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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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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혼자 유럽여행을 갔을 때, 첫 도시였던 네덜란드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느리고 후진 발음으로 호텔에서 체크인을 했는데 호텔 직원이 어찌나 나를 무시하던지 도착 직후부터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 이후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 마음은 흐려졌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 자신이 보잘것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언어로 인해서만 소외감을 느끼는가? 가끔 나는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말주변이 없는 나는 자신을 표현하는 말의 기술이나 표현력들이 부족해서 간혹 대화를 하는 무리 속에서 스스로 이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나의 자존감이 푹 꺼진 것을 느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프닌]을 읽으며 나는 도대체 이 소설이 왜 익살스럽다는지 공감하지 못했다. 나의 경험들을 자꾸 떠올리며 슬픈 마음이 들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프닌의 꼿꼿함, 다정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러시아인이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미숙한 영어를 구사하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는 프닌의 내면을 바라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인가.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프닌의 따뜻함만을 보았다. 프닌을 조롱하는 화자도, 7장에서의 지성을 가장한 나보코프의 위선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 개와 함께 떠나는 프닌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 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 길에 평온함이 깃들길 바랐다.

#프닌 #블라디미르나보코프 #나보코프 #프닌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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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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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학이라고 알고 책을 읽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차별이나 불평등에 대해 쓴 스케일이 큰 소설일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선한 유대인인 모리스와 그를 통해 삶을 변화시키는 프랭크의 인생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나아가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 었다.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모리스는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고 살지 않지만 율법을 마음에 담고 선한 마음으로 사는 유대인이다. 식료품점은 매일 매상을 걱정할 정도로 경영난에 허덕이지만 그는 누구보다 정직했고 자신의 윤리의식과 도덕성을 잃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식료품점에 강도가 들어 돈을 훔쳐가고 모리스를 다치게 한다. 그 강도 중 한명이었던 프랭크는 죄책감으로 식료품점을 찾아가고 점원으로 일을 하게되는데 모리스의 윤리의식과 도덕성에 감화를 받게된 프랭크는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p.185
“살아 있다면 고통받을 수밖에 없어. 어떤 사람은 좀 더 고통을 받지만, 그들이 원해서는 아니야. 하지만 내 생각엔, 유대인이 율법을 위해 고통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쓸데없이 고통받는 거야.”
“모리스 씨, 아저씨는 무엇을 위해서 고통을 받으세요?” 프랭크가 말했다.
“난 자네를 위해서 고통을 받지.” 모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프랭크가 칼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입이 욱신거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내 말은 자네가 나를 위해 고통받는다는 뜻이야.”

모리스를 괴롭게 하는 것은 주변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옆집에 사는 주류업자 카프는 자신의 건물에 식료품점을 세주어 모리스의 매출에 심각한 타격을 주게하였고, 윗층의 세입자 닉은 모리스의 가게가 아닌 그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하기도 했으며, 유대인 동업자인 찰리는 과거에 모리스를 속이고 본인의 이익만을 챙겼다. 그렇지만 모리스는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갖았다. 서로 고통을 주고받는 일들이 결국 삶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모리스의 딸인 헬렌과 프랭크의 사랑은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이게 하였다. 모리스의 고된 삶을 따라가는 프랭크를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프랭크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성숙한 삶의 자세를 갖게 되는 것. 그래서 결국 헬렌과의 행복한 결말을 예상하는 마지막이 참 좋았다.

소설의 처음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똑같다는 사실은 프랭크가 나아갈 삶이 모리스의 살아온 날들과 겹쳐보이게 하였다. 삶은 고되고 힘들겠지만 가치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도서협찬 #점원 #버나드맬러머드 #을유문화사 #고전문학 #소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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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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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아직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 그것은 엄마일 것이다. 늘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으면서도 돌아가신 이후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마저도 그리워서 자꾸만 생각이 난다. 나는 엄마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딸 많은 집의 장녀인 나는 그게 최선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고 넓은 아량을 베풀 수 있는 나였지만 엄마와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언제나 평행선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와 다르다고 생각한 엄마였어도 살아가며 선택의 순간이 오거나 시련이 닥칠때면 엄마와 닮은 판단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


무뚝뚝한 딸이었던 나는 엄마가 되자 딸에게 다른 방식으로 모녀관계를 맺길 원했다. 딸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구체적이고, 표현은 풍부하고 세심해진다. 가끔은 조심성이 없어지고 경솔해지기도 한다. 나는 엄마이지만 딸에게는 그 역할로만 머무르길 원하지 않는다. 친구이고 상담자이자 경쟁자가 되길 원한다. 친밀한 모녀관계는 다른 사람들과는 결코 형성될 수 없는 애착의 형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딸과는 이렇듯 친밀한 동반자가 되길 원하지만 나는 엄마와 냉담한 동행자로만 남은 것 같은, 모녀관계에 있어서 안타깝고도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낀다.

[사나운 애착]을 읽으며 나는 서로에게 상처와 위로를 주고받는 비비언 고닉과 엄마의 관계에 질투와 경외감을 느꼈다. 삶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에 대해 사유하며 딸이 엄마의 삶과 생각을 헤아린다는 것.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연스럽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삶을 존중하고 딸로서 엄마의 인생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쉬울 수 없다.


[사나운 애착]에서 비비언 고닉은 본인의 삶에 자리한 사랑과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의 성장과정을 따라가며 엄마와 그녀 인생 속의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엄마, 네티, 브롱크스 다세대주택에 살던 여자들의 인생은 비비언 고닉에게 삶 속에 사랑이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 중 엄마의 인생과 사랑은 그녀의 사유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 엄마는 사랑하던 아빠와 서로를 존중하는 부부의 모습으로 모범적인 가정을 꾸리던 과거를 삶에서 가장 행복한 때로 기억한다. 그래서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좌절과 괴로움을 오랫동안 겪어냈고 그것을 독선적으로 표현하여 비비언 고닉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건 아마도 본인만의 세상을 구축하지 못했던 엄마가 배우자의 상실에서 오는 공허함과 닿아있을 것이다. 

엄마와는 여러가지 면에서 달랐던, 어린 시절 이웃이었던 네티와의 관계도 그녀에게는 중요했다. 자신의 욕망을 표현한다는 것, 도덕과 관습들을 내던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알게 하였다.


엄마와 다른 여자들의 사랑과 인생에 대해 회상하고 자신의 삶과 연결하던 비비언 고닉은 자신의 남자들이었던 스테판, 데이비, 조와의 사랑을 떠올린다. 그 관계를 돌아보며 본인 삶에서의 사랑의 의미를 헤아려보게 된다. 그리고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삶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신만의 일과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것은 곧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아야 사랑도 지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비비언 고닉이 엄마와 하는 산책은 지난 세월과의 화해와 이해의 과정이자 엄마와 자신이 닮음과 다름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자 엄마의 삶도 보이고 인정하게 되는, 엄마가 돌아가신 지금의 나는 경험할수 없는 일이다. 비비언 고닉이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가까이에 살며 서로의 생활을 공유하는 것. 그 애착이 진정한 사랑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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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을유사상고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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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라이프온마스'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경찰서라는 배경으로 벌어지는 드라마 속의 사건들은 그동안 듣고 보았던 범죄사건들을 적당히 활용한 것 같았고 주인공의 특별한 사연이 뒤섞여서 에피소드들이 흘러갔다. 늦은 밤 기분전환으로 가볍게 보아가던 드라마였고 내게 그 드라마는 그런 식으로 끝맺음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의 가벼움이 반전되는 결말을 보고 한동안 충격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며칠간 행복에 대한 나의 생각을 곱씹어보았다. 주인공의 결정이 그동안 내가 생각해 온 행복에 대한 태도와 가치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행복을 향한 적극적인 의지로 보여서 비난하거나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나는 그 무렵 드라마와 함께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보았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생각을 더 깊이 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은 염세주의자가 쓰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어 어쩐지 감이 오지 않는 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편견에서 오는 오류였다. 염세주의자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만 허우적댈 것이라는 편견말이다. 염세주의자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삶이 고통이 가득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고통의 시작은 행복에 대한 욕망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직시하고 사유한다. 어둡고 추울 것이라고 생각한 이 책은 읽다 보니 밝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고통의 밑바닥에서부터의 사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자산을 세 가지로 나눈다. 인간이 본래 지닌 것(인격)과 본인이 지닌 것(재산, 소유물),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명예, 지위, 명성)이다. 이 중 우리는 인간이 원래 지닌 것에서 본질적인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궁핍과 결핍이 주는 '고통'과 안정과 과잉으로부터 비롯되는 '무료함'-는 인간이 본래 지닌 인격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행복론에 대해서 사유한 쇼펜하우어는 인생론을 통해 자신의 가진 관념들을 풀어놓는다. 사실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자세로 임했다. 노트에 정리하고 필사했다. 그러나 인생론에 들어가서는 쇼펜하우어의 생각들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목차를 보며 이 에세이의 성격을 알 것만 같았다. 생존의 공허함, 세상의 고통의 이론에 대한 글, 소음과 잡음에 대한 글이라는 에세이 제목에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을 알 것 같았다. 특히 '자살에 대하여'라는 글은 쇼펜하우어가 사유한 세계가 어떤 분위기였는지 알 것 같았다. 쇼펜하우어는 생존이 공허하고 세상은 고통에 차 있지만 그것을 이겨내려면 스스로 사고해야 하고 삶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삶의 방향을 행복한 쪽으로 이끈다고 믿어왔지만 삶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함을 느꼈다. 내가 ‘라이프온마스’를 보며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이 삶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살고 싶은 적극적인 의지로 보였던 것은 이런 이유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론에서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독서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이었다. 책을 읽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얻는 것이고 자신의 사고를 중단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독서는 정신의 탄력성을 빼앗아가므로 책을 많이 읽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사고가 다른 사람의 생각에 끌려다니게 되므로 스스로 사고하고, 읽지 않는 기술이 중요하다고 한다. 읽지 않는 기술이란 좋지 않은 책을 읽지 않는 기술을 말한다. 그리고 새로 나온 책보다는 오랜 시간 살아남은 고전을 읽으라고 말한다. 읽은 책의 양을 늘리고 싶어서 구미에 당기는 책만을 골라왔던 나는 반성한다.

올해는 철학책을 읽어보겠다고 결심했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은 철학에세이로 볼 수 있지만 읽기 쉬웠다고 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진지한 삶의 자세가 책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이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책을 다 덮은 이후에도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잘 알게되었는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철학책을 읽는 것은 그 철학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 책을 읽음으로써 내가 세상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어쩌면 쇼펜하우어가 말했던, 책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스스로 사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두고두고 다시 읽겠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쇼펜하우어와 사유를 나눌수 있게 될지도.....

p.195 '나이의 차이에 대하여' 중
우리는 평생에 걸쳐 현재만을 소유할 뿐 결코 그 이상은 아니다. 같은 현재인데 차이가 나는 점은 처음에는 우리 눈앞에 긴 미래가 펼쳐져 있지만, 마지막이 되면 긴 과거가 우리의 뒤에 보인다는 사실과 우리의 성격은 변하지 않지만 기질은 여러 번 친숙한 변화를 겪어 매번 현재의 색조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p.209
넓은 의미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의 첫 40년은 본문을 제공하고, 그다음 30년은 그것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지닌다. 이 주석은 본문에 들어있는 도덕과 온갖 미묘한 맛 말고도 본문의 참된 의미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법을 가르친다.

p.255 '생존의 공허함의 이론에 대한 몇 가지 추가 기록' 중
우리의 삶은 현미경으로 봐야 할 정도로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데, 우리는 그 점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렌즈로 확대해 엄청나게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시간이란 그것의 지속에 의해 사물과 우리 자신의 극히 공허한 존재가 실재한다는 허상을 주기 위한 우리의 머릿속에 든 하나의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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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랜드 - 심원의 시간 여행
로버트 맥팔레인 지음, 조은영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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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밑 세상에 대해서는 개미굴의 구조나 두더지들이 어떻게 땅밑에 길을 내어 이동하는지 정도의 호기심 말고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그곳은 나를 포함한 생명체들의 발이 지지하는 단단한 암석과광물들의 집합이었을 뿐이었다. 또한 중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지닌 실체가 밀도와 무게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땅 위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땅밑 세상은 무엇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그렇게 때문에 결론은 ‘무(無)‘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헤아리고 있었다.

땅 아래를 탐구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 필요나 흥미에 의해 일부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나의 관심은 늘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땅 위의 세상에 대한, 수평적 시선에 국한되어 있었을 것이다. 시야를 넓힌다고 하더라도 내 시야의 각도는 고개를 들어 볼 수 있는 둔각을 이루고 있었지, 아래를 향하는 예각이었던 적은 없었다. 시선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하락, 몰락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삶과 연결해서 생각했을 때에도 땅 위에서 나고 성장하는 상승의 이미지를 밝은 것으로 여겼다면 늙어감과 죽음은 후퇴와 쇠락을 나타내고 결국 땅 밑으로 매장되는 결론은 어두운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목표로 상승하는 것만을 꿈꾸었다.



[언더랜드]는 나에게 그런 고정관념을 깨 주는, 내 좁은 생각을 넓혀주고 알지 못했던 세상의 광활함을 일깨워주는 책이었다. 책은 저자가 6년 동안 땅밑 세상을 탐험하고 조사하여 쓴 자연과학 인문서이다. 작가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깊고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땅밑 세상인 ‘언더랜드‘를 탐험한다. 작가의 생생한 탐험기를 따라가며 수평적인 세계관 속에서 제한된 시각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수직적인 세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가슴을 가장 많이 울렸던 것은 시와 분, 연이 아닌 세와 누대라는 인간의 시간을 하찮게 만드는 단위로 흘러가는 언더랜드의 시간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땅 밑 세상은 멈춰있다고, 단단하게 굳어있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던 나는 나의 무지함을 깨달았다. 사실은 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시간은 흐르고 있고 언더랜드의 기록은 그 시간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언더랜드는 소중한 것을 지키는 은신처의 역할,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생산지의 역할, 해로운 것을 처분하는 처리 역할을 해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매장하여 애도하고, 암흑물질을 연구하기 위한 장소로서 언더랜드의 어둠을 찾아간다. 땅 위 세상에 보관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굴을 파서 전략적으로 이용하기도, 대량 학살 장소로 이용하기도 한다. 또한 핵 폐기물과 같이 인간에 의해 필요를 다한 것들을 매장한다. 언더랜드는 이와 같이 많은 역할들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쌓고 쌓아왔다.

나의 마음을 가장 뜨겁게 한 것은 4장 ‘언더스토리‘였다. 언더스토리는 숲에 대해 이야기한다. www(wood wide web)에 대해 알려주고 숲은 균과 곰팡이로 연결된 커뮤니티가 존재해서 뿌리를 통해 식물들끼리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숲 전체가 하나의 식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수평적으로만 유전물질이(생식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알고 있는데 균을 통해 유전물질이 수직적으로도 전달될 수 있음을, 식물들은 서로 공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내게, 균이라는 미물들도 서로 상생하며 거대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책을 덮으며 고개를 내리고 나를 지탱하는 발 밑 세상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 하락이나 몰락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해 온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고, 상생하기 위한 지혜를 얻는 것이기도 했다. 끝없는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것처럼 단단하게 응축된 지구의 일생을 궁금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크고 거대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책 [언더랜드]를 통해 인간에 의해 지구의 많은 것이 변화하는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후대를 위해 어떤 삶의 자세를 갖아야 하는 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남기는 흔적들이 하나, 둘 언더랜드에 축적되고 있음을 기억하고 내가 어떤 것을 남겨야하고 남길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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