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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진리에서 태어나는 도시 - 파괴된 도시를 살리는 인문학적 상상력
떼오도르 폴 김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정수복 지음 “파리를 생각한다”에서 얻으려 했던 인문학적 고찰의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서평난을 통해 다시 한번 인문학, 그리고 도시라는 명제의 책을 소개받고 읽기 시작한 책, 그러고 보니 “상처받지 않을 권리”로 시작되는 도시에 대한 사념의 입문이 점차 중심을 찾아 가는 것 같다.
떼오도르 폴 김의 “사고와 진리에서 태어나는 도시”는 도시와 인류, 그리고 도시와 문화, 도시와 예술,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시속에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위해, 재불건축가, 사회학자라는 저자의 이력이 충분히 녹아있는 풍부한 인문학적 예문들과 사례 탐구를 제시하여 지금 오늘, 한국의 건설운동의 허망함을 곧장 드러내 보인 한번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 책이다.
이 책은, 문명, 문화의 시발점인 도시, 도시국가의 출발부터 도시라 함은 신성한 장소와 시장이 함께 있는 인간의 진정한 삶을 드러낸 장소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로마시대의 도시부터 발현한 철학, 미학, 사회학, 언어학, 민속학, 인류학 등등의 모든 이론을 바탕으로 저자가 생각하고, 추구하고 있는 올바른 도시환경 구축을 위한 제언으로 가득차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수많은 사진자료와 설명,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인용과 함께, 매년 수억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유럽의 도시들은(내 자신도 영원한 로망 속에 있는 그 반질거리는 포도의 골목길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보존된 역사의 장소이며, 그런 장소로서 도시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그 속 서있는 내 자신이, 마치 동물적 수명인, 길어봐야 80년 안팎의 좁은 객체에서 벗어나, 누천년 이어 온 인류의 삶과 동질화 할 수 있는 확장된 정신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제 1부 “도시란 무엇인가”에서는 도시의 시적고찰, 도시라는 장소가 가진 도덕적, 사회적 관계를 살펴보고, 소통이 공유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의미에 대해 서술하여, 도시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안내를 시작했고, 제 2부. “도시의 이론과 실체와 사상”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도시만의 언어, 그리고 대문이라는 상징을 통해본 개인과 공공의 영역의 조화와 그런 성공적으로 조성된 도시의 품격과 도덕성, 그래서 이 올바른 정체성을 제대로 보존해야 하는 이유들에 대한 서술이다.
인문학의 유명한 경구들 그러니까 세네트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남을 존중해야만 자신을 보호 받게 되고 그래야, 사회가 존재한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관계성은, 바슐라르의 “자기만의 주거공간에서 사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말은, 자신이 그 곳에 존재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내포한다”는 영역적인 측면으로부터 출발하고, “대문”을 통해 소우주(개인적 자아)와 대우주(공공적 공동체)로 조화를 이루는 “인간은 한번 사회적 관계를 가지며, 절대로 그 상대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라고 할한 짐멜의 논리로까지 모두, 도시의 기능으로 귀결될 수 잇을 것이다.
제 3부, “도시의 예술성, 미학적 가치의 기준이란”에서는 장황할 정도의 저자의 예술관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아름다움을 위한 미학적 고찰, 역사적으로 이 인식들을 고민했던, 여러 학자의 입을 빌어, 도시가 아름다워야 하며, 그 이유는 바로,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올바른 삶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 때문이며, 그것이 인류사회, 후손이라는 대상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임을 강조했다. 특히 3부는, 예술화과정 및 사회화 과정에 대해 건축이라는 분야에 대한 관계성을 의심할 만큼 매우 소상히 설명하고 있어서, 잠시 “건축”이라는 단어를 머리에서 비워내야 할 정도의 미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결론은 저자가 인용한 “도시란 하나의 연극무대이다”라는 스페인 건축가 보필의 말인가?
제 4부, “도시의 사회학적 주요인”은 집과 주인, 집들의 공동체 도시에 대한 결론을 한국적 상황과 빚대어 유럽의 선진적인 이론과 사례를 제시한다. 청계천, 운하, 아파트 정책 등 앞 서 3부에 이르기까지 간헐적으로 걱정한 오늘의 한국사회, 건설정책과 왜곡된 사회와 정체성에 대한 날 선 저자의 비판이 속 시원한 것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 지식인 한 두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실천하고, 거부하고,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더 이상의 파괴와 파멸을 후손에게 줄 수 없는 자명한 책임을 우리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주택이란 것을 삶의 공간이 아니라, 소유하기 위해 항상 갈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훌륭한 집을 소유하기 이전에 인간이 산다는 것을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을 도외시하고 부동산을 단순히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보석상자(창문도 못 열고, 온갖 신제품의 첨단기기만 가득차 분양가를 올리고 있는 탐욕에 기댄)”의 가치로만 인식되어 무분별한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오늘, 우리의 책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청계천이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적 장소가 부활했는가에 대한 의문.
역사적 장소의 복원이 아니라, 현대판 물놀이 장소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역사학자, 인류학자들의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운하 건설이 산업발전의 주요정책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몹시 위험하고 심각한 발상이다.
자칫 잘못하면 도시의 불균형 및 자연파괴로 거대한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
폭 100m 깊이 10m의 발상은 심각한 건설정책이자 국토 파괴행위이다.”
“지금의 건설능력은 사막을 공원으로 만들고, 해저에 주택을 지을만큼 발달 되었지만,
이 기술적 가능성에는 인간의 삶이 주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의 방법에는 사회학적, 생태학적, 인류학적 요소들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건설의 가능성을 추진하기에 그 성과만으로 만족한다.
그 결과 거대한 자연을 뚫고 파헤쳐 아예 통째로 사라지게 만든다.“
“소수집단과 단체 그리고 특정한 개인의 이익이나 과시를 위해 만들어지는 건축은
대중의 공공이익을 무시하고 사회성을 파멸시킨다.
즉 소수를 만족시키는 건축은 사회라는 커다란 전체 안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완벽한 삶에
대항하는 미련하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르코르뷔지에 아테네 헌장 발표문 재인용
수 많은 인문학적 관점들이 녹아있는 본문 중, 만분의 일도 안되는 한국건축 생태계를 걱정한 문구들 중 아무렇게나 뽑은 저자의 표현을 비추어 보면, 한국의 건축개념이 얼마나 못생기고 흉악한지를 깨닫게 해 주고 있다. 도시의 본질적 사고와 지식을 잃어버린,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들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집(특히 아파트), 동네, 도시에 지금이라도, 도시학적. 사회학적 기준과 원칙하에 시민은 도시의 주인으로서 거주인, 주거 공간, 도시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복원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이 표현되는 도시, 조상들과 나와 후손들이 영감을 느끼고 교류할 수 있는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기 있는 것은 아닐까?
어찌 되었건, 반복하거니와, 유럽의 작은 수로, 광장, 그리고 역사를 이어가는 건축물들의 조화가 왜 인간의 그리움을 자극하는 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되어 있는, 공공정책 중 올바른 사고를 가진 건설정책이란 바로 시민들이 노예나 하인의 삶이 아닌 귀족의 삶을 살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을 만났다. 한편으로는, 최근의 도시에 대한 책들을 만나면서, 책들마다 빠지지 않고 예시를 들고 있는 짐멜, 베야민 등의 학자들의 대표적인 책 한 권씩은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으니, 이거 참, 숙제는 숙제를 낳고, 욕심은 쌓여만 가는 모양이다.
사족 하나. 저자가 언급한 우리 사회의 두종류의 공동체인식, 즉, 하나는, 교수, 연구단체, 학술기관, 예술인, 변호사, 의사, 건축사 같은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로 사회문제가 발생할 경우, 공감하고, 일치된 동기로 문제를 제시하는 부류고, 또 다른 하나는 개개인이 공통된 이익을 목적으로 분쟁과 폭력, 파괴를 일삼는 부류로 정의한 것은(물론 마지막에 이런 첫 번째 부류의 왜곡된 계급의식도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기는 했다만) 내가 읽기에 다소 불편한 부분이었다. 나는, 지금 바로 그런 문제를 일으키고, 투기를 통해, 불법, 위법, 탈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부류가 어찌 보면 도리어 지식인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심에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족은, 저자의 문장을 인용하기 전에 먼저 그 발췌 이유를 밝혀야겠다. 최근 카라의 엉덩이춤을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히 세바퀴에 출연한 조형기는 그 흔드는 엉덩이를 보면서 침을 흘렸다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있다. 식구들과 그 프로를 시청하며 눈살을 찌푸린 것은, 분명 그것은 20대 초반의 어린 여가수들의 몸짓을 통해 “성”을 생각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 사회에 지금 스타라는 환상과 상업이라는 야만이 만나 빚어 낸 소위 “섹시문화”에 대한 지독한 파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가수를, 그것도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를(본인들은 섹시하게 다 자랐다고 생각하겠다만) 노래가 아닌, 오직 성적대상으로 침을 흘려도 당당한, 그것도 은밀한 사적공간도 아닌 공중파에서 퍼뜨려도 되는 사회, 10대 때부터 오디션, 합숙 등을 통해 정상적인 교육기회와 인격형성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상업주의에 물든 이 아이돌 문화 (뭐, 한 두명의 성공사례나, 인기를 얻는 것은, 문화의 다양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이렇게 온통 대중문화를 흔들어 놓고 주류인양 포장되고 있는, 무슨 걸그룹 등,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은 마구 조직하고 있는 기획사 나부랭이들을 썩은 정신이라 욕하고 싶은), 대중음악의 판도를 영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차에 저자의 언급한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다. 이것만으로도 하루 밤을 새겠으나, 촌철살인격으로 말한 저자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음. 정말, 불쌍한 나라다.
“청소년들은 이타주의 개념이 망각된 도시에서
문화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청소년을 이용해 돈을 버는 연예기획사, 언론사, 광고회사들이 돈을 버는 행위는
방종의 전염병을 사회에 퍼뜨린다.
사회체제와 도시환경이 혼란스러울수록 성인들은 돈을 벌기위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착취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후진국일수록 미성년자 노동착취, 인신매매, 납치 등의 사건이 많이 발생한다.
청소년의 현실은 곧 그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