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기네스북에 오른 박래욱 씨가 쓴 55년간의 일기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단순히 55년의 세월을 쉬지 않고 기록해 왔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테면 그는 그 자신의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며 살아왔다는 이야기인데, 그 지난한 과정에는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생기기 마련이다. 한 개인이 55년간의 일기를 쓰고 나면 그 자신의 삶은 완전히 이해될 수 있을까? 라캉의 "거울단계"에 대한 논의처럼 모든 자아는 언제나 시간의 변증법 하에 예기(anticipation)과 사후작용(retroaction)이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하루의 일기를 쓴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하루의 자신을 기록하는 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어제의 나를 상기시키며, 현재의 나를 재구성하고, 미래의 나를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일기를 다 쓰고 난들 그 일기 속의 이야기가 진짜 나의 이야기라는 확신은 당위성은 하루의 일기를 다 쓰고 펜을 종이에서 떼어내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55년이나 그것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서사의 구조를 가지게 될 터인데, 그 내적 일관성이 생겨날 수록 그 이야기가 자신의 것이어야 하는 당위는 사라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 자신의 삶이기도 하지만, 그와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한결같고, 진실하며, 영원한" 것을 열망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기 쉬운 여자들만의 바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은밀한 바람이기도 한데, 55년의 일기를 읽더라도 이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나에게 물음표만을 던져준다.
The cosmos is all that is or ever was or ever will be.
TV 다큐로 제작되었던 "코스모스"의 맨 처음에 칼 세이건은 기러기가 날고 파도가 끊임없이 부딪치는 해안의 절벽 위에 서서 그렇게 자신의 말을 시작한다. 그의 말을 떠올렸을 때, 비록 55년의 일기의 기록을 적어보지 못한 나라도 어느 정도의 예감은 가질 수 있었다. 55년의 기록이 얼마나 '한결같고, 진실하여, 영원한" 것이든지 간에, 또한 우주 속에서는 길잃은 작은 행성, 암흑 속 외로운 얼룩,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에게는, 어느 것도 '한결같고, 진실하며,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결국 55년의 기록은 그 기네스에 남은 기록이나 하나의 역사적 사료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보며 살아가고자 했는지, 어떻게 그 자신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읽어내려고 했는지의 열망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열망이야 말로 "한결같고, 진실하며, 영원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에 가장 근접한, 온갖 아름다운 이야기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같은 온갖 말말말과 진단과 새로운 의식들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자아. 이 말 많은 국가적 자아의 가장 강력한 대화 방법은 언어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기계의 손상이 아니라 열망하는 마음의 손상이었다."라고 적은 살만 루시디의 말처럼, 열망하는 마음의 손상이야 말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