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말에 한 번 읽었다가 한동안 못 읽다가 다시금 기회가 되어 읽어본다. 내용은 실용적이기보다는 그냥 말그대로 이야기다. 옛날에 나왔던 영화 혹은 외국의 유명 작가라고 알려진 사람들에 관해 잘 몰랐던 이야기들을 저자의 시각을 덧붙여 풀어놓은 에세이 형식의 글이다.

여기 따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p.76에 아포리즘aphorism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물론 이미 알고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처음보는 용어라 뜻을 찾아보니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 이라고 한다. 흔히 격언, 금언, 경구 라고 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하나 배웠다.

뒤이어 나온 내용 중에 p.81에 밑줄친 발터 베냐민의 말한 ‘순수 언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번역가들의 고충이 어떤 것인지를 간접적이긴 하지만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전 세계문학작품 같은 것을 번역할 때 단지 번역된 글을 읽기만 하면 되는 독자들과는 별개로 원문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번역가들의 고충은 직접 번역을 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루 헤아리기 힘들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를 빌어 번역가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저 같이 평범한 독자도 저 멀리 해외에 있는 다양한 작가님들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감사드립니다!
.
.
.
p.92에 밑줄친 내용에선 평소 인간관계에서 들었던 생각들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는데, 기존의 친구 혹은 지인들과 새로운 사람 간에 물리적, 심리적 거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내용이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가 많은 인간관계의 고충이 느껴졌다.

p.96에 밑줄 친 내용은 ‘골방의 관리자‘라는 제목의 글인데 뭔가 공감되는 지점이 있었다. 회사에서의 실적은 어찌됐든 숫자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그 지점과 관련해서 맥을 아주 잘 짚은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99에 나온 내용은 대학생들이 교수님들의 얘기를 빠짐없이 필기하는 것에 대한 저자 분의 생각이다. 이런 식의 필기를 무조건 안 좋게만 볼 것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독자인 내가 이 이슈에 관해 기존에 갖고 있던 관점과는 또 다른 관점을 볼 수 있었다.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의 고전 영화 「하비」(1950)는 사람 크기의 토끼와 친구가 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 토끼는 말도 하며 늘 주인공 옆에 붙어 다닌다. 문제는 이 토끼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걱정이 된 가족은 주인공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한다. 이후 비슷한 설정을 사용한 영화들(「이웃집 토토로」 등)의 선구가 된 작품이다. - P57

우리는 친교의 시작과 끝이 온라인에 기록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예컨대 매일 단골로 찾아와 싱거운 덧글이나 주고받던 이들이 어느 날 어색한 몇 마디를 교환하더니 서로의 계정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런 일은 보통 제삼자는 모르고 지나갈 일이지만 서로 작심하고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는 경우에는 모두에게 생중계되기도 한다. 다들 한두 번씩은 겪어 본 일이다. 이를 보면 친구 관계의 사적이고 비가시적인 영역이 온라인에 의해 잠식되는 중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만 잠식의 규모는 가늠이 어렵다.
친구 관계에서 비가시적인 영역의 전체 크기가 미지수이기때문이다. - P58

가시화되는 건 친교 자체가 아니라 서로 주고받은 ‘글‘인데, 글의 교환 역시 새로운 것은 못 된다. 우리는 덧글이나 메시지가 별게 아니라 응답 속도가 빨라진 편지일 뿐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그에 적응하게 되었다. 사실 그 응답 속도조차 조절되고 있는데, 우리는 적절한 타이밍에 대꾸하기 위해 편지를 쓸 때와 똑같은 짓- 시간을 재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유일하게 새로운 것은 친구 사이에 글의 교환이 폭증한 것이다. 이게 좋은 일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글은 너무나 강력한 매체이기 때문에 친구와 부담 없이 교환할 만한 건 못 된다. - P59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루이스 캐럴은 편지 쓰기에 관해 일련의 조언을 남겼다.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상대방의 편지를 인용할 때는 그가 쓴 말 그대로 인용할 것." "상대방이 기분 나쁠 것 같은 편지는 일단 부치지 말것. 다음 날 내가 받은 편지라고 생각하고 읽어볼 것." "그가 격분한 답장을 보내오면, 못 본 것으로 할 것. 또는 그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답장할 것." "의외로 우호적인 답장이 오면, 그보다 더 우호적인 어조로 답할 것." "농담할 때는 농담임을 의심하지 않게 심한 과장법을 사용할 것." "끝맺는 인사는 최소한 상대방이 한 것만큼은 친절하게." "추신에 의미심장한 구절을 넣지 말 것." 등등. - P59

이게 정말 편지 쓰기에 관한 조언일까? 실은 친구 유지관리 매뉴얼 아닐까? 캐럴은 단 하나의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친구와의 관계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의 규칙들이 지금 문자나 덧글을 쓸 때도 참고가 되는 게 있다고 느껴진다면 우리가 우정에서 기대하는 바는 실제로 변한 게 없는 것이다. - P60

우정의 다이내믹은 꽤 관대한 편이어서 가장 친한 친구의 순위 바꿈이나 연락의 휴지를 허용한다. 하지만 한번 금이 간 친구 관계는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연애가 거의 무한정 누리는 사치, 즉 싸움을 우정은 한 번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 관계는 별로 질기지 않고, 한번 못 볼 꼴을 보면 바로 해소된다. 그런 오점만 없다면, 십 년간 겨울잠을 자던 밍밍한 친교도 나중에 잘 이어지곤 한다. - P60

한트케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진리를 모른다. 우리가 선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늘 오류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의사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결과에 의미가 있다면, 다음 오 년 뒤에 우리 판단을 다시 확인해 볼 기회가 있기 때문이지 진리와 일치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 P64

"이보시오, 당신 말이야 도대체………… 일단 직접 말로 할수도 있는데 굳이 편지를 쓰는 건 어리석은 일 아닌가?" - P65

소설에서 현명한 편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토마스 만의 「트리스탄」(1903)에 나오는 편지처럼 어리석은 건 드물다. 남편인 클뢰터얀 씨는 편지의 내용도 문제지만 말로 해도 되는 걸 "굳이 편지로 쓴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후자가 더 결정적인 하자로 보인다. 겁쟁이인 작가가 자신의 음험함을 실현하는 일은 후자에 기대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P66

문자가 통화보다 선호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문자에 언제 답할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답이 늦으면 상대방은 우리가 언짢은지, 말문이 막힌 건지,
단순히 문자를 못 봤는지, 바쁜 일로 답할 시간이 없는지 알수가 없다. 즉 당장 어쩌지 못한다. 걸려 오는 연락에 늘 무방비 상태인 우리에게 이런 비동시성과 불확실성이 그나마숨 쉴 공간을 준다. 이런 자유에 모두가 득을 보고 있기 때문에 ‘통화 대신 문자‘는 일종의 예절이 된 것이다. - P67

보르헤스 소설 「비밀스러운 기적」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모두가 저마다 아무도 모르는 차원을 감추고 있다면 어떻게 선과 악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나? 한 사람의 정상을 참작하는 데에도 영원의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까? - P71

보르헤스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의외로 곳곳에 촌철살인적 문장들을 뿌려 놓았다. "그는 다른 작가들을 그들이 보인 업적으로 평가했지만, 그들이 그를 평가할 때는 장차 달성할 업적을 가지고 평가해 주길 바랐다." - P71

나는 네 걸만 보겠으나 너는 내 속을 봐 줘야 한다는 이런 태도 내면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태도, 주변에 이런 유아적인 태도를 노출한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대체로 냉혹하게 반응한다. 가끔 그의 딱한 정신 상태를 동정하기도 하고, 나도 다르지 않다고 반성의 계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냉혹, 연민, 반성 어느 쪽으로 기울든, 이런 유아적 태도를 허용하거나 격려할 마음을 품지는 않는다. 이게 사회의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P71

우리는 공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공감의 가치는 선량함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애와 주관성에서 벗어날 계기를 준다는 데 있다. 그런 목적이라면,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대한 공감은 권장될 수 없다. 내가 알 법한 내면의 당사자는 몇 명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이런 선택적인 공감은 취지에 맞지 않는다. 공감은 보이는 것, 즉 타인이 볼 수 있는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타인이 볼 수 없는 것은 차례를 기다려야 맞다. - P71

보이지 않는 것에 우선권을 주면 보이는 것은 상대화, 주변화, 비가시화된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 P72

많은 작가들이 트레버를 좋아한다. 줌파 라히리는 이렇게 말했다. "트레버 단편집은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나는이 책에 실린 작품에 견줄 만한 이야기를 단 한 편이라도 쓸수 있다면 행복하게 죽겠노라고 생각했다." - P75

"세상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지 않아. It‘s all second best.)"(「욜의 추억」, 24)  - P76

"삶은 그녀를 실망시켰고, 그녀는 스스로를 실망시켰다. (Life had let her down, she‘d let herself down.)" (「이스파한에서」 ,267) - P76

트레버의 등장인물들은 "평범하고 고독하고 잊힌" 사람들 ㅡ주로 중하층과 노동자계급ㅡ이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실망해 온 이 인생을 뒤집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이것이 대단한 발견처럼 제시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소설의 처음에서든 끝에서든 모두가 아는 것으로 주어져 있다. - P76

생각을 구획 지어서 직접적이고 투명하게 드러내는 듯한 느낌은 트레버적이지 않다. - P78

‘......라고 생각했다‘ 쪽의 좋은 점은 진술의 간접성과 불확실성인데, 이런 속성들은 그의 책에서 작위를 방지하기 위한 부적처럼 사용되고 있다. - P78

트레버는 복잡한 문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줄거리는 평이하며 공감하기도 쉽다. - P79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지만 자신이 왜 겁을 먹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She was frightened and she didn‘t quite know why she was frightened.(「탄생을 지켜보다」 101) - P79

그 이유는 물론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순환, 즉 작가가 적게 말해도 이미 알아서 다 상상해 버린 독자들이, 책에 적힌 표현의 과묵함에 다시 감탄하고, 화자를 더욱 신뢰하게 되는 무한순환에 트레버가 얼마나 노련한지 보여 주는 수많은 예 중 하나일 뿐이다. - P80

트레버는 교활한 테크니션이다. 적게 말할수록 증가하는 효율에 기뻐하는 관리자이기도 하다. - P80

발터 베냐민은 번역가가 관계하는 언어는 원텍스트의 언어가 아니라 보편적인 ‘순수 언어‘라고 한 적이 있다. 출발 언어를 목표 언어로 번역할 때, 목표 언어가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칠까칠한 부분이 생긴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목표 언어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순수 언어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 거친 부분을 매끄럽게 가공하지 않고 가능한 한 포용하는 것은 목표 언어의 경계를 넓히고 풍부하게 하는 한 방법이 된다. - P81

트레버의 의미는 아직 조작되고 문학화되기 전의 날 것의 인생을 보는 듯한 느낌에 있다. 작위성을 부인하는 듯한 가라앉은, 말을 아끼는 듯한 문체를 통해서 말이다. - P81

핵심은 책의 저역자 소개가 자기표현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 내용의 신뢰성을 보증하는 공간일 뿐이다. 백 퍼센트 보증된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저자가 자신을 공개할 마음이 없으면 신뢰성 보증은 출발도 할 수 없다. - P88

독자 입장에서는 저자 약력이 써 있는 방식을 보면 책 속에서 사실이 어떤 취급을 받을지 예감하게 되는 법이다. - P88

프랑스 말을 못하는 죄로 방에서 영어를 제일 못하는 것까지 들켜야 한다는 건 너무한 일이었다. - P89

문명인의 규칙을 지키려면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타자를 제쳐 두고 친구끼리 떠들면 안 되지 않는가? - P90

너무 한심하게 볼 것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정을 참지 못하며, 이 세상을 친구가 모인 놀이터, 확장된 동문회장으로 보는 태도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 P90

‘선배님‘과 ‘선생님‘은 관계 밖의 타자를 즉각 소외시키는 호칭이지만, 사실 다른 호칭도 없지 않은가? 한국에서 연장자를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곤란은 우리가 해결할 문제이지 타자가 초래한 것은 아니다. - P91

타자가 없는 척하지는 않는 것이 대단한 일은 못 된다.
어렵지도 않다. 타자와의 거리만큼 친구와 떨어지면 된다.
사람들 사이의 이상적인 거리는 접어 두자. 그저 공적 장소,
타자가 있는 곳에서는 그 거리가 균일해야 한다는 말이다. - P91

우리는 공정함을 이야기하고 타자를 포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허용된 거리보다 근접해오는 친구를 막지 못하면 공정함도 포용도 불가능하다. 친구가 공간을 우정으로 채워 버리면 타자는 바로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말없이 빠져나간다. - P92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서문에 썼듯 "산의 모습은 평지에서 봐야 알 수 있고 평지의 모습은 산에서 봐야 안다." - P93

윗 사람이 부모 같은 어조로 경솔한 자식을 타이르듯 ‘다 보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에는 뭔가 매혹적이고 죄의식을 자극하는 지점이 있다. - P94

다 본다는 것은 숫자를 본다는 뜻이 아닐까. 합계와 평균, 최솟값과 최댓값, 증감율과 추세가 있는 숫자 말이다. 물론 회사에서 말하는 숫자란 실적을 의미한다.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지 않기 위해 숫자 그 자체는 판단이 아니고, 언제나 해석이 요구된다는 말은 덧붙여야겠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눈에 명료하게 파악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건 대개 숫자의 영역인 것이다. - P94

이런 걸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팀원에게 지난주까지 작성을 지시한 보고서를 왜 아직도 가지고 오지 않는지, 재촉을 해야 할 텐데 언제쯤 하는 게 적당할지, 오전에 보니별로 표정이 좋지 않던데 오늘 얘기하는 게 과연 현명할지,
한다면 어떤 말투로 하는 게 효과적일지 등등. 이런 태도가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 P95

이런 식의 세심함은 진실을 낳지 않는다. 아니, 내가 무슨 수로 타인의 사정과 진실을 알겠는가?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 - P95

무슨 카프카 소설처럼 골방에서 나오지 않고 조직과 개인의 실적만 들여다보고 있는 관리자. 그가 수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예컨대 그는 회사 분위기라든가 직원들의 개인적 진실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 P95

살다 보면 우리는 각각의 진실들이 등가인 것이 아니고 우선순위에 따라 굴복시키고 굴복하는 관계임을 알게 된다. 이익을 내야 하는 조직에서 단 하나만 챙긴다면 무엇이어야 할지는 분명하다. 적어도 골방의 관리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알고, 그것을 이미 갖고 있는 것이다. - P95

단지 그가 나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진실까지 못보는 건 아닌데, 나의 진실이란 그의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어떤 숫자인 것이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나의 진실이지 나 자신은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 P96

오너가 바뀌면 예외 없이 전보다 힘들었다. - P97

가장 큰 곤란은 다른 업계에서 온 새 오너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지시를 받으면 늘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그 일에 관계된 ‘관행‘ 또는 업계 상식이 어디까지 용인될지 알 수 없었다. 둘째, 무엇이 ‘관행‘인지 나도 몰랐다. 늘 관행에 젖어 있기 때문에 관행인 줄도 모르고 있었음이 밝혀지는 식이었다. - P98

그 역시 의사소통에 답답함을 느꼈을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회의 시간에 오너가 하는 말을 한 자라도 놓칠세라 깨알같이 받아 적는 것이었다. 그걸 일하는 중에도 읽고,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에도 읽고, 복사해서 직원들에게도 참고하라고 나눠 주기도했다. 물론 이런 애처로운 방법 외에 능력을 발휘해서 신뢰를 획득한다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이년 반 뒤에 퇴사했다. - P98

여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시험 전략에 대한 미국인들의 무관심이다. 이왕 비교 조사를 했으면 이 무관심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차이를 낳는 것은 바로 그것인 듯하기 때문이다. - P99

교수가 강의 때, 또는 사장이 회의 때 하는 말을 학생이 빠짐없이 받아 적는 것은 시험 같은 특수한 스트레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함이다. - P99

시험이 스트레스 상황이 아닌 적은 없지만, 문제는 스트레스가 시험 기간만이 아니라 학기 내내, 사 년 전체를 지배할 정도로 지독해졌다는 것이다. - P99

늙어버린, 교수와 같은 나이가 된 세대는 이 광경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그동안 88만원 세대부터 헬조선까지 취업을 박탈당한 세대에 대한 여러 담론이 출현했지만, 왜 학생들이 자기들 때와 다르냐는 문제에 이르면 다들 사회 경제적인 분석이 멈추는 모양이다. - P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