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나팔 제안들 33
리어노라 캐링턴 지음, 이지원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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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얼어 죽기를 바라자. 권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게 인간한테 훨씬 좋고 건강할 거라고 확신해.❞ (215쪽)

❝여긴 지옥이야. 그렇지만 지옥은 그냥 용어의 한 형태일 뿐이야. 사실은 여기는 모든 것이 유래하는 세계의 자궁이지.❞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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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나팔 제안들 33
리어노라 캐링턴 지음, 이지원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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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92세의 ‘메리언’. 스스로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생명체가 아닌 사물로 인식하고 있는 그녀는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활달하고 매우 부유한 친구 ‘카르멜라’가 방문하고 메리언에게 ‘귀나팔’을 선물한다. 잘 들리지 않아 애를 먹던 메리언에게 아주 유용한 선물이었던 것. 하지만 메리언은 듣고 싶지 않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게 된다. 아들 내외가 자신을 노인 요양 시설에 보내기로 작당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진행할수록 진화를 거듭한다. ‘노인’, 특히 ‘여자 노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이야기는 계급의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가 살인 사건이 한 건 터지더니 정치의 아이러니, 지구와 생태, 환경 문제로 거듭나다가 마녀와 흑마술이 나오고 세기말 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급기야는 늑대 인간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한 마디로 정신없다. 메리언의 주변 모습 아래로 여러 갈래의 서사가 (그다지 일관성도 없이) 동시에 진행하는데, 줄거리를 간략하게나마 약술하는 것이 곤란할 지경이다. 그런데 수상쩍게도 꽤 흡인력이 좋다.

독자의 정신머리를 쏙 빼놓는 서사 진행에 독특한 이미지들이 강하게 남는다. 한 폭의 상상화 같기도 악몽 같기도 하다. 모든 무대, 장소, 인물들의 잔상이 강하다.
내 경우엔, 이야기를 즐기기보다 이런 이미지의 홍수, 작가의 상상력을 즐겼다. 이야기로 말하자면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어떤 이슈에 자극받아 이런 작품을 썼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야기는 정치를 거부하고 인간과 지구의 ‘자연다움’을 지향한다.

결말에서 세상은 갱생하고 부활한다. 온갖 잡다한 것들은 죄다 쓸려가고 사라진다. 필요한 것들만 남는다. 그것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세상에. 늑대인간이라니…), 우리가 갖는 희망의 상징처럼 보인다.

동화와 신화적인 요소들을 적극 수용한 폭발하는 상상력이 놀랍다. 주술과 마법이 난무하는 신비롭고 동화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루고, 작가의 자연친화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이 난무한다. 한 폭의 지옥도, 혹은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주제로 한 상상화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이다.



읽으면서 번역이 참 잘 됐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다가 내가 번역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지? 했다가, 그럼에도 번역 소설을 읽다 보면 번역자가 번역은 하지 않고 해석을 하고 있네, 라고 불평하거나, 이건 문장이 너무 이상해, 의심하거나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투덜거린 경험을 떠올리면, 외국어에 능통하지 않아도 결과물로 번역자의 실력을 독자가 가늠하는 게 아주 불가능한,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아무튼 괴상+요상+아름답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눈에 잘 붙었던 것은 번역이라는 작업을 거친 문장이 꽤 훌륭했기 때문이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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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쟁이
E. 록하트 지음, 하윤숙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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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의 ‘케이든스’와 ‘조니’, ‘미렌’은 또래의 사촌지간이다. 대부호인 할아버지 소유의 ‘비치우드’ 섬엔 엄마와 이모들의 저택이 하나씩 있다. 어렸을 때부터 여름 휴가철이면 언제나 그곳에서 함께 추억을 만들던 세 사람에게 이모가 사귀는 인도 출신 애인의 조카 ‘갯’이 합류한다. 갯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섞이고 케이든스는 갯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케이든스는 모종의 일을 겪은 후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편두통과 너무 많다 싶은 약물 투약 이상으로 심각한 건 바로 부분적 기억 상실, 기억이 뚝 잘려나간 2년 전 여름,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비치우드 섬은 (물론 가상의 섬으로) 잘 설계된(작가의 의도를 한층 잘 살리도록 고안된) 무대다. 그곳은 하나의 작은 세계다. 별장이 아닌 저택들, 그것도 네 채씩이나(섬이 얼마나 넓길래) 있다. 한 가족임에도 독립된 생활공간이 필요한 이유는 각자의 개인성을 잃지 않으려는 욕구의 발로다. 그들은 한시적이지만 육로도 없는 섬에 자신들을 고립시킴으로서 외부를 차단한다. 가족 외 사람의 ‘침입’을 불허한다. ‘섬’이라는 공간의 폐쇄성은 그곳에 모인 어른들의 태도를 대변한다.

섬 안에 모인(갇힌) 그들은 평화로울까. 보이는 것과 달리 세 딸들(엄마와 이모들)이 겪고 있는 갈등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런 어른들 옆에서 십대의 아이들은 오히려 평화롭다. 그들이 보기에 어른들이 겪는 문제는 사소하기만 하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까. 십대의 아이들은 서툴렀다.

십대들의 성장드라마+로맨스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시작된 이야기는, 가족들과 함께 섬을 다시 방문한 캐디가 새로 지은 할아버지의 저택, 그리고 말을 아끼며 어딘가 비밀스러워진 사촌들의 모습을 눈치 채면서 방향을 튼다. 이 작품은 한 십대의 내적 성장기이면서 이방인 혐오와 배금주의, 미국 내 백인 사회의 폐쇄된 분위기를 고발하는 사회 소설이고 주인공이 기억을 찾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비밀이 드러나는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하다.

결말은 충격적이다. 드러내는 방식이 익숙하긴 해도 인물들의 감정에 힘입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낸다.
작가가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 무척 능숙하다. 세련됐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독자의 시선을 손가락 끝으로 유도하면서 시야에 들어온 달을 ‘느끼게’ 하는 식이다. 덕분에 이야기가 무척 풍성해졌다. 보통 길이의 장편소설 분량에 이야기가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수수께끼 가득한 이야기, 흥미로운 전개, 날카로운 비판 의식과 문제 제기. 청소년 소설의 외양에 비극적인 이야기는 더 많은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비극이 단지 십대들의 미숙함 탓일지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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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3
안보윤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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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미’는 의미없는 폭력과 기상천외한 미친 짓으로 어렸을 때부터 유명했다. 그런 언니를 둔 덕에 화자인 ‘전수영’은 부모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우그러지고 찌그러진 채 살아왔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나름의 방식을 찾아야 했다. 수영은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전수미’들을 식별하고 피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수영은 ‘자신 안의 전수미’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악의’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작품 속엔 여러 형태의 악의가 나온다. 적극적인 악의, 소극적인 악의, 결과로서의 악의, 기타 등등. 결과로서의 악의는 약간 억울한 점도 있으나, 결과가 이런데 넌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고? 이렇게 따지면 할 말은 없다. 그도 그런 게 무의식이란 게 있으니까. 무의식의 밑바닥에 굳이 악의가 아니더라도 증오와 무관심이 흐르면 수면 위로 어떤 물고기가 튀어 오를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게 사실이니까.

‘절대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절대악’도 거의 거짓말이다. 우리의 마음속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한다는 건 심리학계에서 꾸준히 주장하고 행동심리학에서 증명해 온 가설이다. 평소에 선한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거나, 반대로 악한 인간으로 알려진 사람이 의외의 선한 행동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왕왕 본다.
작품 속 ‘전수미’는 오로지 동생을 위해 행동한 적이 있다. 빈틈없는 장삿속에 냉혈한처럼 보이는 ‘구원장’ 역시 철저히 악인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 수영은?

수영이 ‘태풍’의 결말을 몰랐을까? 나쁜 결과를 예측하기가 전혀 불가능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쁜 조짐을 외면한건 결과를 방치한 것과 다름없을까. 소극적으로나마 그런 결과를 바라고 의도하진 않았을까. 고작 ‘개’일뿐인데, 그렇게까지? 너무 잔인한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작가의 생각은 어떨까.

추리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애정하고 존경하는)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는 작품들 속에 ‘공기 중의 악(evil in the air)’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그 말인 즉,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악의는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일 테다. 세심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악의는 도처에 존재한다.

여러 작품들을 통해 본 작가 ‘안보윤’은 위로보다는 고발, 격려보다는 각성을 촉구한다. 날카롭게 벼린 시선은 인간의 내면을 향한다. 선과 악의 본질을 물으려는 시도는 작가의 관심이 인간 의 본성에 있음을 증명한다.

사족

전수영-전수미 자매의 관계는 작가의 작품집 ≪밤은 내가 가질게≫의 연작 단편, <미도>와 <밤은 내가 가질게>에 나오는 자매를 연상하게 한다. 연관해서 읽으면 의미가 더욱 확장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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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머더 클럽
로버트 소로굿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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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연령과 직업의 세 명의 여성이 의기투합하여 우여곡절 끝에 동네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다. 흥미롭고 유쾌하며 긴장감 넘친다. 쉽게 잊히지 않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건들을 해결한다. 결말이 궁금해 말 그대로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다. ‘쾌락’으로서의 독서를 경험하는 가장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 독자들을 타겟으로 한 ‘코지 미스터리(Cozy Mystery)’의 전형이다. 범죄 자체는 끔찍하고 어둡지만 전체적으로 통통 튀는 밝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진행되는 템포도 경쾌하다.

인물들이 기가 막힌다. 70대의 대범한 할머니, ‘주디스’, 마을 목사 부인인 새침한 40대 ‘벡스’, 그리고 이웃들의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정보통 ‘수지(50~60대로 추정)’.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든 인물들답게 모두 개성들이 특출하다. 이 아마추어 탐정 트리오를 내세운 작품이 이후로 두 작품 더 나왔다고 하는데 모두 해외 평점이 좋다. 우리말로 번역이 될지 궁금한데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

미스터리 소설답게 범죄 구상에 신경을 많이 썼다. 용의자들을 나열하거나 범인을 숨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범인이 드러나는 결말의 쾌감도 상당한데, 알고 보니 작가가 범죄+스릴러 TV 시리즈 시장에서 베테랑이다. ‘제임스 본드’ 식은 아니어도 80년대 TV 외화 시리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액션은 눈여겨 볼 만하다.

살인의 이해관계가 ‘동기’와 ‘기회’로 얽히고설키는 범죄는 굉장히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데, 차 떼고 포 때고 남는 뼈대는 재활용이다. ‘퍼트리셔 하이스미스’나 ‘프레드릭 브라운’의 가장 유명한 미스터리 소설들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데, 어차피 이들도 최초의 작가는 아니었을 것이다(해 아래 새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작가는 그것을 살짝 한 번 더 비트는데 그게 무척 영리해 보인다.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라고나 할까.

사실 이 작품에 대해 쓸 말은 길지 않다. 미스터리 소설로서 눈에 거슬리는 게 없다는 말도 되지만 재미있게 읽기는 했는데 평범하다는 말도 된다. 전자는 장점이고 후자는 단점이다. 하지만 내가 주인공들을 계속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점(그만큼 인상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묵은 것을 가져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환골탈태시켰다는 걸로 칭찬할 게 조금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작가의 다른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로 충분하다. 후속작들이 번역되길 애타게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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