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을 울린, 책 속 그한마디
그걸 읽지도 않고 어떻게 대학교 4년을 다녔다고 할 수 있겠니? 라고 하셔서, 그 자리에서는 "그럼 다시 1학년으로 돌아갈테니 신입생 소개시켜주세요."라고 했다가, 소심하게도 돌아가는 길에 굴종하는 마음으로 두꺼운 그 책을 기어코 옆구리에 끼고서 신촌 거리를 걸었답니다. 그러나 항상 지나는 그 횡단보도에서 문득 바라본 어느 가게 간판이 "신데렐라가 훔친 구두"였어요. 다우지수는 무너지고, 칠월 칠석은 이미 지난지 오랜데도 불구하고 주가와 환율이 몸소 견우직녀의 이야기를 재현하듯 낭만적 재회를 꿈꾸는 시대에, 신데렐라들도 결국엔 제 구두가 아닌 그 구두을 얻으려면 저 좋다고 달려드는 왕자를 한명 키우든지, 그게 안 되면 훔치기라도 해야하는, 그런 이야기인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대학교 4학년이 되도록, 이런 이야기나 하며, 이렇게, 소심하기만 해서.
소심한 남자들은 언제나 깨어있을 때도 종종 꿈을 꾸기 때문에 처치 곤란한 존재랍니다. 그러니까 그게 현실인지, 현실과 아주 비슷한 꿈인지 종종 헛갈려하다가, 이윽고 자신이 소심하다는 사실도 잊고 어느새 자신의 믿음을 맹신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인데, 그건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소심한 남자들의 고칠 수 없는 습성이기도 하답니다. 그들은 어떤 소수의 특정인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하는 히스테리 환자와도 같아서, 하루의 대부분, 어쩌면 한 해의 대부분을 그 사람들에 대해서만 열중하는데, 사실 그들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생각하며 사랑에 빠졌던 대상이라는 게 알고보니 그 특별한 사람이라기보다, 그런 특별함을 발견하고 창조해내며 동시에 이를 숭배하게 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점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였답니다. 그렇게도, 작은 세계에서 넓은 바다를 꿈꾸며.
그는 울기 시작했다. 마리냐를 잃을 것이 두려워서만은 아니었다. 그의 젊음이 끝나는 것에 대한 슬픔이었다. 흠모하면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을 수 있는 능력과의 작별을 서러워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리냐를 더 이상 꿈꿀 수 없다면,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마리냐가 리샤드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리샤드가 꿈꾸는 마리냐보다, 그녀 자신이 꿈꾸는 마리냐, 곧 현실 속의 마리냐를 더욱 사랑했기 때문이랍니다. 모든 우리 소심한 남자들의 문제는 여기에 있을 수 밖에 없지요. 아무리 우리가 그녀를 그 무엇에 비할 수 없이 아름다게 상상하더라도, 현실 속의 그녀들은 어떤 의미로 우리의 상상보다도 훨씬 강하고, 영리하며, 아름다우므로.
제임스 조이스의 "Araby"를 원문으로 읽고 있는데, 머리가 나빠서 영어로는 도저히 문장을 외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기록해두는 것인데 But my body was like a harp and her words and gestures were like fingers running upon the wires. 제 해석으로는, 결국에는 우리는 그녀보다도 그녀의 손가락에 연주되는 하프를 더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네요.
'O, I never said such a thing!'
'O, but you did!'
'O, but I didn't!'
'Didn't she say that?'
'Yes. I heard her.'
'O, there's a... fib!'
"아이, 난 그런 얘기 한 적 없는데요!"
"아, 그랬잖아!"
"아이 아녜요 정말!"
"이 아가씨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맞아. 나도 들었는데 뭘."
"아이, 이런…… 거짓말!"
비슷한 정황의 남자 두명이 모이면 충분히 한 여성을 거짓말쟁이로도 만들 수 있답니다. 이 대화를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그녀는 사실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이 뉘앙스 속에서 거짓말을 한 쪽이 어디인지는 누가 더 그럴 듯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의 문제가 되겠지만, 아무래도 더블린의 사춘기 소년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맥락에 맞추어 해석하는데 챔피언이니까요. 우리가 사모하는 그 소녀가 무엇 하나 사달라고 한 적이 없음에도, 늦은 시간에 홀로 바자에 간 소년이 보았던 것은 거울도 없이 처음으로 직시할 수 있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으므로. 모든 것은 작은 착각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는데, 우리의 좌절은 이제 영영 상상할 수 없게 된 그 세계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아무래도 그녀가 예쁜 것은 우리를 위하여 예쁜 것은 아니므로. papa told me에서는 이런 계절어 빠진 하이쿠도 나오더라구요.
나는 말예요
나를 위해 예뻐요
나를 위해서
자기 스스로 아름다운 신데렐라는 왕자가 없어도 스스로 구두를 훔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사실상 왕자도 마술사도 그녀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일은 힘들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누군가는 계속해서 그 아름다운 그녀와 대등한, 혹은 그녀조차 놀랄만큼 아름다운 상상을 그녀에게 보여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혹은 그가 더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전보다 더욱 간절해졌다는 뜻이므로.
ㅡ
그러니까 두꺼운 책을 옆에 끼고 집에 돌아오는 사이에, 이런 되지도 않는 생각도 해보았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소심해서. 소심하게도, 소심하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