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강 작가가 쓴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 뭐라고 정확히 말은 못하겠는데 중력처럼 이끌리는 무언가가 있다.

오늘 읽기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거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흰‘ 대상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살펴보고, 여기에 더해 독자인 나만의 느낌까지 곁들여 읽어나가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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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흰 도시‘라는 소제목을 가진 챕터를 만났다. 이 도시는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자비하게 파괴했던 도시라고 나오는데, 구체적인 지명이 나와있지 않아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한 편이라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바르샤바가 히틀러의 표적이 된 이유는 나치에 저항하여 한 때 독일군을 몰아냈던 이력 때문이었다. 히틀러의 악랄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근데 이 파괴된 도시가 왜 이 ‘흰‘이라는 소설에 등장한건지 개인적으로는 조금 의아했다. 좀 더 읽다보니 저자가 과거 미군 항공기가 촬영했던 이 도시의 영상을 본 적이 있었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 봤을 때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던게 발단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근데 좀 더 가까이 내려가서 보니 당시 잔혹하게 파괴된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후에 이 도시에 일부분 남은 잔재들과 새로 복원한 것들이 약간은 부자연스럽게 이어져있는 걸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듯 보인다. 이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도시와 비슷하게 부자연스러운 운명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흰 어떤 대상에서 시작하여 사고思考의 흐름이 끊임없이 확장되는 게 참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인간의 상상력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 ‘그 끝이 있기는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 글이었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 P9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 P10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 P11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 P11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 P14

얼룩이 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 낫겠지. - P14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 P23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 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 P24

아니, 저것을 희다고 할 수 있을까? 검게 젖은 어둠을 차가운 입자마다 머금고, 이승과 저승 사이를 소리 없이 일렁이는 저 거대한 물의 움직임을? - P24

이렇게 짙게 안개가 낀 새벽, 이 도시의 유령들은 무엇을 할까.
숨죽여 기다렸던 안개 속으로 소리 없이 걸어나와 산책을 할까.
목소리까지 하얗게 표백해주는 저 물의 입자들 틈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모국어로 인사를 나눌까. 말없이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이기만 할까. - P25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 P29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 P30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 P32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 P33

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 희끗한 빛과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 어둠 속에서 나도 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 P33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 P39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 - P54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 P54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 P55

모든 것은 지나간다. - P55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 P55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 - P66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 P66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 P67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사람이다. - P74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 P74

흰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 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 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ㅡ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 P75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 P76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 P77

배가 너무 작아서 약간의 파도에도 세차게 흔들렸다. - P80

수천의 은빛 점들이 먼 바다에서부터 밀려와 배 아래를 지나갔다. 단박에 그녀는 무서운 것도 잊어버리고, 압도하는 그 반짝임들이 세차게 움직여가는 쪽을 멍하게 바라봤다.
......멸치떼가 지나갔다야. - P80

사람들은 왜 은과 금,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광물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걸까? 일설에 의하면 물의 반짝임이 옛 인간들에게 생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P82

빛나는 물은 깨끗한 물이다. 마실 수 있는ㅡ생명을 주는ㅡ물만이 투명하다. 사막을, 숲을, 더러운 늪지대를 무리지어 헤매다가 멀리서 하얗게 반짝이는 수면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느낀 건 찌르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생명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 P82

복사뼈와 무릎뼈. 쇄골과 늑골. 가슴뼈와 빗장뼈. 인간이 살과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 P84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 (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 P85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 때. - P86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있다.
방금 울었거나 곧 울게 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 P89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다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 P90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 P90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내려갈 것인지, 이 빛의 섬에서 더 버틸 것인지. - P91

회복될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밤마다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입 맞춰주던 이가 다시 한번 그녀를 얼어붙은 집밖으로 내쫓은 것 같은, 그 냉정한 속내를 한 번 더 뼈저리게 깨달은 것 같은 마음. - P92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 - P92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 P93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 P93

조금 더 이대로 있어달라고.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고. - P97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라고 떨면서 스스로에게 답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어떤 대답도 유보한 채 그녀는 걷는다. 살풍경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절반쯤 얼어 있는 그 늪가를 벗어난다. - P101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 길은 눈이나 서리 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둣빛 봄풀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 P103

문득 팔락이며 날아가는 흰나비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채고, 떨며 번민하는 혼 같은 그 날갯짓을 따라 그녀가 몇 걸음 더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막히는 낯선 향기를 뿜고 있다는 사실을, 더 무성해지기 위해 위로, 허공으로, 밝은 쪽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 P103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넋들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 하는 것이다. - P104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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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에 적었듯이 서인주의 친구인 이정희는 류인섭이라는 심리상담가를 만나서 서인주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이동선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인주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류인섭의 얘기로 인해 소설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강석원이라는 사람이 서인주와 관련된 책을 왜곡된 관점으로 썼다는 얘기를 앞선 포스팅에서 했던 적이 있다.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서인주의 친구인 이정희가 이 강석원의 책에 나온 왜곡된 내용들을 바로잡고자 자신이 직접 수집한 정보와 각종 참고자료들을 바탕으로 친구인 서인주에 관한 책을 출간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을 출간하는데 있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사람은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는 심리상담가인 류인섭이 아닐까 싶은데, 그가 이정희에게 준 정보의 양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에서도 거의 한 챕터에 걸쳐서 인주와 관련이 있는 기나긴 이야기가 나온 것을 생각해본다면 전체적인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류인섭이라는 키맨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뒤이어질 내용들이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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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지는 내용에서 추가로 그동안 나오지 않았던 서인주와 이정희에 대한 얘기들이 몇 가지 더 나온다.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상처와 아픔을 느낄 수 있을만한 내용이었다.

챕터를 바꿔서 드디어 이 소설의 마지막 챕터이자 소설 전체의 제목이기도 한 10장 ‘바람이 분다, 가라‘ 는 한동안 나오지 않았던 강석원이 갑작스레 등장해 이정희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정희가 친구인 서인주와 관련된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은 강석원이 무언가를 담판지으려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추가로 좀 더 보태자면 독자인 나는 소설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예상했던 부분이긴 한데 소설 속 이정희라는 인물이 이 책의 저자의 분신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볼 수 있었다. 10장 초반부에 강석원이 이정희의 프로필을 읊는 장면에서 나온 생년월일이 실제 저자의 생년월일과 동일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수유리 지역을 배경으로 쓴 것도 실제 저자가 거주했던 곳이기에 그와 관련된 좀 더 세세한 묘사가 가능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이번에 나온 강 선생님 책 읽어보셨지요?
예, 읽었어요.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사실, 이 원고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책과 얼마나 차별화되는가 하는 거예요.
나는 신중하게 대답한다.
.......그 책을 반박하기 위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P319

달은 기계적으로 반듯하게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지 않는다. 수없이 흔들리며 뒷면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 때문에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달의 표면은 50퍼센트가 아니라 59퍼센트다. 흔들리며 드러난 약간의 뒷모습을 따라 9퍼센트의 불완전한 지도를 그려갈 수 있다. - P320

사십 년 전의 눈 덮인 미시령을,
캄캄한 앞유리를 향해 어둠이 뱉어낸 침 같은 눈발들을 생각한다. - P321

내 짐작은 틀렸다.

인주가 류인섭을 찾아간 11월 12일은 작년이 아니라 이년전 11월 12일이었다. 인주의 마지막 개인전이 열리기 약 한 달 전, 「달의 뒷면」연작 여섯 점을 몰아치듯 그리기 직전이었다. 정선규가 민서를 돌려준 뒤 육 개월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 P321

아니, 죽기 전의 어딘가로 돌아갈 수는 없어. 되돌아가는 길 따위는 없어. 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 P324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숴야 하는 것 같아. - P324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숴야 하는 거야. - P324

누군가가 지금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말해. 지금까지 내가 그렸던 그림들..………… 살아내려고, 어떻게든 존재해내려고 필사적으로 그렸던 모든 것들이 다 가짜라고. - P324

아니, 아무것도 안 무서워.
아무것도 후회 안해.
지금부터 시작이야. - P324

날마다 가차 없이 낡은 것을 부서뜨리고 새로 세우는 이 도시에서, 거기 남아 있는 흔적은 얼마나 될까. - P325

알 수 없다.

류인섭의 피투성이 고백이 그 적막한 그림들을 불러낸 까닭을 알 수 없다.
그 그림들의 첫 제목이 미시령이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 P328

류인섭이 말한 대로일지도 모른다.
내가 찾을 수 있는 모든 퍼즐 조각을 합한다 해도,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 고스란히 남게 될지도 모른다. - P328

비명 같은 바람 소리가 밤새워 창틀 사이로 파고들던 그 집은 없다. 살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나아가야 했던 그 시간은 없다. 그림 없이, 삼촌 없이, 오후의 산책과 따뜻한 김이 오르는 감자 소반 없이도 모든 것이 그대로이던 시간은 없다. 보이는 모든 사물이 주먹질하듯 내 얼굴을 향해 달려들던 시간, 힘껏 부릅뜬 내 눈을 통과해 흩어지던 시간은 없다. - P329

.......우주공간을 적외선 촬영하면, 빅뱅의 흔적으로 남은 배경복사를 우주의 모든 곳에서 크고 작은 점들의 형상으로 볼 수 있어. 절대온도 300도의 무수한 빛점들. 사실은 차갑지만 더 차가운 우주공간의 온도에 비하면 뜨겁다고도 할 수 있지. 우주가 유한하고 굴곡진 다면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 빛점들의 형태와 무늬를 연구해 평생을 바쳐서 가설을 세우고 천체망원경에 매달리지. 그 점들의 형상이 퍼즐처럼 이어 맞춰지는 부분을 우주공간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거야. ......오직 그것만이, 거대한 전체 우주의 형상을 그려낼 결정적인 단서가 될 테니까. - P330

숨을 쉬기 어려울 때마다 삼촌의 방을 생각했다. 내가 그은 먹선들을. 얼음바위 아래 핀 붉은 꽃들을, 부드럽고 끈덕진 침묵을 생각했다. 불타는 별들을, 쓰디쓴 약냄새를, 부끄럽도록 커다랗게 들리던 두 사람의 숨소리를 생각했다. - P332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인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속력이 다른 세계 속에서 인주는 살았다. 달렸고, 높은 휘파람을 불었고, 덤블링을 했다. 사소한 일에 큰 소리로 오래 웃었고, 선선히 타인을 받아들였다. 그 시절 이후로 인주의 속력은 눈에 띄게 누그러졌지만, 사람을 대하는 그 자세만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그득 채운 뒤 흘러 넘친 빚을 누구에게든 흔쾌히 내밀었고, 결코 여분을 걱정하지 않았다. - P332

언제부터 저 두 눈에서 파르스름한 불이 타기 시작했을까. - P334

.......꼭 죽여야 한다면 내가 죽일게, 네가 죽는 건 싫으니까. - P335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하지만, 어쩌면 너도 나를 모른다고 느낄 때가 있었을까.
내가 너를 몰랐던 것보다 더. - P336

어떤 관계는 고인 물처럼 시간과 함께 썩어간다는 것을, 거기 몸을 담근 사람까지 서서히 썩어가게 한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소유와 의존, 집착과 연민, 쾌락과 무감각과 환멸, 한줌의 간절한 진실이 한무더기의 뱀들처럼 서로의 꼬리를 물고 얽히는 동안, 땅 밑에서 하나씩 뿌리가 문드러져가는 나무처럼 어깨가 굽고 목소리가 잦아들어 가리라는 것을 몰랐다. 마침내 아들과 아내를 버린 K가 나와 함께 살았던 마지막 삼 년이 가장 나빴다. - P336

.......고등학교 때 물리 선생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 기억나니?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외우라고 했잖아.
반쯤 웃으며 인주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렇게 너를 그냥 외워볼게. 대신 시간을 좀 줘. - P337

이런 이야기를 넌 이해하지 못하지.
나약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 P339

짐작할 수 있겠니.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간절함이 알 속의 죄를 깨어나게도 한다는 걸. 문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무의미로 무의미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밀봉하려는 마지막 결단을. - P340

내 몸속에 날카로운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점점 더 날카로워지다가 어느 순간 바스라질 것이다. 자신이 가장 예리하게 벼려진 순간 사라지는 칼날처럼. - P341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 P343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그게 무서워서, 꿈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 - P344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어떤 일입니까?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보호하는 거예요. - P346

눈비를 부르는 습기 찬 바람이 조용히 일고 있다. 먼 것과 가까운 것을 뒤섞는 바람.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을 뒤섞는 바람.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 온몸의 실핏줄들을 서서히 부풀리는 바람. - P347

당신의 집요함에는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서인가 누군가의 그림을 따라 그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훼손인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합니까? 그 주장을 증명하는 것은 오직 하나, 당신의 불안정한 정신뿐인데 말입니다. - P350

어지럽게 찍힌 흙발자국들을 따라가 책상 앞에 선다.
편지들을 보관하는 서랍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의 편지들이 모조리 끄집어내져 바닥에 널려 있다. 따로 맨 앞에 두었던 인주의 편지들은 사라지고 없다. 김영신이 준 봉투에서는 편지를 빼가고 은가락지만 남겨두었다. - P351

그는 류인섭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가 류인섭이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은 여기서였다.
그래서 나에게 물었던 것이다. - P352

마지막까지 만나려고 망설였던 사람입니까.
강석원이 어둠 속에서 뱉어낸 말을 나는 곱씹는다. - P352

인주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고, 책을 읽다가 여백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렇다면, 삼촌의 그림에 대한 생각을 어딘가에 밝혀두지 않았을까. - P353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김영신이 그랬듯이, 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를 만나자고 했을 때 그는 너무 쉽게, 급하게 시간을 내주지 않았던가. - P353

그는 미쳤고 동시에 미치지 않았다. 내가 미쳤고 미치지 않은 것처럼. 어떤 생각의 소용돌이가 그의 행위로 이어지는지 추측해내야 한다. 그의 분노, 그의 헌신, 그의 집중력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아야한다. 그러려면 그가 되어야 한다. - P354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 그 사람은 십삼 개월 된 민서를 업고 아파트 10층에서 뛰어내리겠다고 나를 위협했습니다. 아무리 아이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해도 결코 어미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어미로서의 자격을 잃었던 것입니다. 여섯살이 된 민서를 내가 강제로라도 데려온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아이의 건강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애타게 어미를 찾지 않았다면 다시 양육권을 포기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P356

언제나 그 사람의 방식은 그렇게 극단적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으로 인해, 더는 누구로부터도 비난받고 싶지 않습니다. - P357

창밖의 나무들은 아직 죽어 있다.
검고 두꺼운 저 껍질들 아래 수액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다시 봄이 되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죽은 것들을 뚫고 산 것이, 딱딱한 것들을 뚫고 부드러운 것이 치밀어 오르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 P358

아파트 10층의 난간을 붙잡고 소리치는 인주의 얼굴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인주의 등에 업혀 있었을 어린 민서의 얼굴이 서늘하게 눈을 가린다. - P358

아니,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여러 겹의 침착함과 강인함을, 몸속 어딘가에 차곡차곡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 P358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건가.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흔들림으로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뒷면인가. - P359

내가 잠들어 있었을 때.
진동으로 맞춰놓은 휴대폰 소리를 끝까지 듣지 못했을 때. - P360

왜 당신의 친구가 나를 찾았느냐고 나에게 묻는 겁니까.

그 사람 안에도 어머니와 같은 충동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방법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당신은 그걸 부인하고 싶어 하지요. - P362

그가 인주와 함께 있었다.

인주를 차 속에 버려두고, 혼자서 사투를 벌여 미시령을 넘어갔다.

그가 인주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그 역시 인근의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흔적을 그날 새벽 내린 폭설이 덮었다. - P365

고개를 든다. 바람의 온도와 습도를, 방향과 속력을 어림한다. 영상 3도쯤, 습도는 90퍼센트에 가깝다. 풍속은 초속 2미터쯤이다. 지금 내가 들이마셨다 내쉰 공기의 입자들은 한 시간 뒤면 8킬로미터 남쪽으로 날아가 있을 것이다.

이런 날에, 인주는 대체로 말이 없었다. - P367

꼭 이만큼의 바람 때문에, 장대가 뒤로 넘어가지 않고 앞으로 기울었어.
그날의 일을 인주의 목소리로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억울하지 않았어. 내가 바를 넘지 못해서였어. 바를 넘었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었다 해도 장대는 나를 찌를 수 없었어. - P367

기억해. 바람이 부니까 뛰지 말까, 그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럴수 없었어. 넘어가고 싶었어. 정말 넘어가고 싶었어. - P367

이런 바람이 불면 말이야.
민서를 고쳐 업으며 인주는 말했다.
이만큼의 습기를 품은 바람이, 이만큼의 세기로 불면 말이야..... 혈관 속으로 바람이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모든 것이 커다란 전체로 느껴져. 언제고 내 다리를…………… 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다는 게. 무섭도록 분명하게 느껴져. - P369

화학섬유 재질의 부드럽지 않은, 흡습성이 좋은 담요가 필요하다.
보통의 담요는 먹을 빨아들이지 않아 그림을 통째로 망쳐버린다.
벌써 석 장째 실패했다. - P370

왜, 어디로 인주의 물건들을 옮겼나.
왜 그날 내가 보지 못한 것들만 남아 있을까.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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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인 서인주의 죽음으로 인해 그간 인주의 행적을 찾아헤매던 이정희는 인섭이라는 이름을 가진 심리 상담소장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그간의 이야기의 흐름과는 약간은 결이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된다.

갑자기 좀 생뚱맞긴 한데, 상담소장이 이정희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독자인 나는 처음에 좀 의아했다. 물론 남녀사이에 이성적인 끌림이야 얼마든지 있을수 있다고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 어떻게 아무런 맥락없이 처음 본 사람한테 강렬한 이성적인 끌림이 생겨나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의구심은 뒤이어지는 등장인물들의 과거 이야기들을 통해 어느정도 해결되긴 했다. 물론 아직 다 읽은 건 아니라서 약간의 의구심은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상담소장은 과거 대학생이던 시절 진수라는 이름을 가진 고위층의 자제에게 영어 과외를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수에게 수학을 가르쳤던 여자 선생님이 있었는데, 이동선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동선이라는 이름을 보고 읽으면서 약간 소름이 돋았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꽤나 많이 나오는 관계로 독자인 나는 인물들이 새롭게 나올때마다 그들의 이름이나 다른 인물들간의 관계도, 개개인의 인적 특이사항 등을 별도의 메모지에 적어가면서 이 소설을 읽고 있는데, 이동선이라는 이름이 이미 한참 전에 그 메모지에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이동선은 서인주의 어머니라고 내가 적어놓았던 메모를 보면서, 이게 연결고리가 되어 상담소장과 이정희 간에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겠다는 예상을 해볼 수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동선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하자면, 그녀는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각종 유명한 교향곡들을 즐겨 듣거나 혹은 자신이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릴정도였다고 한다.

과외학생인 진수를 매개로 서로 알게된 인섭과 이동선은 조금씩 처음의 서먹서먹함을 깨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어느날 인섭은 아버지가 사회 고위층이라 집안 형편이 좋은 진수의 집에 있는 최고급 음악 관련 장비들을 보고 진수에게 제안을 하여 그 집에서 수학 과외선생님인 이동선과 함께 음악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제안을 한다. 때마침 진수도 수학 과외선생님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던 터라, 진수는 인섭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위에서 언급한 상황이 조성된 뒤 셋이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 인섭이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한 것인데, 단지 몇 마디 말로는 다 나타내기 힘든 음악이 주는 내면의 울림을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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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좀 더 읽다보니 처음에 좋아보였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변한다. 물론 이는 소설의 앞부분에서 화자인 인섭의 말로 인해 어느정도 예상됐던 것이기도 한데, 너무나도 갑작스럽기도 했고 작은 꽃(?)이라도 피울 줄 알았던 로맨스도 너무 빨리 끝나버려서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이 소설의 전반적인 전개상 로맨스적인 요소가 잠깐이나마 나왔다는 거 자체가 어쩌면 신기한 일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죽음과 그로 인한 고통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루어 왔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소설 속 분위기가 바뀐 이유는 얼핏보면 이동선의 동생이 몸이 좋지 않다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동생을 진료하러 온 의사에 대한 인섭의 질투심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여기서 하나 더 추가로 언급하자면 위에서 내가 이동선의 이름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인섭의 질투심을 유발한 사람이 의사라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소설의 앞부분을 읽을 때 적어놓았던 인물들의 특이사항 중에서 서인주의 아버지 직업을 의사라고 적어놓은 메모를 봤기 때문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오래전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기에 이를 통해 결국 이동선과 이 의사라는 사람이 후에 결혼을 하여 서인주를 자녀로 낳았음을 합리적인 근거로 추론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추론을 통해 엄청 먼 곳에 떨어져 있던 퍼즐을 찾아서 맞춰 끼운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내가 등장인물들에 대한 일절의 메모없이 이 부분을 읽었다면 이러한 짜릿함은 결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독자인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집착이라는 게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집착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 집착하는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망가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서도 집착은 궁극적으로 인섭이나 진수에게 어떤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훨씬 더 많이 느끼게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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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이어 읽다보니 이동선이 과거에 겪었던 위험했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 별도로 자세하게 밑줄치진 않았지만 독자인 나는 이 부분에서 ‘미시령‘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는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미시령은 이 소설의 앞부분에 나왔던 서인주의 메모에 적혀있던 것인데, 이를 통해 조금씩 베일에 쌓여있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인섭과 이동선 그리고 진수 이 세 사람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무작정 차를 몰고 미시령으로 간다. 눈발이 매섭게 몰아치는 영하 20도의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술 기운에 충동적으로 움직인 듯하다. 여기 자세히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을 읽다보면 막장 드라마(?)같은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 막장 드라마의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 될 지 지금으로선 딱히 감이 오질 않는다. 물론 큰 틀에서는 아마도 서인주와 관련된 이야기로 어쨌든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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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미시령에서 돌아오면서 차를 몰고 미친듯이 미시령으로 갔던 일은 이제 그냥 단순한 일탈 정도로 마무리 되는 줄 알았는데 상황이 갑자기 급변한다. 질투심에 휩싸였던 진수가 기어코 사고를 친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의 화자인 인섭도 질투심에 휩싸였던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적어도 그는 다른 사람을 해하지는 않았다. 근데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진수가 이동선의 남자친구라고 알려진 레지던트 의사를 차로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 의사는 즉사했고, 진수는 이성을 잃고 의사가 근무하던 병원 외벽을 다시 들이받았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화자인 인섭은 몇 일간 악몽같은 날들을 보내게 되는데, 이후에 더 황당한 것은 진수가 고위층의 자제여서 그랬는지 진수의 잘못을 화자인 인섭이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본문에 직접적인 표현이 나오진 않았지만 아마도 운전자 바꿔치기를 통해 모든 행위를 인섭에게 엎어 씌운 것으로 보인다. 인섭 입장에서는 당연히 부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저 형량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고 회고한다. 이 부분을 보면서 권력의 폐혜가 이런 거구나 라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인섭이었다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분노에 휩싸였을 것 같다. 차마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의 분노일 것이다.

완전하게 집중한 상태에서 음악을 들을 때 우리의 내면이 겪는 것들을 언어로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날 그 음악 속에서 우리가 겪은 것 역시, 결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태로울 만큼의 집중력으로 그녀가 음악을 빨아들이는 것을 나는 느꼈습니다. - P281

그러나 그보다 위태해 보인 것은 진수의 반응이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에만 가능할, 비뚤어진 조숙함 때문에 더욱 강해졌을 집중력으로, 진수는 음악과 그녀를 동시에 빨아들였습니다. 그녀의 진지함, 그녀의 나약함, 지각처럼 단단한 슬픔 아래 숨겨진 관능까지. - P281

다음은 언제지, 라고 그녀는 진수에게 물었습니다. 부활의 5악장, 격정적인 구원의 혼성합창이, 그 격정을 손상시키지 않는 뜨거운 기악 코다가 아직 공기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반짝이던 살얼음이 완전히 녹아 눈시울에 따스하게 고인 눈으로,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한 듯, 모든 것들로부터 용서받은 듯 고요하게.
다음 주 금요일. 이 시간이요.
서툴러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자제하는 어른 남자의 음성으로 진수가 대답했습니다. - P281

눈에 띄게 명랑해진 가정부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2층으로 올라가는 금요일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차츰 세 사람은 서로의 감정 속으로 들어갔고, 예민한 지진계처럼 서로의 균열을 읽었습니다. 한마디 말없이 눈짓으로 말하는 삼중주단처럼 서로의 고통의 회로를 익혀갔고, 그렇게 발견한 어떤 감정의 비밀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고, 멈출 수 없었습니다. - P282

마치 세계 전부가 나를 조롱하며 침을 뱉는 듯 크라이슬러의 앞유리에 뭉클뭉클 몸을 으깨던 물기 많은 눈송이들에 대해서. - P282

내 뺨과 그녀의 손이 하나의 영원히 따스한 덩어리로 느껴진 순간, 그것이 다시 올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서. - P282

그녀가 나에게서 멀어진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일요일 오후를 기다려 집으로 찾아간 나를, 갑자기 대문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습니다. - P283

안 돼. 지금......
독을 뱉거나 삼키듯이, 화살을 쏘거나 스스로에게 겨누듯이 그녀는 힘주어 말을 맺었습니다.
의사가 와 있어.
그 한마디가 일깨운 내 몸속의 지옥을 그녀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P283

나는 집착했습니다. 매달렸습니다. 그녀와 나를 동시에 학대했습니다. 그녀의 집 앞에서, 학교 앞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단호했습니다. 마치 군인처럼, 정보요원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여자처럼. - P283

배신감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레지던트와 그녀가 단둘이서 나누고 있으리라고 내가 순간순간 상상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원한에 가까운 갈망ㅡ그녀의 육체에 대한 정직한 갈망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종의 광기를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 P283

눈짓으로 말하던 삼중주단은 깨어졌습니다. ...(중략)... 나는 갈망과 절망을 조금도 숨길 수 없는 상태였고, 진수 역시 우울하고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 P284

금방이라도 책상을 내리칠 듯한 녀석의 깡마른 주먹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짐작하고ㅡ이해하고ㅡ있었습니다. 수년 동안 그녀가 녀석에게 상상 속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그를 버린 젊은 어머니, 버려진 유년, 따스한 것, 빛나는 것, 눈물, 욕정, 구원, 누더기를 입은 천사였다는 것을. - P284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이 내 눈과 허공에서 만난 순간, 세차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했습니다. 그녀의 눈 때문이었습니다. 군인의 눈도, 정보요원의 눈도 아닌, 다만 혼란을 느끼는 눈. 외면하지 않는 눈. - P287

그 레지던트는 나보다 나은 사람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녀가 술을 끊도록 하는 것은 내 간절한 바람이었는데, 막상 그녀가 술을 끊었다고 말하자 나는 찌르는 것 같은 패배감과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 P287

흔들고 싶었습니다.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 P287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그녀를 위해 알코올중독에 대한 책들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단 한 잔이면 충분했습니다. 단 한 모금의 방심이면 되었습니다. - P288

마침내 그녀가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취기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느슨하고 쓸쓸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더 흔들고 싶었습니다. 더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 P288

너는 결코 모든 것을 잃지 않았다.
너의 존재, 너의 고통은 헛되지 않다.
고통, 모든 사물에 깃든 이 고통.
나는 너를 극복했다.
죽음, 모든 것을 정복하는 이 죽음.
나는 너를 이겼다. - P289

이 모든 것을 너는 잃었다.
너의 존재, 너의 고통은 헛되다.
고통, 모든 사물에 깃든 이 고통.
나는 너를 이기지 못한다.
죽음, 모든 것을 정복하는 이 죽음.
나는 너에게 패배한다. - P290

이런 음악은 말이야. 사실은 가짜야.
...(중략)...
언제나 시작은 정직하지. 인간을 들여다보고, 고통을 직시해. 그런데 그 절망으로부터 이런 5악장에 이르는 과정은 말이지...... 순수하게 음악적인 거야. 삶의 힘이 아니라, 음악 자체의 힘으로 밀고 가는거야. 차라리 저 가사를, 내가 했던 것처럼 모두 거꾸로 했더라면...... 가혹함만으로 끝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면. - P290

왜 술을 마시느냐고 나한테 물었지?
...(중략)...
불안 때문이야...... 불안을 알아? 진짜 불안이 뭔지 알아? 돈. 빌어먹을 추위. 가망 없는 그 애의 병. 내가 인간이라는 거. 이 모든 걸, 빌어먹을 누구와도 나눠서 짐 질 수 없다는 거. - P291

더 흔들고 싶었습니다. 더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잔에 술을 부었습니다. - P291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데는 거기야.
...(중략)...
・・・・・・ 아니, 가장 가고 싶지 않은 데가 거기야. - P292

어머니를 이해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어. 용서했지만, 용서하고 싶지 않았어. 어머니가 죽는 바로 그날까지…………… 그날의 기억은 내 지옥이었어. - P293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그날, 버스가 회전하며 절벽을 향해 기울어가던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그곳에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처럼 기억돼. 마치 거대한 천사 같은게 날 막아서 돌려보내고 있었던 것처럼. - P293

이걸 더 마셔요.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점심 무렵이면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단칼로 끊어낸 것처럼 죽음과 삶이 갈라지던 순간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 P295

나는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탄제의 의미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육체로 신이 태어난 날. 그 통로로 단 한 번 하늘과 땅이 연결된 날, ‘하늘과 땅이 연결된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실감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 P296

막막한 경탄과 공포 사이에서 몸이 떨려왔습니다. 마치 내 몸이 어떤 경계 위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격렬하게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무너지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 P300

하늘과 땅이 한몸의 서늘한 육체가 되어 펄펄 흩날렸던 기적ㅡ재앙ㅡ은 끝났습니다. - P302

추위보다, 공포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내 상상력이었습니다. 이제야 모든 것을 ㅡ 그토록 뻔한 신파의 내막을 ㅡ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지옥이 지금의 지옥보다 나은 것이었습니다. 눈꺼풀 속에서 조용히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만취한 그녀를 임신시키는 남자의 이미지는 좀 전에 보았던 진수의 행위와, 절망적인 나의 수음 속에서 이루어졌던 숱한 상상의 세부사항들과 뒤섞여, 악마의 꼬챙이처럼 내 눈을 찌르고 꿰었습니다. - P302

내 고통은 생명을 가진 짐승처럼 밤새워 나를 파먹어갔습니다. 그녀의 숨소리와 살 냄새, 옷 스치는 소리가 회칼처럼 내 몸을 가르고 살을 발랐습니다. - P303

왜 날 가만 놔두지 않았어요, 라고 항의하듯 녀석은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눈 속에서, 사이좋게 저 여자의 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 의사 새끼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수없이 꿈꿨던 진짜 악마가 되고,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는 공범이 되고, 사이좋게 그 새끼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우리는……… - P304

남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어, 라고 문득 운전석에서 입속으로 중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된 거라고. 기억들은 모두 잊으면 되는 거라고.
그것이 얼마나 비겁한 자기 위안이었는지 깨닫는 데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D병원 현관 앞에 서 있는, 흰 가운을 입고 눈살을 찌푸린, 이 세상 모든 모범생들의 얼굴을 합해놓은 것 같은 남자를 보았을 때 나는 구역질이 났고, 목구멍이 터질 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 P304

굉음에 놀라 몸을 일으켰을 때에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습니다. 그녀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비명을 질렀고, 흰 옷 입은 남자는 이미 절명했고, 진수는 한 번 더 전속력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병원 외벽에 차체를 들이받았습니다. - P305

어떤 죄도, 혐의도 나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악몽만이 내 무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앞 자취방에서 이불 속에 웅크려 보낸 며칠 동안, 나는 그 흰옷 입은 남자를 절명시킨 사람이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앞범퍼를 병원 외벽에 들이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까마득한 벼랑에 걸쳐져 휘청거리는 버스에서, 출구를 향해 기어가는 계집아이를 밀치고 뛰어내린 사람이었습니다. - P306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성북동 집 앞에서 진수의 아버지를 보았을 뿐, 나는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범인에서 목격자로 뒤바뀐 진수의 증언 역시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포함한 어떤 증인도 출석하지 않은 텅 빈 법정에서 나는 자술서의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단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후진하려던 것이 그만 앞으로 차를 몰게 된 것이라고, 누군가를 죽일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고 끝까지 주장해 형량을 줄였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그 순간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 P306

하룻밤의 광기와 맞바꿔야 했던 수형 생활의 기억 따위는 당신에게 의미 없는 것이겠지요. 이런 고백은 더욱이 의심스러운 것이겠지요. 그 시절, 닳지 않는 샘처럼 내가 꺼내 마신 기억이 어리석게도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었다는 것은. - P307

.....설령 애정을 가지기 어려운 내담자였다 해도,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상담자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두 사람이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일일이 복기하며, 끈질기게 반복되는 자책에 사로잡혀 수개월을 보낸 뒤에야 다음 상담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어떤 의미로든 그것이 극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P309

그 겨울이 끝날 때까지 나는 앓았습니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해질 무렵이면 원인을 알 수 없는 38도 내외의 발열이 시작되곤 했습니다. 감쪽같이 덮어두었다고 믿었던 무력감과 억울함, 죄의식과 혼란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명치를 짓눌렀습니다. - P309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 때문에 오 년 가까운 시간을 감옥에서 견뎠다고. 마음으로 저지른 죄까지 모두 치러낸 셈이 되었다고. 당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나를 변호해주지 않은 것을 이해한다고. 다만 아직 내가 살아 있고, 그동안 당신 역시 살아내주어서 다행이라고. - P310

대문까지 따라나온 그녀의 동생에게 나는 이름과 집 주소, 직장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 P310

이제 짐작하겠습니까.
당신의 친구는 그 메모를 간직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잠깐 보았을 뿐인 그 이상한 손님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유일한 사람, 나를 추적해 만나려 했던 것입니다. - P311

왜냐구요.
이것은 당신이 품고 있는 의문과 직접 연결되는 대답이겠지요.
자신의 어머니가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당신의 친구는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친구의 끔찍한 표현에 따르면, 감염된 환부처럼, 죽은 짐승의 육체처럼 서서히 썩어가기를 스스로 택했던 이유를 알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 P311

왜냐구요.
바로 자신 안에 그런 충동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방법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 P312

당신은 그걸 부인하고 싶어 하지요.
이렇게 말하는 나를 견디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똑같은 눈을 가졌습니다.
그녀들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 P312

아직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첫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요한 음악이, 운석과 운석 사이의 침묵처럼 희박해지며 끝나가고 있습니다. - P312

유년 시절에 경험한 형제들의 죽음 때문에 말러는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노래‘ 연작을 썼습니다. 그것이 저주처럼 자신의 어린 딸의 죽음을 불러오리라고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겠지요. 마지막 심장 발작을 앞두고 교향곡 9번의 4악장을 쓰며, 옛 연작 중 한 곡의 선율을 빌려 그는 독백합니다. 아이들은 산책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기를 희망하지 않는다고. 성글게 잦아드는 눈발처럼 고요하고 서늘한 선율입니다. - P312

오래전 그녀가 음악을 들었던 방식으로 바꿔 들으면, 거기 숨겨진 진실은 이제 그가 산책 나가리라는 것입니다. 처음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고백입니다. 어스름 속의 후회, 잔혹하게 몸을 으깨는 진눈깨비, 핏기 잃은 질문들, 무한히 시간이 느려지는 밤 속에서 더 찢기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그래요. 그녀는 산책 나갔고,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 P313

허락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언ㅡ당신의 친구에게 똑같이 던지고 싶었던 조언을 당신에게 해도 될까요. 아니, 허락 따위는 구하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모든 죽은 사람의 관 뚜껑을 닫고, 거칠게 못질을 하고, 영원히 버리십시오. 그 얼굴을 눈동자들을 끈덕진 자책과 결의 따위를. - P314

이제 나는 어리석은 산책길로 들어서려고 합니다. 오해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그녀 때문도, 당신의 친구 때문도, 그렇다고 당신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오랫동안 지쳐왔을 뿐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지만, 어떤 위엄도 깨달음도 마침내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만나온 사람들과 주어진 시간을 서서히 파괴해왔고, 자신 역시 무사하지도 온전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교훈도 치유도 돌이킴도 없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흔들리며 끔찍하게 어두운 길을 가겠습니다. 어떤 사람과도 어떤 전생의 기억과도 마주치지 않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영혼과 천사들을 위해, 내가 그르친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을 위해, 아멘.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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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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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그날의 고통과 아픔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어본다면 그 시대를 온 몸으로 겪어온 사람들의 물리적, 정신적 상처를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그날의 잔혹함을 이 소설만큼 적나라하게 표현한 책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몰입감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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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는 부분에서는 소설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임선주라는 사람이 화자가 되어 과거의 끔찍했던 사건들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선주는 5월 당시 동료들과 함께 시민군의 시신을 수습했던 사람인데, 시신을 수습할 당시 여러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런저런 고민 끝에 시신을 태극기로 감쌌다고 한다.

당시 선주와 함께 시신을 수습했던 동료인 동호와 은숙은 국가가 군인들을 시켜서 시민군을 죽였는데,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로 시민군의 시신을 덮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 의문은 소설의 앞부분에 나왔던 것인데 독자인 나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동호와 은숙의 논리에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었다. 뭔가 아이러니한 상황이지 않은가. 시민군을 죽인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시민군의 시신에 덮는다는 행위 자체가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당시를 다시금 떠올린 선주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그저 도륙된 고깃덩어리로만 남을 뿐이다)는 생각때문에 시민군의 시신들에 태극기를 덮고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고 회고한다.

지난번 포스팅의 후반부에 나왔던 문장 중에 ‘우리는 고귀해‘ 라는 것이 있었다. 이 말은 과거 선주와 함께 일했던 김성희라는 사람이 자주 했던 말인데, 독자인 나는 위에서 언급한 태극기를 시신위에 덮어주었던 선주의 행동도 어쩌면 ‘우리는 고귀해‘ 라는 김성희의 말에 영향을 받아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고귀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를 하는 것이 ‘우리는 고귀해‘라는 생각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
.
.
이 책의 마지막 파트인 6번째 파트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인 동호의 엄마가 그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순수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군인들의 총칼에 짓밟힌 어린 학생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참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잔혹함과 동시에 허무함이 느껴져서 마음이 갑절로 먹먹해졌던 것 같다.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 P173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 P174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 P174

만일 혼들의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어두울까, 어렴풋이 밝을까. - P175

우리들을 희생자라고 부르도록 놔둬선 안돼. - P175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 P182

인자는 암것도 모르겄어야. - P183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을, 왜 끝까장 나를 안 들여보내줬으까이. - P185

그라제, 내가 그 불쌍한 남매를 원망하면 큰 죄를 받제. - P187

그 고운 처녀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빨래 바구니를 보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운동화하고 칫솔을 들고 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던 일이 무신 전생의 꿈 같아야. - P187

목숨이 쇠심줄 같어서 너를 잃고도 밥이 먹어졌제. - P187

네 피가 아직 안 말랐는디. - P188

무섭지 않았어야.
죽어도 좋다는 마음인디, 무서울 것이 어디 있겄냐. - P188

엄마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소? 엄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 P189

맞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가. - P189

벽에 걸린 살인자 사진을 끌어내렸다이. 밟아 부순게 발에 유리가 박혔다이. 눈물이 흐르는지도 피가 튀는지도 몰랐다이. - P189

난간에 기대서서 현수막을 길게 내리고 소리 질렀다이. 내아들을 살려내라아.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아. 정수리까지 피가 뜨거워지게 소리 질렀다이. 경찰들이 비상계단으로 올라올 때까지, 나를 들쳐메고서 입원실 침대에 던져놓을 때까지 그렇게 소리 질렀다이. - P190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 P190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해가 질 때까지 여기 있을 것이다. 소년의 얼굴이 또렷해질 때까지.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안 보이는 마룻장 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어른어른 비칠 때까지. - P200

그 시절, 머리를 깎고 교복을 입은 소년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순한 외꺼풀 눈은. 키가 크느라 야윈 볼과 기름한 목은. - P203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것이 처음의 원칙이었다. 십이월 초부터 다른 아무것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되도록 약속도 잡지 않고 자료를 읽었다. 그렇게 두달이 지나 일월이 끝나갈즈음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
꿈 때문이었다. - P203

입속이 타들어가던 한순간 눈을 떴다. 꿈이었어.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펴면서, 어둠속에서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꿈이었어, 꿈이었어. - P204

예식장의 샹들리에는 화려했다. 사람들은 화사하고 태연하고 낯설어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평론을 쓰는 한 선배는 나에게 왜 소설집을 보내주지 않느냐며 웃으면서 항의했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 P205

나는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지만 기다린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기다린다. - P205

한참 걷다가 오른손이 여태 가슴 왼편에 얹혀 있었던 걸 깨달았다. 심장 언저리에 금이 벌어진 것처럼. 그렇게 해야 무사하게 운반할 수 있는 무엇이 된 것처럼. - P206

1979년 가을 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 P206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 P207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 P207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 P211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 P212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 P213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 P213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P213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 P213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 P213

날을 받아 유족들이 다 같이 이장을 했는데, 관들을 열어보니 처참했던 모습 그대로인 겁니다. 유골에 비닐이 친친 둘러져 있고, 피묻은 태극기가 덮이고………… 동호는 그래도 처음에 가족이 수습했기 때문에 유골이 얌전했습니다. 우린 무명천을 한마 끊어가서, 누구에게도 맡기기 싫어 뼈 한마디 한마디를 직접 닦았어요. 어머니가 머리 부분을 맡으면 충격이 크실까봐, 내가 얼른 집어서 이빨 하나하나까지 정성껏 닦아줬습니다. 그랬어도 그 일을 이기기가 힘드셨던가봅니다. 그때 내가 우겨서 집에 계시게 했어야 했는데. - P214

어젯밤 그의 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동생이 운이 좋았다고, 총을 맞고 바로 숨이 끊어졌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상하게 열기 띤 눈으로 내 동의를 구했다. 동생과 나란히 도청에서 총을 맞았으며 동생과 나란히 묻힌 고등학생 하나는 바로 안 죽고 살아 있다가 확인사살을 당했던 모양이라고, 이장하면서 보니 이마 중앙에 구멍이 뚫리고 두개골 뒤쪽은 텅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학생의 아버지가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울었다고 말했다. - P215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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