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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비밀 강령회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8월
평점 :
때는 18세기 말 영국. 심령 사업으로 유명한 ‘런던 강령술 협회’의 수장 ‘볼크너’가 살해당하자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영매(靈媒, a Medium) ‘보델린’이 파리에서 영국으로 건너온다. 보델린의 제자 ‘레나’도 함께 오는데, 볼크너가 살해당한 날, 레나의 동생 ‘에비’ 역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됐다. 두 여자는 범인을 찾기 위해 강령회를 계획한다.
책을 읽고 화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지극히 주관적으로) 정말 엉망이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렇다.
이 책은 그냥 한 마디로 못 썼다. 재미가 있고 없고 지루하고, 이런 문제가 아니다. 그냥 못 쓴 거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거기다가 길기까지 해서(본문만 거의 450쪽) 사람 미친다.
일단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다.
심령물, 오컬트(occult), 사후 세계, 이런 것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마음이 동할 만하다. 거기에 페미니즘 서사에 퀴어 서사까지 보태져 풍부한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여성들에게 배타적인 클럽을 무대로 두 영매가 남자들의 범죄를 까발리고 응징하는 통쾌한 서사를 기대할 만도 하지 않은가.
이야기 자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은 초현실에 대한 긍정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데(정통은 아니지만 사이비도 아닌) 그런 무리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거짓, 인간의 나약함을 악용하여 돈을 벌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악의 무리를 고발하려는 취지도 좋아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냥 못 썼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 말이 안 된다.
우선 레나의 동기가 이해 안 간다. 레나는 과학의 편에 있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동생의 복수를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경찰 수사가 어떻게 진행됐고 마무리됐는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은 없는지, 이런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수단에 매달리지 죽은 동생의 영혼을 만나려고 영매에게 달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영매의 제자를 자처하다니.
이런 동기가 괜찮아 보이는가? 우연히, 미처 깨닫지 못한 숨은 능력을 발견하고 뛰어드는 게 아닌데? 레나는 그러면서 계속 심령의 세계를 의심한다. 대체 뭐 하자는 건가.
그리고 설사, 작가가 심령이나 영혼의 존재를 긍정했다 치더라도, 영혼의 도움으로 범죄를 해결하는 게 18세기 영국에선 흔한 일이라 치더라도, 독자들에게 그걸 믿으라고, 사건과 갈등의 해결이라고 들이밀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희생자의 영혼이 나와 정답을 알려주는 이 작품의 엔딩을 봐라. ≪장화 홍련전≫이 따로 없다. 이럴 거면 바로 강령회를 해버리지 400쪽이 넘는 분량이 왜 필요했나. 하는 일도 거의 없고 그조차 영혼이 알아서 다 알려주는데 주인공은 왜 필요한가.
강령(降靈), 소위 죽은 사람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접촉하는 행위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고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능력은 ‘타고 난다’.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의 무속신앙(무교)을 보라. ‘신내림’의 과정은 무당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시험 공부하듯 책을 파고든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역을 공부해도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주풀이 정도다. 그런데 레나는 공부를 해서 영매가 되려 한다. 당시엔 영매 자격증이라도 있었나? 영매 되기가 제일 쉬웠어요. 뭐 이런 건가?
심령, 영혼, 접신(빙의), 이런 걸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믿는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다. ‘행위와 근거’의 장르다. 과학과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걸 아예 외면한다. 경찰 수사에 대한 짧은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다. 아주 짧게 언급되긴 하는데 아무 의미 없다.
그런 장면이 꼭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절차와 단계가 있다. 소설과 이야기의 진행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으면 비약이고 과장이다. 작가는 두 사람의 죽음에 어떤 의문이 있는지, 왜 살인인지, 주인공이 독자들과 함께 풀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기본 세팅조차 안 되어 있다. 작가는 거의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사이비, 돌팔이일지도 모르는 주인공을 그냥 쫓아가라고 요구한다. 이 정도면 막무가내다.
인물들은 모호한 동기에, 작가의(이야기의) 필요한 대로만 움직인다. 그게 무척 우습고 바보 같고 억지스러워 보인다. 예를 들면.
악당이 권총으로 두 여자를 위협하고 있는데, 두 여자는 바로 코앞에서 악당을 상대할 방법을 모의하고 있다. 악당이 한눈을 팔거나 자리를 비운 상황도 아니다. 그것도 모자라 (썸을 타는 관계의) 여자들은 그 와중에 에로틱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쯤 되면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 아닌가.
두 여자의 로맨스는 어떤가? 로맨틱한가? 발정난 뭣처럼 보이지 않는가? 적절해 보이지도 않고 애틋해 보이지도 않고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통에 심지어 이야기 흐름을 툭툭 끊어놓기까지 한다. 잘 다뤘다면 여성 퀴어들의 이야기는 나름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불필요하고 어색하고 의미 없고 그냥 거추장스럽다.
이 작품은 그냥 서툴다. 호러와 미스터리, 두 장르의 충돌, 이런 거 따질 가치도 없다. 인물들의 동기도 모호하고 개연성도 없다. 장면들을 잘 분석해 보라. 말도 안 되고 어리석고 민망한 장면투성이다. 애초에 설정이 구멍투성이니 피할 수 없는 결과다. 미국 소설 출판 시장 상황이 어떤지 알 수도 없고 나랑 전혀 상관도 없지만, 이런 소설을 번역해서 내놓을 생각을 한 우리나라 출판 시장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작가가 의욕만 앞세웠다. 역사물을 기본으로 미스터리, 오컬트 호러, 고딕소설, 페미니즘에 퀴어 서사까지 작가가 욕심을 너무 부렸다. 보통 이런 건 장점이기 쉽지만 이 작품은 단점이다. 산만하고 중심이 없다. 작가가 자료조사나 공부를 많이 한 티는 난다. 그런데 어쩌라고? 결과가 이 모양인데. 더 쓰고 더 화내고 더 비웃을 것들이 많지만 이쯤에서 멈춘다. 이런 시간도 아깝다.
돈은 고사하고 내 시간은 어떻게 보상해줄 건데? 진짜 작가한테 메일이라도 쓰고 싶다. 근데 영어다. 대신 출판사에 항의라도 해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