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 1940년생이니 올해로 70살이다. 그럼 원로라는 위상부여가 적절한텐데, 2007년에 출간된 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를 통해 원로라는 선입감을 버리고, 여전히 실험적이며, 속 깊은 얘기들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다. 모두에 일단 이렇게 외국에 살고 있는 한 “원로”에 대한 존경을 먼저 꺼낸 것은, 한 없는 부러움 때문이다.
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 “강력한 의견들”은 소설적 주인공 원로작가가 독일출판사의 권유에 의해 그 출판사가 의뢰한 세계 석학 6명에 포함되어 각자 사회, 정치, 문화에 대한 의견을 출판하자는 것에 동의하여, 그 화두에 대한 작가의 에세이를 수록한 것이며, 제 2부 “두번째 일기”는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들에 대한 짧은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2부로 나누워, 매우 간략하게 주인공 작가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내용들이 범상치가 않다. 그야말로, 현대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합리적 사회구조의 그늘아래 감춰지고 있는 위선과 허상을 매우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인데, 때론 격하게, 때론 비아냥거리듯, 인문학 전방위에 걸쳐 주인공, 아니 존 쿳시라는 작가의 깊은 사색의 결과들을 만날 수 있다. 제 1부, 강력한 의견들을 보면, “국가의 기원, 아나키즘, 민주주의, 마키아벨리, 테러리즘, 유도장치, 알카에다, 대학, 관타나모, 국가적인 수치, 저주, 소아성애, 육체, 동물을 사육하는 것 조류독감, 경쟁, 지적설계, 제논, 개연성, 침략, 사과, 오스트레일리아로의 망명,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적인 삶, 좌익과 우익, 토니 블레어, 해널드 핀터, 음악, 여행, 영어어법, 소설에서의 권위, 내세”등 모두 31개의 토픽을 대한 작가, 아니 주인공 "세뇨르 C"의 사고전개는 원로의 입에서 나오는 “젊은 피”를 만날 수 있었다. 즉인 즉, 살기좋고 여유있는 호주라는 나라마저도, 신자유주의 무역에 휩쓸려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테러리즘법을 새로 만드는 등 점점 더 이상한 꼴로 후퇴하는 현상에 대해, 인용한 포픽 전반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인데, 그 촌철살인의 경구들이 문장 하나하나에 살아 있음에 모골을 서게 했다. “남아공의 폭력적 역사와 불안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던 쿳시가 호주로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는 이 정당한 폭력 때문에 작가의 항거는 결코 멈출 수 없는 모양이다. 거기에 비하면 2부, 두 번째 일기는 문화에 대한 사색의 결과다. “꿈, 팬들의 편지, 내 아버지, 인샬라, 대중에 감정, 정치적 혼란, 키스, 에로틱한 삶, 나이를 먹는 다는 것, 이야기를 위한 생각, 별로 아름답지 않은 프랑스, 고전, 작가의 삶, 모국어, 안키 크로흐, 사진 찍히는 것, 사유, 공중의 새, 동정, 아이들, 물과 불, 지루함, 바흐, 도스토옙스키 등 그가 추려된 화두에 대한 차분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소설을 이렇게 소설속 작가의 에세이를 따라 가는 것은 이 소설의 장점을 백분의 일이나 소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이런 작가의 생각, 지성보다 더 중요한 덕목을 가지고 있는 데, 이것은 내게 별로 익숙하지 않았던, 그러나 어떤 소설보다도 선명히 연결되는 형식파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모두 3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 화자는 앞서 길게 소개한 작가의 에세이이다. 두 번째 화자는 주인공 작가다. 그러니까, 에세이 원고를 청탁받고, 집필하기 시작한 작가가 공원을 산책 중에 우연히 만난 젊은 여자 안야. 그 여자를 만나면서 “늙은이식의 사랑”에 눈 뜨고, 그 여자를 곁에 두기 위해 원고 타이핑을 부탁하며, 그 여자와 함께 작품을 써 내려가며, 진행되는 관계에 대한 주인공 작가 자신이 화자로 된 서술이다. 세 번째 화자는 젊은 여자 안야이다. 마흔이 넘은 남자와 동거중인, 배치미가 돋보이는 여자, 지성으로 포장된 노작가의 시선을 자기 엉덩이의 매력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는 여자. 동거중인 남자가 작가의 재산을 빼돌리기는 음모를 지켜봐야 하는 여자가 바로 마지막 화자다. 그런데 이런 류의 소설이 보통, 각장이 끝나면 각기 새로운 화자를 등장 시킨다든지, 아니면 통합적인 서술방식을 택하는 것이 통례이거늘, 이 소설은 독특하게 한 페이지에 밑선을 긋고, 이 세명의 화자가 동시에 등장한다. 그러니까 독자인 나는 한 페이지 속에 담겨있는 모도 세권의 책 (한권은 에세이, 한권은 한 늙은 작가가 젊은 비서와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소설, 한권은 한 젊은 남자가 애인과 함께 늙은 작가를 곁에 두는 소설)을 읽게 됐는데, 그 연계가 얼마나 절묘하게 짜여 있는 지 당초의 걱정과는 달리 매우 쉽게, 그리고 더 깊게 소설을 이해하고, 작가가 마련해 놓은 “좋은 구경꺼리”에 푹 빠질 수 있었다.
당초의 걱정? 그렇다. 솔직히 책이 도착했을 때, 책 표지를 보고, 작가의 약력을 보고, 역자의 해설을 읽고, 더구나 변형된 제본(세편의 글을 한 페이지에 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세로가 매우 긴 제분)을 만지면서, 세계적인 작가가 형식마저 일탈했으니, 얼마나 읽기 어렵겠냐는 지례짐작 때문에 책 읽기의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런데 몇 개의 토픽을 읽어가면서, 이 정치적 에세이와 나머지 두 편의 소설의 진행이 각 페이지마다, 절묘하게 내용의 전개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국가를 정의할 때면, 남녀라는 새롭게 이뤄지는 관계를 그렸고, 테러와 음모, 왜곡된 정치와 억압에 대한 의견을 피력할 때면, 나머지 두 소설은 여유와 갈등, 그리고 같은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니, 작가가 의도한 대로, 이렇게 한번에 세편의 글을 동시에 읽음으로써, 그 이해와 감동이 보다 쉽게 전달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자신감, 그리고 그 자신감을 한층 더 뒷받침 해주는 노력, 노익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라고 과시라도 하듯 부러운 자신감으로 말이다.
지성인이라는 것, 적어도, 인본주의(지각할 수 있는 동물을 포함하여)를 지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사고, 의견, 그리고 자세에 대한 고찰을, 아주 쉬운 문체로 읽고 싶다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불합리한 사실에 대해 대응해야 하는 생각을 얻고 싶다면, 더욱이 그것이 소설이라는 장르로, 예술이라는 장르 속에서 기교가 들어가 신선하게 재생된 것으로 만나고 싶다면, 나는 우선 아주 손쉽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존 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를 추천하고 싶다. 예술성과 주제를 완벽하게 소화시킨 작품을 이렇게 쉽게 만난다는 것은 행운에 가깝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