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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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 낯익은 단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제 2의 신처럼, 우리를 돌보아 주고, 우리의 이상이 되어 버린 체제. 그 풍요로움과 합리적 사고, 개인의 자유와 재산의 축적의 완벽한 사회체제처럼 인식되던 사회. 정치, 외교, 무역, 삶의 질까지 모든 것을 의존하고 동경이 대상이 되는 미국의 대표적인 이미지로서의 아메리칸 드림이란 단어다. 

빔 벤던스 감독의 “풍요의 땅”, 또는 마이클 무어의 “식코”라는 영화를 통해 미국이 안고 있는 몇 가지의 이면을 들어다 볼 기회도 있었지만, 지금도 우린 여전히, 동양적 사고, “의리”의 산물인지는 몰라도 미국이라는 거친 품안에서 안주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이 미국이 국민복지차원에서의 의료수준 OECD국가의 54위이며, 최근 법안이 통과 되었다고는 하지만, 세계에서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 체계가 허술한 나라로 남아공과 함께 유일한 국가이며, 한 순간의 헛된 풍요를 꿈꾸는 리얼리티쇼와 아이돌 문화에 빠져있는, 독일인 보다 세배나 많은 소고기를 소비하고, 인스턴트 음식의 간편함으로 얻는 시간을 모두 성공, 출세, 부의 축척에 몰입하며 늘 쫓기는 일면을 가진 사회라면 왠지 그 모델을 삼고자 하는 우리로서는 참 서글픈 이야기이다. 

물론, 미국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들, 종교개혁과 원시적 계몽주의의 신념을 그대로 가지고 새로운 땅에 정착한 사람들, 1달러만 있어도 유럽에서는 꿈꿀 수 없었던 토지를 소유할 기회의 땅에서 개척정신과 윤리의식, 개인이 모든 것을 부담해야 하는 책임감, 그리고 태생이 다른 인종을 노예로 부리면서 머릿속에 잔재되어 있는 인종차별에 대한 정서, 오늘 날 미국을 만든 정신, 화려한 성공 뒤에 감추어진 걷어낼 수 없는 의식을 감안하면,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에 대한 동정도 인다.

 제러미 리프킨은 이러한 미국사회에 대한 반성과 지향해야 할 공동체 의식을 제시한다. 그 대안은 이상과 이론이 아니다. 바로 지금 지역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에서 실험을 거쳐, 실천하고 있는 유럽공동체를 대상으로, 그 장점들을 제시함으로써 미국을, 아니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모두 3부 1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부 “구세계”에서 얻은 새로운 교훈에서은, 아메리칸 드림이 퇴색할 수 밖에 없는 이유와 유럽피언 드림이 각광받을 수 밖에 없는 경과에 대해 요약하고 있으며, 제 2부, “현대의 형성”에서는 중세이후 유럽의 사회발달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오늘 날 유럽공동체가 성립할 수 있었던 정당성과 인류사회 속에서의 장점을 다루고 있으며, 제 3부 다가오는 글로벌시대에서는 지금 세계화된 경제와 사회 속에서 EU가 보이고 있는 선도적인 사례들과 그들의 실천하는 “이상”을 보여 줌으로써, 이 성공이 뻔히 보이는 체계가 세계 속에 보편화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의 사회와 정신사를 통해, 장원이라는 공동체, 길드라는 전통을 중시하는 공동체, 그리고, 산업혁명 후 1861년 이탈리아 카시밀 디젤디오가 말했다는 “이탈리아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이탈리안 인을 만들 차례 입니다”라는 민족주의의 태동과 각축을 거쳐,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황폐화된 지역을 재건하면서 생긴 “사회민주주의식의 시장경제의 확립”, 그리고 유럽통합에 이르고, 그 과정에서의 그들의 노력과 이념을 아주 부럽게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거꾸로 읽자면, 바로 이러한 과정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식민지로의 이주를 시작으로 딱 초기 이민정신만을 고수하고, 답습하고 있는, 이제 점차, “불량한 골목대장”처럼, 애국심을 내세운 군사력 증강을 통해 배타주의라는 오염된 호수에 점점 빠져 들고 있는 미국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오늘날, 영토권만 보장된 국경 없는 제국의 강력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성별, 인종, 종교, 민족의 장애가 없는 하나의 제국으로써 기틀은 다진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에 의거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조약에 “자각적 존재로써의 동물의 복지를 추진”하겠다는 조항까지 포함함으로써(마하트마 간디는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성은 그 나라들이 동물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 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인류 뿐 아니라, 전 생태계의 재결합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토대 하에 오늘날 유럽은 영웅적 신화창조를 통한 민족국가에서 전쟁이 패배에서 잿더미 속에 다시 일어난 대규모 통치하에서, 숫자적으로야 미국인 소득의 72%에 도달하지만, 여가에 집중할 수 있으며, 6주의 휴가를 통해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인간이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을 통해 끊임없이 대안을 실천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미국과는 이질적인 고민과 삶의 질 선택, 환경과 보편적 도덕감의 분위기 조성하에서도, EU, 10조 5천억 달러, 미국, 10조 4천억 달러라는 GDP의 역전(군사비, 마약, 범죄관리비용, 비만치료 등 각종 사회질병이 포함된 것을 고려하면 이 차이는 더 커지겠지만)현상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물론, 유럽이라는 범주와 각 영토, 각 지역, 각 공동체로 분할되어 그 속성을 들어다 보면, 완전하게 인간적인 갈등과 편견이 해소되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인종, 빈부, 이민사회, 복지제도의 불균형 등 인간이기에, 개인의 자유의지와 보편적 윤리의식, 즉 집단적 책임감은 병립될 수 밖에 없으며, 고민의 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언 바필드가 얘기했다는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식의 발전과정이다”라는 말로써 이 고민의 해법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인간이기에 적어도, 도덕의 황금률이 구현되는 지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 주류의 사고로 안착된다면, 글로벌인격체로서의 조화는 분명 꿈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고무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유러피언의 모델이 새롭게 접목될 수 있는 곳이 아시아지역이라는 것이다. 동양적 사고, 자연과의 순응과 집단의식이 강한 지역적 특성을 잘 살린다면, 미국과 멕시코, 캐나다나 인도와 중국의 결합보다 우월한 통합체제로서의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아세안에 참여하고 있는 10개국과 한국, 일본, 중국(물론 중국이 가지고 있는 역학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긴 하다만)의 노력에 의한 새로운 막강한 공동체의 탄생도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인 제러미 리프킨의 메시지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의 꿈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개인출세지향주의의 산물인 학원수업의 과열, 외고, 특목고, 조기유학, 국내외의 기러기아빠로 무너진 가정체제, 문화다양성은 오직 피부색이 하얀 인종에 대한 환상으로만 남아있고, 탈세, 투기 등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오직 “부자”면 된다는 피해의식. 성장기의 기초적이며, 보편적인 교육마저도 집어 던지고 몇 년간의 합숙생활을 통해 한탕주의와 결합하고 있는 “걸그룹” 문화, 가치 있는 삶과 즐기는 삶의 불균형 등의 개인적 특징들과 함께, 사회양극화, 지역경제를 무시하고 다시 시작되는 분야와 규모를 가리지 않는 대기업의 횡포, 포괄적 집단 윤리의식의 결여에 의한 사회체제의 불안 역시 만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럽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이제 우리를 돌아봐야 할 시기인 것 같다. 개인의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에 의한 과두정치가 파워엘리트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이 때, 유럽처럼 건강한 비영리법인, 시민사회의 활동이 보다 강화되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것이야 말로 잘못 맡긴 주권에 대한 되찾음이요, “모든 문화를 가능한 모든 형태로 재생산하기 위한” 활동이며, 핵심적인 역할로 지도층을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현실(또는 욕망)이 만연하여 결코 유러피언 드림으로의 전환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의식의 전환, 사회적인 묵약만 있으면, 7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기껏해야 40년 안팎 유지되어 온 가치의 전환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 역시, 아주 훌륭한 공동체의 역사, 유대관계와 연대의식이 차고 넘치던 국민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결코 요원한 희망이 아니다. 지금이야 말로, 욕심 같아서는 이 두 개의 꿈이 지니고 있는 장점만 쏙 뽑아낸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커뮤니티건, 코뮌이건, 공동체건, 하여간 어떤 이름으로든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지는 시기다. 

부언할 것은 “유러피언 드림”이, 이러한 주제를 50여 페이지에 이르는 참고문헌에서 알 수 있듯이 폭넓은 자료조사와 적절한 배치로 인해, 각 장마다의 연계성을 “잘 짜여진 바구니”처럼 연결시키고 있어, 추리소설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각종 사례의 분석 및 적용을 성공적으로 집필되어진 점이며(이 점은 사회과학인문도서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도 하며, 장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마치 옆집 아저씨의 푸근한 잡답처럼 매우 쉽게 읽힐 수 있는 재미 또한 갖추고 있는 점이다. 이것이 “10쇄”라는 관심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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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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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에 대한 예습처럼, 네덜란드와 하얀이빨을 읽었다면, 그 복습의 차원으로 순서를 잡았던 것이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이다. 물론 억지로 순서를 맞추었다기 보다, 어찌 하다 보니라는 것이 딱 맞는 표현인데, 곰곰 따져 보니, 아무래도 요사이 세계성을 갖춘 독자들의 진정한 화두는 역시, 이민사회, 다인종, 그리고 문화의 교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제야 감 잡은 나의 게으름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함께..

 

  데뷔작 “축복받은 집”으로 “퓰리처상” 수상, 두 번째 소설이자 첫 번째 장편 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으로 미국 내에서만 80만 부의 판매, 그리고 세 번째 출판물인 “그저 좋은 사람”으로 “타임지” 선정 최고의 책 등의 훈장을 달고 있다는 젊은(?) 작가의 최근 작품집 “그저 좋은 사람”을 읽으면서 나는, 모처럼 소설이란 장르가 주는 즐거움을 되찾았다.

 

  인도 벵갈 출신의 부모, 미국으로의 이민생활을 겪었다는 것으로 약력과 관심을 미루어 짐작하면, 이민자의 사회적 소통에 대한 쓸쓸한 회환이나 성공기를 떠올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줌파 라히니의 소설들은, 그런 거창한 접점을 드러내지 않은 채, 주인공들의 성장통, 고향의 전통을 사수하려는 이민세대 부모의 방어와 미국생활이 곧 유전자가 되어 버린 신세대들의 문화적 차이, 또는 지극히 어떤 인종이든 부딪쳐야 하는 세대, 부부, 연인, 가족 등의 국부적인 갈등을 통해 도리어 그 감쳐진 거시적 화두(물론, 이미 미국정착 전, 그들의 성공적인 삶을 고려한다면 감출 수 밖에 없지 않겠냐고 끌어 내릴 수도 있겠다만)를 끄집어 낸 작품들이었다.

 

  낯선 도시로 이사해 전업주부로서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시작하는 딸, 부인과 사별한 후 세계여행을 즐기는, 그 여행길에서 만난 연인과의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며 딸의 집을 방문, 도시의 육아방법에 익숙한 아이에게 친자연적 놀이를 전수하는 “길들지 않은 땅”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더 강해지는 자손에 대한 답을 내렸으며, 새롭게 정착한 땅 미국, 우연히 만난 고향 청년을 짝사랑하는 엄마를 지켜 본 딸의 이야기 “지옥―천국” 잡고, 놓치고, 은밀히 관조하는 머뭇거리는 조바심에 대해서, 한때 짝사랑했던 동창의 결혼식을 기회로 연상의 아내와 다시한번 “가족”의 의미를 찾고자 찾은 대학시절의 공간을 그린 “머물지 않은 방”은 곧 깨어질 듯 위태한 빛깔 좋은 권태의 화해를, 이민세대 부모와 미국식으로 자랄 수 밖에 없는 동생의 저항사이에서, 1.5 세대처럼 가족의 소통을 책임져야 했던 누나의 역할을 그린 “그저 좋은 사람”에서는 신세계에 적응하는 또 다른 방법,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의 한계를, 1부의 마지막 작품 “아무도 모르는 일”에서는 두 남자와 한 여자를 통해 감정과 신뢰, 거짓과 집착에 대한 현상고발을 시도했다. 세 편의 독립적인 작품이면서 시점 변화를 꾀해 다양한 느낌을 주었던 “헤마와 코쉭”은 조우에 대한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선택에 대한 회환을 차곡차곡 그려 내고 있었다.

 

  이 다양한 갈등과 화두, 신세계와 세대라는 시공간적 공존에 대한 선문답은 5편의 단편소설과 1개의 중편소설(2부 헤마와 코쉭으로 편집된 세 편의 단편은 하나의 중편으로 묶어야 하므로)을 통해 사례별로 작가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었고, 그 진위와 설득력의 강도는 슬쩍 독자에게 남겨 둔 것 같지만, 이미 결론은 아주 강하게 작가 자신이 매듭지었는데, 나는, 이것이 작품에 대한 완성도에 대한 작가의 자부심이며, 글쓰기의 즐거움 아니겠냐고 느꼈다.

 

  작가가 차려준 이 호화스러운 찬 앞에서, 작가가 얘기하고자 한, 이민사회든, 인간관계든, 가족소통이라는 얘기하고자 하는 진위보다도 더 값지게 생각된 것은, 주인공들의 내면을 쉽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머뭇거리며 다가가고 있는 소통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고 서려있는 그 서술의 힘이 아닌가 한다. 낯선 환경, 관계에 대한 무심한 듯 제시되고 있는, 그러나 결코 그 섬세함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때론 일인칭 시점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건조하게 진술하고 있는 알찬 서술)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매우 치밀했던 문장을 통해 완성된 소설집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생각, 이 작품집에 대한 작가의 의도보다, 역자의 감성이 역시 더 동양적이며 드라마적이었던 모양이다. 책을 다 읽고, “그저 좋은 사람”이라는 번역판 제목보다, 나는 작가의 원제 그대로 “길들지 않은 땅”에 더 호감이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정의가 인도, 미국, 런던 등의 거주 지역과 유럽, 아시아 지역을 넘나드는, 범위를 좁혀 미국내에서도 성장기, 청장년기를 통해 제시되는 새로운 공간에서 끊임없이 추구되고 있는 주인공들의 생존의지에 보다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 때문이다. 이와는 별개로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읽으며, 차분하게 보여주는 이국적 풍경을 따라 가면서, 문득 문득 박시정이라는 작가를 떠 올린 것은, 영어소설이 가지고 있는 시장의 풍부함이 몹시 부럽다는 기성세대의 욕심을 대변 했다는 증거인데, 어쩌랴, 이것이 우리 현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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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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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각계에 원로라는 계층이 참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원로의 목소리가 참으로 초라하다라는 생각, 점차, 어린 사람들의 대중문화에 휩쓸리고, 안위에 대한 관심만 많아지면서 원로들은 잔소리쟁이고, 번거로운 억지 존경이 부류로 밀려나 있는 듯한 생각 말이다. 한편으로는, 일부 원로들은 혹시, 젊은 시절부터 유지해 오고 있는 명성에 안주하고 있는 가하는 질문도 던져본다. 낡은 노트, 발전하지 않은 생각, 어느 덧 원로라는 장식 앞에서, 이제 더 이상의 고민도, 열정의 불도 가라앉히고, 너무 무책임하게 안주하고 있는 원로는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 말이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지금 한국사회에 존재하지 않다고 강력하게 부인한다면, 우리 사회가 이 모양으로 진행되고 있겠는가? 새해를 맡고, 신문을 보면, 여러 가지 이유와 배경에 의해 원로들, 전문가들이 조심스럽게 진단하고 있는 현상과 함축적인 메시지들을 읽으면서 마음이 가 닿지 않는 것은, 피상적인 관념과 움직이고 있는 현실의 갭이 너무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노예는 고통을 두려워 하고, 자유로운 사람은 수치를 두려워 한다.”

“데러리즘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새 법률에 포함되어 있다.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자는 것인데, 그런 게 아닌 척 하지도 않는다.“

“모든게 옛날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존 쿳시,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 1940년생이니 올해로 70살이다. 그럼 원로라는 위상부여가 적절한텐데, 2007년에 출간된 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를 통해 원로라는 선입감을 버리고, 여전히 실험적이며, 속 깊은 얘기들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다. 모두에 일단 이렇게 외국에 살고 있는 한 “원로”에 대한 존경을 먼저 꺼낸 것은, 한 없는 부러움 때문이다.

 

   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 “강력한 의견들”은 소설적 주인공 원로작가가 독일출판사의 권유에 의해 그 출판사가 의뢰한 세계 석학 6명에 포함되어 각자 사회, 정치, 문화에 대한 의견을 출판하자는 것에 동의하여, 그 화두에 대한 작가의 에세이를 수록한 것이며, 제 2부 “두번째 일기”는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들에 대한 짧은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2부로 나누워, 매우 간략하게 주인공 작가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내용들이 범상치가 않다. 그야말로, 현대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합리적 사회구조의 그늘아래 감춰지고 있는 위선과 허상을 매우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인데, 때론 격하게, 때론 비아냥거리듯, 인문학 전방위에 걸쳐 주인공, 아니 존 쿳시라는 작가의 깊은 사색의 결과들을 만날 수 있다. 제 1부, 강력한 의견들을 보면, “국가의 기원, 아나키즘, 민주주의, 마키아벨리, 테러리즘, 유도장치, 알카에다, 대학, 관타나모, 국가적인 수치, 저주, 소아성애, 육체, 동물을 사육하는 것 조류독감, 경쟁, 지적설계, 제논, 개연성, 침략, 사과, 오스트레일리아로의 망명,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적인 삶, 좌익과 우익, 토니 블레어, 해널드 핀터, 음악, 여행, 영어어법, 소설에서의 권위, 내세”등 모두 31개의 토픽을 대한 작가, 아니 주인공 "세뇨르 C"의 사고전개는 원로의 입에서 나오는 “젊은 피”를 만날 수 있었다. 즉인 즉, 살기좋고 여유있는 호주라는 나라마저도, 신자유주의 무역에 휩쓸려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테러리즘법을 새로 만드는 등 점점 더 이상한 꼴로 후퇴하는 현상에 대해, 인용한 포픽 전반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인데, 그 촌철살인의 경구들이 문장 하나하나에 살아 있음에 모골을 서게 했다. “남아공의 폭력적 역사와 불안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던 쿳시가 호주로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는 이 정당한 폭력 때문에 작가의 항거는 결코 멈출 수 없는 모양이다. 거기에 비하면 2부, 두 번째 일기는 문화에 대한 사색의 결과다. “꿈, 팬들의 편지, 내 아버지, 인샬라, 대중에 감정, 정치적 혼란, 키스, 에로틱한 삶, 나이를 먹는 다는 것, 이야기를 위한 생각, 별로 아름답지 않은 프랑스, 고전, 작가의 삶, 모국어, 안키 크로흐, 사진 찍히는 것, 사유, 공중의 새, 동정, 아이들, 물과 불, 지루함, 바흐, 도스토옙스키 등 그가 추려된 화두에 대한 차분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소설을 이렇게 소설속 작가의 에세이를 따라 가는 것은 이 소설의 장점을 백분의 일이나 소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이런 작가의 생각, 지성보다 더 중요한 덕목을 가지고 있는 데, 이것은 내게 별로 익숙하지 않았던, 그러나 어떤 소설보다도 선명히 연결되는 형식파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모두 3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 화자는 앞서 길게 소개한 작가의 에세이이다. 두 번째 화자는 주인공 작가다. 그러니까, 에세이 원고를 청탁받고, 집필하기 시작한 작가가 공원을 산책 중에 우연히 만난 젊은 여자 안야. 그 여자를 만나면서 “늙은이식의 사랑”에 눈 뜨고, 그 여자를 곁에 두기 위해 원고 타이핑을 부탁하며, 그 여자와 함께 작품을 써 내려가며, 진행되는 관계에 대한 주인공 작가 자신이 화자로 된 서술이다. 세 번째 화자는 젊은 여자 안야이다. 마흔이 넘은 남자와 동거중인, 배치미가 돋보이는 여자, 지성으로 포장된 노작가의 시선을 자기 엉덩이의 매력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는 여자. 동거중인 남자가 작가의 재산을 빼돌리기는 음모를 지켜봐야 하는 여자가 바로 마지막 화자다. 그런데 이런 류의 소설이 보통, 각장이 끝나면 각기 새로운 화자를 등장 시킨다든지, 아니면 통합적인 서술방식을 택하는 것이 통례이거늘, 이 소설은 독특하게 한 페이지에 밑선을 긋고, 이 세명의 화자가 동시에 등장한다. 그러니까 독자인 나는 한 페이지 속에 담겨있는 모도 세권의 책 (한권은 에세이, 한권은 한 늙은 작가가 젊은 비서와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소설, 한권은 한 젊은 남자가 애인과 함께 늙은 작가를 곁에 두는 소설)을 읽게 됐는데, 그 연계가 얼마나 절묘하게 짜여 있는 지 당초의 걱정과는 달리 매우 쉽게, 그리고 더 깊게 소설을 이해하고, 작가가 마련해 놓은 “좋은 구경꺼리”에 푹 빠질 수 있었다.

 

    당초의 걱정? 그렇다. 솔직히 책이 도착했을 때, 책 표지를 보고, 작가의 약력을 보고, 역자의 해설을 읽고, 더구나 변형된 제본(세편의 글을 한 페이지에 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세로가 매우 긴 제분)을 만지면서, 세계적인 작가가 형식마저 일탈했으니, 얼마나 읽기 어렵겠냐는 지례짐작 때문에 책 읽기의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런데 몇 개의 토픽을 읽어가면서, 이 정치적 에세이와 나머지 두 편의 소설의 진행이 각 페이지마다, 절묘하게 내용의 전개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국가를 정의할 때면, 남녀라는 새롭게 이뤄지는 관계를 그렸고, 테러와 음모, 왜곡된 정치와 억압에 대한 의견을 피력할 때면, 나머지 두 소설은 여유와 갈등, 그리고 같은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니, 작가가 의도한 대로, 이렇게 한번에 세편의 글을 동시에 읽음으로써, 그 이해와 감동이 보다 쉽게 전달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자신감, 그리고 그 자신감을 한층 더 뒷받침 해주는 노력, 노익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라고 과시라도 하듯 부러운 자신감으로 말이다.

 

     지성인이라는 것, 적어도, 인본주의(지각할 수 있는 동물을 포함하여)를 지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사고, 의견, 그리고 자세에 대한 고찰을, 아주 쉬운 문체로 읽고 싶다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불합리한 사실에 대해 대응해야 하는 생각을 얻고 싶다면, 더욱이 그것이 소설이라는 장르로, 예술이라는 장르 속에서 기교가 들어가 신선하게 재생된 것으로 만나고 싶다면, 나는 우선 아주 손쉽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존 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를 추천하고 싶다. 예술성과 주제를 완벽하게 소화시킨 작품을 이렇게 쉽게 만난다는 것은 행운에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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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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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대해 빼놓고 있는 것이 있다. 1841년 l월 아편전쟁을 계기로 홍콩을 점령한 영국, 1842년 난징조약으로 영구할양, 1898년 2차 베이징조약에 의해 99년 동안 조차확정 등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아시아에서 빠르게 현대경제를 형성한 지역, 식민지이지만, 조차구역이라는 구분은 왠지 동서양이 자유롭게, 있는 동양속의 유럽을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이 여전히 폐쇄정책을 쓰던 시절에도 홍콩은 자유로운, 뭔가 그럴싸한 근대문화의 향수가 골목마다 진하게 배어 있는 그런 호사스런 섬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홍콩도 본토와 마찬가지로 1941년부터 일본군의 점령지역이라는 것을 까맣게 빼어놓고 있었다. 본토처럼 지금의 아세안 지역처럼, 똑같이 전쟁을 겪고, 특히나 식민지에서 다시 타국의 점령지로 주인이 바뀌면서 현지인들과 기득세력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도리어 더 했을 것이라는, 이 작은 섬의 고통을 완전히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한인 2세 작가 Janice Y. K. Lee의 “피아노 교사”는 이, 내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이 전쟁기간 1941년부터 1953년 사이의 홍콩이야기다. 그런데, 소설의 무대가 되고 있는 동양의 홍콩에서, 주인공들은 영국인이고, 혼혈인이며, 일본인이고, 중국인이며, 마지막 미국인까지 등장한다. 작가가 30대 후반의 한국인 2세인 것을 감안하면,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스케일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작가는 이 홍콩, 2차대전의 소용돌이를 함께 겪고 있는 이 식민지에다 아주 섬세하고, 드라마틱하게 각종 소품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었다.

별빛이 소근 대는 등불같은 홍콩, 그 곳엔, 사교계가 있다. 점령지를 약탈하기 위한 제도와 체계의 완성을 위해 파견된, 온갖 곳을 부랑하다가도, 침략자의 여권을 소지했다는 것으로만 지배자가 될 수 있는, 현대사의 그늘이 만들어 놓은 부서질 듯 견고하게 자리 잡은 크리스탈 제품 같은 사교계가 있다.



“중국인들은 바보가 아니야.
우리는 이곳의 영국인 대부분이 자기네 나라라면 엄두도 못 낼 수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이곳에서 왕처럼 살 수 있는 건 그들의 화폐가 우리 화폐보다 가치가 높아서훨씬 더 많은 노동력을 살 수 있기 때문이야.
자기들은 이곳의 영주이고, 우리는 농노라고 생각지.
하지만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여기에서처럼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야.
그 사람들은 빌린 돈을 가지고 가장된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

본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건, 어떤 이유로 식민지까지 쫓겨 왔던 간에, 이들은 승자고, 현지인들을 아마라고 지칭되는 하인으로 거느리며 곱게 다림질한 리넨제품을 선호하며, 파티와 클럽문화에 젖어 든 온갖 스캔들과 루머를 양산하는 사교계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그 곳엔 사랑이 있다. 광풍처럼 휘감는 애정, 사랑, 질투, 소유, 패배, 양보, 포기 등 인간이 이성을 상대로 부릴 수 있는 온갖 마술이 존재한다. 그 위에 혈육도 필요 없는 탐욕이 있으며, 그 옆에 발 빠르게 바뀌는 지배자에게 고개를 드미는 해바라기들이 있고, 그 속에 조롱과 야유, 그리고 나약함이 포함된다. 

역시 그곳에도 전쟁이 있다. 포획과 수탈에 익숙한 광기어린 철없는 군부가 있고, 강간과 살육에 미쳐가는 일본군이 있으며, 공습과 학살에 움추린 한때 잘 나갔던 기득세력들이, 그리고 수용소의 비윤리와 도덕이 상존한다. 덧붙여서, 그 곳엔 “크라운 컬렉션”이라는 원래 중국것이었으나, 대영박물관을 위해 영국황실이 수집하고 있는 영국것인 중국보물이 새로운 주인인 일본으로 넘어가야 하는 아이러니까지 삽입된다.

소설 “피아노 교사”는 이 홍콩, 가능한 한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특히나 식민지, 게다가 한걸음 더 나아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견디어 나가는 인간의 양상을 모두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1951년, 영국에서 지루한 하류인생을 거부하고, 안정된 삶을 위해 공직자 남편을 따라 홍콩에 온 클레어는 영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바로 상류사회인 사교계에 입문할 수 있었으며, 홍콩의 대 부호 빅터 첸의 아이 로봇의 피아노 교사가 된다. 그녀는 새로 찾아 온 환경, 상류사회의 진입을 통한 정체성의 위기를 이 부호의 기사로 있는 영국인 윌 트루스데일과의 사랑으로 벗어나려 하는데, 윌은 돌리어 이 천진난만한 여자를 통해, 십년전 사랑에 빠졌던 중국인과 포르투칼인 사이의 혼혈아 트루디와의 관계를 다시 집착한다. 이렇게 설명하면 제목 “피아노교사”가 맞다. 그런데.. 

작가는 기가 막힌 음모를 심어놓았다. 사실, 이 소설은 피아노 교사인 클레어가 아닌, 그로부터 10년전 혼란기의 홍콩사교계를 주름잡던 투루디, 그녀의 사랑과 용기, 그리고 그 매력이 한 남자로 인해 철저히 와해되는 애절한 사랑이야기이다.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욕망, 전쟁터에서 그 욕망과 매력이 할 수 있는 타협,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로 인해 씻김 받기를 원했던, 귀여운 악마, 도리어 약아서 순진한 한 여자의 부침을, 원칙과 도덕이라는 가면 속에 비겁과 무능을 감춘 윌이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을 땐, 아이를 낳고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된 그녀을 위해 결코 방문을 잠그지 않고 지낸 10년을 보낸 그 사랑의 이야기이다. 8살이 되어서 엄마가 떠나고, 부자아빠 덕에 유럽으로 유학을 갔으나, 혼혈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고, 그 반발심으로 사교계의 여왕벌이 되어, 매년 누구를 만나던 그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던, 마치 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사랑을 희구하며 살아 온 강한 트루디가 처음으로 만난 의젓한 인간 윌에게 빠져드는 이유는 마치 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과 같았다. 그리고 전쟁터, 야욕과 야만만이 지배하고 있는 그 폐허의 유배지에서, ”트루디라는 새는 새장에 가뒤놓을 수 없어, 나는 음침하고 위험한 자유와 그에 따르는 모든 굴욕에 익숙해 졌다며“ 그 자신을 버리고 윌에게 매달렸던 그녀, ”제발 남자답게,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보여“ 달라는 마지막 절규를 뿌리친 가책에 빠져 있는 윌에게 마치 트루디의 환영처럼 클레어가 다가온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유층, 사교계의 욕망에 눈이 멀어, 의심을 하녀에게 덮어씌우고 수업이 있는 날, 부호의 물건들을 하나씩 가방 안에 넣어 가지고 나오는 피아노 교사 클레어에게 윌이 그처럼 추락하듯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상반된 성격, 두 여자를 한 사람으로 가름할 수 있게 하는 작가의 힘은, 전체적인 구조의 짜임새, 그리고 당시 홍콩을 그대로 재현한 무대와, 다양한 인간, 상황과 대처라는 것을 매우 짜임새있게 풀어놓은 전개에 있다. 모두에 서술한 당시 홍콩에 있었던, 아니 작가가 탄생시킨 모든 화두들 하나 하나의 그 미묘하고 처연한 관계를 아주 숙련된 구조물을 올리듯 그렇게 만들었으니, 정말, 표지 뒷면에서 소개된 서평처럼 “전화기의 감춰놓고 읽어야 하거나”, “한번 손에 잡으면 탐닉하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또 다른 매력, 나는 이 소설이 곧 영화화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메이저급 영화사에 의해 말이다. 왜냐면, 그동안 숱한 영상으로 소개된, 홍콩, 사교계, 전쟁, 욕망을 이렇게 한꺼번에 응집시키면서도, 뛰어난 묘사를 통해 책을 읽어갈수록 텍스트가 아닌 영상으로 머릿속에 계속 남아있는 소설을 모처럼 만났다는 것인데, 예를 들자면, 하인들이 날을 세운 깃, 나른한 식민지 오후, 바스락 소리가 날 듯이 풀먹인 침대보를 마구 주름을 가하는 오후의 정사, 식민지 부호의 탁자위에 올려진 수입 찻잔과 피아노, 사교장, 밀실을 꽉 채운 담배연기, 홍콩의 뒷골목들, 침략자의 오만과 성욕, 수용소, 먹기 위해서는 육체까지 넘겨야 하는 굴욕, 보물이라는 아이템, 그리고, 마지막 클레어가 그토록 원했던 상류상회의 이질감을 버리고, 영국에서의 그녀의 삶처럼, 현지인처럼 완차이 골목에서 살아가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결말까지, 영화가 가져야 하는,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극적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말부분의 급박하게 처리한 서술방법이 전체 구조로 보아서는 살짝 어긋나긴 했지만, 더더욱 놀라왔던 것은,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철저하게 완곡하게 돌아가는 작가의 재치다. 모든 것을 보여준 듯한데, 꼭 독자가 앞뒤를 고려해서 그 엉킨 줄을 풀게 만드는, 그리고 이해하게 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고를 통해 마치 당시 홍콩의 거리, 사교계 안에, 그 가십세계에 내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 주는 작품을 만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작가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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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진리에서 태어나는 도시 - 파괴된 도시를 살리는 인문학적 상상력
떼오도르 폴 김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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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복 지음 “파리를 생각한다”에서 얻으려 했던 인문학적 고찰의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서평난을 통해 다시 한번 인문학, 그리고 도시라는 명제의 책을 소개받고 읽기 시작한 책, 그러고 보니 “상처받지 않을 권리”로 시작되는 도시에 대한 사념의 입문이 점차 중심을 찾아 가는 것 같다.
 

떼오도르 폴 김의 “사고와 진리에서 태어나는 도시”는 도시와 인류, 그리고 도시와 문화, 도시와 예술,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시속에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위해, 재불건축가, 사회학자라는 저자의 이력이 충분히 녹아있는 풍부한 인문학적 예문들과 사례 탐구를 제시하여 지금 오늘, 한국의 건설운동의 허망함을 곧장 드러내 보인 한번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 책이다. 

이 책은, 문명, 문화의 시발점인 도시, 도시국가의 출발부터 도시라 함은 신성한 장소와 시장이 함께 있는 인간의 진정한 삶을 드러낸 장소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로마시대의 도시부터 발현한 철학, 미학, 사회학, 언어학, 민속학, 인류학 등등의 모든 이론을 바탕으로 저자가 생각하고, 추구하고 있는 올바른 도시환경 구축을 위한 제언으로 가득차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수많은 사진자료와 설명,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인용과 함께, 매년 수억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유럽의 도시들은(내 자신도 영원한 로망 속에 있는 그 반질거리는 포도의 골목길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보존된 역사의 장소이며, 그런 장소로서 도시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그 속 서있는 내 자신이, 마치 동물적 수명인, 길어봐야 80년 안팎의 좁은 객체에서 벗어나, 누천년 이어 온 인류의 삶과 동질화 할 수 있는 확장된 정신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제 1부 “도시란 무엇인가”에서는 도시의 시적고찰, 도시라는 장소가 가진 도덕적, 사회적 관계를 살펴보고, 소통이 공유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의미에 대해 서술하여, 도시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안내를 시작했고, 제 2부. “도시의 이론과 실체와 사상”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도시만의 언어, 그리고 대문이라는 상징을 통해본 개인과 공공의 영역의 조화와 그런 성공적으로 조성된 도시의 품격과 도덕성, 그래서 이 올바른 정체성을 제대로 보존해야 하는 이유들에 대한 서술이다.

인문학의 유명한 경구들 그러니까 세네트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남을 존중해야만 자신을 보호 받게 되고 그래야, 사회가 존재한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관계성은, 바슐라르의 “자기만의 주거공간에서 사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말은, 자신이 그 곳에 존재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내포한다”는 영역적인 측면으로부터 출발하고, “대문”을 통해 소우주(개인적 자아)와 대우주(공공적 공동체)로 조화를 이루는 “인간은 한번 사회적 관계를 가지며, 절대로 그 상대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라고 할한 짐멜의 논리로까지 모두, 도시의 기능으로 귀결될 수 잇을 것이다.

제 3부, “도시의 예술성, 미학적 가치의 기준이란”에서는 장황할 정도의 저자의 예술관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아름다움을 위한 미학적 고찰, 역사적으로 이 인식들을 고민했던, 여러 학자의 입을 빌어, 도시가 아름다워야 하며, 그 이유는 바로,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올바른 삶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 때문이며, 그것이 인류사회, 후손이라는 대상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임을 강조했다. 특히 3부는, 예술화과정 및 사회화 과정에 대해 건축이라는 분야에 대한 관계성을 의심할 만큼 매우 소상히 설명하고 있어서, 잠시 “건축”이라는 단어를 머리에서 비워내야 할 정도의 미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결론은 저자가 인용한 “도시란 하나의 연극무대이다”라는 스페인 건축가 보필의 말인가? 

제 4부, “도시의 사회학적 주요인”은 집과 주인, 집들의 공동체 도시에 대한 결론을 한국적 상황과 빚대어 유럽의 선진적인 이론과 사례를 제시한다. 청계천, 운하, 아파트 정책 등 앞 서 3부에 이르기까지 간헐적으로 걱정한 오늘의 한국사회, 건설정책과 왜곡된 사회와 정체성에 대한 날 선 저자의 비판이 속 시원한 것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 지식인 한 두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실천하고, 거부하고,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더 이상의 파괴와 파멸을 후손에게 줄 수 없는 자명한 책임을 우리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주택이란 것을 삶의 공간이 아니라, 소유하기 위해 항상 갈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훌륭한 집을 소유하기 이전에 인간이 산다는 것을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을 도외시하고 부동산을 단순히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보석상자(창문도 못 열고, 온갖 신제품의 첨단기기만 가득차 분양가를 올리고 있는 탐욕에 기댄)”의 가치로만 인식되어 무분별한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오늘, 우리의 책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청계천이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적 장소가 부활했는가에 대한 의문.  

              역사적 장소의 복원이 아니라, 현대판 물놀이 장소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역사학자, 인류학자들의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운하 건설이 산업발전의 주요정책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몹시 위험하고 심각한 발상이다.
                     자칫 잘못하면 도시의 불균형 및 자연파괴로 거대한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 
                             폭 100m 깊이 10m의 발상은 심각한 건설정책이자 국토 파괴행위이다.”

“지금의 건설능력은 사막을 공원으로 만들고, 해저에 주택을 지을만큼 발달 되었지만,
이 기술적 가능성에는 인간의 삶이 주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의 방법에는 사회학적, 생태학적, 인류학적 요소들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건설의 가능성을 추진하기에 그 성과만으로 만족한다.
그 결과 거대한 자연을 뚫고 파헤쳐 아예 통째로 사라지게 만든다.“
 

“소수집단과 단체 그리고 특정한 개인의 이익이나 과시를 위해 만들어지는 건축은
대중의 공공이익을 무시하고 사회성을 파멸시킨다.
즉 소수를 만족시키는 건축은 사회라는 커다란 전체 안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완벽한 삶에
대항하는 미련하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르코르뷔지에 아테네 헌장 발표문 재인용

수 많은 인문학적 관점들이 녹아있는 본문 중, 만분의 일도 안되는 한국건축 생태계를 걱정한 문구들 중 아무렇게나 뽑은 저자의 표현을 비추어 보면, 한국의 건축개념이 얼마나 못생기고 흉악한지를 깨닫게 해 주고 있다. 도시의 본질적 사고와 지식을 잃어버린,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들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집(특히 아파트), 동네, 도시에 지금이라도, 도시학적. 사회학적 기준과 원칙하에 시민은 도시의 주인으로서 거주인, 주거 공간, 도시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복원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이 표현되는 도시, 조상들과 나와 후손들이 영감을 느끼고 교류할 수 있는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기 있는 것은 아닐까?
 

어찌 되었건, 반복하거니와, 유럽의 작은 수로, 광장, 그리고 역사를 이어가는 건축물들의 조화가 왜 인간의 그리움을 자극하는 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되어 있는, 공공정책 중 올바른 사고를 가진 건설정책이란 바로 시민들이 노예나 하인의 삶이 아닌 귀족의 삶을 살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을 만났다. 한편으로는, 최근의 도시에 대한 책들을 만나면서, 책들마다 빠지지 않고 예시를 들고 있는 짐멜, 베야민 등의 학자들의 대표적인 책 한 권씩은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으니, 이거 참, 숙제는 숙제를 낳고, 욕심은 쌓여만 가는 모양이다. 

사족 하나. 저자가 언급한 우리 사회의 두종류의 공동체인식, 즉, 하나는, 교수, 연구단체, 학술기관, 예술인, 변호사, 의사, 건축사 같은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로 사회문제가 발생할 경우, 공감하고, 일치된 동기로 문제를 제시하는 부류고, 또 다른 하나는 개개인이 공통된 이익을 목적으로 분쟁과 폭력, 파괴를 일삼는 부류로 정의한 것은(물론 마지막에 이런 첫 번째 부류의 왜곡된 계급의식도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기는 했다만) 내가 읽기에 다소 불편한 부분이었다. 나는, 지금 바로 그런 문제를 일으키고, 투기를 통해, 불법, 위법, 탈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부류가 어찌 보면 도리어 지식인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심에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족은, 저자의 문장을 인용하기 전에 먼저 그 발췌 이유를 밝혀야겠다. 최근 카라의 엉덩이춤을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히 세바퀴에 출연한 조형기는 그 흔드는 엉덩이를 보면서 침을 흘렸다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있다. 식구들과 그 프로를 시청하며 눈살을 찌푸린 것은, 분명 그것은 20대 초반의 어린 여가수들의 몸짓을 통해 “성”을 생각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 사회에 지금 스타라는 환상과 상업이라는 야만이 만나 빚어 낸 소위 “섹시문화”에 대한 지독한 파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가수를, 그것도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를(본인들은 섹시하게 다 자랐다고 생각하겠다만) 노래가 아닌, 오직 성적대상으로 침을 흘려도 당당한, 그것도 은밀한 사적공간도 아닌 공중파에서 퍼뜨려도 되는 사회, 10대 때부터 오디션, 합숙 등을 통해 정상적인 교육기회와 인격형성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상업주의에 물든 이 아이돌 문화 (뭐, 한 두명의 성공사례나, 인기를 얻는 것은, 문화의 다양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이렇게 온통 대중문화를 흔들어 놓고 주류인양 포장되고 있는, 무슨 걸그룹 등,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은 마구 조직하고 있는 기획사 나부랭이들을 썩은 정신이라 욕하고 싶은), 대중음악의 판도를 영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차에 저자의 언급한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다. 이것만으로도 하루 밤을 새겠으나, 촌철살인격으로 말한 저자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음. 정말, 불쌍한 나라다.

 

“청소년들은 이타주의 개념이 망각된 도시에서
문화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청소년을 이용해 돈을 버는 연예기획사, 언론사, 광고회사들이 돈을 버는 행위는
방종의 전염병을 사회에 퍼뜨린다.
사회체제와 도시환경이 혼란스러울수록 성인들은 돈을 벌기위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착취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후진국일수록 미성년자 노동착취, 인신매매, 납치 등의 사건이 많이 발생한다.
청소년의 현실은 곧 그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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