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의 시계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7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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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무 번째.

속기 타이피스트인 ‘셰일라 웨브’는 고객의 요청으로 그 집을 방문한다. 하지만 빈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중년 남자의 시체와 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는 네 개의 시계. 알고 보니 그 집의 주인인 ‘페브마쉬 양’은 타이피스트를 부른 적이 없고 현장의 시계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주장한다. 죽은 남자는 신원불명이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시계들 중 하나가 현장에서 사라지고 얼마 후, 두 번째 살인이 터진다.

도입 부분이 매력적이다. 첫 장을 열자마자 독자들은 ‘어마무시’한 사건에 직면하는데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한둘이 아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게다가 그 연극적인 무대라니.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후던잇(Whodunit)’ 장르의 성격을 고려하면 큰 흠은 아니다.
미스터리 장르의 미덕은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가학적인 고통, 혹은 즐거움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도입부는 모범적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크고 작은 문제가 서서히 드러난다. 플롯은 재활용이고 ‘안락의자 탐정(armchair detective)’을 자처하는 ‘포와로’의 추리는 기계적이다. 작가의 특기였던 ‘로맨틱 미스터리’조차 수줍음이 사라져 억지스럽고 민망하다. 스파이 스릴러 장르와 전통적인 후던잇 장르를 섞어놓은 작가의 시도는 서로 삐걱거려 다소 황당한 결말로 이끈다.

사실 자신의 기존 작품에서 플롯을 재활용해 환골탈태한 작품으로 (새 작품인 척) 내놓는 건 작가의 장기이고 결과 또한 대부분 훌륭하니 (크리스티의 작품에 익숙하다면) 독창성 운운하며 트집 잡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스파이 스릴러와 후던잇의 혼용 또한 작가가 꽤 자주 사용한 방법인데, 이 경우에 있어서 결과는 ‘케바케’다. 어떤 작품은 괜찮고 어떤 작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후자인데 두 장르가 따로 논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범죄는 영국 내의 ‘공산주의자’를 고발하려는 의도와 잘 붙지 않는다. 목적과 성격이 전혀 다른 두 플롯이 한 작품 안에서 각자 고유한 지면을 차지하면서 적절히 뒤섞이려면 공통분모(여기서는 동기와 기회 면에서)가 있어 서로 돕거나 반목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상관이 있는 모양새가 나와 작가의 의도가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지금은 살인범도 그렇고 포와로도 그렇고 지나치게 운(어쩌면 우연)에 의존하고 있다. 어쩌다 얻어걸린다고나 할까.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거의 말년에 완성한 작품이다(63년 作. 이로부터 10년 후, 작가가 마지막으로 쓴 소설, ≪운명의 문https://soulflower71.tistory.com/407≫이 출판된다). 작가가 60년대에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 사건의 ‘불가사의함’이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 작품은 그런 특징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인간의 양면성, 사건보다는 캐릭터에 포커스를 두어 작가가 여전히 ‘인간’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소’의 대립이 한창이었던 60년대의 작품이니, 스파이, 간첩 운운하는 이런 이야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의 세대가 이 작품을 읽는다면 주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작품에도 당시의 소련에 망명하려는 인물이 나오는데, 적지 않은 작품에서 공산주의를 적대시했던 걸로 미루어 작가가 보수적이었다고 짐작해도 될까(여러 평론가들이 크리스티를 매우 보수적인 사람으로 여긴다). 하지만 당시엔 이쪽 세계에서라면 당연한 일이지 않았나. 오늘날 스파이 스릴러를 쓰려는 작가들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할까. 어떤 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갈등을 엮으며 어떤 싸움을 할까. 과거의 스파이 스릴러가 ‘소련 팔기’가 주종목이었다면, 오늘날의 스파이 스릴러는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을 위해, 문학으로서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할까. 한 장르 안에서도 문학이 시대에 맞춰 다양한 모습으로 변태되는 걸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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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키스의 말 - 2024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배수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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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효석 문학상 수상집과 세 작품이나 겹치네요. 무려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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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10-11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엄청시리 좋은 작품인가 봅니다~. 이효석 문학상과 김유정 문학상을 같은 해에 동시 수상한 작가가 셋씩이나!
 
런던 비밀 강령회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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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sense.
이런 책 읽으면 화난다.
출판은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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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10-10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 읽으실 지 모르지만, 영꽃님 리뷰 팬입니다~.

영꽃 2024-10-1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런던 비밀 강령회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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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8세기 말 영국. 심령 사업으로 유명한 ‘런던 강령술 협회’의 수장 ‘볼크너’가 살해당하자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영매(靈媒, a Medium) ‘보델린’이 파리에서 영국으로 건너온다. 보델린의 제자 ‘레나’도 함께 오는데, 볼크너가 살해당한 날, 레나의 동생 ‘에비’ 역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됐다. 두 여자는 범인을 찾기 위해 강령회를 계획한다.

책을 읽고 화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지극히 주관적으로) 정말 엉망이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렇다.

이 책은 그냥 한 마디로 못 썼다. 재미가 있고 없고 지루하고, 이런 문제가 아니다. 그냥 못 쓴 거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거기다가 길기까지 해서(본문만 거의 450쪽) 사람 미친다.

일단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다.
심령물, 오컬트(occult), 사후 세계, 이런 것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마음이 동할 만하다. 거기에 페미니즘 서사에 퀴어 서사까지 보태져 풍부한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여성들에게 배타적인 클럽을 무대로 두 영매가 남자들의 범죄를 까발리고 응징하는 통쾌한 서사를 기대할 만도 하지 않은가.
이야기 자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은 초현실에 대한 긍정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데(정통은 아니지만 사이비도 아닌) 그런 무리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거짓, 인간의 나약함을 악용하여 돈을 벌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악의 무리를 고발하려는 취지도 좋아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냥 못 썼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 말이 안 된다.

우선 레나의 동기가 이해 안 간다. 레나는 과학의 편에 있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동생의 복수를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경찰 수사가 어떻게 진행됐고 마무리됐는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은 없는지, 이런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수단에 매달리지 죽은 동생의 영혼을 만나려고 영매에게 달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영매의 제자를 자처하다니.
이런 동기가 괜찮아 보이는가? 우연히, 미처 깨닫지 못한 숨은 능력을 발견하고 뛰어드는 게 아닌데? 레나는 그러면서 계속 심령의 세계를 의심한다. 대체 뭐 하자는 건가.

그리고 설사, 작가가 심령이나 영혼의 존재를 긍정했다 치더라도, 영혼의 도움으로 범죄를 해결하는 게 18세기 영국에선 흔한 일이라 치더라도, 독자들에게 그걸 믿으라고, 사건과 갈등의 해결이라고 들이밀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희생자의 영혼이 나와 정답을 알려주는 이 작품의 엔딩을 봐라. ≪장화 홍련전≫이 따로 없다. 이럴 거면 바로 강령회를 해버리지 400쪽이 넘는 분량이 왜 필요했나. 하는 일도 거의 없고 그조차 영혼이 알아서 다 알려주는데 주인공은 왜 필요한가.

강령(降靈), 소위 죽은 사람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접촉하는 행위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고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능력은 ‘타고 난다’.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의 무속신앙(무교)을 보라. ‘신내림’의 과정은 무당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시험 공부하듯 책을 파고든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역을 공부해도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주풀이 정도다. 그런데 레나는 공부를 해서 영매가 되려 한다. 당시엔 영매 자격증이라도 있었나? 영매 되기가 제일 쉬웠어요. 뭐 이런 건가?

심령, 영혼, 접신(빙의), 이런 걸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믿는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다. ‘행위와 근거’의 장르다. 과학과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걸 아예 외면한다. 경찰 수사에 대한 짧은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다. 아주 짧게 언급되긴 하는데 아무 의미 없다.
그런 장면이 꼭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절차와 단계가 있다. 소설과 이야기의 진행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으면 비약이고 과장이다. 작가는 두 사람의 죽음에 어떤 의문이 있는지, 왜 살인인지, 주인공이 독자들과 함께 풀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기본 세팅조차 안 되어 있다. 작가는 거의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사이비, 돌팔이일지도 모르는 주인공을 그냥 쫓아가라고 요구한다. 이 정도면 막무가내다.

인물들은 모호한 동기에, 작가의(이야기의) 필요한 대로만 움직인다. 그게 무척 우습고 바보 같고 억지스러워 보인다. 예를 들면.
악당이 권총으로 두 여자를 위협하고 있는데, 두 여자는 바로 코앞에서 악당을 상대할 방법을 모의하고 있다. 악당이 한눈을 팔거나 자리를 비운 상황도 아니다. 그것도 모자라 (썸을 타는 관계의) 여자들은 그 와중에 에로틱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쯤 되면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 아닌가.

두 여자의 로맨스는 어떤가? 로맨틱한가? 발정난 뭣처럼 보이지 않는가? 적절해 보이지도 않고 애틋해 보이지도 않고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통에 심지어 이야기 흐름을 툭툭 끊어놓기까지 한다. 잘 다뤘다면 여성 퀴어들의 이야기는 나름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불필요하고 어색하고 의미 없고 그냥 거추장스럽다.

이 작품은 그냥 서툴다. 호러와 미스터리, 두 장르의 충돌, 이런 거 따질 가치도 없다. 인물들의 동기도 모호하고 개연성도 없다. 장면들을 잘 분석해 보라. 말도 안 되고 어리석고 민망한 장면투성이다. 애초에 설정이 구멍투성이니 피할 수 없는 결과다. 미국 소설 출판 시장 상황이 어떤지 알 수도 없고 나랑 전혀 상관도 없지만, 이런 소설을 번역해서 내놓을 생각을 한 우리나라 출판 시장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작가가 의욕만 앞세웠다. 역사물을 기본으로 미스터리, 오컬트 호러, 고딕소설, 페미니즘에 퀴어 서사까지 작가가 욕심을 너무 부렸다. 보통 이런 건 장점이기 쉽지만 이 작품은 단점이다. 산만하고 중심이 없다. 작가가 자료조사나 공부를 많이 한 티는 난다. 그런데 어쩌라고? 결과가 이 모양인데. 더 쓰고 더 화내고 더 비웃을 것들이 많지만 이쯤에서 멈춘다. 이런 시간도 아깝다.

돈은 고사하고 내 시간은 어떻게 보상해줄 건데? 진짜 작가한테 메일이라도 쓰고 싶다. 근데 영어다. 대신 출판사에 항의라도 해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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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라이터
앨러산드라 토레 지음, 김진희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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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의 나이에 쓴 데뷔 소설이 대박을 치고 서른두 살에 이미 대성한 작가인 ‘헬레나’는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앞으로 남은 삶은 대략 3개월. 헬레나는 위약의 어마어마한 금전적 대가를 치르면서 작업 중인 소설의 계약을 파기한다. 그녀에겐 죽기 전에 꼭 써야 할,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일생일대의 과업인 셈인데, 그건 바로 자신의 이야기. 4년 전, 그녀는 남편과 어린 딸을 잃었는데, 아무래도 그 책임이 바로 그녀에게 있는 것 같다.

이야기는 대략 두 질문으로 집약된다.
① 헬레나와 그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② 우리의 주인공은 과연 남은 석 달 동안 장편 소설 한 권을 마칠 수 있을까.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작가들의 작업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흥미로웠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 스릴러로 방향을 트는 지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작가는 ‘설명하기’보다 이야기에 관한 정보들을 하나씩 흘리면서 독자들을 감질나게(책을 놓지 못하도록) 한다. 덕분에 정보가 거의 없는 초반의 혼란스러움을 지나면 유려히 흐르는 이야기에 쉽게 빠져든다.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직진하는 스타일도 작품의 미덕이다.

생생한 인물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에겐 빛과 그늘, 표면과 이면이 존재한다. 그들은 어떤 순간에 우리가 할 만한 생각과 행동을 한다. 상당히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간간히 튀어나오는 유머가 윤활유 역할을 한다. 작가의 꾸준하고 집요한 관찰과 공감의 결과처럼 보이는데, ‘핍진성’의 문제는 사건이 아닌, 인물들의 행동과 반응에 달려 있는 게 맞다.

시한부 암 환자의 육체적 한계와 과거의 비밀이 어우러져 독특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과거의 사건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나날이 죽음에 가까워지는 헬레나의 모습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마냥 연민을 갖기는 힘들다. 목표에 매진하면 주위의 모든 것들은(어린 딸조차) 방해물이 되는 헬레나의 성격은 (MBTI 성격 테스트에 의하면) 전형적인 ‘I’와 ‘T’의 나쁘고 못된 부분을 그대로 답습한다. 여기에 (‘F’인 게 분명한) 대필 작가 ‘마크’와의 충돌, 성적인 긴장감 같은 요소들이 첨가된다.

헬레나가 죽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에 집착했던 이유를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죽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신과의 화해’가 아닐까 싶다. 잘 살았다고, 잘 했다고, 수고 많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건 사실 언제나 필요하다.
글을 쓰는 행위에 ‘치료’의 측면이 강조될 때, 그 치료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그 작업을 통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타인이 아닌 ‘나’로부터 인정받고 위로받는다. 나를 쓰다듬고 안아주며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 역시 타인이 아닌 ‘나’이다. 진정한 자신과의 화해는 원망과 증오, 후회, 죄책감, 미련, 그리고 어쩌면 그 밑바닥에 고여 있는 감정의 찌꺼기 같은 사랑마저도 소거한다. 이 작품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잃었던 적이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인 것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야기의 마법’이란 말이 있다. 이야기가 요술을 부린다는 말인데, 요술이란 게 알고 보면 뻔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 작품 역시 ‘가정 스릴러(Domestic Thriller)’라는 장르 안에서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비밀스러운 남편, 위험에 빠지는 아내) 하지만 이 작품은 특별한 구석이 있다. 화려한 소품과 유별난 몸짓으로 포장된, 그냥 평범한 요술과는 달리, 진짜 마법을 부리고 있다.
인물들엔 ‘진심’이 있고 이야기 속엔 삶의 ‘진실’이 있다. 이 작품은 ‘용기’와 ‘책임’에 관한, 지금 생각나는 소설 중 가장 솔직한 질문을 담고 있다. 스릴러 따위를 읽고 울다니.

그런 데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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