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피곤했는지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이 떠졌다. 수면의 질이 좋았는지 바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책을 펼쳤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도 밤인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 소설에 나온 첫 문장에 밤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참 신기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장을 보면서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가 생각났다. 정확한 문장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생각나는대로 끄적여보자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뭐 이런 식의 문장이었던 것 같다.

위에 끄적인 성경에 나온 문장과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을 연결지어 보자면 모든 시간이 밤이었기에 빛을 만든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간단한듯 보이는 문장이지만 뭔가 심오한 우주의 섭리가 담겨있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이 책에 나올 내용들이 어떤 것들인지는 지금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전혀 알 수 없기에 깜깜한 밤처럼 느껴지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가면서 독자인 내가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은 역할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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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챕터의 제목은 ‘가모가와의 사냥꾼‘이라는 것인데, 가모가와는 물이 흐르는 강의 이름이고, 여기 나오는 사냥꾼은 사람이 아닌 백로라는 순백의 새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새는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 있는 물 속 구조물 등에 움직임없이 서있다가 물 속에 있는 자신의 먹이들을 순식간에 낚아채는 특성이 있는데, 저자는 이 특성에 근거하여 사냥꾼이라는 이름을 붙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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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좀 더 읽다보니 일본 교토에 있는 명소들에 대해 몇 가지가 나오는데,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그 이미지들이 아주 볼만했다. 만약 교토에 여행을 가게 된다면 한 번쯤 방문해보고 싶은 그런 장소들이었다.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의 소제목은 ‘추방당한 왕후‘ 인데, 여기서는 성경 에스더 서에 나오는 와스디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 주변 인물들에 관한 폭넓은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와 관련된 페르시아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페르시아에 관해 들은 것은 과거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잠시 스쳐지나가듯 배우고 지나간 기억밖에 없지만,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본문을 읽어나가는데 있어 그 이해의 깊이가 좀 더 깊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도 본문을 통해 페르시아라는 나라와 조금이라도 친숙해진 듯한 느낌이다.

이 라슬로의 작품을 읽으면서 반복적으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작가가 다양한 나라에서 저술활동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세계 여러 나라들에 대해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들을 직접 가보는 게 쉽지 않지만, 이렇게 책을 통해서 만난 나라들에 대해 인터넷에 검색해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나 인상 등을 어느정도는 가늠해볼 수 있기에,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라슬로의 작품을 통해 내가 배울 수 있는 장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본문의 내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드넓은 세계를 느끼고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측면에서 라슬로 작가는 내게 이미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른 독자님들도 라슬로의 책을 읽다보면 내가 지금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시간이 밤이다. 그렇지 않다면 빛이 필요 없을 테니까.
W·토머스 핀천, 《낮에 대항하여 Against the Day》에 인용된 텔로니어스 멍크의 말 - P5

하나의 순간 속에서, 그 지나가는 것을 측량할 수 없으나 아무리 믿기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않는 그 하나의 순간 속에서, 시간 속에 던져진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그물처럼 그저 빙빙 돌 뿐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는 그 하나의 순간 속에서 - P13

저 새는 하나의 순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모든 움직임을 억제해야 하거니와, - P14

"새가 하늘을 가로질러 집으로 날아간다. 지친 듯 보이는 것은, 힘든 하루였기 때문이다. 사냥에서 돌아오는 것은, 사냥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_알자하드 이븐 샤히브 - P15

즉 그는 당면 목표는 있었지만 장기적 목표는 없었으며, 그가 존재하는 공간에서는 어떤 장기적 목표도 어떤 장기적 이유도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되, 눈앞의 목표와 이유를 더 촘촘하게 엮어 그로부터 그는 빚어지고 그로부터 언젠가 필멸할 것이다. - P15

아름답다는 것의 요점은 무엇인가, 무지막지하게 정확한 부리와 의지력을 지닌 하얀한 마리가 서서 수면 아래에 무언가 나타나길 기다리다가 부리를 내리꽂을 뿐인 것을. - P17

이 모든 일은 교토에서 일어나는데, 교토는 무한한 예절의 도시요, 올바르게 처신하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는 법정이요, 올바른 몸가짐을 유지하는 자의 낙원이요, 법도를 지키지않은 자를 위한 유형지다. 이 도시의 미로는 예절, 처신, 몸가짐의 미궁으로부터, 사물의 관계를 규정하는 무한히 복잡한 규칙들로부터 생겨난다. - P17

이곳에는 왕궁도 정원도 없고, 거리도 실내도 없고, 도시 위 하늘도, 자연도, 도시를 둘러싼 먼산에서 가을이면 붉어지는 단풍나무도, 절 마당의 개미자리도 없고, 니시진西陣에 남은 견직 공방들도 없고, 기타노텐만구北野天滿官신사 옆에 숨겨진 후쿠즈루 상의 유곽도 없고, 순수한 건축의 도道로 지은 가쓰라리큐桂離宮도, 가노 가문의 황홀한 그림이 걸린 니조조도, 《라쇼몽》의 음산한 배경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도, 2005년 떠들썩했던 여름 도심의 근사한시조카와라마치 교차로도 없고, 시조오하시ㅡ영원히 우아하고 신비로운 기온으로 이어지는 다리ㅡ의 매혹적인 아치도 없고 기타노오도리 무희의 작은 얼굴에 패인 고혹적인 보조개 두 개도 없고, 어마어마한 규칙 덩어리만, 모든 것 위에서 작용하며 모든 것에 확장되는 예의범절만 있었거니와, - P18

이 질서는, 사물과 사람 사이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더 나아가서, 사물과 사물 사이의 불변하는 동시에 변덕스러운 이 복잡성의 감옥은 인간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바,
오로지 이와 같이, 이를 통해서만 모든 왕궁과 정원, 격자무늬로 배치된 거리, 하늘과 자연, 니시진 구역과 후쿠즈루 상과 가쓰라리큐와 라쇼몽이 있던 장소와 기타노오도리 무희의 작은 얼굴에 패인 고혹적인 보조개 두 개는 존재를 부여받으니, 그녀는 번득이는 찰나에 부채를 얼굴에서 치워 영원히 아름다운 보조개 두 개를, 추잡하고 부유한 후 원자들의 음흉한 시선으로 가득한 관중 앞에서 자연스럽고 황홀하고 매혹적이고 남자를 타락시키는 미소를 모두에게 보여준다. - P18

말하자면 고도의 집중력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기에, 관찰의 파동이 이루는 골에 있는 어떤 저점에서, 주의력의 파동에서 이른바 가장 낮은 어쩌면 심지어 절대적으로 가장 낮은 구간에서 - P23

이 일을 단번에 해치우는 게 나으리니 그대가 내일, 또는 내일 이후에 돌아오면 그대를 이해할 자가, 바라볼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며 그대의 모든 천적 중에서 그대가 진정 누구인지 볼 수 있는 자는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요,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 바로 이 저녁에 떠나는 게 나을 것이요, 밤이 내려오기 시작하면 나머지 모든 것과 함께 퇴각하는게 나을 것이요, 내일, 또는 내일 이후에 동이 터도 돌아오지 말아야 할 것은 내일이 없고 내일 이후도 없는 게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이니, 이제 풀속에 숨어, 몸을 낮추고, 모로 누워, 천천히 눈을 감고, 죽으라, 그대가 짊어진 숭고함에는 어떤 의미도 없으니, 한밤중에 풀 속에서 죽어, 몸을 낮추고 쓰러져, 그렇게ㅡ마지막 숨을 내뱉으라. - P27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 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 하였나이다_에스더 1:16) - P33

치수는 예사롭되 기법은 예사로워서는 안 되네, - P43

언젠가 이 또한 끝나리라, - P49

학식이 커질수록 무지도 커지는 법이어서 - P51

재료를 섞는 양동이가 완전히 비었는데 학자들이 골머리를 썩여봐야 결국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P54

이 굴욕, 치욕, 몰락을 표현하려면 가장 깊은 아름다움과 대비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 P66

그들은 작품의 제목을 ‘라 레지나 바스티 라시아 일 팔라초 레알레‘로 지었는데, 이것은 ‘왕후 와스디가 왕궁을 떠나다‘라는 뜻으로,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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