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라이터
앨러산드라 토레 지음, 김진희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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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의 나이에 쓴 데뷔 소설이 대박을 치고 서른두 살에 이미 대성한 작가인 ‘헬레나’는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앞으로 남은 삶은 대략 3개월. 헬레나는 위약의 어마어마한 금전적 대가를 치르면서 작업 중인 소설의 계약을 파기한다. 그녀에겐 죽기 전에 꼭 써야 할,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일생일대의 과업인 셈인데, 그건 바로 자신의 이야기. 4년 전, 그녀는 남편과 어린 딸을 잃었는데, 아무래도 그 책임이 바로 그녀에게 있는 것 같다.

이야기는 대략 두 질문으로 집약된다.
① 헬레나와 그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② 우리의 주인공은 과연 남은 석 달 동안 장편 소설 한 권을 마칠 수 있을까.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작가들의 작업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흥미로웠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 스릴러로 방향을 트는 지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작가는 ‘설명하기’보다 이야기에 관한 정보들을 하나씩 흘리면서 독자들을 감질나게(책을 놓지 못하도록) 한다. 덕분에 정보가 거의 없는 초반의 혼란스러움을 지나면 유려히 흐르는 이야기에 쉽게 빠져든다.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직진하는 스타일도 작품의 미덕이다.

생생한 인물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에겐 빛과 그늘, 표면과 이면이 존재한다. 그들은 어떤 순간에 우리가 할 만한 생각과 행동을 한다. 상당히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간간히 튀어나오는 유머가 윤활유 역할을 한다. 작가의 꾸준하고 집요한 관찰과 공감의 결과처럼 보이는데, ‘핍진성’의 문제는 사건이 아닌, 인물들의 행동과 반응에 달려 있는 게 맞다.

시한부 암 환자의 육체적 한계와 과거의 비밀이 어우러져 독특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과거의 사건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나날이 죽음에 가까워지는 헬레나의 모습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마냥 연민을 갖기는 힘들다. 목표에 매진하면 주위의 모든 것들은(어린 딸조차) 방해물이 되는 헬레나의 성격은 (MBTI 성격 테스트에 의하면) 전형적인 ‘I’와 ‘T’의 나쁘고 못된 부분을 그대로 답습한다. 여기에 (‘F’인 게 분명한) 대필 작가 ‘마크’와의 충돌, 성적인 긴장감 같은 요소들이 첨가된다.

헬레나가 죽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에 집착했던 이유를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죽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신과의 화해’가 아닐까 싶다. 잘 살았다고, 잘 했다고, 수고 많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건 사실 언제나 필요하다.
글을 쓰는 행위에 ‘치료’의 측면이 강조될 때, 그 치료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그 작업을 통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타인이 아닌 ‘나’로부터 인정받고 위로받는다. 나를 쓰다듬고 안아주며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 역시 타인이 아닌 ‘나’이다. 진정한 자신과의 화해는 원망과 증오, 후회, 죄책감, 미련, 그리고 어쩌면 그 밑바닥에 고여 있는 감정의 찌꺼기 같은 사랑마저도 소거한다. 이 작품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잃었던 적이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인 것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야기의 마법’이란 말이 있다. 이야기가 요술을 부린다는 말인데, 요술이란 게 알고 보면 뻔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 작품 역시 ‘가정 스릴러(Domestic Thriller)’라는 장르 안에서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비밀스러운 남편, 위험에 빠지는 아내) 하지만 이 작품은 특별한 구석이 있다. 화려한 소품과 유별난 몸짓으로 포장된, 그냥 평범한 요술과는 달리, 진짜 마법을 부리고 있다.
인물들엔 ‘진심’이 있고 이야기 속엔 삶의 ‘진실’이 있다. 이 작품은 ‘용기’와 ‘책임’에 관한, 지금 생각나는 소설 중 가장 솔직한 질문을 담고 있다. 스릴러 따위를 읽고 울다니.

그런 데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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