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립백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G1 워카 넨케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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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포장지를 뜯었을 때 느껴지는 향이 강렬합니다. 이후 뜨거운 물에 내려서 마셔보니 겉표지에 써있는 레몬티 향이 느껴져서 내가 지금 커피를 마시는 건지 그냥 커피맛 나는 레몬티를 마시는 건지 잠시 헷갈릴 정도 였습니다. 커피가 좀 식은 뒤에는 얼음을 넣어 아이스로도 마셔봤는데, 이때 은은한 살구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겉봉 마지막에 써있는 캐러멜 향은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많이 느끼진 못했지만 레몬향과 살구향을 커피에서 함께 느낄 수 있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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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밑줄친 글은 이 책의 맨 앞에 인용된 시 구절인데, 뭔가 이 소설의 전반적인 느낌이 어떨지를 예상해볼 수 있게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좀처럼 오지 않는, 다소 답답한 상황이 연상된다. 또한 이 소설의 제목도《‘검은‘ 사슴》이다 보니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느정도는 어두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한강 작가님의 책을 몇 권 읽다보니 전반적으로 작가님이 쓰시는 글의 분위기가 밝은 쪽 보다는 어두운 쪽에 좀 더 가깝다는 것을 체감하곤 한다. 이는 작가님이 작품을 쓰실 때 그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통이나 상처 같은 쪽에 집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처럼 보인다.

이제 시작인데 어떤 내용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작품 속에 온전히 젖어들어보길 바라면서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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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초반부에는 크게 세 명의 인물이 나온다. 임의선, 명윤, 인영 이렇게 셋인데, 여기서 인영과 명윤은 회사 선후배 관계로 나오고 임의선이라는 인물은 약간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과거 의선은 제약회사에서도 일했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정신이 이상해진건지 알몸으로 대학로를 질주하기도 하고 광화문 지하보도를 미친듯이 뛰어다니기도 하는 등 다소 기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좀 더 읽다보면 상황과 장소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탄광촌이 있다는 황곡시라는 곳에 살고있는 ‘장‘과 ‘안‘이라는 사람이다. ‘장‘과 ‘안‘은 8살 차이로 장이 나이는 더 많은데, 장이 거주하던 곳이 화재가 나는 바람에 어떻게 하다보니 안이라는 사내의 거주지에 얹혀사는 형국이 되었다. 그래서 ‘안‘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장‘을 부하처럼 부리는 상황이다.

‘장‘의 본명은 장종욱인데, 이 사람은 과거 한 때 사진을 찍어서 책도 출간할 정도로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이 살던 집이 화재로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오랜 시간동안 찍어서 모아두었던 사진 필름들이 싹 다 전소되고 만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장종욱의 아내라는 사람은 장종욱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그를 유유히 떠나버린다.


한편 앞에서 언급했던 명윤과 인영은 취재를 위해 취재대상을 물색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황곡시 탄광촌의 장종욱과 연결이 된다. 명윤과 인영은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잡지의 한 섹션을 맡아서 취재를 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하는데 이를 위해 장종욱과 인터뷰를 하면서 황곡시 탄광촌 사람들의 삶을 취재한다. 근데 장종욱이 자신들이 생각했던 방향과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그들과 대화하자 명윤은 조금씩 불쾌감을 느끼지만 선배인 인영은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프로답게 인터뷰를 이어가고자 애쓴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을 누군지 알 것만 같다.

-김형영,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 P5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으며 소리없이 멀어져가는 허공의 푸른빛을 향하여 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 푸른빛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둠의 속으로, 태어났던 곳으로, 태어나기 전의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일까. - P10

부화되다 만 달걀은 일부러 찾아서 먹는 이도 있을 만큼 몸에 좋으며, 마찬가지 이치로 사람의 중절수술한 태아와 태반도 은밀히 거래되고 있다는 떠도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태반은 약으로 먹고 태아는 화장품의 원료로 쓰이기도 한다던가. - P16

케케묵은 이야기는 필요 없어. 구질구질한 얘기도 안 돼. 이제는 그런 게 안 먹혀. - P22

가족 아닌 사람의 주민등록등본이나 호적등본을 떼려면 본인의 위임장이 필요하며 주민등록증과 도장도 함께 가져가야 한다. - P25

가서 부딪쳐보는 거예요. - P29

기적이니, 좋은 예감이니 하는 따위, 그런 것들은 믿어본 적이 없어. - P29

큰 충격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기억력을 잃을 수 있다고 하잖아. - P42

사진이 없는 글은 별 의미가 없는 잡지라는 인영의 설명에 그는 사진을 배워보겠다고 했다. 그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최민식쯤은 알고 있다면서, 그깟 풍물 사진이야 어려울 게 있겠느냐고 지레 큰소리를 쳤다. - P47

명윤은 처음 의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떠올렸던 이미지들을 수정하였다. 풍만한 여체 대신 좀 전에 보았던 깡마른 육체를, 벌거벗은 여자에게 쏟아지는 은밀하고 끈적끈적한 시선 대신 경악과 연민을 입력했다. - P50

그러나 그보다 더욱 명윤을 괴롭혔던 호기심은 그녀의 불가해한 침묵에 관한 것이었다. 그 침묵, 무수한 말과 형상들로 가득찬 듯한 침묵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인영의 말대로 아무 기억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일까. - P50

정신 치료에는 예술활동이 좋다고들 하지? 뭔가에 집중하고 있으면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 P51

잘 알지도 못하는 의선이라는 여자에 대해 집착하게 된 것은 명윤의 상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더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서서히 줄어가는 예금 잔고에 대하여, 미래라든가 삶에 대하여, 앞으로 해야 할 것과 자신이 해온 것에 대하여는 생각할 수 없었다. 조금만 그런 생각을 진행하려 하면 명치에서부터 몸을 꼬며 틀어오르는 역겹고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어둠과 비, 습기 찬 빨래만을 생각했다. - P56

그는 자신이 처음 들어와본 이 습기 차고 무더운 방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팔에 안긴 뜨겁고 끈적끈적한 육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땀인지 모르게 섞이어 젖은 자신의 손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물줄기에 부딪히는 햇빛만을 생각했다. - P66

날 삼켜버려요. - P66

......굳이 말로 써야 한다는 게 구차하고 귀찮아요.
구차하다니?
말이라는 게 원래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P71

"며칠 전부터 시작했지만 재미있어요. 언어를 배운다는 건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힘이 있어요. 영한사전하고 한영사전을 나란히 펴놓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처럼・・・・・・ 영한사전을 아무데나 펼쳐서 단어를 찾아보고, 그 해설로 나온 단어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보는 식으로……………" - P72

명윤이 어두운 것을 싫어하는 것은 유복하게 자랐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는 자신이 안간힘을 다해 빠져나온, 혹은 빠져나오려 하고 있는 그 구덩이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 P76

길에서 우는 사람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 성품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 일도 있었다. 얼마나 평소에 눈물을 보이는 것을 꺼려했으면, 억지로 막아두었던 둑이 터지듯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울음을 터뜨릴 것인가. - P85

자신의 찌푸려진 내면에서 벗어나 갑자기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때 사람의 얼굴은 저렇게 투명해지는 모양이었다. - P94

과연 그 수많은 사진들 가운데 진정으로 내 마음에 흡족했던 것이 있었던가. 그토록 분노하고 가슴 아파할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었던가. 어떤 과거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그 의미 없는 사진들에 집착해왔던 자신을 나는 이상스러울 만큼 텅 빈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마치 의선은 나의 사진들을 불태웠듯이, 내 내부의 무엇인가를 태워 그 자리에 빈 공간을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 P95

열렬하게 지껄이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침묵이었다. 침묵하는 그의 얼굴에 빠르게 스쳐가는 여러 표정들이 불편한 심경을 말해주고 있었다. - P95

어디로 간다고 해도 똑같지 않겠어요?
뭐가 달라지겠어요?
알아요. 조금 나은 정도겠죠. 하지만 어쩌면 그 조금이라는 게 숨을 쉴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숨을 쉬는 게 힘이 드니까...... 이곳에서는 언제나, 앞사람이 가는 대로 벼랑 끝을 밟고 앞만 보고 가야 하니까요. - P96

하지만, 다른 곳에 가도 결국 마찬가지겠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교전이 벌어지고 있고, 누군가 살해되고, 굶고 병들어 죽어가고, 어린 여자애들이 몸을 팔고 있겠죠. 힘을 가진 큰 것들이 힘없는 작은 것들을 먹고 마시는 동안・・・・・・・ 그런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겠죠. 오히려 점점 심해지겠죠. - P96

내가 보기에 너는 단지 감상적일 뿐이야. 이제 그럴 나이도 지나지 않았니. 언제까지 젊음을 낭비하고 있을 생각이니. 현실을 직시할 수 없다면 거짓말이라도 해라. 똑바로 보는 척이라도 해. - P97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어." - P97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자신에게 또박또박 물었다. 그 칠 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가. - P98

그때 이후로 나는 보는 눈뿐 아니라 기록할 수 있는 눈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이백오십 분의 일 초 혹은 백이십오 분의 일 초라는 찰나를 감쪽같이 내 수중으로 훔쳐낼 수 있게 하는 사진기라는 기계에 나는 매혹되었다. 내가 훔치는 것은 피사체뿐만이 아니었다. 그 찰나의 시간과 빛이기도 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짧은 찰나가 영원이 되는 순간, 긴 침묵이 되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게 되는 순간의 매혹에 나는 빠져들었다. - P98

나는 사진이 좋아요.
삼킬 듯이 바라보고 있던 사진을 돌려주며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말이 없잖아요. 사진 속에는. - P101

언제나, 노리고 있던 ‘물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서 터져나온다. - P104

수없이 반복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습관적인 긴장을 느꼈다. 긴장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만큼 미미한. 그러나 잘 살펴보면 분명히 존재하는 마음의 떨림이었다. - P104

어떤 사진에건 작가가 피사체들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 P105

떠나가는 모습을 찍으세요. - P116

남은 모습을 찍으면 되지 않습니까. - P117

희생이나 봉사는 타인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 P117

몸 없어지면 끝이야. 내 생각엔 그래... 아무것도 없어. - P120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무치는 일인가 - P123

일이 생겼다는 것은 핑계이리라. - P125

자신의 능력보다 쉬운 일을 하며 생각 없이 살아가는 생활을 가장 경멸해온 장이었지만, 막상 지내보니 그것은 참으로 편안한 삶의 방식이었다. - P126

자신의 연고가 있는 집단의 세가 커지면 자신의 힘이 함께 커진다고 생각 - P129

그것은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자라 자수성가한 안의 외로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종종 ‘내가‘라고 해야 할 부분을 ‘우리가‘로 대치했다. ‘우리는 그렇지 않거든... 뒤끝이 없는 스타일이거든‘하는 식이었다. 그만큼 그는 네 편과 내 편을 가르기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안이 ‘내 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안에게 적당히 듣기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한다는 점이었다. 안이 이즈음 들어 장에게 표하는 거부감은 장이 고분고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데 대한 반발일 수도 있었다. - P129

명윤은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이라는 따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단지 멀리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고통이나 병이나 죽음을 알아낼 수 있는 힘조차 잃어버리고 말 만큼 무력한 것이 사랑이었다. 지금 의선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 그가 전혀 알 수 없으며, 아무런 육체적 통증도 전하여지지 않듯이. - P141

필터에 가깝게 타들어갈수록 니코틴의 함량이 높아진다 - P151

"갱내는 미끄럽소. 당신네 같은 서울내기들은 상상도 못해. 섭씨 삼십팔 도도 넘는데다 습도가 구십 프로요. 일 년 내내 그렇소. 바닥이 꼭 비누질한 것 같지. 장화 신고 장갑 끼어도 방심할 수가 없소. 가만히 있기만 해도 탄가루가 목을 팍팍 막는데, 거기서 여덟 시간 동안 막일들을 하는 거요." - P165

명윤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기회가 되어 술과 춤, 음악 소리, 부나비처럼 춤추는 젊은 애들,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 속에 던져지면 고통에 가까운 거부감을 느꼈다. 그가 견딜수 없어하는 것은 폭발하는 쾌락의 분위기였다. 자신을 방기하며 음악 속으로 뛰어드는 한순간의 몰입을 그는 할 수 없었다. 그 고막이 터질 듯한 음악에 몸을 맡길 수가 없었다. 몸을 흔들며 춤을 출 수 없었다. - P169

명윤이 학창 시절 공부에 열을 올릴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연탄공장 골목과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 P172

가차 없이 떠나야만 했다. 갖은 힘을 다하여 구덩이 바깥으로 밀어내놓은 자신의 삶의 싹이 도로 흙더미 속에 묻혀버릴 것 같은 조바심으로 그는 탈출을 꿈꾸었다. - P173

그러나 떠난들 어디로 가겠는가. 이 땅을 떠난다해도, 아니 세상의 끝까지 간다 해도 그의 몸뚱이는 그의 몸뚱이일 것이다. 그가 떠나려는 것은 마치 감옥처럼 옥죄어오는 기억들을 떨쳐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떠나려 하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이라면, 그 지긋지긋한 자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P174

명윤은 자신의 젊음을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홀려보내고 있었다. - P174

"밤이란 원래 짧은 거니까, 그저 그동안 마지막 남은 열기를 다하는 거요."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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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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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는 영화로 나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의 서사가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오는 관계로 각각의 캐릭터별로 서로 간의 관계도나 인물별 특징들을 간단하게나마 메모해가며 읽었었는데, 이 과정이 살짝 번거롭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작가님이 구석구석 배치해둔, 자칫하면 그냥 놓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소설 속 포인트들을 하나하나 잡아나가며 읽을 수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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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 이정희는 강석원과 만나기로 한 시각에 자신이 숨겨두었던 열쇠를 이용해 인주의 작업실에 들어간다. 그런데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있어야 할 인주의 그림들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이외에도 서랍에 있어야 할 인주와 관련된 물건들이 없어진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동안 자신이 보지 못했던 낯선 스케치북과 낡은 노트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이정희는 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자신이 인주의 사망 전 행적을 온전히 짐작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겠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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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강석원과 이정희가 서인주에 관해 있었던 일을 서로 얘기하면서 그간 각자가 인주에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느꼈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서로의 면전에서 토해낸다. 그리고 이후에는 상대방을 정말로 죽여버릴듯한 기세로 싸운다. 개인적으로는 두 인물이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살기殺氣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도 피 튀기는 물리적 충돌을 주고 받는 장면을 보면서 소설 속 긴장감이 고조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을 영화로 봐도 실감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강석원과 이정희의 불꽃튀는 싸움은 물리적인 충돌 장면만 놓고 보면 이정희가 패한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으나, 전체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서인주의 작품들이 불에 타서 전소되었기에 두 사람 모두 웃을 수 없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정희는 극적으로 화재가 난 장소를 탈출하는데 성공한 뒤 그당시를 회상하는데, 독자인 나는 이정희가 했던 말 중에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말이 개인적으로 가슴에 와닿았다.

이 소설 속에서 이정희에게 피할 수 없는 길은 바로 강석원이 쓴 책의 왜곡된 부분들을 바로 잡기 위한 행동이었다. 비록 그 과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이정희는 그 험난한 과정을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말로 표현하면서 힘들지만 가야만 하는 혹은 겪어내야만 하는 과정을 겪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과정이 정말 죽을만큼 힘들어서 그냥 차라리 죽는게 속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일을 만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고난을 내가 피할 수 없다면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 소설 속 이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왔던 진짜 목숨이 위태위태했던 이정희의 모습이 다시금 아른거린다.

소설의 스토리 자체도 흥미진진 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로부터 위에서 언급한 교훈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영화로 나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만 읽었는데도 뭔가 실감나는 게 느껴졌는데, 영상으로 보면 훨씬 더 실감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독자인 나도 행복했다.

결국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끝끝내 짐작해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
분노 대신 은둔을 택한 이유를.
짧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나를 건너다보던 얼굴을.
내 병실 문 앞에 완고하게 서 있던 깡마른 어깨를.
물기 없이도 착잡하게 빛나던, 빛나던 네 두 눈을. - P372

스케치북을 덮고 낡은 공책을 펼친 순간 내 눈을 믿을 수 없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삼촌의 필적이다. - P372

왜 가끔 이렇게 오지 않았어? 아무 말 없이라도 나타나지 않았어? 그랬다면 좀더 견디기 쉬웠을 텐데, 환멸을. 증오를. 고통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그 여자만큼이나 부서진 정희의 얼굴을. - P373

......당신이 죽였지.
이를 악물고 나는 내뱉는다.
당신이 인주를 죽였지. 인주의 차를 당신의 차로 뒤쫓아갔지. 인주를 들이받은 충격으로 당신도 허리를 다쳤지. - P374

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죽일 수 있을까. 내 손등으로 느껴지는 그의 더운 숨. 미지근한 그의 체온을 내가 끊어버릴수 있다는 것, 영원히 차갑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게 뚜렷하다. - P374

......이 방에서 밤을 새우고 있으면, 살아 있는 서인주를 내가 알았던 게 현실이 아니었던 것 같았어. 그 체온, 차가운 입술, 악수할 때 느껴지던 여자답지 않게 세찬 악력...... 그 모든 게 날아가버리고, 서인주의 이미지, 서인주의 필적, 서인주의 그림...... 그러니까, 서인주의 깨끗한 흔적들만 남았지. 그것들이 오히려 나에게는 안전하고.......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웠어. - P375

우리는 닮은 데가 있어, 그렇지? 적당히 미쳤고 끈질기고 나약해. - P375

당신이 밀어붙였겠지... 당신한테서 도망치는 인주를 견딜 수 없었겠지. 죽여서라도 갖고 싶었겠지. 어떤 남자를 만나러 가는 여행인지.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겠지. 인주는 당신을 피했을 테니까. 당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연락을 끊었으니까. 젖 뗀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면서, 당신은 인주를 밀어붙였겠지. - P376

네가 그 사람의 코트를 입고 있었을 때 ...... 그 사람이 살아 돌아온 줄 알았어. 아니, 귀신으로 돌아온 줄 알았지. 그때부터 너를 죽이고 싶었어. - P376

네가 여기 올 줄 알고 있었어.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어린다. - P376

그해 내내..... 서인주가 맴돌았던 사람은 바로 너였어. 나는 그걸 몰랐어. 최근까지도, 그 빌어먹을 상담소를 찾아간 오늘 아침까지도 확신할 수 없었어. 어떤 남자를 만난 거라고만 생각했지. 지친 얼굴로 돌아와서………지극한 사랑 때문에 고통받은 얼굴로 돌아와서 날 밀어내는 걸 견딜 수 없었지. 미칠 것 같았지. 그런데 왜 너였지? 왜 너는 그 사람에게 그렇게 중요했지? 너 따위, 더러운..... - P377

이것들이 없으면 네 모든 주장은 의미 없는 정신병자의 독백이 돼. - P377

・・・・・・ 처음부터, 이 그림들은 서인주에게 어울리지 않았어. 초월하지 말았어야지. 끝까지 껴안았어야지. 싸웠어야지.
서서히 불길이 올라오는 그림을 꿈꾸듯 바라보다 그는 중얼거린다.
바깥쪽은 천천히 타는군. 먹의 밀도가 높아선가? 하지만 가운데에 불을 붙이면... 물이 번졌던 길을 따라 불길이 번지겠지. - P378

내 손으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너에게 연민을 느끼거든. ・・・・・・ 더구나, 이 그림들의 마지막을 지켜봐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 P379

또 다른 평전을 쓰다니, 제법 재미있는 생각이었어. 하지만 이제 너는 방화범, 미친 여자, 자살자일 뿐이야. ......억울한가? 그럼, 이 년 전에 가려고 했던 길을 지금 간다고 생각하지. - P379

믿을 수 없어. 너 같은 인간을, 그토록 서인주가 사랑했다니...... 내가, 단 하룻동안 가져보았던 여자가...... 평생을. - P379

살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과 배가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한 뼘, 또 한 뼘. - P381

마지막 힘을 다해 더 앞으로 기었다. - P381

인주도 이 모든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 P384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고통이 더 멀어진다. - P384

......봄이 왔어.
너를 잃은 뒤 처음으로 입술을 열고 새어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 혀를 믿을 수 없었다. - P385

무한히 번진 먹 같은 어둠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삼촌은 말했지.
생명이란 가냘픈 틈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한테서 생명이 꺼지면 틈이 닫히고,
흔적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생명이 우리한테 있었던 게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었던거지. - P386

그 기적에 나는 때로 칼집을 낸 거지. 그때마다 피가 고였지. 흘러내렸지.
하지만 알 것 같아.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는 걸.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걸.
......지금 내가, 그 얼음 덮인 산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 P386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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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강 작가가 쓴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 뭐라고 정확히 말은 못하겠는데 중력처럼 이끌리는 무언가가 있다.

오늘 읽기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거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흰‘ 대상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살펴보고, 여기에 더해 독자인 나만의 느낌까지 곁들여 읽어나가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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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흰 도시‘라는 소제목을 가진 챕터를 만났다. 이 도시는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자비하게 파괴했던 도시라고 나오는데, 구체적인 지명이 나와있지 않아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한 편이라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바르샤바가 히틀러의 표적이 된 이유는 나치에 저항하여 한 때 독일군을 몰아냈던 이력 때문이었다. 히틀러의 악랄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근데 이 파괴된 도시가 왜 이 ‘흰‘이라는 소설에 등장한건지 개인적으로는 조금 의아했다. 좀 더 읽다보니 저자가 과거 미군 항공기가 촬영했던 이 도시의 영상을 본 적이 있었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 봤을 때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던게 발단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근데 좀 더 가까이 내려가서 보니 당시 잔혹하게 파괴된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후에 이 도시에 일부분 남은 잔재들과 새로 복원한 것들이 약간은 부자연스럽게 이어져있는 걸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듯 보인다. 이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도시와 비슷하게 부자연스러운 운명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흰 어떤 대상에서 시작하여 사고思考의 흐름이 끊임없이 확장되는 게 참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인간의 상상력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 ‘그 끝이 있기는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 글이었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 P9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 P10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 P11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 P11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 P14

얼룩이 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 낫겠지. - P14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 P23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 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 P24

아니, 저것을 희다고 할 수 있을까? 검게 젖은 어둠을 차가운 입자마다 머금고, 이승과 저승 사이를 소리 없이 일렁이는 저 거대한 물의 움직임을? - P24

이렇게 짙게 안개가 낀 새벽, 이 도시의 유령들은 무엇을 할까.
숨죽여 기다렸던 안개 속으로 소리 없이 걸어나와 산책을 할까.
목소리까지 하얗게 표백해주는 저 물의 입자들 틈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모국어로 인사를 나눌까. 말없이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이기만 할까. - P25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 P29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 P30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 P32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 P33

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 희끗한 빛과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 어둠 속에서 나도 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 P33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 P39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 - P54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 P54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 P55

모든 것은 지나간다. - P55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 P55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 - P66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 P66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 P67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사람이다. - P74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 P74

흰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 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 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ㅡ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 P75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 P76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 P77

배가 너무 작아서 약간의 파도에도 세차게 흔들렸다. - P80

수천의 은빛 점들이 먼 바다에서부터 밀려와 배 아래를 지나갔다. 단박에 그녀는 무서운 것도 잊어버리고, 압도하는 그 반짝임들이 세차게 움직여가는 쪽을 멍하게 바라봤다.
......멸치떼가 지나갔다야. - P80

사람들은 왜 은과 금,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광물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걸까? 일설에 의하면 물의 반짝임이 옛 인간들에게 생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P82

빛나는 물은 깨끗한 물이다. 마실 수 있는ㅡ생명을 주는ㅡ물만이 투명하다. 사막을, 숲을, 더러운 늪지대를 무리지어 헤매다가 멀리서 하얗게 반짝이는 수면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느낀 건 찌르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생명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 P82

복사뼈와 무릎뼈. 쇄골과 늑골. 가슴뼈와 빗장뼈. 인간이 살과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 P84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 (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 P85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 때. - P86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있다.
방금 울었거나 곧 울게 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 P89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다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 P90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 P90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내려갈 것인지, 이 빛의 섬에서 더 버틸 것인지. - P91

회복될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밤마다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입 맞춰주던 이가 다시 한번 그녀를 얼어붙은 집밖으로 내쫓은 것 같은, 그 냉정한 속내를 한 번 더 뼈저리게 깨달은 것 같은 마음. - P92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 - P92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 P93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 P93

조금 더 이대로 있어달라고.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고. - P97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라고 떨면서 스스로에게 답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어떤 대답도 유보한 채 그녀는 걷는다. 살풍경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절반쯤 얼어 있는 그 늪가를 벗어난다. - P101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 길은 눈이나 서리 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둣빛 봄풀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 P103

문득 팔락이며 날아가는 흰나비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채고, 떨며 번민하는 혼 같은 그 날갯짓을 따라 그녀가 몇 걸음 더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막히는 낯선 향기를 뿜고 있다는 사실을, 더 무성해지기 위해 위로, 허공으로, 밝은 쪽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 P103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넋들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 하는 것이다. - P104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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