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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를 누르세요 ■ ㅣ 아작 YA 8
존 발리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24년 4월
평점 :
26년 일흔네 번째 책.
★★★☆
독신에 싱글, 거의 은둔형 외톨이로 살고 있는 ‘빅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합성된 기계 음성으로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이웃에 사는 ‘클루지’에게 당장 가봐야 하며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그 후엔 적절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 할 일이란 뭘까? 그리고 보상이란 건 또 뭘까? 빅터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웃집을 향하는데, 그곳에서 죽은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집안을 가득 채울 정도의 컴퓨터와 어마어마한 양의 약물.
후에 경찰이 오고, 컴퓨터에 저장된 클루지의 유언이 발견되는데, 그 내용인 즉, 모든 재산을 빅터에게 남긴다는 것. 그저 눈인사 정도만 나누던 남자의 호의치곤 너무나 뜬금없고 엄청난데다 클루지의 사인도 자살인지 타살인지 의심스럽다. 컴퓨터 전문가인 ‘리사’가 수사에 투입되고 빅터 역시 사건에 말려든다.
미스터리의 얼개를 지닌 SF 이야기다. 읽다 보면 흔히 요즘 상상하는 SF의 전개와는 거리가 좀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80년대 중반. 당시의 미국 가정에 컴퓨터 보급률은 고작 10퍼센트였다고. 그것이 여전히 미지의 영역, 용도를 확정할 수 없는 기계, 비씨기만 한(없어도 되는) 사치품, 대중화되기 이전의 최첨단 기술이었음을 고려할 때, 작품의 SF적인 상상력이 아우른 영역이 지금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음은 분명하다. 당시의 대중이 그것에 대해 가졌던 호기심, 두려움은 오늘날 우리가 A.I. 기술이나 사람을 대신한다는 로봇에 대해 갖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작품 안에서 컴퓨터라는 소재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조금 더 분명해진다. 이야기 속 컴퓨터(정확히는 통신망)는 50~60년대 SF 영화에 나오는 살인 광선이나 지구에 떨어진 외계 생명체의 알처럼 취급된다. 그것은 사용자를 조종하고 두뇌를 마비시키고 세뇌시킨다. 각각의 기계들은 그 자체로도 괴물이지만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 더 큰 위용을 드러낸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능을 갖게 되어 수뇌인 정보국을 통해 대중들을 통제하고 감시한다(‘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난다). 그것은 오늘날처럼 업무와 실생활에 활용하고 게임 등의 여가를 즐기는, 그런 친밀한 기계와는 달랐다.
(현재의 독자가 80년대의 SF 소설 속 컴퓨터를 보는 방식과 80년대의 작가가 자신의 소재와의 유사성을 30년 전 SF 영화에서 찾는 것과 닮았다.)
충분한 유머가 있음에도, 이야기 전반엔 공포와 불안이 녹진하게 흐른다. 컴퓨터라는 소재는, 낯섦,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란 감정을 기반으로 당시의 자국 내 과장된 안보의식, 소련에 대한 적대감, 첨예한 긴장, 과거 전쟁의 트라우마 등과 얽히고설켜, 작품 안에 현재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공포를 적절하게 심어놓는다. 한국 전쟁 트라우마가 있는 빅터와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였던 리사는 캐릭터의 쓸모가 너무나 눈에 띄지만 이야기 안에 잘 스며든다.
미스터리, 범죄 소설이 아니므로 그에 상응하는 해답 같은 건 없다. 결말은 대체적으로 모호하다. 다만 특정 짓기가 어려울 뿐, 독자는 이 비극적인 이야기 뒤에 도사린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미래, 그리고 그에 따른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기술 개발의 주체는 우리 인간이지만 인류가 과연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뒤처지고 도태되어 오히려 기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고전적인 두려움. 그런 것들은 항상 존재했던 것 같다. 글쎄. 그건 동전의 양면 아닐까.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느니,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로봇으로 대체된다느니, 이런 예측들. 오늘날의 기후 위기 역시 같은 맥락의 위협이다. 반대로 과학과 기술의 덕을 보는 부분도 있으니, 그것이 주는 비전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균형일 텐데, 그게 어려운 거다.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지 꽉 채워 40년. 당시엔 하이 테크놀러지 SF 대접을 받으며 해당 장르의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명실상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한 컴퓨터가 이리도 무서운 존재였나, 하는 생각에 격세지감을 느끼는가 하면, 가상의 통신망이 우리에게 가할 수 있는 해악이 요즘에도 분명 존재하므로, 시기와 위상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인 건 여전한 것 같다.
사족.
1. 출판사 ‘아작’은 ≪The John Varley Reader; 30 Years of Short Fiction≫이란 미국에서 2004년 출판된 중단편 선집을 ≪베스트 오브 존 발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는데,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편 세 편을 따로 뽑아 ‘아작 YA’ 시리즈의 단행본으로 낸다. 당연히 ‘베스트 오브 존 발리’에는 빠져 있다. 이 책도 그렇게 우리나라 독자들을 만나는데, 출판사 하는 짓이 참 얌체 같다가도 출판 시장 형편을 생각하면 좀 짠하기도 하고.
2. 그런데 미국의 원작엔 각각의 단편 앞에, 작가가 작품을 소개하는 ‘사설’이 실려 있는데, ‘아작’은 이 사설들만 떼어 전자책으로 출판한다. 얌체를 떠나 좀 구질구질해 보인다.
3. ‘영 어덜트’ 독자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한 시리즈로 짐작하는데,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성적인 장면, 표현들이 흔하게 나온다. 행간에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아시아에 대한)편견도 작가는 서슴없이 드러내는데 괜찮은 건지?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YA’가 그 의미 아닌 건가?
4. 제목의 ‘■’ 기호는 오타나 글씨가 깨진 게 아니다. 아마도 커서 같은데,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을 그대로 옮긴, 작가의 유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