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를 피똥 싸게 굴리고 싶거든 당근과 채찍을 함께 휘둘러라‘

누군가는 기교까지 부리며 호쾌하게 타더라만 그건 고수의 영역이다. 난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마치 떨어지는 낙엽처럼 내려오는 게 전부일 뿐.

뭐 그랬다. MT를 즐기는 방식은 각자 다르고 조용한 것보다는 떠들썩한 게 훨씬 좋은거니까.

‘하루 만에 저렇게 끈끈한 전우애를 얻게 되다니.‘

이번엔 단념시킨다.
내 두뇌는 그녀의 단념을 끌어낼 가장 좋은 대답을 찾아 열심히 굴러갔다.

"어떻게 알았냐가 중요한게 아니야."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

"사람 좋더라. 잘 살아라."

심장이 까맣게 타버렸어도 그래서 오랫동안 그 둘을 저주했더라도 이 말만은 진심이었다.

등뒤를 덮쳐오는 포식자에게 느끼는 동물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날 약해빠진 놈이라고 비웃는다면 그건 신용재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180 중반의 키에 110킬로나 되는 떡대가 등 뒤에서 노리고 있다고생각해 보라. 저놈이 적성대로 직업을 선택했다면 진작 서울 뒷골목을 평정했을 거라는데 손모가지를 걸 수 있다.

지금은 1월 말 한겨울의 실내 습도란 바짝 마른오징어와 다름없다. 

"결국 남은 건......"
경하나가 손가락 두 개를 둥글게 말아 들어 올렸다.
"네. 돈이죠."

그랬다. 나와 제품개발팀에서 나온 3호라는 아이는 돈이있어야 세상에 나올 수 있다.
결국 사주인 PAI의 투자 결정을 얻어내야 했다.

"여 파트장, 고민은 좀 해봤나?"
유 대표의 질문에 강제로 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져졌다.

요 며칠 잘려고 눕기만 하면 오늘 미팅이 머릿속을 맴돌아 제대로 잠도 못 잤다. 그렇게 도출해낸 고민의 결과물을 머리에 새겨놓고 왔지만 지금 그걸 털어놓을 생각은 없다.

‘이 차 안에 박쥐 한 마리가 숨어 있거든‘

그래서 형식적인 대답밖에는 내놓을 수 없었다.
"네. 뭐. 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형식적인 대답이 아니라 좀 모자란 대답이 된 것 같지만.

‘PAI, 진짜 코딱지만 하구만‘

솔직한 감상이었다. PAI는글로벌 투자사이자 한국에서 조 단위의 투자금을 굴리는 엄청난 회사다. 하지만 국내 굵직한 기업 5개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에 걸맞지 않은 작은 규모.

‘고작 건물 한 개 층, 상주하는 직원도 열 명 남짓!

직접 눈으로 본 사모펀드의 실체였다. 그들의 배후인 투자자들이야 거물들이겠지만 정작 본체는 이런 모습이다. 그러니 자기 소유 회사의 장기전략을 구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 밖에.

결국 자기 배를 불릴 궁리만 하는 놈들이고 기업의 고혈을 짜 골병이 들게 만드는 기생충일 뿐이다.
하지만 이 역시 엄연히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 부분이다.
결국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돈 없는 회사는 돈 있는 자에게 몸을 내맡길 뿐이다.
‘이게 현실이지.‘

이런 식이다. 한쪽은 시장과 비전을 이야기하고 한쪽은 단기 성과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구조. 생각보다 답답하게 조여오는 현실에 난 한숨을 내쉴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더욱 한심한 것은.

"대표님, 저쪽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PAI로서는최대한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팽팽한 평행선에서 삐딱선을 타는 놈이 있다는 거다. 누구겠나. 사주의 이쁨을 한몸에 받고 있는 기획실장 김강현 님 되시겠다.

결국 평행선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이해의 대치점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아무런 진전도 얻을 수없다.

후려치기에 이은 선 긋기.
양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대척점은 마침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익을 담보한 투자를 하시면 됩니다."
음. 이렇게 말해서는 역시 못 알아듣나?

"PAI가 가져갈 몫을 정하고 나머지는 투자를 하시면 된다는 말입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해 봐도 PAI와의 미팅에서 사주에게 투자를 끌어낼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선택한 방법은 스스로 PAI의 입장이 되어 보는 거였다.
‘내가 사모펀드의 대리자라면 어떤 생각을 할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며 생각해 낸 결론은 이러했다.
‘나는 대리자일 뿐 자본의 주인이 아니다. 결국 명분이 가장 중요해.‘

안정적인 투자자들의 이익을 확보하고 잘못되었을 경우에 한국공조에 응당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명분. 그때부터 생각을 정리하는 건 훨씬 쉬웠다.

[한국공조는 올해 PAI의 영업이익 100억을 확보한다. 확보하지 못할 시 한국공조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진다. 구조조정을 포함한 조건 없는 책임을.] 여기까지가 PAI의 대리자를 위한 명분이다. 그리고.

[초과 영업이익은 한국공조의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투자결정은 전적으로 대표의 소관으로 PAI는 이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이건 한국공조를 위한 명분이다.

일개 파트장일 뿐인 내가 이토록 과감한 제안을 입밖에 올릴 수 있는 이유는 당연하다.
‘올해 그 이상의 영업 이익을 낼 자신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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