으면서, 어설픈 조선시대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있는 한국사회, 과학적 개가라는 미명하에 어떤 연구도 허용되는 한국사회를 돌이켜 보게 되면 이 부러움은 더욱 배가 될 것이 분명히, 분···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