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 마지막 부분에서 슈레버라는 사람이 1903년에 출판한 《어느 신경병 환자의 회상록》이라는 작품을 간략하게 소개했었는데 그것과 관련된 내용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사람인지라 아직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상 슈레버라는 인물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와 더불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분야의 대가로 유명한 프로이트가 위에 언급한 슈레버에 대해 분석한 내용들도 몇가지 나오는데, 프로이트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분석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이 챕터 막판에 자크 라캉,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같은 철학자들도 잠깐 등장하는데 이쪽 분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철학자들에 관하여 책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봐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다음으로 스파이와 관련된 얘기들이 등장한다.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는데, ‘게오르크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냉전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스파이 중 하나인 귄터 기욤이라는 사람에 관한 간단한 소개로 시작하는데, 그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파견한 스파이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아예 처음 알게 된 인물이라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봤더니 관련된 내용들이 꽤나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오르크‘라는 것은 암호명이었는데, 서독 정보당국의 대처로 귄터 기욤은 스파이인 것이 들통나게 되어 장기간의 징역살이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기욤과 그의 부인 사이에는 피에르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아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자신의 혼란스러웠던 경험을 회고록 형식의 책으로 썼다고 한다. 이 책에서 피에르는 자신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1인칭 대신 3인칭으로 화자를 설정하여 책을 쓴 뒤 편안함을 느꼈다고 하면서 얘기가 마무리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p.239에 밑줄 친 것처럼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자신의 경험을 3인칭으로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느꼈던 위협이나 고통을 그 3인칭의 어떤 세계 속에 봉쇄시키는 심리적인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찌보면 글이 가져다줄 수 있는 힘같은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떤 사람의 흔들리는 감정을 안정시켜 준다고나 할까.


다음에 이어지는 글은 ‘균형 맞추기‘라는 제목의 글이다. 맨 처음에 조지 오웰의 소설《1984》에 나오는 한 장면에 대한 설명과 함께 배신이라는 키워드를 도출한다. 저자는 배신 장면에서 돌변, 위장, 놀라움이라는 세 요소가 한 세트로 등장한다고 말하는데 이와 관련된 저자의 생각들이 쭉 이어진다.

글을 읽으면서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문장 중 하나는 p.243에 밑줄 친 문장이다.

[바깥에 드러난 행위의 일관성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은 내면이 아닌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행동같은 것이 될테지만, 내가 나 스스로를 볼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행동이 아닌 내면에 숨겨져있는 나만이 아는 자아상에 따라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별도로 책에 나온 말은 아니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요즘 많이 쓰는 말 중에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이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을 부르기 쉽게 줄인 일종의 줄임말인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자기 연인이 아닌 다른 이성과의 외도 혹은 바람)은 동일해도 자신이 그 행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는 게 이 말의 핵심 포인트이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자신이 갖고 있는 자아상이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 하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저자는 본인만의 자아상에 매달리는 것이 타인의 신뢰를 지속적으로 침해하게 되는 경우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이에 관해 개인적인 생각을 좀 보태자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현실이라면 자아상은 일종의 이상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현실과 이상간의 괴리가 점점 커질수록 현실에서의 인간관계를 하는데 있어 나 외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점점 멀어지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얘기인듯 하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자아상이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타인이 그것을 일일이 찾아봐주기를 기대해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게 저자의 얘기였고 독자인 나 또한 이에 대해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개개인이 해야 할 것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자아상과 현실의 삶을 가급적 일치시켜서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믿음도 함께 회복하면서 좀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좀 힘들어도 노력하고 열심히 살면서 이상적인 자아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우리들의 삶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
.
.
다음에 나오는 글은 ‘파란 셔츠에 빨간 스카프‘라는 제목의 글인데 책의 내용에 근거하면 이 제목에 나오는 말이 마누엘 푸익의《거미 여인의 키스》라는 작품에 나오는 문장에 있는 소재인 듯 하다. 이 작품의 대략적인 스토리들이 나오는데 일단은 p.248에 밑줄 친 내용처럼 환상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잠시나마 곱씹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또한 스파이 파트에 이 글이 나온 것은 《거미 여인의 키스》속 등장 인물 중 한 명이 스파이 역할을 해서 그런 것 같은데, 나중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마누엘 푸익의 작품을 한 번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를 봐야 좀 더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오는 ‘가족 대여 서비스‘라는 제목의 글은 제목에서부터 뭔가 속이는 냄새가 난다고 느껴졌다. 유일무이한 존재인 가족을 어떻게 대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역시나 독자인 내가 맡은 냄새가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이어지는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을 일일이 언급하긴 힘들지만, 독자인 내가 여기서 느낀 이 글의 핵심은 트릭위에 트릭이 있을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속고있는 사람을 본다고 하는 것이 내가 속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글이었다. 만약 나를 속이려는 자가 이러한 트릭을 쓰는 사람이라면 아주 고단수의 사기꾼일 가능성이 농후해보인다. 내가 속지 않고 있다고 믿게 함으로써 사기꾼의 말을 믿게 하는 그런 유형의 인간들은 정말로 조심 또 조심하는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책 페이지로는 2장(4page)밖에 안되는 분량의 글임에도 독자인 나의 뇌리에는 엄청난 임팩트로 느껴진 글이었다.


다음에는 ‘비밀과 외국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일기를 쓸 때 비밀유지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든 외국어를 사용해서 일기를 썼다는 내용도 나오고, 근래에 있었던 정부 문서에 핀란드어가 등장했던 사건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도 결국 구글 번역기의 등장으로 인해 더 이상은 보기 힘들어질 듯 하다는 게 이 글의 결론이었다. 이 글을 보면서 앞으로 이 세상에 비밀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잠시 잠깐은 가릴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고 투명한 흐름으로 흘러가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지 않나 싶다.


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어떤 배신‘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조지 블레이크 라는 인물이 핵심 인물인데, p.257에 밑줄 친 문장에서 참조 할 수 있듯이 글을 읽으면서 배신이라는 것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를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여기 밑줄치지 못한 추가적인 내용들은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서 논해보겠다.

이 병은 ‘과거‘에 속하지 않았다. 처음 슈레버 사건을 접하는 독자는 이 책이 지금은 치료된 이가 자신의 과거 정신병을 회상한 것이리라고 무심코 가정했다가 나중에 깜짝 놀라기 마련이다. - P224

슈레버는 자신의 여성화나 태양광에 의한 임신 등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혀 치료되지 않았다. - P224

프로이트가 사례 연구를 출판한 다섯 명의 환자는 다음과 같다.

도라(1905) - 히스테리

꼬마 한스(1909) - 거세 불안

쥐인간(1909) - 강박 신경증

슈레버(1911) - 편집증

늑대 인간(1918) - 유아기 신경증
(여기에 어느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짧은 보고(1920)를 포함시켜 ‘6개의 사례 연구‘라고 묶기도 한다.) - P226

프로이트가 말했듯, 정신분석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만 도움이 되는 것 - P226

슈레버는 둘 다 해당되지 않았고, 그의 망상은 정신분석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 P226

편집증 환자는 신경증 환자와 달리 거리낌 없이 하고싶은 말만 하기 때문에, 슈레버의 경우 그의《회상록》을 잘 읽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 P227

프로이트의 결론은 슈레버의 억압된 동성애가 편집증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슈레버의 숨은 애정의 대상으로 그를 치료했던 닥터 플렉지히를 지목했다. - P228

슈레버의『회상록』이 호모에로틱한 분위기로 가득 차있음을 감안하면 프로이트가 동성애를 말한 것은 딱히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회상록』에서 플렉지히가 시종일관 슈레버의 박해자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플렉지히를 슈레버의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극히 까다로운 트릭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프로이트의 천재성은 이를 단 네개의 문장으로 해냈다는 데 있다. - P229

[그(플렉지히)는 나(슈레버)를 증오한다.]

프로이트의 억압 공식에 따라, 주어와 목적어는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는,

[나는 그를 증오한다.]

가 된다. 그런데 이는 다음 문장에 대한 방어 작용이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여기에 억압 공식을 다시 적용하면, 우리는 맨 밑바닥에 감춰진 최초의 형태를 얻는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 P229

슈레버가 여성으로 변한 것은 플렉지히의 사랑을 얻기 위함이었다. - P230

이런 추론 과정이 참신하기보다 뭔가 단순하고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프로이트가 우리 사고의 일부가 되어 있는 탓도 있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이나 꿈, 소설이나 영화 등을 관조할 때 주어, 목적어, 동사를 바뭐 끼워 보는 것은 기본적인 체크리스트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 P230

학설의 타당성 논란과 무관하게 사람들이 아직도 프로이트를 읽는 이유 - P230

독자들은 프로이트가 환자의 혼란스러운 진술에서 하나의 명확한 문장을 추출한 뒤 이를 반대 방향으로 변주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이는 진기한 구경거리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머리에 모터가 달리는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 P230

「엠마순스」(1948) 마지막 문단에서 보르헤스는 감정의 진실은 언제나 "상황과 시간과 한두 개의 고유명사가 거짓인" 채로 나타난다고 썼다. 이는 프로이트가 먼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문장이었다. - P230

편집증이 자신의 동성애를 억압하는 주체가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박해받는다고 느끼는 망상이라면, 사랑의 대상이자 박해자인 닥터 플렉지히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플렉지히의 의미가 슈레버의 남자 형제일 것이며, 나아가 그 인물은 "(동생이 아닌) 형이었을 것"이라 단정한다. 프로이트는 놀랍게도 아마 그 형은 죽었으리라고 추측했다.
이런 심증을 가지고 그는 『회상록』을 샅샅이 뒤진 끝에 "형에 대한 기억"이라는 지나가는 한 구절을 찾아낸다. - P231

신은 형보다 더 중요하고 강력한 사람, 아버지를 뜻한다. 전능한 그는 슈레버가 여자가 되는 책임을 전가하게 해주는 핑계이기도 하다. 여성으로 변하라는 신의 명령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거세 위협의 반복일 것이다. 실제로 슈레버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여성적인 행동을 보일때마다 그런 위협ㅡ흔히 체벌을 동반한ㅡ을 하며 사내답게 만들려고 애썼다. - P231

프로이트는 슈레버에게 만일 자식, 특히 아들이 있었다면 충족되지 못한 동성애적 애정을 쏟는 출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여성화나 임신에 대한 망상은 자신이 여성이었다면 자식을 출산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무의식적인 기대도 반영한 것이었다. - P231

"나는 구체적인 자료를 모두 알고 있어야 분석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 P232

그(프로이트)는 결국 실험과 데이터를 중시하는 자연과학자로 훈련받았으며, 찾아온 환자의 말투나 옷차림의 구체적 디테일에 관한 그의 예리한 관심은 문학가, 더 나아가 영화 평론가를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다. - P232

1932년 자크 라캉은 편집증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편집증이 동성애의 억압에서 비롯된다는 프로이트의 공식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 - P232

1972년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프로이트의 슈레버 해석을 비판했다. 요점은 프로이트가 정신질환을 집요하게 가족 구조 안에 가두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다.) - P232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삼인칭으로 써 보기도 한다. 자신은 분리되어 안전해지고, 위협이나 고통은 삼인칭의 어떤 세계 속에 봉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책이 되면, 그 거리는 영원한 것이 된다. - P239

왜 꼭 그래야 하는 것일까?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 - P240

우리가 상상하는 배신 장면이란 대개 이런 식이다. 돌변, 위장, 놀라움이라는 세 요소가 한 세트로 나온다. - P241

태도의 돌변과 인격을 위장해 왔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같은 것은 아니다. 돌변은 순간적이고 위장은 오랫동안 갈고 닦는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당하는 쪽의 입장에선 대개 한 가지 사건으로 경험된다. - P242

배신감은 강렬할수록 놀라움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이 놀라움이 역으로 배신의 정의를 흔들기도 하는 것 같다.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 배신의 주요 내용인 것처럼 우리가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었다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할 일인데, 단지 조금 미리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용납 가능한 일처럼 보이게 되는일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게 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이유는 모른다. - P242

아마 우리는 신뢰받는다는 느낌을 좋아하고, 덕분에 놀라지 않게 되었다는 데 안도하고, 그것에 터무니없는 대가를 지불하는 데 익숙해진 듯하다. - P242

우리는 돌변한 태도가 주는 놀라움이 위장된 인격의 본질이나 배신의 실제 내용보다 더 큰 관심사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겁에 질린 사람의 태도이다. - P242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들이 이 유리한 환경ㅡ놀라게 한 것만 사과하면 되는ㅡ을 잘 이용하는 것 같지도 않다. 채링턴 씨(조지 오웰의 소설《1984》에 등장하는 사상 경찰) 처럼 직업적인 기만가가 아니라면, 자신의 일관성에 대해 일말의 회의도 갖지 않는 게 보통인 듯하기 때문이다. - P242

자신이 타인을 기만했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기대나 신뢰를저버렸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다. 기준이 다른 쪽에 있으니말이다. 바깥에 드러난 행위의 일관성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 P243

무해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저녁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다음 날 아침 ‘나답지 않게 실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고 하자. 그가 그날 말을 해도 되고 아껴도 되는 여러 선택 앞에서 어떤 방향을 택할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 P243

우리의 언행은 기존의 자신의 언행에 무엇을 추가하거나 취소하려는 의도에서 나온다. - P243

남의 말은 알아듣기 힘든 법인데, 취소라는 차원 때문에 우리의 의사소통은 한층 복잡해진다. - P243

문제는 그가 주관적으로 뭘 취소하는지 타인이 알아차릴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오늘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어제의 경박한 언행을 취소하고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다‘ 라고 생각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제는 광대같더니 오늘은 더 바보 같다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사실 그이상으로 깊이 헤아려 줄 의무가 타인에게 있을 리 없다. - P243

본인만의 자아상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진부한 말이지만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고 인격의 균형을 유지하는 건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타인의 신뢰를 계속 침해하는 방식이라면 자문해 봐야 할 것 같다. - P244

자기 이미지라는 것도 결국 타인의 시선을, 관객을 가정하고 형성된 것이 아니었나? 아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이 그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그를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 P244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1976년 스페인에서 출간되었다. - P246

이야기는 바야흐로 폴린 케일을 격분시킨("비밀접선한다는 인간이, 파란 셔츠에 빨간 스카프를 매고 나가나?") 장면에 이른다. - P247

환상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놓지 않고, 꼼짝하지 않고 있는데도 상대에게 다가갔다고 믿게 만들어 준다. - P248

가족 대여 서비스는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부재하거나 만날 수 없게 된 사람을 불러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치료적인 서비스였던 것이다. 바투만은 역으로 심리 치료라는 것 자체가 치료자가 부모 역을 맡는 일종의 가족 대여 서비스가 아닌가 자문해 본다. - P250

"사람들은 가짜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 - P250

결국 이들은 순진한 서방 방문자의 역할, 즉 주민들의 소박한 모습에 감탄하지만 마을 전체가 세트장인 건 눈치채지 못하고 나오는 유서 깊은 바보 역할을 재현한 셈이 됐다. - P251

알다시피 영화 「트루먼 쇼」에는 오직 한 사람을 속이기위해 존재하는 가짜 마을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끔찍한 것은 마을 사람 누구도 트루먼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는 점이다. 어찌 이런 잔인한 공모가 가능한가 궁금했는데, 이제알 것 같다. 이건 리얼리티 쇼가 아니며, 속고 있는 건 트루먼이 아니라 시청자이기 때문이다. - P251

「트루먼 쇼」의 트릭은 이런 것이다. 트루먼이 속고 있는 한 그걸 바라보는 우리는속지 않는 자 편에 있다고 느낀다. 트루먼이 바보같이 속아 넘어갈수록 시청자는 더욱 이 쇼를 신뢰한다. 부당하게 피해를 입는 자를 봐도 본인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오히려 체제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건 속거나 당하는 자가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거기에 속하느냐일 뿐이니까. - P251

가짜 가족이라도 붙들어야 할 처지의 사람들은 대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해해 줘야 할 대상이었을 따름이다. - P252

내려다볼 대상이 나타나면 우리 마음은 편해진다. 크게 속을 준비는 이런 식으로 마쳐진다. - P252

외국어가 정보의 방화벽 역할을 하던 시절은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핀란드어 폴더 논란의 진정한 승자는 구글 번역기인 모양이다. - P256

뒷날 그(조지 블레이크)는 인터뷰에서 후회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고 했다. "배신하려면 먼저 거기에 속해야 한다. 나는 속한 적이 없다." 이 유명한 말은 영국의 민족적, 사회적 편협성에 대한 고발로 여겨졌다. - P257

스파이로서 블레이크의 최대 업적은 동베를린 지하에 미국과 영국이 땅굴을 파서 몰래 설치한 감청 시설을 소련에 알려준 것이다. 덕분에 소련은 이 시설을 계획 단계에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완공 후 일 년 넘게 운용되도록 모른 체하고 있었다. - P258

작가 존 르카레의 말은 어떤 일반적인 정서를 요약한 것이다. "나는 필비 (케임브리지 5인조의 한 명)를 아주 싫어하지만 블레이크에게는 동정심을 느낀다. 블레이크 같은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들이 봉사하는 사회 계급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 P2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문학을 사랑한다면 - 잃어버린 감수성을 찾아 떠나는 열아홉 번의 문학 여행
이선재 지음 / 다산초당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가 인상깊게 읽었던 다양한 문학작품들을 19가지 키워드에 기반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특별히 각각의 작품들과 관련된 저자만의 경험담이 함께 담겨있어서 글이 더욱 더 진솔하게 느껴졌다. 또한 문학이 사람들에게 주는 가치와 그것이 가진 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두려운 일‘이라는 제목의 글로 시작한다. p.193에 밑줄 친 문장에서 유추해보자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지 여부가 굉장히 중요해 보인다. 말을 좀 더 보태자면 정상이 비정상화되는 것보다 비정상이 자신을 정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라는 얘기다. 나는 과연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다음에 나오는 글은 ‘전쟁 극장‘이라는 글이다. 얼핏 보면 무슨 전쟁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말은 전쟁이 진행되는 영역을 지칭하는 theater of war라는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밑줄 친 문장에 이 말의 유래가 간단히 소개되는데 ‘아 이런 관점에서 이러한 말이 나왔구나‘하고 감탄했다.

또한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는데,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과 관련하여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인 젤렌스키가 우리 국회의원들에게 화상으로 연설을 했던 일화가 나오는데 부끄럽게도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젤렌스키의 연설에 관심없이 딴 짓을 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저들의 전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앞서 말했던 진짜 현실판 ‘전쟁 극장‘이라는 게 씁쓸하긴 하지만 이런게 아닌가 싶었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유사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러한 우리 국회의원들의 태도로 인해 전 세계로부터 외면받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나타낸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남의 나라 전쟁이라고 영화보듯이 보는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한국 전쟁‘ 때 우리를 도와줬던 나라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참 부끄럽기 그지없다.

현실판 ‘전쟁 극장‘ 이야기와 더불어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p.204에 밑줄친 내용인데, 전쟁이라는게 결국에는 정치적으로 유리한 조약 체결을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는 것이라는 저자의 얘기는 나를 포함한 독자들에게 전쟁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다음으로는 요즘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챗GPT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 책이 에세이 형식의 글이다보니 챗GPT와 관련된 전문적인 내용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챗GPT와 문학을 연계하여 생각한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서 챗GPT의 발전 수준과는 별개로 자신의 경험을 문학의 언어로 재발견하려는 욕구가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할 거라는 얘기는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위의 말을 약간만 더 확장해서 챗GPT같은 기술의 발전과 무관하게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어떤 근본적인 욕구 혹은 본능은 영원할 거라는 말로 일반화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이것이 어떤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
.
.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중국의 한 농민공에 관한 얘기다. 농민공이란 중국에서 이주 노동자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하는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다 소진하기 때문에 책과는 거리가 먼 경우들이 많다고 하는데 여기 소개된 첸지라는 농민공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노동 후의 무력감을 달래고자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 중에 철학자 하이데거의 책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첸지가 어떤 저자의 책에 푹 빠졌는지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자기 삶의 자유를 찾기 위해 철학을 추구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우리가 독서를 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거창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사람들마다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독서를 하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문학작품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심도있게 하기 위해 독서할 수도 있으며, 에세이 같은 글을 통해 공감과 위로를 받기 위해 독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단지 재미를 위해서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정말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독서를 하는 이유에 합당한 어떤 것을 얻어간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도 p.212에 밑줄친 부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내가 어떤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그 책을 읽는 사람에게 ‘저런 책을 쓸데없이 왜 읽고 있지?‘라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될 것이다. 남이 뭘 읽든 참견하지 말자는 말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면 그만인 것에 딴지 걸지 말자는 얘기다. 그냥 저 사람에게는 저 책이 필요하니까 읽는가보다 하면 그만인 것이다. ‘남이 뭘 읽든 신경쓰지마‘라는 말이 참 단순하면서도 강력하게 느껴졌다.
.
.
.
다음에 나오는 것은 ‘완전한 소모‘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책에 직접적으로 나온 단어는 아니지만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서 가급적 자신이 소유하는 물건을 줄이고 간소한 삶을 추구하자는 주의가 있다.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집에 쇼핑한 각종 물건들로 가득찬 분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형태가 미니멀리즘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을 완전히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행위는 단지 그 물건과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는 저자의 얘기가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독자인 나도 얼마 전에 잘 쓰지 않고 공간만 차지하는 듯한 물건을 버린 경험이 있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 물건을 버렸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물건을 쓸만큼 써서 처음 구입했을 때 느꼈던 효용만큼의 효용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기에 과감하게 더 이상의 미련없이 버릴 수 있었다. 버리는 것도 이렇게 기분좋고 유쾌한 버림이 있는 반면 막상 사놓고 별로 쓰지도 못한채 공간만 차지하다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버리게 되는 경우들도 많이 있는듯 하다. 이런 걸 보면 애초에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독자인 나도 예전에 사놓고 아직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한 물건들이 적지 않게 방에 존재한다. 오늘의 독서를 통해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소비습관에 대해 재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을 소비하는지 아니면 없어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없지만 단지 싸고 예쁘다는 이유로 소비하는 건 없는지 반성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나를 비롯해 현대인들이 소비라는 것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관대해진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환경적인 측면도 생각해서 지금부터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소비는 조금이라도 줄이는 쪽으로 가는게 맞지 않나 싶다.
.
.
.
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는 ‘겨울 이야기‘라는 글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연극 제목이자 에리크 로메르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독자인 나의 추측으로는 연극과 영화라는 형태만 다를 뿐 문맥상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상연 혹은 상영하는 듯 보여진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보는 작품인데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꽤나 뿌리깊은 작품인듯 보인다. (독자인 내가 이쪽 분야에 무지한 편이라 너그러이 양해바란다.) 어쨌든 이 극의 내용을 놓고 저자는 인생에 대해 간단한 논의를 전개한다. 핵심은 사람이 진정한 인생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충(혹은 임시적인) 인생을 사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좀 풀어서 나만의 설명을 보태자면 사람이 자기가 꿈꾸던 삶을 현실에서 살아간다면 진정한 인생을 사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꿈꾸던 삶이 아닌) 경우에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그냥저냥 대충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글(‘겨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죽음과 부활이라는 단어도 잠깐 나온다. 이것이 지칭하는 의미를 좀 더 자세히 풀어보면 대충 사는 인생을 죽이고 진정한 인생을 살아가는 부활을 맛보자는 얘기인데, 이러한 부활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대충 사는 인생을 살아갈 때 사랑했던 것들을 과감히 놓아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에 앞서 언급한 대충 사는 인생을 살아갈 때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예시가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인생을 살면서 다가오는 각종 유혹이나 쾌락 혹은 온갖 부질없는 것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p.221에 밑줄 친 문장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무난할 것이다.
.
.
.
p.224에 밑줄 친 부분은 ‘슈레버 사건‘이라는 글에 나온 글인데 사정 상 다음 번 포스팅에서 이 글의 내용에 대한 얘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아마 한 조직이 선한지 악한지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두목보다 착한 부하가 생존이 가능한지를 살펴보는 것일지 모른다. - P190

평범한 사람이 악당이 되는 것보다, 악당이 자신을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하는 것, 그게 훨씬 두려운 일이 아닐까. - P193

개인과 마찬가지로 권력 집단 역시 한번 발을 잘못 디디면 심연을 향해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다. 간혹 계획이 좌절될 때, 문득 정신 차리고 뒤돌아설 수 있을까. 그보다는 더 끔찍한 다음 단계로 질주하는 것이 보통 아닐까. - P201

원고를 읽는데 ‘전쟁‘ 옆에 ‘극장‘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편집자는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군사학 용어로 전쟁이 진행되는 영역을 뜻하는 theater of war를 번역자가 ‘전쟁 극장‘이라고 무심코 옮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P202

전쟁 극장은 클라우제비츠 이전부터 있던 말이다. 속설에 의하면 전황이 궁금한 왕과 영주들이 지도를 가지고 보고받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 좀 더 실감할 수 있도록 전쟁을 극화해 궁정 무대에 올리게 한 것이 어원이라고 한다. - P203

클라우제비츠는 극장을 외부 현실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서양 문화에서 극장이 이 정도로 광범위하고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인가 하고 놀랄 때가 있는데, 우리는 수술실의 옛 명칭이 수술 극장(operating theater)이었음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 P203

군사(軍事)라는 것의 극장적 요소들은 흔히 지적되고 있다. 실용적이라 보기 어려운 번쩍이는 군복이라든지, 해마다 광장에서 펼쳐지는 열병식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이런 것은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 P203

실제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전략적으로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민간인 지역을 초토화시켰다는 뉴스가 나온다. 물론 이는 공격자가 자신들이 이처럼 무자비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알리려는 것이다. - P203

전쟁은 자체의 목적과 효율성을 따르는 게 아니라 정치에 복종할 뿐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정치의 연장"이라는 경구처럼, 전쟁 중에도 외교 협상은 계속된다. 전쟁 중 정치가 사라지거나 우위를 잃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정치의 입장에서 최종 목적은 유리한 강화 조약의 체결이며, 전쟁은 이를 위한 협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평화 협상과 반대이기는커녕 바로 그 테이블에 펼쳐 놓는 수단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전쟁의 민얼굴에 좀 더 접근하게 된다. - P204

그 극장의 진짜 무대는 스크린이 아니라 관람석이라는 것 - P204

챗지피티(chatGPT)-3는 샌프란시스코의 인공지능 스타트업 오픈에이아이가 공개한 프로그램이다. - P206

화이트칼라 노동을 기계가 대신해 주는 미래가 갑자기 우리에게 맛보기로 제공된 것이다. 몇 초 만에 끝나는 것을 노동이라고 부르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 P206

사람들의 의견은 대체로 ‘약간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이걸 기계가 썼다니 놀라울 따름‘으로 수렴된다. - P206

그 이름이 가리키듯 챗지피티는 대화용 프로그램인데, 중요한 건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 P207

우리는 인공지능의 아버지 앨런 튜링이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사람이 이 기계를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는가?"라는 판별 가능한 테스트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화하면서 기계가 기계인지 사람이 못 알아차리는 지경이 되면, 그 기계는 지능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207

체호프의 단편 「문학 교사」(1894)에는 세상 사람이 다아는 것밖에 말할 줄 모르는 인물이 나온다. - P207

시기가 문제일 뿐이다. - P208

편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자신의 체험을 문학화하려는 욕구인데, 이는 문학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곤경의 탈출구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 P208

자신의 경험을 문학의 언어로 재발견하려는 욕구는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할" 가능성이 있다. - P209

농민공(農民工)은 중국에서 이주 노동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 P210

"인간은 시적으로 산다."라는 하이데거의 말 - P211

하이데거가 예로부터 사회주의권에서 언제나 인기 철학자였다는 사실 - P211

자기 삶의 자유를 찾기 위해 철학을 추구하는 태도가 훨씬 훌륭 - P212

‘그가 뭘 읽든 넌 신경 쓰지 마‘ - P212

핸디캡 (지적이든 경제적이든)은 참견쟁이들을 모여들게 하는 좋은 조건 - P212

경제적인 욕망도 네 처지에 맞게 가지라고 충고하는 세상에서 독서에 관한 참견쯤이야 애교일지도 모르겠다. - P212

노동과 가난. 사람들을 가차없이 책과 멀어지게 하는 이유들이 첸지의 경우에는 반대로 책을 집어들게 했다. - P213

‘못 찍은 사진도 지우지 말 것‘ - P214

물건을 줄이는 삶, 간소한 삶에 대한 담론은 늘 있었지만 대유행이 되기도 했다. 공간은 비울수록 아름답고, 옷은 몇 벌이면 충분하고, 매일 물건 하나씩 줄여야 하며, 그게 지구에도 이롭다는 것이다. - P215

이 담론이 다이어트와 똑같은 갈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나는 이 삶을 지고 가는 것이 힘들고, 출발점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으며, 자신과 주변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해야겠다는 것이다. 물건들은 체중과 같고, 물건이 없거나 버려서 생긴 불편은 배고픔이나 운동의 고통과 등가이다. - P215

간소한 삶과 다이어트의 유사성은 피상적인데서 그친다. 다이어트는 자기의 지방을 태우지만, 간소한 삶은 물건을 내버릴 뿐이다. - P215

지방은 본래 태우라고 쌓아 두는 것이므로, 다이어트는 지방의 본질을 존중하고 목적의 실현을 돕는다고 할 여지도 있다. - P215

물건을 버리는 것은 이와 다르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관계 단절이 있을 뿐 물건의 특성을 존중한다거나 적절한 사용법을 찾아보려는 관심은 들어 있지 않다. 자신이 물건뿐 아니라 다른 대상에도 이런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면, 과연 간소함으로 삶의 변화를 얻을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 P216

‘우리는 허기진 사람처럼 물건을 사서 공간을 채우므로‘ 따라서 ‘뭔가 반대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이 생겼다. 진실은, 큰 시간 단위로 보면, 우리가 열심히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 P216

우리는 공간이 좁아서, 또는 새 물건을 들이기 위해, 또는 심리적, 심미적 이유에서 많은 사물들과 작별한다. - P216

일상이 된 이 버리는 삶은 삶의 허망함의 주된 원인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허망함은 정직한 감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건과 의미 있는 연관을 만드는 데 실패했고, 물건의 가능성을 완전히 써 버리지도 않은 채 버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가 인생을 다루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 P216

물건을 끝까지 다 사용했을 때 쾌감이 일어난다고 말했던 스토아 철학자들이 있었다. 예컨대 치약이나 장판 테이프를 끝까지 다 쓰면 우리는 실제로 기쁨을 얻는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감정이라는 건 확실하다. - P216

삶의 목적은 자신을 생산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완전히 소모해야 한다고 말한 키르케고르 - P217

자신을 소모할 때 인간은 출발점에 서게 되는 거라고 - P217

인생의 실마리는 물건을 치우는 쪽보다. 사용 방법을 이해하고 끝까지 써 보려고 하는 쪽에 섰을때 더 찾기 수월해지는 건지 모른다. - P217

셰익스피어의《겨울 이야기》. 배우자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연극이다. - P219

에리크 로메르의 영화 「겨울 이야기」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언제 시작할 수 있는가? - P219

죽음만 우리의 상상 속에서 유예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인생을 사는 날도 계속 연기되고 있는데, 내가 준비가 안 되었거나 객관적인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19

"지금까지 난 대충 산 겁니다!" - P219

자신이 임시적으로 사는지 진짜로 사는지 타인이 알아차릴 수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본인들은 그걸 구분하면서 산다. - P220

어쩌면 우리가 타인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그의 진짜 삶과 임시적인 삶, 양보할 수 없는 것과 어찌되든 상관없어 하는 것을 가려서 살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 P220

내게는 중요한 일인데 이 일에 엮인 상대방은 이게 자신 인생의 본령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온도차를 내가 감수하면 되는 걸까? - P220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실무적이든 윤리적이든 책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 P220

왜 우리는 인생을 살지 않는가. 사랑했던 것을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의 죽음과 부재를 받아들이고 애도를 표하자. 그게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으로 돌아오는 첫걸음이다. 부활은 아마 그 다음에야 가능한 것일 게다. - P221

슈레버는 1903년 『어느 신경병 환자의 회상록』을 출판했다. 여기서 신경병(Nervenkrankheit)은 정신병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며 신경증(neurosis)과는 다르다. - P2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의 앞부분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세상에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지요. 그럴 때 우리는 상상 속에서 찾고 추측하고 조각을 맞춥니다.]

이 책에 수많은 문장이 나오지만 이 문장만큼 이 소설을 잘 나타낸 문장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자평에도 간단하게나마 써놓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설정해 놓은 소설의 구조가 참 신박하게 느껴졌다. 이 소설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크게 대표적인 두 인물로 린샹푸와 샤오메이를 들 수 있는데, 앞에서는 린샹푸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고, 뒤에서는 샤오메이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내가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 욘 포세 작가의 《보트하우스》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 작품을 보면 두 사람이 동일한 사건에 대해 각자 자기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원청'의 소설 구조도 이와 완전히 동일하진 않지만 두 사람이 함께 겪었던 일들에 대해 두 사람의 생각을 대비시키며 읽어볼 수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입체적인 감상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이 소설을 쭉 읽다보면 두 사람이 겪었던 일들이 시점적으로 불일치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뒷부분까지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 같다. 앞의 린샹푸의 관점에서 물음표나 빈칸으로 남겨져 있던 부분들이 뒤에 나오는 샤오메이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그 궁금증이 어느정도 해결되는 것을 보며 저자의 이야기 전개 방식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장편의 소설임에도 지루하지 않았고 긴장감을 유지하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 소설에는 일일이 세는 것이 힘들만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위에서 언급한 린샹푸와 샤오메이를 비롯해 아창, 천융량, 리메이롄, 구이민 등이 핵심 인물이고 악당으로 등장하는 장도끼를 비롯한 토비들, 핵심 인물들의 수많은 자녀들 등 정말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온다. 물론 이 작품의 가장 핵심은 린샹푸와 샤오메이 두 사람이기에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작품을 읽어나가는 걸 추천드린다.

내 경우 처음 읽을 때는 등장인물의 관계도 같은 걸 일일이 따져보지 않고 그냥 쭉쭉 읽어나갔는데, 리뷰를 쓰기위해 밑줄쳤던 문장들을 다시금 읽어보면서 인물들간의 관계도가 어느정도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너무 세세한 관계도에 연연하며 읽다보면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기에 노파심에 적어봤다. 물론 한 번에 인물들간의 관계도가 다 이해된다면 감사할 일이다.

이외에도 이 작품을 읽다보면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뼈있는 문장들도 볼 수 있다.

몇 가지 문장만 간단하게 인용해보면,

[천만금의 재산을 가진 것보다 얄팍하더라도 기술을 가진게 낫지, (중략) 재산은 아무리 많아도 탕진할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기술은 탕진될 리 없었다]

[그는 당나귀를 토닥이며 슬픈듯이 말했다. 항상 내 곁에 있는 건 너 뿐이구나]

뭐 이런 문장들이다. 리뷰 쓴다고 밑줄 쳤던 문장을 다시 읽어보다가 와닿는 문구들을 적어 봤다.

소설의 구조, 등장인물들, 뼈있는 문장 등을 주저리주저리 적어봤다. 또한 여기 자세히 적지는 못했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에서 내 나름대로 교훈적인 메시지들도 느껴볼 수 있었다.

샤오메이의 도둑질과 아창의 거짓말을 보면서 사람이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 린샹푸가 원청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말투나 여러가지 단서에 기반해 시진으로 향하는 모습에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얻더라도 결국 최종 결정은 자기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 묘령의 여인이 구퉁녠을 외국에 일꾼으로 팔아버리는 장면과 토비들의 만행을 보면서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결국 돈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 등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로부터 추출한 교훈들이 비단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예외없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을 보며 문학의 힘이 이런 교훈을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상문학과 관련있는 추리소설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따로 이쪽 분야의 책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쪽 업계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자의 얘기에 따르면 이 분야는 도서 시장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아니지만 꾸준히 명맥을 이어 오고는 있다고 한다.

또한 앞선 포스팅을 포함하여 이 ‘업계인‘이라는 챕터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출판사 직원들도 결국 매출의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저 책이 좋아서 출판사에 입사했는지는 몰라도 자기가 속한 출판사에서 출판했거나 출판 예정인 책들이 잘 팔리지 않을 경우 당장의 수익성에 있어서 타격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포스팅에서 저자가 이 쪽 업계인들이 다들 제일 먼저 살펴보게 되는 것이 판권면이며 자신들이 본업을 대하는 태도가 결코 정신적이지 않다는 고백(p.150)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익성을 배제한 채 어떤 것을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비단 여기서 언급한 출판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업계에 통용될 것이다. 업계인으로서의 진솔함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업계인에 대한 얘기 다음에는 철학자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개인적인 독서의 깊이가 얕아서 이 책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들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읽으면서 한 번씩 찾아보고 하면서 꾸역꾸역 읽어나가고 있다. 중간중간 저자가 던지는 촌철살인의 문장들은 뭔가 내 머릿속에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느낌이었다.

p.172에 밑줄친 문장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소크라테스나 보들레르라는 이름의 가치는 쓸모 있는 생각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름들이 생각의 가치를 보증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면서 독자인 나는 껍데기와 알맹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이고 핵심은 껍데기 안의 쓸모 있는 알맹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면보다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더 집착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겉모습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자신의 내면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게 살짝 아쉬울 따름이다. 요즘 시대가 알맹이라는 본질보다 껍데기라는 겉모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게 현실이기는 하나 이러한 시대일수록 알맹이에 더 집중하고 키워나가는 것이 위기의 순간이 닥쳤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
.
다음에 나오는 글은 지하철의 교통약자석과 관련된 이야기다. 저자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도덕과 법에 대한 생각을 기술해놓았다. 독자인 나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법치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모든 것을 일일이 세세하게 법으로 규정할 수는 없기에 도덕이 하는 역할이 분명히 있다는 게 핵심적인 저자의 생각이라고 느꼈다. 생각을 좀 더 확장해보자면 이러한 역할이 있기에 초중고 교육에도 도덕, 윤리 같은 과목을 아직까지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러한 과목들이 대학에 진학하는데 국영수만큼의 큰 비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겠다는 나름의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주제를 바꿔서 ‘자유‘라는 것에 대한 얘기들도 등장한다. 특별히 p.180, 181에 밑줄친 내용들에 공감이 많이 갔다. 핵심은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실제로 저말이 나온 것은 한참 전이지만 자기 색깔대로 살아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도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닌가 싶다.


뒤이어 나오는 얘기는 궁극에는 정치와 관련이 있어보였다.

˝우리 사람 되기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

이 대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생활의 발견》에 나왔다고 한다.

저자는 이 대사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는다. 그러다가 권력과 정치 쪽으로 포커스를 맞추면서 정치의 속성에 대해 얘기한다. 적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명제를 통해 왜 정치인들이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고 죽자살자 물어뜯고 뜯기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정치의 속성을 조금이나마 느꼈다고나 할까...


오늘 포스팅의 마지막에서는 가상 인터뷰에 대한 저자의 이런저런 생각들을 엿볼 수 있었다. 수능시험 같은 각종 시험에 이러한 형식의 문제가 출제되는 것을 거론하면서 과연 이런게 교육적으로 효과가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약간의 회의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새롭고 참신한 시도같아 보이지만 핵심을 깊게 파고들어가보면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다 똑같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궁극적으로 알맹이는 동일한데 굳이 복잡하게 만들어서 작성자를 굳이 피곤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추리소설은 "완전히 불가해한 사건의 완전히 합리적 해명"을 목표로 하는 장르 - P153

출판업계에는 죽어 있던 책이 몇 년 뒤 운 좋게 부활하는 이야기들이 꽤 있다. 대개 출판사나 번역자, 제목 중 하나 이상이 바뀌거나, 영화화되어 주목받는 방식이다. - P155

상업성이 없다는 것은 환상문학의 가장 큰 비밀의 하나다. 왜 상업성이 없을까? 앞에서 ‘문학사적으로 소멸한 장르‘라는 말을 썼는데, 그 실질적인 의미는 ‘무섭지 않다‘이다. 그것은 독자들의 독후감에서 쉽게 확인된다. 왜 무섭지 않을까? 100년, 200년 전 독자에게 통하던 기법이 지금 효력을 발휘할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에서 사용된 클리셰들, 예를 들어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는 지금 책을 읽지 않는 사람도 영화 등을 통해서 훤히 알고 있을 정도이다. - P157

환상문학이 고전 총서류에 포함되면 단행본으로 냈을 때보다 더 팔리는 수수께끼는 복잡한 것이 아니다. 19세기 유령 이야기가 상업적 자립성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 P157

환상문학 기획자 앞에 놓인 판매라는 과제는 이중적이다. 출간된 책의 판매를 궁리하기에 앞서서 출간 자체가 가능해야 한다. 회사가 자신의 기획을 사 줘야 하는 것이다. - P157

회의가 보수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을 뿐이다.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동료라고 해서 기획에 찬동해 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 P158

이런 까다로운 경우 정면 승부보다는 기존에 확정된 기획에 슬쩍 올라타는 방식이 언제나 훨씬 쉬웠던 것 같다. - P158

편승이 가능해 보인다고 과욕스러운 탑승 리스트를 만드는 건 어리석다. 리스트가 회의에 부쳐져 검토되는 것은 편승 전략을 원점에 돌리는 일이니까. 당신이 정말로 그 책을 내고 싶다면 회의를 최대한 건너뛸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기존 기획의 편승이든 확장이든 회사의 방침을 실현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점이다. - P158

기획자는 회사에 본인의 제안을 제출하기도하지만 회사의 방침을 이해하고 구체화하는 역할도 맡게 된다. - P159

우리는 원칙적으로 홍보에 두 가지 차원, 즉 받는 이가 예상 가능한 정보와 예상 가능하지 않은 정보가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실제로 독자의 선입견을 넘어서는 정보를 집어넣을 공간을 찾기는 쉽지 않다. 진부한 말 한두 마디를 뺄 수 있다는 건 한두 마디의 다른 이야기를 넣을 드문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때 장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있다면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P159

"한 장르에 정치성을 불어넣어 젊은 세대에게 참신한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결국 판매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업계인은 알게 된다. 스스로가 그런 의미 부여에 동의하는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 P160

사실 출판은 각 출판물들이 그보다 큰 단위의 이미지에 기여하고, 브랜드 이미지가 그보다 작은 단위의 판매에 기여하도록 하는 게 이상적이다. 단권, 총서, 브랜드의 상호기여라는 점에서 출판 홍보는 애초에 편승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 P160

사실 편승이라는 말 자체가 또 다른 기획자에 의한 간섭을 뜻하는 것 - P161

기획자는 자신이 제안할 수 있는 다수의 목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고, 기존의 기획을 편승에 적합한 것으로 변형해 볼 수 있는 약간의 상상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책을 내기 위해 필요한 절충의 범위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 P161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기획자도 있다.
한 명의 이상적인 기획자를 가정해 보자. 유능한 그는 ‘편승‘
을 우리처럼 눈에 띄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행하는 편승은 결코 편승으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고 그의 제안은 아무런 수상한 느낌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 P161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때가 ‘보이지 않는 기획자‘가 얼핏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인 것이다. - P162

"나는 오랜 투쟁 끝에 용기를 끌어내어 무언가를 실행한 후에는 언제나 훨씬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느꼈다. 너는 기는 것을 그만두고 걷기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책임질 일을 찾아서 그것을 수행하려고 노력해라." - P169

곤경이 시작되면 철학은 멈춘다는 세간의 격언이 있지만 비트겐슈타인과는 무관한 얘기였다. - P169

우리는 별로 하고싶지 않은 주제의 대화를 거절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실로 인간의 평안을 좌우하는 권리인데, - P171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 - P171

적절하지 않은 이야기를 악의 없이 꺼내는 것.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일 - P171

소크라테스나 보들레르라는 이름의 가치는 쓸모 있는 생각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름들이 생각의 가치를 보증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다. - P172

철학자들의 전기를 보면 벼락같은 한마디로 주변인들의 인생을 혼란에서 구해 주는 이야기들이 없지 않다. - P172

이름이 지식은 아니고, 착한 말이 선은 아님 - P173

어떤 종류의 배움은 선생이 학생의 존경을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학생 역시 선생의 존경을 획득해야만 성립이 가능한 듯하다. - P173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은 교통약자를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자, 어린이 등‘으로 정한뒤, 이들을 위해 교통약자석을 설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 P174

우리는 사소한 거짓말을 뱉은 뒤 비참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낼 때가 있는데, 자격 없이 교통약자석에 앉아 있는 기분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P176

교통약자석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치르는 일종의 도덕 시험이다. 거짓말과 다른 점은, 거짓말은 자신의 것만 바로 알수 있을 뿐이지만 교통약자석 위반은 마치 극장처럼 되어있는 지하철 좌석 구조 때문에 누구나 잘 관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176

만일 코로나 같은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도덕적인 역량이 필요하다면, 그게 이런 일상적인 연습 없이 갑자기 발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P176

말년의 저서《학부들의 논쟁》(1798)에서 칸트는 썼다.
"선은 자유 상태에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국가는 국민을 선하게 만들 수 없고, 단지 자유를 줌으로써 스스로 선하게 될 기회를 줄 수 있을 뿐이라는 뜻으로 읽었다. - P176

뭐든지 세밀하게 법으로 정해 놓는 이상적 사회가 있다면 개인은 도덕적 판단을 안 해도 되니 편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선 위법 아닌 것은 모조리 당당하게 합법이고, 구성원들은 서로가 도덕적 백치임을 발견하고 새삼 놀랄 뿐일 테니까. - P176

"영국인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기지만, 이는 심한 착각이다. 그들은 단지 선거일에만 자유로울 뿐이며, 다음날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 18세기 사상가 루소의 이 말은 선거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인용구일 것이다. - P178

루소의 말은 『사회 계약론』(1762)에서 ‘대의제‘라는 장에 나오는 것으로, 시민들이 주권을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한 자유롭게 사는 건 꿈같은 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 P178

"그들은 자기 생각을 그렇다 아니다로 그 자리에서 말하지 못하는 겁쟁이들을 싫어한다.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면 그들은 당신을 불쾌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둘 것이다." 불법만 아니면 말이다. - P180

‘내버려 둔다‘는 일단 두고 보다가 나중에 거두어들일 수도 있는 허용이나 관용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항구적인 무관심임이 밝혀진다. "그들은 남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라고 훈련받은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 일 말고는 관심이 없다." - P180

에머슨의 요점은, 자유에는 개인적인 용기가 필요하고 집단적인 무관심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 P180

내가 신경을 끄지 않고, 시선도 떼지 않고서 어떻게 상대방에게 (그리고 나에게) 자유를 줄 수 있을까? - P180

자녀나 부모, 직장 동료 문제로 힘들어서 상담을 받는 경우, 짐작할 수 있듯 최종 해답은 문제의 인물이 나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영향 받거나 영향 주려고 하지 말고 무관심해지라는 것이다. - P181

스팅의 노래 중에 「사랑한다면 그들을 놔줘(If You Love Somebody, Set Them Free)」가 있다. 에머슨이라면 조건절은 ‘사랑하지 않아도‘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P181

"우리 사람 되기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 - P182

귀에 들어간 것은 반드시 입으로 나온다는 홍상수 영화의 법칙 - P182

이 편리한 대사가 새삼스럽게 공론의 장으로 불러내진 적이 있다. ‘586세대의 내면 풍경을 절묘하게 보여 주는 대사‘라는 해석도 보았다. 좌절된 이상주의와 타락의 최저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추락하고 있는데, 바닥이 어딘지 모르는 세대의 두려움과 자성이 표현된 것이라고. - P183

그런 말이 승리감을 준다면, 이게 겉보기처럼 ‘우리 타락하지 말자‘는 권유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괴물‘로 추락하는 자리에, 그리고 나는 너를 꾸짖는 ‘사람‘
의 자리에 당연한 듯 배치하는 권력 효과 때문이다. - P183

이 말이 수행하는 것은 권력 투쟁이고, 카를 슈미트의 유명한 말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다."를 교과서적으로 실천한다. - P183

이론상, 정치는 죽느냐 사느냐뿐이다. - P184

"인류에게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권을 가진 동등한 시민들 속에 적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 우리가 인류를 대표하고 있는 이상, 우리의 적은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을 것이고 그들은 그에 마땅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 P184

그 대사에 왜 ‘괴물‘이 나오는가라는 의문은 이렇게 풀린다. 사람을 존중하는 관용적 민주 사회의 역설은 적을 괴물, 사람 이하의 존재로 호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상대를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주된 정치 투쟁이다. - P185

지금 과격한 강령을 내세우는 정파는 드물다. 모두가 더 큰 연대를 확보하려 노력하며, 인류의 대변자라도 된 듯한 온건한 메시지밖에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치는 인간에 속하지 않는 괴물들을 절멸시키려는 투쟁이 되어 버리는 역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정치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상대가 괴물로 추락하면 우리는 사람의 자리를 독차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 P185

가상 인터뷰는 복화술의 한 형식이다. 아무리 위인이나 천재라 해도 작성자가 아는 것 이상을 말해 주지는 못한다.
그것이 일차적인 답답함이다. 여기에 작성자가 제공하는 이차적인 답답함도 추가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뻔히 아는 답을 위인(물론 자신)이 말하게 하기 위해서 짐짓 모른 체하고질문을 던진다. 방에는 자기 말고 아무도 없는데 마치 한 명더 있는 체한다. 이런 장면의 괴로움은 작성자가 대개 프로극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더 심화되기 마련이다. - P188

‘인터뷰 형식을 차용한 인상주의적 묘사의 시도‘ - P1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