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ㅣ 네오 클래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주)열림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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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여덟 번째 책.

 

★★★

 

읽지도 않았는데 읽었다고 착각하는 소설 작품들이 몇 개 있다. ≪작은 아씨들≫, ≪빨강머리 앤≫, 그리고 바로 이 소설.

그런 데엔 소설의 유명세가 가장 큰 이유다. 원작이 워낙 유명하니 이런 저런 곳에서 어떤 이야기인지 주워들을 기회가 충분했고,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영화 등도 많이 나와 있으니 소설보다 그것들에 이미 익숙해졌던 것. 이 작품 역시 일찌감치 영화로 접했고, 이십여 년 후 새로 만들어진 영화를 또 봤으니, 책을 읽으면서 내내 ‘로버트 레드포드’와 ‘리나르도 디카프리오’, 두 배우의 얼굴이 오락가락했던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막상 읽고 나니 어땠을까.

 

소설 자체로만 보면 눈에 띄는 요소는 딱히 없어 보인다. 계급 차이와 형편없는 주머니 사정 탓에 사랑을 포기했던 남자가 다소 의뭉스러운 방법으로 부자가 되어 여자 앞에 다시 나타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장벽에 걸려 좌절하고 파멸하는, 다소 평범한, 그리고 충분히 뻔한 이야기.

불륜과 사고, 의심과 오해, 질투와 살인 등의 요소는 이야기에 다이내믹함과 멜로드라마성을 부여하지만, 이런 서사적 장치 역시 크게 주목할 만한 건 아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화려하지만 우울한 정서, 그것에 기인한 독특한 질감은 꽤 좋았다. 일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재즈 시대’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던 걸’이나 ‘모던 보이’들이 오늘날 ‘셀럽’, ‘패셔니스타’ 같은 대접을 받았던 우리의 일제강점기 시절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하지만 전쟁 후 경제 부흥과 몰락을 앞둔 미국과 식민지 조선은 문화를 소비하는 행태나 심인적 동기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개츠비’는 법을 어겨가며 돈을 모으고, 아무리 첫사랑이라지만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데이지’에게 추근거리다가 낭패를 본다. 작가는 이 사람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작가는 주인공을 소위 반면교사의 인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돈에 대한 개츠비의 욕망만 본다면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해 보여 오히려 인간적이다. 물질만능주의나 배금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고안된 인물이라면 과연 적절한 인물일지 의문이 든다. 개츠비의 욕망은 ‘이카루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의 금주법에 반하여 밀주 사업을 벌인 건 범법행위라고 쳐도, 특히나 전쟁이 남긴 폐허에서 살아남으려는 욕망이 팽배한 분위기라면 사람들은 더욱 물불 안 가리지 않았을까. 가난해서 사랑의 기회를 잃은 개츠비 같은 남자라면 더 그랬을 터.

 

개츠비의 파국은 그의 내면에서 온다. 사랑이 너무 지나쳤달까. 이기적인 속도로 폭주했다는 말도 가능하겠다. 당시엔 불륜이나 혼외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어떤 법적인 장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이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개츠비의 행동은 너무나 순수하고 외곬수인데다, 치열하다 못해 찌질해 보이기까지 한다. ‘톰’ 부부를 앞에 두고 자신과 데이지의 관계를 털어놓는 장면(7장)에선 ‘뭐 저런 자기 혼자만 알고 경우도 없는데다 머리까지 나쁜 인간이 있나’, 싶기도 했다. 제목의 ‘the Great’가 이런 뉘앙스였을지도.

 

내겐 이 소설이 비극적인 결말의 로맨스 소설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눈이 돌아갈 듯 모든 것이 변화무쌍한 요즘, 모든 동력의 저변에 돈이 흐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만능주의 어쩌구 하는 경고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할까 의심쩍다. 돈을 숭배하듯 하는 오늘의 세태가 위험한 건 사실일지라도 비상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이 작품은 극히 평범한데다가 ‘올드’하기까지 하다. 이 화두가 2026년의 독자들에게 먹히려면 이 이상의 뭔가가 더 있어야 한다.

 

세상에 나온 지 꼬박 백 년이 된, 대단히 미국적인 이 소설이 당시의 미국과 서양 독자들을 각성시키고, 더 나중의 독자들에겐 대공황의 징조를 품은 선지자 같은 작품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적 배경을 걷어내면 남는 거라곤 화려함과 사치, 이후의 몰락, 치정과 살인 등이 엮어내는 한 남자의 비극일 뿐인 이 작품이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독자들에게 여전히 읽히고 고전으로 회자되며 추앙받는 이유는 뭘까 궁금하다.

 

고전이 시대를 관통해서 백 년 이후의 독자들에게 와닿는 건 이야기의 보편성, 원형성이 여전한 힘을 갖기 때문일 테다. 사실 이 작품엔 특별한 구석이 별로 없다. 통속적인 소재에 남발하는 우연, 자세히 들여다보면 플롯에 구멍 등, 구조적인 측면에서 봐도 흠결이 많다. ‘재의 고개’나 부릅뜬 눈이 그려진 빌보드 같은 상징도 다소 노골적인데다 메시지도 이미 낡았다.

그럼에도 부(富)를 향한 욕망, 일편단심의 사랑, 희생, 이성을 마비시키는 질투, 폭력성, 이기심과 자기 보존 욕구 등의 아주 보편적인,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 본연의 성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데 작품의 매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주 비슷하면서도 다른, 비슷한 시기에 쓰이고 발표된 ‘윌라 캐더’의 소설 ≪로스트 레이디(A Lost Lady, 23년)≫가 생각난다. 부유한 사업가의 안주인을 동경하는 마을 소년(이 작품에선 ‘닐’)의 시선으로, 그녀의 몰락과 그 이후의 이야기가 그려지는데, 이 작품에서도 ‘돈’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다뤄진다. 남편이 죽고 재산을 잃어가는 귀부인이 세상물정 몰랐던 자신을 닦아세우며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구성, 세대가 교차되는 시기의 갈등과 혼란, 가치관의 대립 같은 화두는 두 소설이 공통적이지만, 윌라 캐더는 ‘돈’과 ‘물질’을 경계하는 관점은 지양하고 있는데 그런 지점에서 ‘피츠제럴드’의 소설과 차별된다. 윌라 캐더의 소설 역시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결말의 행간엔 희망이 스며있다는 점도 두 소설이 다른 점이다.

 

사족.

 

1. 한글 번역이 아주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미 소설 중 하나라고 한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대개 그렇다고. 그 중에서 번역이 가장 유려하기로 소문난 ‘김석희’의 번역으로 출간된 ‘열림원’의 책을 골랐는데, 글쎄…, 번역 소설의 한계인가 싶기도.

 

2. 이 소재가 만약 당시의 미스터리 작가들의 손에 들어갔다면 어떤 소설이 태어났을까. 이 소설엔 미스터리 소설에 필요한 재료들이 모두 다 있다. 의혹에 싸인 과거를 안고 다시 나타난 남자, 삼각관계, 연적, 의문의 죽음, 시간 차 알리바이, 진실을 암시하는 메타포, 용의자들과 의외의 진상까지. 이 책을 읽는 도중, ‘애거서 크리스티’의 숨겨진 걸작 ≪파도를 타고(Taken at the Flood, 48년)≫가 생각났는데, 은근히 겹치는 설정들이 많아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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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 - 모호한 아이디어를 독자에게 전달되는 말로 바꾸는 힘
오가와 사토시 지음, 박대겸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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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일곱 번째 책.

 

★★★☆

 

❝소설을 읽는다는 건,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얼굴도 모르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비일상적인 행위다. (69쪽)❞

 

❝소설은 작가가 무엇을 표현했는지가 아니라 독자가 무엇을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160쪽)❞

 

저자가 소설에 방점을 두는 건 ‘재미’다. 저자는 소설의 ‘보편적 승리’는 독자들로 하여금 ‘재미있게’ 읽게 만드는 거라고 주장한다. 독서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성이 깊을수록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성은 뭘까?

 

‘저자는 독자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독자는 말해진 내용을 읽고 저자가 전하려는 바를 이해하려 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화자가 청자에게 적절한 정보를 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명료할수록 좋다. (75쪽)’

 

소설은 항상 독자(타자)를 향해 있어야 한다. 소설을 평가하는 기준은 항상 독자가 재미있다고 느끼는지 어떤지(107쪽)이다. 이런 면에서 소설가는 예술가로서의 태도와 상업 작가로서의 태도, 두 가지 면이 요구된다(162쪽)고 말한다.

 

소설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150쪽)는 말에 공감했다. 소설이란 작가가 자신의 언어를 자신의 방식으로 탐구해 가는 과정에서만 존재(150쪽)한다고 하니, 독자들마다 독법이 다르듯, 작가들도 소설을 쓰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저자는 ‘소설법(15쪽)’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단순히 취향이나 선호도 같은 의미를 포함하면서 넘어서는 것으로 이해된다. 소설의 행간에 흐르는 어떤 흐름, 구조적인 조건들, 형태에서의 불문율 같은 것일 테다.

간혹 읽기 곤혹스러운 소설을 만날 때마다 작가 탓을 하거나 나의 수준을 저주해왔던 나로서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였다. 저자에 의하면 작가와 독자의 ‘소설법’이 다를 뿐이다. 그러면서 ‘독자의 고집대로 소설을 읽는 게 바로 재미(19쪽)’라고 조언한다. 소설법이 맞지 않는 저자의 작품을 읽으면 대부분의 경우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19쪽)는 말은 위안이 된다.

 

우리가 (소설을 포함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메커니즘은 압축된 작품을 해제하여 그 근본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작가)의 인지’를 발견하고 수용하여 ‘그 너머’의 세계로 넓혀가는 과정(148~149쪽)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독’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관점이 상당히 재미있다.

저자는 독자의 오독을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독자의 경험에 접속하고 정보를 전달한다는 커뮤니케이션 본래의 역할을 이탈하여, 거기에 존재할 리 없는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일(80쪽)’, ‘각각의 해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 작가가 제시한 작품이 작가가 의도한 것과 서로 다른 것을 환기하는 것(150쪽)’이라 보며,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받는 작품일수록 오독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150쪽)’고 말한다.

작가의 손을 떠나 시장에 나온 작품은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다. 독자가 그 작품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엔 독자 자신의 삶과 체험에 영향을 받으므로 작품이 독자들에게 스며드는 정도와 양상은 천차만별일 테니, 저자는 그것을 당연한 감상,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보는 것 같다. 내게는 있어야만 하는 일로도 보이는데, 감상이 다양해질수록 작품이 생명력을 얻으리란 믿음 때문이다. 이는 곧 독서가 작가와 독자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저자의 말, 고집대로 읽으라는 조언과도 상통한다.

 

독법을 제시하고 일종의 방향을 제시하는 비평이나 리뷰의 역할에 대해서도 저자는 첨언하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것들이 독자들에게 색다른 결의 소설을 보여주어 감상을 확장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했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 난 약간 회의적이다.

오늘날 소설 비평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 가장 원초적인 솔직함이 미덕인 독자 리뷰조차 도서를 협찬 받는 형식에 의해 훼손되고 있지는 않은지, 내 불신이 탄력을 받는다.

 

저자인 ‘오가와 사토시’는 문단 데뷔 11년차인 일본의 중견 소설가로 장르를 넘나드는 전천후 작가다. 소설을 두 권 갖고 있으나 읽기를 미루고 미루다가, 어찌 먼저 읽은 게 이 책이다.

이 책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 쓴 소설에 관한 에세이 성격이 강하다. 저자 스스로는 작법책이 아니라고 말을 하는데, 소설가가 소설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작법에 대해 쓰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작정하고 쓴, 교과서적인 작법책은 아니더라도 작가 자신의 집필 습관이라거나, 소소하게 터득한 know-how 같은 것이 심심찮게 나온다. 추상화와 개별화, 문체, 복선, 아이디어, 작풍 등은 작법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미) 써버린 것에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고 아이디어도 발견(113쪽)’한다거나 ‘소설의 재미는 집필 과정에서 발생(97쪽)’한다는 걸 보면 ‘일단 쓰고 본다’는 작가의 평소 지침이 엿보인다.

 

짧은 분량에 그리 어렵지 않은 것들을 저자가 수다 떨 듯 하고 있어 쉽게 읽히지만, 번역의 장벽에 자주 걸려 넘어졌다. 번역이 그리 잘 된 것 같지 않다. 일본어 특유의 표현이나 일본 문장을 한글로 옮겼을 때의 특이한 어색함 등이 난무한다. 도대체 ‘탈법소설(22쪽)’은 무엇이며, ‘열화판(158쪽)’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단어들이 더러 눈에 띈다. 앞뒤 문맥으로 의미는 대강 ‘통밥’으로 때린다 쳐도, 어쩔 수 없이 일본 단어 그대로 풀었으면, 각주를 달던가, 한자라도 남겨 놓던가. 독자와의 소통을 이야기하는 책을 번역하면서 번역자야 말로 독자와의 소통은 아랑곳 않는 것처럼 보이니, 정말 어이없다.

 

에필로그로, 독자와 원활한 소통을 원하는 편집자와 고집을 부리면서도 독자 곁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한 작가의 티격태격, 고군분투, 아웅다웅을 보여주는, 짧은 소설이 실렸다. 이 책을 위해 따로 쓴 소설처럼 보이는데, 책을 마무리, 총정리해주는 느낌이랄까.

본문 어딘가에 나온 문장을 인용하자면, 이런 거다.

 

❝작품이 닿기를 원하는 상대에게 부족함 없이 전해지도록(가급적 정확하게), 쓸데없는 시간을 뺏지 않도록(가급적 단도직입적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상대가 나에게 일절 관심이 없다는 전제로(가급적 상대를 생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151~152쪽)❞

 

‘상대가 나에게 일절 관심이 없다는 전제로’. 전율이 흐른다. 맞는 말이다. 나는 소설가에겐 관심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건 그들이 쓴, 지어낸 이야기, 즉 소설 작품이다.

 

사족.

 

위의 인용된 문장에서도 번역에 실수가 있다. ‘쓸데없는 시간을 뺏지 않도록’이 아니고 ‘쓸데없이 시간을 뺏지 않도록’이 맞는 문장이다. (어으.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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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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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여섯 번째 책.

 

★★★☆

 

1800년대의 미국.

초라한 무대에 오르지만 ‘제니’는 마술에 진심이다. 실력이 꽤 출중한 마술사로서 그녀는 자신의(그리고 모든) 마술을 설명이 가능한 속임수, 약간의 기술이 동원된 손재주로 간주한다.

어느 날 쇼를 끝낸 제니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탐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제니에게 일을 제안한다. 당시 유명했던 영매(靈媒)인 ‘폭스 자매’의 비밀을 알아내 달라는 것. 많은 보수에 이끌린 제니는 그녀들의 강령회에 참여하여 은밀히 접근한다.

 

이야기의 중심엔 ‘사후 세계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세계의 존재들과 소통하는 게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유물론자이고 회의론자인 제니는 폭스 자매의 속임수를 밝히려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과학과 이성으로 무장된 제 신념을 흔드는 경험을 하고 난 뒤 태도가 살짝 변한다. 의심은 호기심으로 바뀐다.

 

이야기는 폭스 자매의 강령술을 속임수, 이단 행위, 사기 행각이라는 전제를 두고, 믿음(어쩌면 신앙)에 대한 사유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방향을 살짝 튼다.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강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고, 이것은 폭스 자매의 ‘딱’ 소리에 얽힌 비밀과 부딪힌다.

어디까지 믿을 수 있고 무엇을 가짜로 치부해야 하는지, 작가는 진짜와 가짜를 섞어놓으며 그 경계를 흐린다. 이런 혼란은 인물들의 대립 관계를 흐리게 만들고 그들을 상처 받고 슬픔이 많은 보통의, 동등한 인간들로 만든다.

아버지의 유품인 보잘것없는 마술 안내서에 집착하는 제니, 누가 아버지의 진정한 아들인가 증명하기 위해 대립하는 ‘로버트-윌리엄’ 형제, 우연한 사건으로 본의 아니게 쇼 비즈니스 계로 내몰려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폭스 자매의 갈등은 서로를 위로하며 감긴 눈을 뜨게 도우면서 잦아든다. 모종의 종교 행위로 시작된 이야기는 각자의 마음속 묻힌 상처와 아픔을 다독이는 결말을 맺는다.

 

영혼 운운하는 게 비이성적이고 야만의 찌꺼기라는 결론은 없다. 그것이 실재하니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도 없다. 이야기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추고 있는데, 결국 아픔을 뒤로 하고 삶을 재정비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동시에 ‘믿음(신앙, 종교, 뭐든지…)’에 대한 메타포로 읽히기도 한다. 작품은 이런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슬픔과 좌절의 나락에 빠졌을 때, 우리를 안아 일으키고 구렁에서 건져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런 기능만 중시할 때, 우리가 빠질 수 있는 함정,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은 무엇일까.

나아가 진짜 종교와 사이비의 경계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믿음은 다른 이들에게 미신일 수 있지만, 테두리 밖에서 본다면 의심스럽게 보이는 건 거대 종교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믿음이 내게 진정한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 가치 있는 것일 텐데, 그것이 만약 속속들이 거짓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의도를 지니고 좋은 결과로까지 이어진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선일까 악일까.

 

사후 세계란 실재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어떻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확인할 수도 없고 확인된 바도 없으니 어떤 말도 섣부를 테고, 유일하게 확인할 방법은 스스로 경험하는 것일 텐데 그러기엔 증명하기에 너무 늦었으니, 우리 산 사람들은 결코 모를 일이다.

그런 걸 두고 있네 마네, 사기네 어쩌네 하면서 입씨름해봤자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체력 낭비에 지나지 않으니, 그냥 잠자코 있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2011년의 영화, ≪디 어웨이크닝(The Awakening)≫과 구조가 비슷하다. 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한 영국을 배경으로 영매들 ‘털기’ 전문인 여성 수사관이 으슥한 고성에서 진짜 유령을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상당히 재미있다.

소재로 비슷하기는 ‘사라 페너’의 소설 ≪런던 비밀 강령회≫도 떠오르는데, 이 소설은 (내가 읽기에) 완전 개망, 폭망이다.

무당 ‘김금화’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만신(2014)≫도 생각난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무교(武敎)’가 ‘무속(-俗)’이란 멸칭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힘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토속 종교를 주류 사회에서 어떻게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는지에 관해서라면 이 작품과 관련이 많다. 거대 시스템의 횡포라면 우리 영화 ≪불신지옥(2009)≫도 생각난다. 기독교 중심적인 시선으로 한 가정 내의 비극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사족.

 

1. 작품 속 ‘폭스 자매’와 ‘로버트-윌리엄’ 형제 모두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핑커튼 탐정 회사’ 역시 현재까지 존재하는 실제의 기업이다. 지금은 보안 업체에 매각되어 명맥만 유지하는 중이라고.

 

2.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작가는 프랑스인이다. 여성 캐릭터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잘 그렸는데 작가는 남자다. 이런 발언도 차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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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는 주검 은밀한 애도
오가와 요코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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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다섯 번째 책.

 

★★★

 

열한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연작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들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단 큰 역할은 없더라도 공통된 공간 배경이 언급된다. 그리고 인물들이 서로 겹치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 스치듯 나왔던 인물이 다음 작품에 중요하게 다뤄지고, 그 작품의 단역이 또 다음 작품의 주요 인물이 되고… 이야기들이 이렇게 조금씩 겹치다가 마지막 작품은 첫 작품으로 되돌아오는, 그런 식의 구성이다.

 

이야기들로 말할 것 같으면 제목처럼 ‘죽음과 애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기엔 조금 모호한 작품들이 있다. 작가는 죽음을 생(生)의 반대 개념으로서만이 아니고 ‘존재의 사라짐’으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 ‘애도’라는 단어도 행위보다는 감정과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단어로 보이는데, 작품들마다 기저에 흐르는 감정이란 게 약간 독특하다. 쓸쓸하면서 서늘하달까.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집은 적당히 흥미롭고 예쁘게 꾸며졌지만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동굴이 도사린 ‘인형의 집’ 같다. 작품들마다 슬픔과 외로움, 한탄과 애수, 아련한 노스탤지어 등이 적절히 배어있고 여기에 이야기의 그늘 아래 은밀한 어둠, 사악함, 기괴함 등이 어우러져 왜곡된 아름다움 같은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작정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의도한 것도 아니고 첫사랑 같은 설렘도 없고 눈물샘 자극하는 신파도 없는, 독특하면서도 밍밍한, 일본 소설 특유의 맛이랄까, 분위기랄까, 그런 걸 느꼈는데, 이는 일본 소설에 대한 편견일 수 있다.

 

각각의, 혹은 전체의 이야기들은 어떤 의미일까. 아리송하다. 모든 소설 작품에 의미란 게 있을 리가 없고 또 그것을 굳이 캐내려는 노력이 그야말로 무의미하다고 말들은 하지만, 난 솔직히 그런 독자고 그런 식으로 책을 읽어 왔다. 내가 소설을 읽으며 필요한 건 ‘이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이다. 적어도 작가가 ‘왜 이런 작품을 써야만 했던 건지’ 그 의도라도 짐작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집은 ‘글쎄올시다’라는 감상이 적절하겠다. 강렬하면서 동시에 편집증적인 이미지를 주기 위한 시도라면 일단은 성공했다. 하지만 의미가 있는 읽을거리로서는 약간 미심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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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를 누르세요 ■ ㅣ 아작 YA 8
존 발리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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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네 번째 책.

 

★★★☆

 

독신에 싱글, 거의 은둔형 외톨이로 살고 있는 ‘빅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합성된 기계 음성으로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이웃에 사는 ‘클루지’에게 당장 가봐야 하며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그 후엔 적절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 할 일이란 뭘까? 그리고 보상이란 건 또 뭘까? 빅터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웃집을 향하는데, 그곳에서 죽은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집안을 가득 채울 정도의 컴퓨터와 어마어마한 양의 약물.

후에 경찰이 오고, 컴퓨터에 저장된 클루지의 유언이 발견되는데, 그 내용인 즉, 모든 재산을 빅터에게 남긴다는 것. 그저 눈인사 정도만 나누던 남자의 호의치곤 너무나 뜬금없고 엄청난데다 클루지의 사인도 자살인지 타살인지 의심스럽다. 컴퓨터 전문가인 ‘리사’가 수사에 투입되고 빅터 역시 사건에 말려든다.

 

미스터리의 얼개를 지닌 SF 이야기다. 읽다 보면 흔히 요즘 상상하는 SF의 전개와는 거리가 좀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80년대 중반. 당시의 미국 가정에 컴퓨터 보급률은 고작 10퍼센트였다고. 그것이 여전히 미지의 영역, 용도를 확정할 수 없는 기계, 비씨기만 한(없어도 되는) 사치품, 대중화되기 이전의 최첨단 기술이었음을 고려할 때, 작품의 SF적인 상상력이 아우른 영역이 지금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음은 분명하다. 당시의 대중이 그것에 대해 가졌던 호기심, 두려움은 오늘날 우리가 A.I. 기술이나 사람을 대신한다는 로봇에 대해 갖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작품 안에서 컴퓨터라는 소재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조금 더 분명해진다. 이야기 속 컴퓨터(정확히는 통신망)는 50~60년대 SF 영화에 나오는 살인 광선이나 지구에 떨어진 외계 생명체의 알처럼 취급된다. 그것은 사용자를 조종하고 두뇌를 마비시키고 세뇌시킨다. 각각의 기계들은 그 자체로도 괴물이지만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 더 큰 위용을 드러낸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능을 갖게 되어 수뇌인 정보국을 통해 대중들을 통제하고 감시한다(‘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난다). 그것은 오늘날처럼 업무와 실생활에 활용하고 게임 등의 여가를 즐기는, 그런 친밀한 기계와는 달랐다.

(현재의 독자가 80년대의 SF 소설 속 컴퓨터를 보는 방식과 80년대의 작가가 자신의 소재와의 유사성을 30년 전 SF 영화에서 찾는 것과 닮았다.)

 

충분한 유머가 있음에도, 이야기 전반엔 공포와 불안이 녹진하게 흐른다. 컴퓨터라는 소재는, 낯섦,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란 감정을 기반으로 당시의 자국 내 과장된 안보의식, 소련에 대한 적대감, 첨예한 긴장, 과거 전쟁의 트라우마 등과 얽히고설켜, 작품 안에 현재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공포를 적절하게 심어놓는다. 한국 전쟁 트라우마가 있는 빅터와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였던 리사는 캐릭터의 쓸모가 너무나 눈에 띄지만 이야기 안에 잘 스며든다.

 

미스터리, 범죄 소설이 아니므로 그에 상응하는 해답 같은 건 없다. 결말은 대체적으로 모호하다. 다만 특정 짓기가 어려울 뿐, 독자는 이 비극적인 이야기 뒤에 도사린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미래, 그리고 그에 따른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기술 개발의 주체는 우리 인간이지만 인류가 과연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뒤처지고 도태되어 오히려 기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고전적인 두려움. 그런 것들은 항상 존재했던 것 같다. 글쎄. 그건 동전의 양면 아닐까.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느니,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로봇으로 대체된다느니, 이런 예측들. 오늘날의 기후 위기 역시 같은 맥락의 위협이다. 반대로 과학과 기술의 덕을 보는 부분도 있으니, 그것이 주는 비전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균형일 텐데, 그게 어려운 거다.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지 꽉 채워 40년. 당시엔 하이 테크놀러지 SF 대접을 받으며 해당 장르의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명실상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한 컴퓨터가 이리도 무서운 존재였나, 하는 생각에 격세지감을 느끼는가 하면, 가상의 통신망이 우리에게 가할 수 있는 해악이 요즘에도 분명 존재하므로, 시기와 위상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인 건 여전한 것 같다.

 

사족.

 

1. 출판사 ‘아작’은 ≪The John Varley Reader; 30 Years of Short Fiction≫이란 미국에서 2004년 출판된 중단편 선집을 ≪베스트 오브 존 발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는데,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편 세 편을 따로 뽑아 ‘아작 YA’ 시리즈의 단행본으로 낸다. 당연히 ‘베스트 오브 존 발리’에는 빠져 있다. 이 책도 그렇게 우리나라 독자들을 만나는데, 출판사 하는 짓이 참 얌체 같다가도 출판 시장 형편을 생각하면 좀 짠하기도 하고.


2. 그런데 미국의 원작엔 각각의 단편 앞에, 작가가 작품을 소개하는 ‘사설’이 실려 있는데, ‘아작’은 이 사설들만 떼어 전자책으로 출판한다. 얌체를 떠나 좀 구질구질해 보인다.


3. ‘영 어덜트’ 독자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한 시리즈로 짐작하는데,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성적인 장면, 표현들이 흔하게 나온다. 행간에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아시아에 대한)편견도 작가는 서슴없이 드러내는데 괜찮은 건지?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YA’가 그 의미 아닌 건가?


4. 제목의 ‘■’ 기호는 오타나 글씨가 깨진 게 아니다. 아마도 커서 같은데,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을 그대로 옮긴, 작가의 유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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