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레이디
윌라 캐더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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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서부개척시대. 부유한 철도업자의 부인, ‘메리언’이 남편의 사업 실패와 건강 악화와 더불어 서서히 몰락해가는 과정을, 동네의 청년 ‘닐’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메리언의 변모가 과연 타락일까. 우리로 치면 사대부 안주인이 가세가 기울자 주막을 차려 술을 팔고 돈 버는 재주는 있지만 신분이 낮은 남자와 연애를 하고 이런 모양새인데, 어렸을 때부터 메리언을 흠모했던 닐은 그런 변화를 안타까워하지만, 남편 없이 계속 살아가야 하는 메리언에겐 유일한 ‘삶의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했을까.

 

메리언의 삶에 일어난 파란과 닐의 시선을 통해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삶을 지속할 용기가 있는가. 그 과정에서 삶과 시대의 가치가 충돌할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과연 사회의 가치란 불변의 것인가. 타인의 삶을 재단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짧은 분량이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면 마치 대하소설을 읽은 기분이 든다. 기나긴 세월을 통과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깊고 조밀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유려한 번역. 이 책을 출판한 곳이 1인출판사라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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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증거
비그디스 요르트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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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베르기요트’는 부모의 유산 분배 문제를 계기로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가족들과 재회한다. 반갑기는커녕 껄끄러운 만남은 갈수록 ‘진짜 유산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폭력의 긴 그림자에 여전히 갇혀 사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은 폭력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고 외면하거나 침묵한, 그로 인해 또 다른 가해를 하는 ‘가족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다른 가족들에게 베르기요트는 폭력의 피해자이기 이전에 가정의 화목과 평안을 깨뜨린 장본인이다. 내부고발자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까. 베르기요트가 어렸을 때 ‘당한 일’은 거의 막바지에 드러나는데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고 작가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는 듯하다. 이야기의 가장 아픈 부분은 (큰오빠를 제외한) 가족들 중 누구도 피해자 편에 서주질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피해자를 탓하고 의심하며 ‘공공의 적’으로 몰고 간다.

 

들쑥날쑥한 시간 구성과 오락가락하는 주인공의 기억은 마치 시퀀스를 잘게 쪼개 마구 섞은 것 같은 영화, 혹은 악몽처럼 보인다. 이는 오히려 알코올의존증세까지 보이는 주인공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게 만들어버림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이차 가해’를 직접 경험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독자들이 피해자가 아니라 이차 가해자들에게 이입하도록 설계된 듯 보인다.

 

작가의 고향인 노르웨이에서는 일대 파란을 일으킨 작품이라고 한다. 자전적인 소설로 알려진 이 작품에 반목하는 소설이 뒤이어 출판됐는데, 작가의 동생이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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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말들의 편 가르기, 차별의 말들 - 무심코 쓰는 말에 숨겨진 차별과 혐오 이야기
태지원 지음 / 앤의서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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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적인 ‘말 생활’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차별과 혐오의 증거들을 사회학적으로 잡아낸다.

 

내용에 대부분 공감이 갔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라거나 ‘참 피곤하게 산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부분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차별이나 혐오 같은 이슈들에 불 같은 관심을 보이며 달려들었으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도 너무 세면 부러지듯이, 요즘은 그 불길이 다소 수그러진 듯하다. 너도 나도 그러고 있으니 ‘유행템’처럼 치부되는 느낌도 있고, 너무 나갔다 싶은 부분도 있고. 예를 들어 ‘범죄자의 인권’ 문제 같은.

 

이 책에 대부분 공감이 갔다고는 말했지만 공감이 간다고 모든 것에 완벽히 동의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의 저자가 혐오와 차별, 인권 같은 이슈들을 진짜 ‘유행템’처럼 다루지는 않았는지 독자 스스로 질문하게 되는데, 그건 새로운 관점이 부족하고 낡은 말들을 앵무새처럼 읊어대고 있는 저자의 탓이 더 크다. 물론 새롭고 신선하다 느낄 독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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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 언니 - 반양장 ㅣ 창비아동문고 14
권정생 / 창비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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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먹고사는 외에 좀더 즐기기 위해 남을 해친다. 어떤 방법이라도 가리지 않고 많이 차지하는 것을 좋아했다.

육이오라는 전쟁도 똑같은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어른들은 개인끼리 빼앗고 뺏기는 것부터, 좀더 크게는 집단끼리 빼앗는 것이었다. 더 크면 나라끼리 빼앗기 위해 싸움이 일어난다. (265쪽)❞

 

갈등, 특히 전쟁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이 문장으로 부족할까.

근래에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책들을 연달아 읽게 되는데, 단지 눈에 띄어서 읽게 된 건지, 아니면 무의식이 이끈 선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앞에 읽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나 ≪라일락 걸스≫처럼 이 책도 ‘전쟁이 야기한 상실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저변엔 가부장,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란 의식이 썩은 물처럼 흐른다. 어린 아이의 눈에서 서술된 이야기라는 차이점만 빼면 고통받는 ‘여성들’이라는 핵은 같다.

그러나 작가는 ‘전쟁’이라는 특이한 상황 아래, 고통 받는 게 유독 여성들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영문도 모른 채 손에 총을 들고 전장에 뛰어든 남자들을 기억 밖으로 되살려낸다.

 

학창 시절에 읽은 기억이 없는데, 요즘은 교과서에도 실려있다고들 하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다 읽고 어린 독자들이 읽기에 이야기가 너무 세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접적으로나마 묘사되는 폭력의 수위도, 인물들이 겪는 고난의 정도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도 늙긴 늙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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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피플 존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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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정이현’의 작품집.

인간, 이웃, 함께 하는 삶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사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창동’의 영화, ≪시(詩)≫를 생각나게 하며, 선명한 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회피하고 외면함으로서 그 동안의 모든 배려와 선의를 위선으로 만들어버리는 인물의 이야기인 <빛의 한가운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희미한 깜빡임조차 없는 어두움 속에서 끝내 마주해야 할(153쪽)’ 예감은, 살면서 계속 죄책감과 양심에 시달릴 ‘안희’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하다.

 

역시 양심의 이야기이면서 인물을 궁지로 몰아가는 설정이 숨막히는 <선의 감정>도 인상이 깊었다.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형벌을 받는 주인공의 결말은 곱씹을수록 섬뜩하다.

 

고립을 자처하는 현대인들을 은유한 <단 하나의 아이>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존재하지 않아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187쪽)’ 타인의 존재는 일말의 희망으로 보인다.

 

삶에 대한 치열함 마저 ‘급’이 있고 욕하는 것에도 ‘태도’가 있다는 <실패담 크루>는 계급과 ‘아비투스(habitus)’에 대한 이야기처럼 읽혔다. 이야기 자체보다 구상의 근원이 된 아이디어, 작가의 의도가 신선해서 기억에 남는다.

성실함의 대가가 항상 만족스럽지 않다는 씁쓸한 결말의 <언니>는 이야기 자체보다 캐릭터가 매력적인 작품이었고, 폭력에 대한 대응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하는 <가속 궤도>도 좋았다.

 

그 외, 타인에 대한 신뢰의 한계를 물으며 그것이 일종의 신화(神話)가 아닌지 독자들을 각성시키는 <이모에 관하여>와 <사는 사람>, 일종의 러브 스토리로 우왕좌왕하는 포커스가 산만했던 <우리가 떠난 해변에>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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