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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 경제학자들이 말하지 않는 경제학 이야기
베르나르 마리스 지음, 조홍식 옮김 / 창비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Ⅰ
어렸을 때, 소년잡지에서 읽었던 기사들. 슈퍼 옥수수가 곧 나올 것이고, 그러면 지구상에 모든 기아는 해결된다. 인류 과학 문명은 각종 신약을 개발해 인류는 참 오래 살 것이다. 중세의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인류는 거의 배 이상의 삶을 즐길 수 있다. 햐! 얼마나 가슴 뛰는 이야기였는지. 이젠 사람들은 질병도 없고, 배고픔도 없고, 전지구적으로 손에 손을 잡고 만년의 삶을 산다니 나같이 넉넉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난 꼬마들은 얼마나 희망에 부풀 이야기였던지! 그런데, 스무살이 지나고, 서른살, 마흔살을 넘어, 이 나이가 되었는데, 갈수록 웃긴다. 유전자변형의 잉여생산물은 다양해지고, 각종 약들도 넘쳐 나서, 하다 하다 이제 비만, 성형 등 아주 오지랖 넓은 의술까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 어찌, 가난으로 인한 기아문제는 더 회자되고 있으며, 생각지도 못한 병들이, 계속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늘 질병과 싸우는 품새가 어릴적 기대하던 장밋빛 미래와는 거리가 멀다. 옥수수로 휘발유를 만드는 바람에, 그 곡식들을 생산하는, 식량자급율이 훨씬 넘치는 국가들이 도리어 선진국의 바이오원료를 위해 폭등한 가격 탓에 자국의 국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다. 철학자 조지프 히스의 말대로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http://blog.naver.com/jjjang60915/100077702780 ) 똑똑하고 실적 좋아하는 과학자분들께서 암이니 뭐니 계속 신병을 발견해 주는 바람에, 옛날 같으면 “자연사”로 행복하게 죽을 사례들도 이젠 “질병사”로 취급받는다고 하니, 7.5년의 평균수명 연장이 무슨 소용이람! 이거 참, 거 참....
희귀병 백혈병의 치료제로 쓰인다는 “‘글리벡 Gleevec“을 보건복지가족부가 2009년 9월, 장관 직권으로 100mg을 기존 23,044원에서 19,818원으로 3,226원(14%) 인하하라는 고시를 했고, 이에 대해 다국적 제약사인 한국노바티스가 약가 인하 취소소송을 제기함에 따라, 2010년 1월 22일, 법원은 “글리벡 약값이 과대평가됐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제약사 손을 들어주었다. “말보루” 담배 한 갑의 가격도 유럽과 한국, 동남아가 틀리다. 관세, 환경, 정책 등의 여러 요인이 있겠다만, 그러니까 요인만 있다면 동일상품 다양한 가격이 가능하다. 같은 가자미 한 마리도 강남과 강북, 대형매장과 재래시장의 가격이 틀린 것처럼.. 그런데, 음 국민건강보다 법리해석이 중요하다. 햐, 이것 참... 어떤 나라들은 “제너릭” 약품을 생산해 그나마 싼가격에 국민들의 건강을 위한다고 하는데, 우린 10개국안에 드는 선진국이니, 그런 방법을 취할 수도 없고, 그저 암담하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약은 있는데 돈이 없어 치료를 못받는 사람들 아닌가? 하긴, 복사의약품을 제멋대로 만들어 아프리카와 동남아에 마구 뿌려, 병 고치려고 약 먹고, 그 약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양산하며 돈 버는 중국놈들에 비해서는 훨 낫다. 흐미...
저축은 미래 기대가치에 근거한다. 지금보다 나은 삶을 위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금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개미처럼 살면서 나중에 베짱이를 흉보자는 것이다. 케인즈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삶의 유일한 목표가 축적하기 위해 축적하는 것이고 삶과 예술을 누릴 줄 모른다면 그건 경멸받아 마땅하다며,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를 요구했다고 한다. 섬뜩하긴 하지만, 설마, 케인즈가 정말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난 그게 그만큼 공공복지, “금리”가 아니라 사회안전망, “연금” 등을 통해 공공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믿는다. 차라리 젊은 시절 일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세금, 기부 등으로 정부를 도와주고, 나이 들면 공공복지로 편안한 삶을 즐기자는 것인데, 꿈같은 얘기 아니다. 이거 분명 이런 나라 있을 것으로 믿는다. 아무튼, 한국사회에서 나는 베짱이다. 가만 보니까. 나이 쉰이 넘어가도록 통장에 여유자금이라는 것을 보관해 본 적이 없다. 단, 한번도.. 이런 내 참....
며칠 전, 제주도에 있는 어떤 저축은행이 년리 6%의 이자를 제공한다고 하여, 엄청난 수신고를 자랑하다가 덜컥 튀었다는 뉴스를 마을버스에서 들었다. 법에 의해 5천만원 이하의 예금자들은 보호를 받는 다는 데, 이럴 때 나타나는 사람들. “안먹고 안놀고 모은 전재산을 맡겼는데, 나는 어떻하라고?”하며 오천만원 이상 예치한 사람들. 음, 증시도 아니고, 펀드도 아니고 일반 저축은행의 년리 6% 유혹에 저금했다면, 그건 “저축”이 아니라 “투자” 또는 “투기”다. 부동산 가격으로 한 밑천 잡으려고 땅 값 올려놓는 심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보는데, 투자와 투기의 결과는 (물론 과도한 투기는 도박과 같은 심리이기 때문에 의당 정부가 막아야 하지만) 당연히 그 당자자의 책임이다. 그런데, 정부는 한번도 여유자금을 가져본 적이 없는 봉급생활자인 내가 한 푼도 속이지 못하고 고스란히 낸 “갑종근로소득세”로 공적자금을 만들어 그 손해분을 보전해준다. 햐, 이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지기론, 펀드 등 상품이 아닌 돈을 가지고 돈장난을 해서 투자가들에게 막대한 이율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최고의 자본가 논리라고 칭송하면서, 떼돈을 벌다가 쫄딱 망하면, IMF는 다른 나라들(특히 남반구 불쌍한 나라들)은 절대로 못하게 하면서, 미국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소란을 막아준다. 그리고 그 당사자들, 한 천년전쯤 중국같았으면, 저자거리에서 백성들 앞에서 능지처참을 했을, 그 꽤씸한 놈들은 실패한 역경을 딛고 다시 자서전을 쓰고, TV 토크쇼에 나와 “나의 실패기” 그러니까 “이렇게 했으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논리로 또 다른 꽤씸한 놈들을 육성하면서, 자신은 그걸로 다시 부를 축척한다. 머리 나쁜 나로서는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햐, 부럽다...
진흙쿠키를 먹으며, 유아노예시장이 존재하는 곳. 미국의 값싼 농산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아이러니 하게 식량자급율이 높았던 나라. 다국적기업이 들어오면서 농민은 파산하고, 도시유랑자로 변하고, 미국기업들은 이들을 형편없는 임금으로 고용하고, 여전히 부자들은 잘 사고, 지반이 튼튼한 지역에서 무장경비원을 두고, 지진으로 혼란한 사회에서 자신들을 보호하는 부자들의 나라. 아이티. 갈수록 굶어 가는 이들이 많아야 하는 21세기의 자화상. 그게 다 누구 때문일까? 장 지글러에(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http://blog.naver.com/jjjang60915/100058972603) 의하면 탐욕스런 자본주의에 예속된 괘씸한 것들 때문 아닌가?
프랑스 경제학자면서, 라디오 진행 등 대중적 인기도 함께 갖고 있다는 베르나르 마리스의 책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 경제학자들이 말하지 않는 경제학 이야기”를 읽고 있는 중간중간 마침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겹치면서 슬금슬금 장난스럽게 떠오른 단상들이다. 이런. 철 없는 놈...
Ⅱ
서론-기대수명으로 시작하여, 1장. 왜 자본주의는 유럽에서 발생했을까?, 2장. 기업가란 누구인가? 3장. 종교는 자본주의에 녹아들 수 있는가? 4장. 위험사회 또는 새로운 금융자본주의 5장. 자본가와 학자, 또는 공짜가 어떻게 돈을 만들어내는가? 6장. 특허는 발명을 가로막는가? 7장. 협력의 반격 8장. P2P, 9장. 케인즈의 정신분석학 1: 돈, 10장. 케인즈의 정신분석학 2: 공포, 11장.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불행: 자발적 예속, 12장. 자본주의의 핵심, 죽음 충동, 13장. 경제와 환경 또는 “내가 엄마를 살해한” 방법, 그리고 결론-오는 정, 가는 정과 불쌍한 자본주의에 대한 몇가지 단상들이 모인 보너스편으로 끝나는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이 책이 매우 쉬워 쉽게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며 혹시 이 비슷한 사례를 떠 올렸기 때문이다. 시카고 학파로 지칭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절대로 얘기할 수 없는, 아니, 그들이 신념을 가지고 주장하고 있는 자본주의, “인간은 부를 위해 노력하고, 평등한 기회하에 스스로를 책임지면 된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인간을 예속시키고 죽도록 자본가를 위해 노동으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주소를 이렇게 쉽고, 통쾌하며, 툴툴거릴 줄이야, 제목만 보고는 미처 몰랐다.
이 책은 경제에 대한 안티메뉴얼이라는 원제(맞나?)답게, 몇 개의 신문에서 서평으로 언급한, 처절한 보통사람들의 절망속이 삶의 현실은 아니라고 본다. 온갖 사례를 들며, 라디오 진행자답게 어려운 문제를 아주 쉽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상쾌한 책이다. 사회자본주의의 이상을 버리고, 이타정신을 버리고, 온갖 흉악한 짓으로 자신들의 성을 더더욱 굳건하게 구축하면서 새로운 농노들을 양산하는, 전제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아냥이며, 투덜거림이며, 딴지다. 게다가, 대놓고 욕하고, 거리낌 없이 흉보고, 까발리는 정말 “대중적”인 경제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개괄서다.
케인즈와 다윈, 프로이트,
이 셋은 모두 그 어떤 목적도 없는 삶의 풍요로움에 대해 놀라워한다.
무용의 삶, 아름다움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있다.
삶이 있는 곳이라면 우연과 미완이 있다. 이런 덧없음이 삶에 가치를 더한다.
교환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행위가 그 대상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찌 인간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만 불리기를 바라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겠는가? 인생의 즐거움을 모두 포기한체 (부자는 인생의 즐거움이 오직 돈의 축척에 있으니 그건 논외로 하자) 워커홀릭으로 내일의 불확실한 미래가치에 희망을 거는 것만이 유일한 것일까? 혹시 이러한 일들은 더 많은 노동력, 더 저렴한 임금을 위해 다국적기업이란 명분하에, 남반부에게 희망을 준다는 이유로 저임금 노동지역으로 공장을 옮기며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부류들이 만들어 놓은 눈가리개는 아닌가? 그저 이 바보들은 이들이 설정해 놓은 체제에 무한경쟁을 통해 자기만 살아남으려는 “모방경쟁”이 칩을 피부 속에 스스로 삽입한 것은 아닐까?
사악하게 돈을 벌고, 일부를 자선사업을 하며, 어떻게 돈을 벌었던 선비처럼 쓰고 있다는 부류들이 신자유주의의 기치하에 만성화된 고용불안, 주주들의 눈치를 보며, 자본의 위험을 직원들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고용과 임금을 구조조정의 변수로 삼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이 자본주의를 통째로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럼,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경제에 미치는 비이성적인 행동들은 무엇인가?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쉴러가 공저한 책은 이것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 학문적 사례들을 고찰하고 있다만 (“야성적 충동” http://blog.naver.com/jjjang60915/100089549625) 그 주고 받기의 교환의 법칙에서 일방적인 “주고”와 일방적인 “베품”을 가지고 있는 인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말이다.
프랑스 십자군이 베지에를 점령하자 주민들을 칼로 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부대장에게 어떻게 훌륭한 기독교인과 이단자를 구분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 죽여 버리시오. 신이 자기 자식을 구별할 것이오”
적과 동지가 없는 사회, 자본주의는 돈과 공포라는 두가지 축을 가지고 인간들을 두려움에 떠는 아동들을 만든다. 저자 네르나르 마리스가 체념했듯이 “노예가 되는 것이 노숙자가 되는 것 보다는 나으므로” 사람들은 미래가치라는 악마에 속아, 자신의 자유를 버리고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모습을 보며 자본가는 즐긴다. 누구든 상관없어, 나를 위해서는 다 죽여도 괜찮아. 오직 이익뿐이야. 아, 이런. 제길!
불행한 세계화의 출구는 두가지다.
1) 대재앙이다. 경제적 혼란과 정글법칙의 무정부상태,
대중의 심리적 불행이 지배하는 완전히 파편화된 사회에 대재앙이 닥친다.
2) 완벽히 자동적으로 조율된 인간은 조금씩 개미집의 높은 수준에 도달한다.
인간은 여왕개미나 어쩌면 슈퍼 빅 블루 같은 독재자를 위해 모든 자유를 포기할 것이다.
그 이익은 자신들이 자연에서 모방한 곡식, 예술, 저작까지도 남은 모방할 수 없는 제도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는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지적보호는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자신들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온갖 과학적 혜택(거의 무료로 취득한)을 이용해 운 좋게 얻어 걸린 결과물을 “특허”, “저작권”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한다. 아 참, 판매를 위해 눈속임은 필수다.
기억해보라.
한창 디지털 음질이 아날로그보다 훌륭하다는 등
CD는 영원하다는 등 하는 이야기가 돌았다.
하하하! 그런데 CD는 비닐레코드보다 훨씬 수명이 짧다.
정말, 왜 내가 한권의 책을 구입하여 재미있으면 식구들을 읽게 하고, 지인들에게 빌려주고, 블러그에 소개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일인데, 인터넷에 올려 무료로 배포하는 것은 법에 걸린다는 말인가? (난 전지구의 모든 인류를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럼 손해를 본다고? 도서관에서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다만, 그도 귀찮으면 전화대여에 퀵배달까지 해 주는 도서관 대여시스템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책을 구입하는 것은, 좋은 상품은 내가 소장하고 싶다는 욕망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굳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지 않고 비싼 돈 주고 그림을 소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불법다운받은 파일로 17인치 텔레비전으로 본 영화는 절대로 영화관의 넓은 스크린과 음향이 주는 감동을 전하지 못한다. 그러니, 잘 만들면 오지말래도 극장을 찾는다. 물건이 좋으면 직접 구입한다 (단 돈이 있다면). 그게 인간의 심리다. 뭐? 지적보호권 발동이라고, 벌금물리겠다고? 그럼 니들이 모방한 자연과 삶을 창조하신 조물주는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으, 젠장!
돈을 위해 달리는 자본주의, 그 사이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들(물론,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 따뜻한 정서에 국한한다)을 스스로 떼어내 버리고, 이 싸구려 시장논리, 사기성 자본가의 의견에 내 몰리고, 여차하면 국가경제를 살리겠다며, 고용을 늘리겠다며, 싸구려 정책을 내놓으며, 경기활성화를 위한 부양책들, 사회심리불안을 억제한다며, 내놓는 정책들을 살펴보면 점점 더 케인즈선생과의 거리는 멀어져만 간다.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부자의 세금을 줄였다고?
결과적으로 당신은 저축만 늘려 부동산 거품을 조성했고
그리고 집세는 올라가고 빈곤은 확대된다.
다시 강남의 집값이 움직이고 전세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오늘, 저 멀리, 비행기로 10시간 남짓 가야 하는 나라, 프랑스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웃긴다.(매우 정말!!) 제러미 리프킨은 그래도 이런 고민들, 자본주의의 모순을 유럽이 발견하면서 적어도 개선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며, 일부 성장동력에 방해가 되더라도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전한다. (“유러피언 드림” http://blog.naver.com/jjjang60915/100091992897 ) 그래도 이런 고민을 유럽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발견되면서 적어도 개선의 노력이라도 하고 있다. 그런데, 고민은 커녕, 깡패국가 미국을 형님으로 모시며, 경찰국가 중국을 두려워하며, 땡깡국가 인도와 손을 잡으려고 하는, 아, 부자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이 철없는 나라는 어쩔 것인가? 안됐다, 정말!
Ⅲ
이 책의 진정한 덕목은 잠깐 언급한대로 낄낄대거나 박장대소하며 경제학자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즐거움에 있다. 케인즈와 프로이트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사람들의 이름을 가져와서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경제학 책을 읽는 즐거움, 개그 콘서트 같이 속 시원하게 내뱉는 저자의 화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가, 아니 내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게 살아왔고, 얼마나 허탈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지 알게 된다. 각 장마다, 결론을 먼저 내놓고, 장황한 (그러나 웃겨죽는) 사례와 인용, 그리고 원문읽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말한 내용들을 친절하게 편집한 책을 읽으며 전격 찬동을 하다보면, 슬그머니, 그런데 이 재미있는 책이 왜 역자의 해설 등의 지침이 필요 없었는지를 알게된다. 앞서 인용한 대표적인 4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면 다소 유치하다고 느껴 질 수도 있는, 대중적 지지를 위해 여기저기 참 기가 막히게 인용하여 전달하고 있는 책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쯤에 이르면, 슬쩍 음, 창비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책값이 상대적으로 조금 비쌌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흐흐
그럼 나는 어떤가? “내일 일은 난 몰랐다. 오직 우리 주님이 아신다는” 찬송가 구절처럼, 오늘의 최선이 내일을 자연스럽게 만들터이니, 그저 최선을 다해서 그 날 그 날, 놀자라는 것이 신조이긴 하지만, 뭐 자본주의 대항한다는 핑계 대고 놀다가, 사회보장 제도의 무심함으로 역시 노숙자가 될 수는 없으니, 그저 허리 숙이고, 자존심 버리고, 열심히 자본주의에 목매달 수 밖에..(충성!!) 정말 그렇겠지? 몇십년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의 감쳐졌던 유산이 어느날 벼락처럼 나타나기 전까진..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