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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나팔 ㅣ 제안들 33
리어노라 캐링턴 지음, 이지원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2년 5월
평점 :
주인공은 92세의 ‘메리언’. 스스로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생명체가 아닌 사물로 인식하고 있는 그녀는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활달하고 매우 부유한 친구 ‘카르멜라’가 방문하고 메리언에게 ‘귀나팔’을 선물한다. 잘 들리지 않아 애를 먹던 메리언에게 아주 유용한 선물이었던 것. 하지만 메리언은 듣고 싶지 않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게 된다. 아들 내외가 자신을 노인 요양 시설에 보내기로 작당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진행할수록 진화를 거듭한다. ‘노인’, 특히 ‘여자 노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이야기는 계급의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가 살인 사건이 한 건 터지더니 정치의 아이러니, 지구와 생태, 환경 문제로 거듭나다가 마녀와 흑마술이 나오고 세기말 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급기야는 늑대 인간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한 마디로 정신없다. 메리언의 주변 모습 아래로 여러 갈래의 서사가 (그다지 일관성도 없이) 동시에 진행하는데, 줄거리를 간략하게나마 약술하는 것이 곤란할 지경이다. 그런데 수상쩍게도 꽤 흡인력이 좋다.
독자의 정신머리를 쏙 빼놓는 서사 진행에 독특한 이미지들이 강하게 남는다. 한 폭의 상상화 같기도 악몽 같기도 하다. 모든 무대, 장소, 인물들의 잔상이 강하다.
내 경우엔, 이야기를 즐기기보다 이런 이미지의 홍수, 작가의 상상력을 즐겼다. 이야기로 말하자면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어떤 이슈에 자극받아 이런 작품을 썼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야기는 정치를 거부하고 인간과 지구의 ‘자연다움’을 지향한다.
결말에서 세상은 갱생하고 부활한다. 온갖 잡다한 것들은 죄다 쓸려가고 사라진다. 필요한 것들만 남는다. 그것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세상에. 늑대인간이라니…), 우리가 갖는 희망의 상징처럼 보인다.
동화와 신화적인 요소들을 적극 수용한 폭발하는 상상력이 놀랍다. 주술과 마법이 난무하는 신비롭고 동화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루고, 작가의 자연친화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이 난무한다. 한 폭의 지옥도, 혹은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주제로 한 상상화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이다.
읽으면서 번역이 참 잘 됐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다가 내가 번역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지? 했다가, 그럼에도 번역 소설을 읽다 보면 번역자가 번역은 하지 않고 해석을 하고 있네, 라고 불평하거나, 이건 문장이 너무 이상해, 의심하거나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투덜거린 경험을 떠올리면, 외국어에 능통하지 않아도 결과물로 번역자의 실력을 독자가 가늠하는 게 아주 불가능한,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아무튼 괴상+요상+아름답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눈에 잘 붙었던 것은 번역이라는 작업을 거친 문장이 꽤 훌륭했기 때문이었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