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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 자본주의는 나쁜 경제 시스템이다.

2. 한계가 있는 인간의 합리성을 전제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

3. 인간의 나쁜면보다 좋은 면을 발휘하게 하는 경제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

4. 항상 ‘받아 마땅한’ 만큼 보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5. 탈산업화 지식사회는 신화에 불과하고, 제조업은 지금도 경제에 필수적이다.

6. 금융부문과 실문부문이 더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7. 더 크고 더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8. 세계경제시스템은 개발도상국들은 ‘불공평하게’ 우대해야 한다.

 

■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
 

스마트폰은 지식경제산업의 결론이다. 이제 공간과 시간에 관계없이 우리는 이 괴물을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취미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됐다. 출, 퇴근시 1시간 20분동안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객차 안을 둘러보자면, 적어도 70% 이상의 승객들은 모두 스마트 폰의 모니터를 들여다 보고 있으니 이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제 인간은 쏟아져 나온 기술혁명을 통해 적어도 정보측면에서 공평하다. 그 공평한 기회를 가지고 우리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남들에게 뒤쳐질까봐 스포츠, 게임, 드라마, 영화에 무섭도록 집착한다. 

이 기계 덕분으로 더 이상, 드라마와 뉴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찍 귀가를 서두를 일도 없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몰래 책상에서 딴 짓을 할 이유도 없다. 회사가 멀면 어떤가? 하루에 세간이 걸려도, 그 시간동안 충분히 평소의 관심꺼리를 즐길 수 있는데, 그것도 한달에 불과 몇 만원만 내면 되는,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매끄러운 기계하나만 있으면. 식구들이야 뭐, 가족이란 것은 이미 최근의 경제상황에서 해체된 지 오래인데.. 
 

■ 이것은 우리가 알 듯, 모를 듯 하다. 
 

사람의 뇌도 가끔 쉬어야 한다. 물론, 적당한 시간 숙면을 취하는 동안 충분하다 할 수 있겠지만, 때론 좀 멍하니,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 업무에 대한 고민과 실연에 대한 고통이 아니라면, 때때로 차창너머도 바라보고, 사람들도 둘러보며 우리 주위에 대한 여러 가지 잡생각도 필요하며, (뭐 일부 사악한 추행범은 논외로 치자) 아니면 정말 멍하니 눈을 뜨고 있으되, 무념무상한 시간도 필요하다. 시간낭비라고? 천만에 곰곰이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시간 낭비하는 것이 어디 이것 뿐이겠는가? 이런 시간 낭비는 도리어 생산적일 수 있다. 그런데 스마트 폰의 판매성공은 이러한 우리가 늘 해왔던 휴식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이런 쉴 시간외에도, 회의시간에도, 심지어 업무보고시간에도 당당하게 스마트 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는 사람도 있다. 회사뿐인가? 귀가하고도 거실에 앉아서도 스마트 폰으로 드라마를 본다. 

스마트 폰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어플들, 따지고 보면 그동안 없이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이 콘텐츠들의 집요한 공격에 사람들은 오직, 일, 그리고 스마트 폰만 있으면 되었다. 굳이 일을 하는 이유는, 음, 스마트 폰 사용료를 제 때 내야 하기 때문이라면 다소 지나치겠지? 
 

■ 이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다. 

한번 따져보자. 스마트 폰이 생기고 나서, 혹시 업무시간이 늘지 않았는가? 드라마나 뉴스시간에 맞출 필요없이 귀가길에 다운받아 보면 되니까, 잔업시간이 길어지지 않았는가? 지방에 내려 왔다는 핑계로 휴일은 회사일에서 벗어났다 싶었는데, 이 기계로 전달된 메일을 확인하고, 저장해 놓은 자료들을 가지고 산 중에 있는 사찰에서 열심히 자판을 두드린 경험은 없는 가? 잘 지내고 있겠지,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며 느긋하게 기다리던 응답에 대한 궁금증이, 당연한 기능으로 인해 조그만 늦어지면 화를 낸 사례는 무수히 많지 않은가? 

문제는 이렇게 좋은 선물을 주고는 열심히 일을 시키면서 기본료라는 이름으로 거의 모든 국민들로부터 일정액을 꼬박꼬박 받아내고 있는데, 이걸 너무 당연시 하는 소비자들은 아무 저항없이 경쟁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 폰이라는 노비문서를 도리어 자랑스럽게 흔들고 다니고 있다면 좀 황당할 정도의 과장이라고 질책을 받겠지만, 그렇다. 이렇게 온통 장난감 하나를 쥐어 주고는, 한 눈 팔고 있는 사이에, 일부 소수자들이 하나씩 기본적인 권리마저 빼앗아 가며, 온통 분탕질을 치고 있는데도 그것에 대한 저항이 없다면 노비문서와 다름없을 것이다. 

■ 경제논리가 아닌 것도 있다. 

어제 아침, 평소처럼 집 앞에서 전철역까지 타고 갈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승용차 한 대가 역까지 태워 주겠단다. 50대 중반의 부부, 부인이 운전하며, 출근길 남편을 역까지 데려다 주는 참에 빈 뒷좌석에 나를 태워 주겠다는 친절이다. 아마, 숙취에 멍한 내 몰골로 보면 설마 뒷자리에서 강도로 돌변할 확률이 0%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 역시 이대로 새우잡이 배에 끌려간들 내 저질 체력을 확인하면,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뭍으로 되돌려 보낼게 뻔하므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냉큼 올라탔다. 

올해만 해도, 봉고 등 몇 차례의 이런 경우가 있었는데(신기할 정도로 거의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으나, 한번 신세진 분들을 다시 만난 적은 없다), 태우기 위해 일단 차를 정차, 다시 출발하고, 늘어난 무게로 인한 연료소비 증가, 혹시 가벼운 사고라도 나면, 변상의 책임과 왜 태워 가지고 하는 원망 등등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현대사회에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친절이라고 흉을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슬쩍 오늘 아침도, 그런 친절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물론, 주머니 속에 건네 줄 사탕 몇 개를 비축했다만...

■ 이제야 장하준 교수를 말한다. 

당치않게 장하준교수의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집필 방식을 엉뚱하게 흉내내면서 시작한 것은, 저자가 얘기한 23개의 토픽에 대한 하나하나의 대꾸가 의미 없어서가 아니라,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기 때문에 일단 책으로 시작하면 도대체 그 끝을 보기 어려울 수 있다는 자만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책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http://blog.naver.com/jjjang60915/100067146337 ’들의 후속편. 즉, 개괄적이며 정책적인 개념의 전자에서 3년이 지난 보다 확실한 실패한 세계화의 대표적 유형들과 소위 자유무역, 시장경제라는 허울뿐인 가면 속에서 역사와 세상을 유린하는 말뿐인 ‘정의’에 대해 그들의 논리를 경제학적으로 그대로 반박한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 소비자와 정책입안자가 한번쯤 고려하고 행동해야 할’ 지침서로 짧게 요약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적당할 것이다. 그저 덧붙이자면, 최근에 읽었던 마이클 샌텔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리스토 텔레스부터 시작된 인간의 덕목과 상반되게 흘러오는 사회심리적인 문제를 강조했다고 하면, 장하준교수의 신간은 경제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천민자본주의가 감추고 있는 비도덕적 행위들을 지적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소위 ‘금서’의 저자가 새로 쓴 이 책은 절대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자본주의가 정의로운 정부와 시민의 합의하에 얼마나 더 큰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사례와 화두를 던지고 있다. 보다 나은 사회, 나눔의 사회가 공정사회라는 최근의 화두를 견주어 본다면, 이 책이야 말로, 절묘할 정도로 시기적으로 딱 맞게 그 해법을 제시해준 책이 아닌가 한다. 
 

■ 시민의식, 유창한 겉치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불과 몇 십년 전, 젊은 시절을 보냈던 시절 (아, 물론, 내가 뭐 운동가거나, 적어도 의식이라도 제대로 있었다고 거짓말 하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소설책이나 읽으며 소주잔을 좋아한 모범적인 우파일 뿐이었다), 그 정치적으로 어렵던 시절에도, 그 땐 세계화가 막 시작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더 거세고, 활기차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 광범위한 토론과 고민이 있었다. 젊은 세대를 욕하자는 것이 아니라, 분명 그런 의식하에 세계에서 몇 위라고 국격을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국격은 ‘개에나 주어 버린(요즘 개를 너무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요즈음의 세태가 아쉽고, 또 아쉽다. 사찰이라 하면, 그 때가 더했고, 빈곤하다 하면 그 시절과 비하겠냐마는, 이젠 거의 포기상태, 아니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이, 우리사회는 싸구려 서비스업에만 몰리고, 재벌기업에 예속되어 가고 있다. 

몇 십원 싸다고, 기름값 들여 대형마트로 가는 것이 도리어 손해라는 분위기가 시작되자, 재빨리 동네까지 잠식한 체인점에서 편리성이라는 이유로 아무 의식 없이 이용하고 있으며, 마일리지 적립과 할인이라는 싸구려 유혹에 그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고스란히 바치고 있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재임용에 대한 확약도 없는 한달에 80만원의 보수로 만족해야 하는 인턴직에도 고학력이 몰려들고, 부족한 용돈은 부모의 지원을 받는다. 숱하게 발생하는 부조리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인터넷에 의해 확산되는 부도덕에도 흥분된 댓글 하나를 달아, 분출하고 나면 그 뿐이다. 그리고는 ‘그렇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하고 이내 잊어버린다. 

‘그들이 해 온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한 대로 하는’ 개발도상국, 아니 어설픈 G20 국가의 현실, 그것은 일부 정책입안자와 일부 기업총수의 사욕과 탐욕에 의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실은 결국, 그것들을 견제해야 할 다수의 국민들 스스로의 우민화에 있으며, 소리 내지 않고 죽여 지내는 바로 나한테 있는 것이다. 운동을 선동하자는 것도 아니고, 소요를 일으키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몇 가지의 생활수칙이라도 만들어 놓고, 적어도 비도덕적 상술, 부덕한 기업의 제품이라도 불매해 보자. 자기들 말대로 ‘철저한 시장경제’라면 수요가 없으면 포기하지 않겠는가? 그 틈새를 이전처럼 그냥 우리 이웃들이 다시 점유할 수도 있도록 하자. 옆집이 보낸다고 비싼 학원비 들이지 말고, 내 아이가 등수는 떨어져도 인격은 올라간다는 믿음으로, 우리가 자랐던 시대로 돌아가 보자. 며칠 전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의 날개론. 우익이든 좌익이든 한쪽 날개로는 절대로 새가 날아갈 수 없다는 평범한 자연현상이 진리임을 깨달으면서, 역사도 시민의식에 의한 자정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도록... 

■ 읽는 방법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책 서두에 이 책을 읽는 일곱가지 방법을 제시해 놓았다. 23개를 각자의 관심분야에 따라 읽는 순서를 정해 준 것인데, 나는 당연히 마지막 방법, ‘그냥 순서대로 읽는다’의 방법을 택했었다. 막상 책을 읽고 나니, 8번째 방법을 제안한다. 1, 7, 9, 10, 11, 15, 16, 20 그리고 나머진 아무렇게다. 무슨 기준인고 하니, 그냥 순서대로 읽다가 제목에 동그라미 친 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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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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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비행기가 다니는 길, 성층권이라는 그 곳, 슬쩍 창 너머로 내려다보는 지표면은 대개 아련하기 마련이다. 안개나 구름한 점 없는 하늘이라도, 쾌청한 대기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 곳은 실제 보이는 것을 결코 믿을 수 없는, 내게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래, 지극히 개인적 고집이다. 그리고 이 ‘너머의 공간’에 대한 불확실성, 미경험 풍경에 대한 마구잡이식의 억지에 불과한 이 ‘아련함’에 대한 기조에는 실사보다, 허상에 집착하는, 직유보다 은유를 선호하는, 현실보다 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허세가 자리 잡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최근 소설 ‘숨그네’를 먼저 읽고, ‘저지대’를 거꾸로 접하면서, 전자에서 꼼꼼하게 서술해간 그 풍경화와 같은 묘사 속에 숨어있는 그 눈부신 참담함이 어떻게 이번 소설집에서 전달될까가 먼저 궁금했다. 첫 작품집, 정권의 방해, 검열, 망명 등 이후의 작가의 행보를 가름하면, ‘숨그네’보다도 더 선명한, 감추어진 현실이 가시처럼 돋아 있을지 모른다고 섣불리 판단하기도 했다. 

중편의 분량을 가지고 있는 ‘저지대’를 제외한다면, 이 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때로는 손바닥 장자인 장편까지)들은 내게는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지표면 같았다. 아니, 때로는 지층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퇴적층, 날카로운 날에 의해 단번에 짤려나와 뚜렷하게 쌓여있는 그 현실의 절단면들, 그 성층들을 한꺼번에 견주어 보는 느낌이었다. ‘저지대’에서 보여주는 현실, 취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고, 사건 사고는 늘 일상일 뿐이며, 적당히 음흉하고, 때로는 북유럽의 들꽃들처럼 하나하나가 선명한, 한 마을 이야기, 그리고 그와 덧붙여지는 ‘마을 연대기’와 ‘우리가족’처럼 수록작품들은 각자 날숨과 들숨처럼, 씨줄과 날줄처럼 그렇게 엮여 있었다. 그 연대기 속에서 ‘슈바벤목욕’법을 익히고, ‘일하는 날’의 일정을 고백하고, ‘독일가르마와 독일콧수염’을 선호하는 개인들의 삶이 있었고, ‘거리미화원’과 ‘잉게’처럼 사회화로 응집되는 그런 관찰기가 있었다. 이 기록들이 분명 5월의 고운 들판을 그려내고 있는데, 몹시도 흐릿했다. 

그랬다. 몹시도 아련했다. 전후, 지독하고 악명 높은 독재정권 체제에서 작가의 죄목은 현실을 현실이 아닌, 현실로써 전달한 것이다. 때로는, 너무 자주 사용해서 식상할만한 공감각적 표현들과 서정성이 튀어 올랐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늘땀처럼 꼼꼼하게 뜨는 바람에, 풀 먹인 호청 같은 청량감을 덧칠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냥 살아야 하는 현실’을 세밀한 언어, 갓 빚어낸 단어로 미화한 바로 그 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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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6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정의는 없다. 우파든 좌파든, 서로 상대방에 대한 폭력의 양태는 모두 같다. 이념은 정반대인데,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루는 방법은 동일한 이 아이러니는 절대로 변할 수 없다. 유태인 학살의 주범들도 수용소에 들어가면 어느덧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방법에 의해 조롱당한다. 유태인역시 그들이 지금 가자지구에서 자행하고 있는 폭력을 들여다보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인류애든 반성의 기미든 아무 것도 없다. 불쌍한 인본주의.
 

흑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더라도, 여전히 산타나모 수용소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념은 개나발이고, 그 이념에 빌붙어 사는 기회주의와 배타주의만이 공공의 존재감을 갖기 때문이다. 갈수록, 더, 발전하는 세계를 둘러볼수록, 점차 공상과학만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문명의 질이 현실화 되면 될수록, 상대적으로 아니, 절대적으로도 전혀 변함없는 도덕의 피아구별없이 자행되고 있는 폭력의 역사. 단지 이게 우울할 뿐이다.

그 기조에는 어떤 화해와 용서에도 지워지지 않는 집단기억이 있다. 어떤 가해자가 사과와 보상을 완벽하게 했다손 치더라도, 그건, 지엽적이다. 뇌 속에 숨어 있는 그 기억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무한반복 되는 행위는 도대체 어떤 자만심으로부터 기인하는 가? 몇 백년전은 돌이키지 말기로 하자. 궁금한 것은, 적어도, 인본주의를 얘기하고, 삶을 얘기하며, 가치를 숭상한다는 계몽주의 이후의 역사로만 국한하기로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진보와 함께 자행되었던 우리 인간의 퇴보적 행동, 야욕과 폭력이 계몽사상의 확산과 같은 질량으로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 때때로 삶은 지독히도 꾸며진 (그저 시대에 따라 그 권력의 양태만 달라지는) 장미 한 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게 우울할 뿐이다.


헤르타 뮐러의 소설책이 두 권 발행되었다는 뉴스에 망설인 것은, 어쩌면 이런 폭력의 역사에 대한 진부한 해석과 표현이 부담스러운 것일 수 있겠다.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 2차대전, 전범, 수용소. 그 황량함을 다시 기억해 내어야 한다는 것은, 오랜 역사, 박해와 불균형의 결과로 얻은 피해의식이 유전형질로 변해 집단기억을 내려 받고 있는 내게도 상당히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했던 모양이다.


참전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우리가 러시아인들에게는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에 책임이 있는 독일인이었다.

소설 ‘숨그네’는 2차대전 종전을 앞두고 재빨리 노선을 바꾼 국가, 루마니아에 살던 독일인 가계의 17살 주인공이 우크라이나 수용소에서 5년간 지낸 일기장이다. 1945년 1월 15일 영화 15도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새벽 3시 순찰대에 이끌러 기차를 타고, 수용소에 격리되고, 334명이 시체로 귀환한 그 곳에서, 강제노역과 굶주림, 같이 일상을 만들어 냈던 사람들을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다분히 비인간적이며, 완장의 폭력에 길들여져야 하며, ‘배고픈 천사’로 대변되는 굶주림의 장소인 그 수용소, 작가가 영혼으로 키운 문장, 그 장미와 같이 아름다운 표현속에 빠져서 ‘메타포’가 주는 위대함에 가려진 그 수용소에 대한 집단기억의 재생이다. 그 때문에 몹시 우울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숨결을 그네뛰게 한다.
눈을 올려 저 위로 조용한 여름솜, 구름의 뜨개질,
내 뇌는 바늘 끝에 하늘에 고정된 채 꿈틀거린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와 몇 십년이 지나도록 결코 지울 수 없는 고통들. 그 처참한 기억의 공간에서 서정시인처럼 일상들을 관조하던 그 시선과 작가의 독특한 표현들(설명을 통해 많은 단어들을 작가가 만들어 낸 조어들임을 알았다만)속에 숨어 있는 공포는 어쩔 수 없이, 결과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검은 포플라나무 심기 현장과 감자밭에서의 주인공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이성을 잃고 동조한 것도 바로 이 아름다운 문장 때문이다. 밀린 급여를 받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 치장을 하고, 성적 대상들을 찾고, 그리고 탕진하는, 귀향 후 암살을 당하는 간수나, 함께 시간을 보냈던 이웃이나 외면으로 지나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살아 있으되, 이미 죽은자들과의 동질의 고통으로 살아야 하는 생존자들의 아픔일 것이다. 이 때문에 더 더욱 우울하다.

당연히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와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떠올리며 부담스러워 했던 소설읽기는 몇 장을 넘기면서, 문장에 취하고, 그 고통에 취하고, 그 수용소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마치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그렇게 길들여져 가는 삶, 지금의 현실에 대입해 봐도 여전히 똑같은 이 ‘길들어짐’. 부인해야 하는데, 이젠 '아니다'라고 강하게 반항해야 하는데, 소설 ‘숨그네’에서 읽을 수 있었던 이 ‘어찌할 수 없는 길들어짐과 굴복과 복종’의 미화외에는 여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오늘 내 삶이 질리도록 우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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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 경제학자들이 말하지 않는 경제학 이야기
베르나르 마리스 지음, 조홍식 옮김 / 창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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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렸을 때, 소년잡지에서 읽었던 기사들. 슈퍼 옥수수가 곧 나올 것이고, 그러면 지구상에 모든 기아는 해결된다. 인류 과학 문명은 각종 신약을 개발해 인류는 참 오래 살 것이다. 중세의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인류는 거의 배 이상의 삶을 즐길 수 있다. 햐! 얼마나 가슴 뛰는 이야기였는지. 이젠 사람들은 질병도 없고, 배고픔도 없고, 전지구적으로 손에 손을 잡고 만년의 삶을 산다니 나같이 넉넉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난 꼬마들은 얼마나 희망에 부풀 이야기였던지! 그런데, 스무살이 지나고, 서른살, 마흔살을 넘어, 이 나이가 되었는데, 갈수록 웃긴다. 유전자변형의 잉여생산물은 다양해지고, 각종 약들도 넘쳐 나서, 하다 하다 이제 비만, 성형 등 아주 오지랖 넓은 의술까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 어찌, 가난으로 인한 기아문제는 더 회자되고 있으며, 생각지도 못한 병들이, 계속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늘 질병과 싸우는 품새가 어릴적 기대하던 장밋빛 미래와는 거리가 멀다. 옥수수로 휘발유를 만드는 바람에, 그 곡식들을 생산하는, 식량자급율이 훨씬 넘치는 국가들이 도리어 선진국의 바이오원료를 위해 폭등한 가격 탓에 자국의 국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다.  철학자 조지프 히스의 말대로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http://blog.naver.com/jjjang60915/100077702780 ) 똑똑하고 실적 좋아하는 과학자분들께서 암이니 뭐니 계속 신병을 발견해 주는 바람에, 옛날 같으면 “자연사”로 행복하게 죽을 사례들도 이젠 “질병사”로 취급받는다고 하니, 7.5년의 평균수명 연장이 무슨 소용이람! 이거 참, 거 참.... 

   희귀병 백혈병의 치료제로 쓰인다는 “‘글리벡 Gleevec“을 보건복지가족부가 2009년 9월, 장관 직권으로 100mg을 기존 23,044원에서 19,818원으로 3,226원(14%) 인하하라는 고시를 했고, 이에 대해 다국적 제약사인 한국노바티스가 약가 인하 취소소송을 제기함에 따라, 2010년 1월 22일, 법원은 “글리벡 약값이 과대평가됐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제약사 손을 들어주었다. “말보루” 담배 한 갑의 가격도 유럽과 한국, 동남아가 틀리다. 관세, 환경, 정책 등의 여러 요인이 있겠다만, 그러니까 요인만 있다면 동일상품 다양한 가격이 가능하다. 같은 가자미 한 마리도 강남과 강북, 대형매장과 재래시장의 가격이 틀린 것처럼.. 그런데, 음 국민건강보다 법리해석이 중요하다. 햐, 이것 참... 어떤 나라들은 “제너릭” 약품을 생산해 그나마 싼가격에 국민들의 건강을 위한다고 하는데, 우린 10개국안에 드는 선진국이니, 그런 방법을 취할 수도 없고, 그저 암담하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약은 있는데 돈이 없어 치료를 못받는 사람들 아닌가? 하긴, 복사의약품을 제멋대로 만들어 아프리카와 동남아에 마구 뿌려, 병 고치려고 약 먹고, 그 약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양산하며 돈 버는 중국놈들에 비해서는 훨 낫다. 흐미...  

    저축은 미래 기대가치에 근거한다. 지금보다 나은 삶을 위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금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개미처럼 살면서 나중에 베짱이를 흉보자는 것이다. 케인즈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삶의 유일한 목표가 축적하기 위해 축적하는 것이고 삶과 예술을 누릴 줄 모른다면 그건 경멸받아 마땅하다며,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를 요구했다고 한다. 섬뜩하긴 하지만, 설마, 케인즈가 정말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난 그게 그만큼 공공복지, “금리”가 아니라 사회안전망, “연금” 등을 통해 공공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믿는다. 차라리 젊은 시절 일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세금, 기부 등으로 정부를 도와주고, 나이 들면 공공복지로 편안한 삶을 즐기자는 것인데, 꿈같은 얘기 아니다. 이거 분명 이런 나라 있을 것으로 믿는다. 아무튼, 한국사회에서 나는 베짱이다. 가만 보니까. 나이 쉰이 넘어가도록 통장에 여유자금이라는 것을 보관해 본 적이 없다. 단, 한번도.. 이런 내 참.... 

    며칠 전, 제주도에 있는 어떤 저축은행이 년리 6%의 이자를 제공한다고 하여, 엄청난 수신고를 자랑하다가 덜컥 튀었다는 뉴스를 마을버스에서 들었다. 법에 의해 5천만원 이하의 예금자들은 보호를 받는 다는 데, 이럴 때 나타나는 사람들. “안먹고 안놀고 모은 전재산을 맡겼는데, 나는 어떻하라고?”하며 오천만원 이상 예치한 사람들. 음, 증시도 아니고, 펀드도 아니고 일반 저축은행의 년리 6% 유혹에 저금했다면, 그건 “저축”이 아니라 “투자” 또는 “투기”다. 부동산 가격으로 한 밑천 잡으려고 땅 값 올려놓는 심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보는데, 투자와 투기의 결과는 (물론 과도한 투기는 도박과 같은 심리이기 때문에 의당 정부가 막아야 하지만) 당연히 그 당자자의 책임이다. 그런데, 정부는 한번도 여유자금을 가져본 적이 없는 봉급생활자인 내가 한 푼도 속이지 못하고 고스란히 낸 “갑종근로소득세”로 공적자금을 만들어 그 손해분을 보전해준다. 햐, 이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지기론, 펀드 등 상품이 아닌 돈을 가지고 돈장난을 해서 투자가들에게 막대한 이율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최고의 자본가 논리라고 칭송하면서, 떼돈을 벌다가 쫄딱 망하면, IMF는 다른 나라들(특히 남반구 불쌍한 나라들)은 절대로 못하게 하면서, 미국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소란을 막아준다. 그리고 그 당사자들, 한 천년전쯤 중국같았으면, 저자거리에서 백성들 앞에서 능지처참을 했을, 그 꽤씸한 놈들은 실패한 역경을 딛고 다시 자서전을 쓰고, TV 토크쇼에 나와 “나의 실패기” 그러니까 “이렇게 했으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논리로 또 다른 꽤씸한 놈들을 육성하면서, 자신은 그걸로 다시 부를 축척한다. 머리 나쁜 나로서는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햐, 부럽다... 

    진흙쿠키를 먹으며, 유아노예시장이 존재하는 곳. 미국의 값싼 농산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아이러니 하게 식량자급율이 높았던 나라. 다국적기업이 들어오면서 농민은 파산하고, 도시유랑자로 변하고, 미국기업들은 이들을 형편없는 임금으로 고용하고, 여전히 부자들은 잘 사고, 지반이 튼튼한 지역에서 무장경비원을 두고, 지진으로 혼란한 사회에서 자신들을 보호하는 부자들의 나라. 아이티. 갈수록 굶어 가는 이들이 많아야 하는 21세기의 자화상. 그게 다 누구 때문일까? 장 지글러에(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http://blog.naver.com/jjjang60915/100058972603 의하면 탐욕스런 자본주의에 예속된 괘씸한 것들 때문 아닌가?    

    프랑스 경제학자면서, 라디오 진행 등 대중적 인기도 함께 갖고 있다는 베르나르 마리스의 책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 경제학자들이 말하지 않는 경제학 이야기”를 읽고 있는 중간중간 마침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겹치면서 슬금슬금 장난스럽게 떠오른 단상들이다. 이런. 철 없는 놈...

 



  
   서론-기대수명으로 시작하여, 1장. 왜 자본주의는 유럽에서 발생했을까?, 2장. 기업가란 누구인가? 3장. 종교는 자본주의에 녹아들 수 있는가? 4장. 위험사회 또는 새로운 금융자본주의 5장. 자본가와 학자, 또는 공짜가 어떻게 돈을 만들어내는가? 6장. 특허는 발명을 가로막는가? 7장. 협력의 반격 8장. P2P, 9장. 케인즈의 정신분석학 1: 돈, 10장. 케인즈의 정신분석학 2: 공포, 11장.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불행: 자발적 예속, 12장. 자본주의의 핵심, 죽음 충동, 13장. 경제와 환경 또는 “내가 엄마를 살해한” 방법, 그리고 결론-오는 정, 가는 정과 불쌍한 자본주의에 대한 몇가지 단상들이 모인 보너스편으로 끝나는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이 책이 매우 쉬워 쉽게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며 혹시 이 비슷한 사례를 떠 올렸기 때문이다. 시카고 학파로 지칭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절대로 얘기할 수 없는, 아니, 그들이 신념을 가지고 주장하고 있는 자본주의, “인간은 부를 위해 노력하고, 평등한 기회하에 스스로를 책임지면 된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인간을 예속시키고 죽도록 자본가를 위해 노동으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주소를 이렇게 쉽고, 통쾌하며, 툴툴거릴 줄이야, 제목만 보고는 미처 몰랐다.  

   이 책은 경제에 대한 안티메뉴얼이라는 원제(맞나?)답게, 몇 개의 신문에서 서평으로 언급한, 처절한 보통사람들의 절망속이 삶의 현실은 아니라고 본다. 온갖 사례를 들며, 라디오 진행자답게 어려운 문제를 아주 쉽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상쾌한 책이다. 사회자본주의의 이상을 버리고, 이타정신을 버리고, 온갖 흉악한 짓으로 자신들의 성을 더더욱 굳건하게 구축하면서 새로운 농노들을 양산하는, 전제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아냥이며, 투덜거림이며, 딴지다. 게다가, 대놓고 욕하고, 거리낌 없이 흉보고, 까발리는 정말 “대중적”인 경제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개괄서다. 

케인즈와 다윈, 프로이트,

이 셋은 모두 그 어떤 목적도 없는 삶의 풍요로움에 대해 놀라워한다.

무용의 삶, 아름다움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있다.

삶이 있는 곳이라면 우연과 미완이 있다. 이런 덧없음이 삶에 가치를 더한다.

교환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행위가 그 대상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찌 인간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만 불리기를 바라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겠는가? 인생의 즐거움을 모두 포기한체 (부자는 인생의 즐거움이 오직 돈의 축척에 있으니 그건 논외로 하자) 워커홀릭으로 내일의 불확실한 미래가치에 희망을 거는 것만이 유일한 것일까? 혹시 이러한 일들은 더 많은 노동력, 더 저렴한 임금을 위해 다국적기업이란 명분하에, 남반부에게 희망을 준다는 이유로 저임금 노동지역으로 공장을 옮기며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부류들이 만들어 놓은 눈가리개는 아닌가? 그저 이 바보들은 이들이 설정해 놓은 체제에 무한경쟁을 통해 자기만 살아남으려는 “모방경쟁”이 칩을 피부 속에 스스로 삽입한 것은 아닐까?  

    사악하게 돈을 벌고, 일부를 자선사업을 하며, 어떻게 돈을 벌었던 선비처럼 쓰고 있다는 부류들이 신자유주의의 기치하에 만성화된 고용불안, 주주들의 눈치를 보며, 자본의 위험을 직원들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고용과 임금을 구조조정의 변수로 삼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이 자본주의를 통째로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럼,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경제에 미치는 비이성적인 행동들은 무엇인가?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쉴러가 공저한 책은 이것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 학문적 사례들을 고찰하고 있다만 (“야성적 충동” http://blog.naver.com/jjjang60915/100089549625) 그 주고 받기의 교환의 법칙에서 일방적인 “주고”와 일방적인 “베품”을 가지고 있는 인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말이다. 

프랑스 십자군이 베지에를 점령하자 주민들을 칼로 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부대장에게 어떻게 훌륭한 기독교인과 이단자를 구분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 죽여 버리시오. 신이 자기 자식을 구별할 것이오” 

   적과 동지가 없는 사회, 자본주의는 돈과 공포라는 두가지 축을 가지고 인간들을 두려움에 떠는 아동들을 만든다. 저자 네르나르 마리스가 체념했듯이 “노예가 되는 것이 노숙자가 되는 것 보다는 나으므로” 사람들은 미래가치라는 악마에 속아, 자신의 자유를 버리고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모습을 보며 자본가는 즐긴다. 누구든 상관없어, 나를 위해서는 다 죽여도 괜찮아. 오직 이익뿐이야. 아, 이런. 제길! 

불행한 세계화의 출구는 두가지다.

1) 대재앙이다. 경제적 혼란과 정글법칙의 무정부상태,

대중의 심리적 불행이 지배하는 완전히 파편화된 사회에 대재앙이 닥친다.

2) 완벽히 자동적으로 조율된 인간은 조금씩 개미집의 높은 수준에 도달한다.

인간은 여왕개미나 어쩌면 슈퍼 빅 블루 같은 독재자를 위해 모든 자유를 포기할 것이다.

      그 이익은 자신들이 자연에서 모방한 곡식, 예술, 저작까지도 남은 모방할 수 없는 제도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는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지적보호는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자신들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온갖 과학적 혜택(거의 무료로 취득한)을 이용해 운 좋게 얻어 걸린 결과물을 “특허”, “저작권”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한다. 아 참, 판매를 위해 눈속임은 필수다.  

기억해보라.

한창 디지털 음질이 아날로그보다 훌륭하다는 등

CD는 영원하다는 등 하는 이야기가 돌았다.

하하하! 그런데 CD는 비닐레코드보다 훨씬 수명이 짧다. 



        정말, 왜 내가 한권의 책을 구입하여 재미있으면 식구들을 읽게 하고, 지인들에게 빌려주고, 블러그에 소개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일인데, 인터넷에 올려 무료로 배포하는 것은 법에 걸린다는 말인가? (난 전지구의 모든 인류를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럼 손해를 본다고? 도서관에서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다만, 그도 귀찮으면 전화대여에 퀵배달까지 해 주는 도서관 대여시스템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책을 구입하는 것은, 좋은 상품은 내가 소장하고 싶다는 욕망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굳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지 않고 비싼 돈 주고 그림을 소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불법다운받은 파일로 17인치 텔레비전으로 본 영화는 절대로 영화관의 넓은 스크린과 음향이 주는 감동을 전하지 못한다. 그러니, 잘 만들면 오지말래도 극장을 찾는다. 물건이 좋으면 직접 구입한다 (단 돈이 있다면). 그게 인간의 심리다. 뭐? 지적보호권 발동이라고, 벌금물리겠다고? 그럼 니들이 모방한 자연과 삶을 창조하신 조물주는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으, 젠장! 

  돈을 위해 달리는 자본주의, 그 사이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들(물론,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 따뜻한 정서에 국한한다)을 스스로 떼어내 버리고, 이 싸구려 시장논리, 사기성 자본가의 의견에 내 몰리고, 여차하면 국가경제를 살리겠다며, 고용을 늘리겠다며, 싸구려 정책을 내놓으며, 경기활성화를 위한 부양책들, 사회심리불안을 억제한다며, 내놓는 정책들을 살펴보면 점점 더 케인즈선생과의 거리는 멀어져만 간다.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부자의 세금을 줄였다고?

결과적으로 당신은 저축만 늘려 부동산 거품을 조성했고

그리고 집세는 올라가고 빈곤은 확대된다.

   다시 강남의 집값이 움직이고 전세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오늘, 저 멀리, 비행기로 10시간 남짓 가야 하는 나라, 프랑스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웃긴다.(매우 정말!!) 제러미 리프킨은 그래도 이런 고민들, 자본주의의 모순을 유럽이 발견하면서 적어도 개선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며, 일부 성장동력에 방해가 되더라도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전한다. (“유러피언 드림” http://blog.naver.com/jjjang60915/100091992897 ) 그래도 이런 고민을 유럽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발견되면서 적어도 개선의 노력이라도 하고 있다. 그런데, 고민은 커녕, 깡패국가 미국을 형님으로 모시며, 경찰국가 중국을 두려워하며, 땡깡국가 인도와 손을 잡으려고 하는, 아, 부자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이 철없는 나라는 어쩔 것인가? 안됐다, 정말!


 

Ⅲ 

 

  이 책의 진정한 덕목은 잠깐 언급한대로 낄낄대거나 박장대소하며 경제학자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즐거움에 있다. 케인즈와 프로이트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사람들의 이름을 가져와서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경제학 책을 읽는 즐거움, 개그 콘서트 같이 속 시원하게 내뱉는 저자의 화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가, 아니 내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게 살아왔고, 얼마나 허탈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지 알게 된다. 각 장마다, 결론을 먼저 내놓고, 장황한 (그러나 웃겨죽는) 사례와 인용, 그리고 원문읽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말한 내용들을 친절하게 편집한 책을 읽으며 전격 찬동을 하다보면, 슬그머니, 그런데 이 재미있는 책이 왜 역자의 해설 등의 지침이 필요 없었는지를 알게된다. 앞서 인용한 대표적인 4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면 다소 유치하다고 느껴 질 수도 있는, 대중적 지지를 위해 여기저기 참 기가 막히게 인용하여 전달하고 있는 책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쯤에 이르면, 슬쩍 음, 창비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책값이 상대적으로 조금 비쌌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흐흐 

  그럼 나는 어떤가? “내일 일은 난 몰랐다. 오직 우리 주님이 아신다는” 찬송가 구절처럼, 오늘의 최선이 내일을 자연스럽게 만들터이니, 그저 최선을 다해서 그 날 그 날, 놀자라는 것이 신조이긴 하지만, 뭐 자본주의 대항한다는 핑계 대고 놀다가, 사회보장 제도의 무심함으로 역시 노숙자가 될 수는 없으니, 그저 허리 숙이고, 자존심 버리고, 열심히 자본주의에 목매달 수 밖에..(충성!!) 정말 그렇겠지? 몇십년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의 감쳐졌던 유산이 어느날 벼락처럼 나타나기 전까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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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미술이란 넓은 흰벽 위로 보기 좋게 걸어 있는 액자를 떠올린다. 장소현선생의 “그림이 그립다”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연유도 사실, 최근의 미술양식에 대한 보다 친절한 이해도우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대중과 멀리 떨어진 미술작업을 계기로 사기성 활동에 대한 저자의 질타가 매우 통쾌했기 때문이다. 

미술사, 미학과 관련된 책은 나 같은 우자는 그 제목으로도 일단 접근을 스스로 꺼려한다. 마치 그들만의 언어, 몇 번은 뒤튼 기표적 언어들은 일반인들이 교양서적으로 한번쯤 공부하고자 하는 의욕마저 억눌려 버린다. 어쩌면 그 역시 아마도 현대미술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보는 대로 믿어라. 아니, 믿는 것만큼 보라는..

모든 것이 문화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도 쉽게 인정할 수 있다. 

왜, 이 생각을 못했나 모르겠다. 제의와 권력, 그리고 신에 대한 찬양을 위한 도구로 쓰인 벽화, 조상, 공예품들이 당시의 인간들 속에 있는 상상력과 당시의 표상들에게로 부터 차용한 행위였다면, 오늘날 대중적인 표상은 코카콜라며, 일상에 드러내고 있는 이미지들인 것이고, 재료적인 면에서도 가장 널리 쓰이는 회칠과 식물의 즙에서, 철기에서 뽑아낸 색상을 가지고 화면을 꾸몄다면, 오늘날, 밧줄, 쓰레기, 생활용품에서 빌려오는 것과 전혀 다름없는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대, 도리어 20세기 이전의 차용과 재생산만 마치 미술인양 슬쩍 무지를 드러내고 살았으니 이 또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근대에 정립되었다는 미학, 미술사, 그리고 미술에 대한 정의들은 참으로 그간의 어설픈 스스로의 논리들을 고약할 정도로 무너뜨려 보였다. 역시 아는 것 만큼 보이고, 믿는 것 만큼 보이는 모양이다.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는 책, 이 가벼운 개론서 한 권으로 미술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린다면 그만큼 내 무식을 탄로시키는 것이겠지만, 음,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사물들이 어떻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며, 그것이 문화라는 개념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며, 적게는 미술이라는 장르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내 고정관념의 뒤짚기를 시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즉. 1사물들이 1. 미술이란 무엇인가, 2. 미술과 근대적 주체, 3. '미술'이라는 용어, 4. 미학 : 예술의 이론, 5. 미술창작이라는 특권, 6. 아카데미, 7. 박물관, 8. 미술사와 모더니즘의 발전, 9.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 대중매체의 창조, 10. 오늘날의 미술과 문화 등 모두 10부로 나누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전적 미술작품에 대해 미술이 아니다라는 역설로 시작하여, 읽다보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재료와 상상력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던 “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 질수록 그래, 모든 것이 미술이다라는 결론을 던져주고 있으니, 참으로 신통한 일이다. 

칼라 도판을 넣기 위해서 새롭게 출판한 책에 의해, 본문 만큼이나 수록된 도판을 통해 저자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쉽게 시청작교육을 전달받을 수 있었으니, 책 읽는 즐거움도 컸고, 강의록 정리한 듯한 진행과 서술은, 게다가 역자 박이소씨가 용어와 사조, 그리고 저자의 생각을 친절하게 부연해 주고 있어서 나 같은 문외한이 미술을 들여다 보는 것에 딱 인 책이 되어 버렸다. 

이제 좀 더 편하게 미술관 나들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쎄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와 사조를 슬쩍 이용하는, 대책없는 흉내쟁이 사기꾼 미술이 넘쳐 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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