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로드
조너선 프랜즌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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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부목사인 러스 힐데브란트와 그의 아내 메리언, 그리고 네 자녀 클렘, 베키, 페리, 저드슨은 뉴프로스펙트의 평범해 보이는 가족이다. 그러나 실상은 각자가 위태로운 현실을 감당하고 있으며 가족의 해체까지 이를수 있을 위험까지 느껴질 정도의 긴장감을 안고 사는 가족이다. 러스는 '크로스로드'라는 교회의 청소년 단체의 지도자 자리를 릭 엠브로드에게 명예롭지 못하게 넘겨주게 되어 그에게 적개심을 공공연하게 표출하고, 교회의 신자인 코트렐 부인과의 불륜을 꿈꾸고 있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잃은 아내 메리언은 아픈 과거를 숨기고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홀로 견디고 있다. 이런 부모에 대한 실망감은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데 큰아들 클램은 아버지의 이중성에 실망하여 그 반발심에 베트남전에 참전하려고 하고, 베키는 공정하지 못한 부모에 대한 불만을 키워가며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와의 연애를 시작하고, 똑똑하지만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페리는 약물중독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책은 불륜과 사랑, 베트남전, 약물문제, 인종차별 등을 힐데브란트 가족의 현재와 그들이 살아온 과거의 서사 속에서 그려낸다. 당시의 사회문제들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과 가족 내의 분열은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심리묘사로 인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괴로운 과거를 종교로서 구원받으려 했고, 종교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안전함을 느끼며 살고 싶었던 메리언. 그녀는 과거를 지우려고만 했지 정작 상처 받았던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 자신의 의지와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현실에 고통받으며 결국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정해야 함을 깨닫는다. 책을 읽는 초반 우유부단하고 나쁜 사람이었던 목사이자 남편, 아버지인 저드.그러나 그의 과거를 돌아보니 그 역시 약한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옭아매었던 금기와 절제들은 그의 삶을 오히려 불안하고 결핍이 있는 것으로 만들었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그는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리고 네 명의 아이들. 젊음의 한 때를 방황하는 데에 소진해 버리는 클렘의 인생에 마음 아팠고(그 삶에 다시 도약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존재만으로도 반짝반짝한 베키가 뉴프로스펙트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현실에 화가 났고(그 이후의 삶에 이것이 더 큰 의미가 깃들지라도), 높은 지성과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에 상흔을 남긴 페리의 미래가 암담한 것에 한숨이 나왔고(그것들로 인한 감각과 경험이 감성적인 그의 미래에 자양분이 될 지라도),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어쩔 수도 없는 상처를 받을 저드슨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삶의 교차로에 서게 되면 선택을 하게 된다. 불안한 선택의 순간에 나는 의지할 누군가를 찾게 될 것이다. 그때 내게 떠오르는 누군가라면 그것은 아마도 가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 안에서의 나, 나의 삶 속에서의 가족. 가끔은 나의 역할로부터 벗어나 나 자신을 찾으려 노력했고, 말과 행동으로 가족들과 상처를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여러 가지 감정들과 경험들이 쌓여 다른 무엇에서보다도 더 깊은 상처를 받기도 했고, 가족을 벗어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나 자신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때는 답을 찾지 못해 방황을 하고 가족이 아닌 외부에서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결국 '가족이 있으니까’라는 것에서 결론을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깨달은 것은 결국 나는 나이고, 가족 속의 나였다. 저드와 메리언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들은 병에 걸린 아들 페리를 돌보며 가정을 지키고, 베키는 그녀의 가정을 꾸렸으며, 클렘은 베키에게로 돌아온다. 방황하고 자신의 삶을 찾으려 하던 힐데브란트 가족은 결국 서로에게로 돌아왔다. 

‘대림절’과 ‘부활절’이라는 두개의 큰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 이것은 아마도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 믿는다. 책을 읽기 전에 벽돌 두께의 부피감에 놀랐지만 책을 덮으며는 이 굴곡진 가족의 인생을 이정도의 부피로 담아낼 수 있음에 감탄했다. 조너선 프랜즈의 소설 [인생수정]을 구입했다. 이 책 역시 좋을 것 같다.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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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키즈의 반자본주의적 분투기 - 조용하게 이긴다 우아하게 바꾼다.
이혜미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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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들은 이야기들

1. 요즘의 중고등학생들은 친구들과 함께 분식집에 갔을 때 돈이 없는 사람은 먹고 있는 친구들 옆에서 멀뚱히 기다린다고 한다. 나는 먹고 있는 나의 옆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면 마음이 쓰일 것 같은데 요즘 청소년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먹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매너를 지키는 것이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2. 프리랜서로 일하는 친구에게 들었다. 함께 작업하는 분(대학생)의 지인이 삶을 포기했다고 한다. 대학생인 그 사람이 현실의 녹록하지 않음을 비관해서 일어난 일인 것 같다고 한다. 나의 친구는 만난 적은 없지만 일로 인해 연결점이 있는 사람이라 그 소식에 힘들었다고 하는데 정작 함께 작업하는 분은 지인의 죽음에도 생각보다 의연하더란다. 이런 일들이 요즘 취업준비생 또는 사회초년생들에게 예상보다 더 많이 일어나기 때문일 것 같다고 한다.

3. 독서모임에서 들었던 책 ‘피로사회’. 쉼 없이 채찍질하는 성과위주 사회에서 톱니바퀴처럼 돌고 있는 현대인들에 대한 염려와 피로사회로 진입한 이 사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나 그날들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그 청소년들이었다면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함께 나눠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각자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해서 상황이 불편해질 경우에는 차라리 먹지 않는 쪽을 택할 것이다. 만약 내가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겪는 취준생이라면 스펙과 능률 위주의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노력을 할 것이다. 도저히 그 산을 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생활의 고단함을 받아들이며 살지도 모른다. 삶을 포기할 정도로 얼마나 큰 괴로움을 느꼈을까 안타깝다가도 시련을 견디지 못한 것은 결국 나약함일 거라고 헤아려 본다. 있는 그대로, 그들이 느끼는 그대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내게 누군가는 꼰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피로사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무한 긍정과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아도 그런 사회의 이념을 당연한 듯 체득하여 살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거리감을 느꼈을 것 같았다.

일상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들으며 나는 '아, 나와는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데? 왜 그렇게 행동할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때 찾은 가장 좋은 이유는 '나와는 세대가 달라서 그래.'였다. 그들이 나와 생각이 어떻게 다르고 어떤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나 해석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세대의 다름'에 따른 차이를 곧이곧대로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려고 하는 편리함이었다. 물론 현재의 나는 치열한 일상을 꾸리는 경제주체가 아니고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의 폭은 좁고 듣는 이야기들은 단편적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한정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것들은 소소한 문제들만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가 듣고 경험한 일들로 나보다 어린 세대들을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 책 ‘자본주의 키즈의 반자본주의적 분투기’를 읽으며 세대차이에 대한 현상 분석이 아니라 내가 다른 세대를 이해하려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89년생 현직 기자가 쓴 이 책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 보이는 MZ세대의 생각과 행동, 생활 방식들에 대해 조곤조곤 풀어서 설명해준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서술되는 이야기들은 흥미롭고 문장은 기자답지 않게 재치 있다가도 기자답게 명료하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물론 세대는 살짝 비껴있을지라도) 배경과 상황에 대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새벽 5시 기상을 해서 명상을 하며 자신의 내면을 가꾸어 나가고, 주식과 부동산 등의 정보에 밝아서 저축보다는 적극적 투자로 인해 자산을 불려 나가고, 환경문제와 동물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돈을 써야 할 것과 아닌 것을 엄격하게 분리하지만 배움을 위한 소비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이념 또는 신념의 중립을 지키며, 본인의 삶에 주체성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무례한 어른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응하고 정보력과 기술력으로 보란 듯이 한방 먹일 줄도 안다. 어른들에게 ‘요즘애들은 다 그런가?’라는 말을 들으면서 쌓아왔던 억울함과 분노는 조용하고 우아하게 해소하고 갚아주기도 한다.

작가는 89년생이고 보수적일 수도 있는 언론계에 몸담으며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 지점을 살아가는 작가의 삶에 나는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사회 초년생이 아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직업인의 관점에서 삶을 관조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내 생각의 흐름을 맞추는 것이 편안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다. 80년대 초에 태어난 나는 밀레니얼 세대쯤일까? MZ세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나의 윗세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경계에 선 나는 이 책을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도 하고 내 삶의 신념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내가 어릴 때는 세대를 구분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ㅇㅇ세대로 명명되고 분석대상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들과 그 위의 세대. 그리고 나와 생각이나 생활방식이 비슷한 세대와 그 위의 세대. 세대 간의 이해는 가능하지 않다는 듯이 그저 그렇게 분류하고 분리해버리는 것이 간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꼰대'라고 불리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연배로 진입한 나는 나의 아랫 세대와 나의 윗 세대를 아우르는 축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부모님을 모시는 자식으로서 나의 현재가 옳다고 믿는 나의 신념과 사회가 말하는 위, 아래 세대를 구분 짓는 일반적인 관념들에 끼인 세대라고 느껴져서 인지도 모르겠다.

세대의 다름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 대한 관점에서 책을 읽어나갔지만 책을 덮고 나니 이 책은 세대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세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고와 생활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자는 생각을 열어주는 젊은 사람다운 에세이이기도 하다. 세대 간의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그렇지만 너무 재밌게 읽은 지금 현재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요즘 세대가 말하는 자신의 행복과 삶을 대하는 주체성에 대한 자기 성찰을 하게도 하고, 앞으로의 나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 나가야 할까 수없이 나를 안달복달 했던 내면의 번민을 해소하는 소화제 같기도 한 글이었다. 가볍게 들었던 이 책이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유쾌한 지침서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달달하거나 포근한 말이 아닌 건조한 문장 속에서도 과녁을 꿰뚫는 화살과 같은 통찰과 위로의 말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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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관 을유세계문학전집 115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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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 명예, 사랑, 자유와 같은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닌 그냥 죽자~~ 하는 러시아 문학이 좋았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읽고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느낌만 남고 내용은 대부분 까먹는 '느낌독서'를 하는 나라서 러시아문학이 잘 맞았는지도 모르겠다.(그렇다고 많이 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한다.) 최근에 고전읽기 모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아직 1권만 ㅋ-곧 2권은 읽을 것임.)읽었고, 문학동네 독파 멤버쉽을 통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이것도 아직 1권만 ㅋㅋㅋ곧 2, 3권도 읽을 것임.)을 읽었고 며칠 전 을유문화사에서 서평이벤트에 당첨되어 니콜라이 고골의 [감찰관]을 읽었다. 위의 두권은 방대한 두께 때문에 몇번이나 완독을 실패했던 책이었지만 [감찰관]은 10여년 전 읽었고 이번에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책을 재독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 하는데 생각이 많고 말이 많고 읽고나면 '죽겠다~죽겠다'하며 자신의 내면에 몰입하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힘들어지곤 한다. 톨스토이는 많이 접해보지 않았지만 시대와 관계와 상황과 같은 배경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많고 넓어서 내게 배경지식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거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인물들이 갖고 있는 이상향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에 몰입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고골의 책은 내가 읽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마도 고골이 작품을 창작한 시기가 그들보다 빨랐고 러시아의 감정문학이 발달하기 전, 리얼리즘이 유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배경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이고 인물에 대한 설명은 직설적이다. 그리고 사건은 풍자적이면서도 해학적이다. 그러나 읽고 나면 인간본성에 대해 아무런 포장 없이 해체해 버리는 듯해서 뜨끔해지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아야 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건 러시아문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꼴랑 몇 권 읽은게 전부인 나의 생각일 뿐이다. (세 작가 다 좋음)

책은 <감찰관>, <결혼>, <도박꾼> 세편의 희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편의 희곡 모두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를 속고 속이는 일종의 소동극을 그린 듯하다. 내가 관극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지라(못즐기고 있다는 말이 맞을 듯 하다. 흑흑), 그리고 산문에 익숙한 독자라 희곡을 읽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들을 이해하려면 대사를 실감나게 읽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대사들에 스며들기엔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도 잠시다.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우스꽝스럽지만 정곡을 찌르고 극적 효과를 위한 과장들은 오히려 상황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며 작품의 세계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감찰관>의 첫 장을 열면 '제 낯짝 삐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 - 속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글귀라고도 할 수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등장인물들은 모두들 부패하고 어리석고 탐욕스럽다. 시골 마을의 시장과 관료들, 지주들과 같은 '가진자들'은 '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대도시의 호화로운 삶을 갈망한다. 이렇게 부조리하여도 그들이 사는 세상은 나름대로 평탄하게 잘 굴러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도시에 감찰관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흘레스타코프'라는 한량을 감찰관으로 오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이들을 비극으로 치닫게 하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불안감과 그들 사이에 생긴 균열이다.

본인에게 주어진 삶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 더 안락한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비열해지는 태도, 다른 사람들에게 군림하고자 하는 오만함,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태도들은 비난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에서 떨쳐지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문학작품을 통해서 꾸준하게 이야기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찰관>도 발표된 시기에 부조리에 대한 거침없는 까발림과 현실 비판을 담은 작품이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의 환영과 보수계층의 비난을 동시에 받게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무언의 장면 씬. 모든 등장인물들이 굳어 버린 듯 멈춰버린 장면은 그들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 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 극의 끝이란 마치 없는 것처럼.

<결혼 -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2막극>
결혼이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부제가 이 희곡의 성격을 짐작케 해준다고 생각했다. 중매쟁이가 각각의 조건을 내건 배우자들을 소개해주고, 신부감과 신랑감들은 그 조건들을 저울질하고 그 것들에 집착하는 것. 결혼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계속 회피하는 주인공 보드콜료신에게 무언가 불편한 마음이 느껴지고, 등장인물들에게 애잔한 마음도 느껴졌다.
중매쟁이로 나선 코치카료프는 정작 결혼생활에 대해 혐오하고 있고 극의 마지막, 포드콜료신이 결혼 직전 도망가는 것은 이 결혼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인가, 혹은 현실의 결혼 절차나 결혼생활에 대해 비판하려고 하는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포드콜료신의 독백. 역시 결혼은 안하는 게 잘하는 건가.
결혼 직전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망간 포드콜료신을 보고 느껴지는 바는 조금 다르지만 앨리스 먼로 여사의 단편 <아문센>이 생각났다.

<도박꾼 -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영화 [타짜]가 생각났다. 서로를 속고 속이는 도박꾼들의 말과 행동들, 큰 그림을 위한 기초작업들. 읽으며 화가 나다가 마지막에 한숨이 나왔다. <감찰관>과 <결혼>보다 더 진지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는데 이중사기를 당하는 이하레프를 이해하기도 동정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인 것 같다. 등장인물들의 이중성과 자기기만에 대해 더 감정이입이 되어서 <감찰관>도 좋았지만 나는 <도박꾼>을 더 몰입하며 읽은 것 같다.

최근에 책이 잘 안 읽혀서 힘들었는데 정말 오랫만에 책을 펴고 금새 읽어치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극을 못하고 있지만 오랫만에 좋은 극을 본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입체감을 갖고 나의 머릿속에서 소리와 동작으로 메세지를 전달해 준 것 같다. 내가 하는 '느낌독서' 이번에도 제대로 잘~ 했다.

고골의 새 책이 나온다. 11월 10일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읽고 싶다.을유문화사에서 펴낸 고골의 초기단편집인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와 후기작품 [죽은 혼]은 곧 구입해서 읽어야 겠다. 좋은 책 내주시는 을유문화사 최고.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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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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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존재하는 순간부터 수많은 관계를 맺는다. 어머니와 맺어진 첫 번째 인간관계는 감정교류를 통한 정서적인 관계의 시작이다. 그 단단한 시작 이후로 우리는 가족, 친구, 동료 등 인간관계를 비롯해 사물, 자연과도 상호작용을 하며 유기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와 같은 수많은 관계 맺음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한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 물리적 필요들을 나누기도 하고 소속감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며 다양한 관계의 가지들을 뻗어나간다. 그러나 관계를 지속할수록 서로 간의 차이와 다름을 알게 되고 이로부터 갈등은 초래된다.

이때 우리는 ‘인간성’이라는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 본성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인간성을 동물과 구별할 수 있는 다른 점에서 찾아보려 했다. 본능에 지배되지 않고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그것은 배려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사회화를 통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타인들과의 교류가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나는 인간성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과학이 발전하고 편리함과 신속함을 지향하는 책 속의 세상은 인간에게도 더 높은 능력을 요구하고 능률을 중시한다. 이 곳에서는 인간마저도 도구화되어 급기야 ‘향상된 인간’을 만들어 낸다. 향상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다. 사회적 위치에서 추락하지 않기 위해 건강을 위협받으면서도 '향상'을 선택하는 이곳은 친구마저 인공적으로 생산해서 소비되는 존재로 창조한다. 그 곳에 대한 반발심이 일어난다. 하지만 나 역시 그 사회의 일원이 된다면 모나지 않은 구성원이 되기 위해 '향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씁쓸하다. 그 모순된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를 위한 변명을 고민한다. 과연 이런 곳에서 인간다움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인간은 본인과 연결된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게 늘 ‘인간적인 면모'를 갈망한다. 인공으로 창조한 친구에게마저 역설적이게도 공감능력을 요구한다. 이해받고 보호받으려는 욕구에서 AF(ArtificialFrind)가 탄생한 것이다.

<클라라와 태양>에서 화자는 AF인 클라라다. 클라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인간의 관찰자가 된 독자는 인간성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된다. 인간은 감정과 생각의 소통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소모품으로 변질되어 가는 듯한 인간과는 소통에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고, 인공적인 친구와의 소통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필요에 의해 맺어진 이 관계는 사실 소통이 아니다. 인간에게만 유용하고 합리적인 관계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AF에게서 전달받으려는 인간적인 정서에 반하여 인간이 전달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에 대한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오랜 시간 조시를 관찰했던 클라라가 ‘조시를 이어가는 것은 조시 안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성이란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배려와 사랑, 여러 가지 감정교류를 하게 될 때 나와 다른 사람의 특별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특별한 누군가, 그와의 관계에서부터 우리는 존중과 포용을 동반한 감정적,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게 되고 ‘인간성’을 실현하게 될 수 있다.

AF인 클라라에게 태양은 에너지원이다. 클라라는 조시에게도 태양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태양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밝음과 따뜻함을 준다. 태양의 포용력은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해주고 우리는 세상의 일부가 된다. 이런 자연스러운 관계 속에서 우리의 인간다움이라는 본성이 발현된다. 우리는 클라라가 조시를 구하기 위해 배려와 헌신이라는 가치를 품고 세상이 비롯되는 근본인 태양을 찾아가는 힘든 여정을 응원한다. 클라라의 그 여정은 타인과 나의 관계 속 특별함을 찾아가는 여정과 닮았다. 우리는 인공의 힘이 아닌 영원하고 선한 존재인 태양을 찾아가는, 마치 인간다움의 중핵으로 다가가서 문제를 극복하려는 결말에 희망을 갖게 된다. 인공지능 친구 클라라의 눈과 생각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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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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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밤의 정서를 생각해 본다. 어둠이 주는 안정감, 안락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잠시다. 나의 시선을 가로막는 어둠에 당황한다. 어둠은 상처 받은 나를 감추어주지만 동시에 다른 것들로부터 나를 단절시킨다. 그때부터 나는 밝음을 갈구한다. 아마도 처음의 안정감이란 빛의 세계를 피해 도달한 어둠에서 잠시 느낀 편안함일 것이다. 어둠에 정착한 나는 빛을 찾으려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안도할지도 모른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울었고 많이 생각했다. 책을 덮고 표지의 제목을 다시 읽었다. 내가 생각하는 밤의 이미지, 그 어둠으로부터 발화된 아득함과 두려움에 '밝은'이라는 그 모순적인 형용사가 사용됨으로 나의 마음을 둘러싼 무거운 공기가 굴절됨을 느낀다.

책은 100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역사와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면 읽기 전부터 어쩐지 고되고 힘든 여정일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여성으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것에 어떤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해야 했는지 알고 있고 느끼고 있다. 역사의 면면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나의 엄마의 삶을 알고 있고 할머니의 삶도 자세하지는 않아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밝은 밤]은 전쟁 중 위안부로 끌려갈 뻔했던 백정의 딸 증조모, 한국전쟁 중 중혼을 당한 할머니,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엄마,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한 주인공 지연의 역사를 담담하고 고요하게 그려낸다. 할머니의 이야기로 전달되는 증조모와 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는 지연을 통해 전달하는 현재의 상처들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살아온 시간의 틈이 있지만 출신이나, 살아온 환경으로 인해 희생들을 감내하고, 결핍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강요된 삶이었다. 그 삶 자체가 커다란 상처이고 견디기 힘든 무게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자신에게 닥친 고된 상황에 초연해질 수 있었다. 지켜야 할 것이 있었고 그녀들의 곁에는 그 슬픔과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는 우정이 있었다. 증조할머니(삼천이)에게는 새비가 있었고, 할머니(영옥)에게는 희자와 명숙 할머니가 있었고 엄마에게는 명희 아줌마가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 지연에게는 지우가 있다. 위태롭고 힘든 가운데 그녀들이 나누는 정서적 연대의 힘은 삶에의 의지를 굳건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밝은 밤]에서 지연이 본인의 상처를 직시하고 감정을 토해내는 장면을 그려보며 비로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지연은 자신의 근원적인 불안을 마주했다. 할머니도 지연과 자신의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며 마음속에 담아온 감정들을 꺼내 보인다. 이렇게 그들은 100년의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그 중첩된 세월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를 함께 하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게 된다.

삶은 퍼즐과도 같다. 복잡할 것 같은 퍼즐의 조각들을 맞추어 가며 삶의 의미들을 하나씩 찾아간다. 거대한 역사의 굴레 안에서 개인의 역사도 대를 이어가며 흐르고, 그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알고 이해하는 것 역시 내 삶의 퍼즐을 구성하는 수많은 조각들 중 일부가 아닐까. 퍼즐의 조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 끼워 넣을 때 시련과 고난의 조각 옆에는 우정과 사랑의 조각이 맞물려 있을 것이다. 내 옆의 누군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 늘 그것이 복잡할 것 같던 삶을 정돈하는 중요한 조각이었다. 이렇게 퍼즐의 조각들을 맞추어가며 나의 근원을 알고, 온전히 나를 받아들이고, 내 삶의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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