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ㅣ 펭귄클래식 56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곽명단 옮김 / 펭귄클래식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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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널리 알려졌듯, 이야기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닥친 주인공 ‘세라’의 지난한 고생과 그 극복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부잣집 ‘알파 걸’에서 하녀로의 추락은 도약을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세라의 나이답지 않은 능력과 성숙함, 인간됨, 특이한 성격은 지긋지긋한 고난에도 해피엔딩을 예고한다.

 

세라의 이야기는 독자의 연령과 세상 경험에 따라 다각적으로 읽힐 것이다.

어린이 독자들의 눈에 세라는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강인한 히어로급 주인공일 테지만, 몇 십 년이 지나 다시 읽는 내 눈에는 현실도피의 방어기제와 더불어 정신분열 초기의 위험한 환자로 보였다.

풍부한 상상력은 현실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세라의 특기이고 장기이지만, 거짓에 위로받고 자신의 머릿속에 숨어버리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어 보였다. 외줄 타기 같은 위태로운 세라의 습관은 영화 ≪베스와 베라(Incident in a Ghostland)≫를 연상케 한다. 해피엔딩이 아니었다면 잔혹한 이야기로 읽힐 가능성이 충분해 보였다.

 

초등학교 시절, 축약판 번역으로 양산된 소년소녀문고 이런 판본으로 읽은 작품이다. 어렸을 적 매우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하고,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은 마음으로 다시 읽었다.

 

추억을 곱씹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싶었는데, 중요한 장면, 극적인 국면 들이 속속들이 기억나서 반가웠다. 어렸을 때 읽은 책이 축약본이라고 우습게 알 게 아니었고 나름 신경을 쓴 출판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어렸을 때 나름 중요한 고전들을 축약된 문고판으로나마 적잖이 접했는데, 그때의 독서도 나름 중요한 경험이었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나의 어린 시절이 환기되어 행복했고, 책 읽는 어린이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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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질 정원에서 - 한수영 소설집
한수영 지음 / 강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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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을 흔들어 깨운 종소리가 시월의 정원으로 퍼져갔다. 화로 속의 식어버린 재는 내년 봄 정원에 뿌릴 좋은 거름이 될 거였다. 뿌리와 뿌리 사이에 스며들어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해줄 거였다. 바질 향이 흔들렸다. (<바질 정원에서>, 37쪽)❞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이 모여 원이 되듯 우리도 그럴 거라는 것. 인생이라는 원의 크기는 저마다 달라도 누구나 자신만의 인생의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을 거라는 것. 어떻게 있든, 무엇으로 있든 누구나 같은 거리에 있다는 것. (<파이>, 91쪽)❞

 

작품집의 포문을 여는 표제작, <바질 정원에서>엔 오십 평생의 반 세월동안 서로에게 힘과 의지가 되어준 세 여자의 취중한담이 전개된다. 수다와 기억으로 일관된 이 작품은 긴 세월 세 여자의 우정과 애정을 조망한다. 이들에게 갈등과 반목의 순간이 없었을까. 하지만 그조차 ‘내년 봄 정원에 뿌릴 좋은 거름(37쪽)’이다. 좋은 관계와 아름다운 삶은 예측하고 계획되고 단계별로 실행되는 것이 아닌, ‘잘못 울린 종소리’처럼 우연일 뿐인 것 같다.

현실과 과거를 병치시키고 중첩시켜 진행하는 구성은, 아내로 엄마로 여자로 위기에 빠진 화자의 이야기인 <파이>에서 더욱 효과적이다. 퀴즈쇼 현장의 긴장감은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화자의 회상에 탄력을 더한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는 오독과 오해가 가득한 세상에 아무런 보호막 없이 세상에 던져진 삶을 살아내려는 화자의 안간힘, 타인과 연결되려는 처절한 몸짓이 인상적인, 그럼에도 희망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반면 <울>의 ‘기옥’은 세상에 속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타인에 좌절한다.

 

균열을 그리는 세 작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랑의 지점>에서는 낭만적 설렘에서 시작해 배반을 거쳐 관계에 위기를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의 말>에서는 친근했던 사람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신뢰에 의심이 들러붙어 머릿속에 안개가 드리워지는 순간을 그렸다. 해외 이주 노동자를 등장시켜 명쾌한 소통을 어렵게 하는 ‘언어’라는 상징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지금 어디쯤이에요?>는 일상의 균열과 불안을 그리는데, 절도 사건의 피해자에서 직접적인 가해자(복수자)로의 변모가 부러움이나 질투가 원인일 수 있다는, 그리고 이는 화자의 심리 저변에 흐르는 모친과의 갈등과 엄마를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부딪히는 결과로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감상을 풍요롭게 한다.

 

그 외, 병상에 누운 노년의 여인이 자신의 지난 굴곡진 삶을 구어체의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내는 <만조유생>, 폭력과 증오의 상관관계를 말한 듯한 <달개비 꽃> 등이 실려 있다.

 

서점을 떠돌다가 우연히 읽게 된 책이다. 난 이런 걸 ‘탐험’, ‘발굴’이라고 표현하는데, 말 그대로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기웃거리다가 좋은 책, 좋은 작가를 발견하는 거다. 그야말로 ‘케바케’, ‘복불복’이다. 진짜 백 퍼센트의 운이고 절대 우연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이 만남이, 그 책이, 읽는 행위가 아주 특별해진다.

 

문장이 기름기 없이 담백하고 이야기가 물 흐르듯 한다. 작품마다 개성이 있고 각 캐릭터들의 차별화가 잘 되어 있다.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렌즈에 경험이 묻어 있어 관록이 느껴진다. 작가는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얼마 전에 읽었던 ‘이수안’ 작가와 함께 지루했던 나의 책읽기에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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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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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된 달콤함. 압축하면 한 줌도 안 되는 솜사탕 같은 이야기.

많은 인물들이 각자 뭔가를 열심히 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너무 쉽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싶으면 진정되고 또 어떤 일이 틀어지는가 싶으면 해결된다. 사는 게 이리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사는 이야기’가 감동이나 특별한 의미를 줄 수는 있으나, 이 작품은 아니다.

 

푸릇푸릇 물 오른 시절,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감성에 푹 빠졌던 적도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오랜만에 읽으니 많은 게 달라 보인다.

나는 변했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작가를 보니, 뭔가 씁쓸하다. 아니, 다행인 건가.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고수해야 할 ‘무엇’이 있는 게, 작가로서는 무척 다행일 것이다. 독자로서는 좀 식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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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인형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안영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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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인형>은 수질 오염으로 인한 심해 괴물이 등장한다. ‘네스 호’의 괴물이나 ‘봉준호’의 영화 『괴물』을 연상하게 만든다. 상황에 따라 타인을 의지하기도, 이용하기도 하는 인간의 계략을 러시아 인형(마트료시카)에 비유한다.

 

<로취에서의 만남>은 크리스마스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인물이 우연히 신(神)과 조우하며 교훈을 얻는 이야기다. 다분히 기독교적이다.

 

연극을 소재로 한 <카토>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페르소나의 힘, 예술의 기능을 단초로 인간과 사회를 통찰한다. 거듭 읽을수록 의미가 깊고 넓어지는 이 작품은 우리의 현대사와도 많이 겹친다.

 

<물 아래서>는 연어의 분비선을 인간에게 이식하여 인어가 된 연인의 이야기다. 현재의 호러나 SF영화들에서 익숙한 설정이라 흥미가 생긴다.

 

일기 형식으로 된 <우리들의 여행>은 과거 ‘남녀 연애백서’를 생각하게 하는 티격태격 연애담이다. 결말이 우습다.

 

오늘날 건강 보조 식품의 오남용을 경고한 듯한 <마르가리따 또는 철분 플러스의 힘>, 전염되는 냄새로 인한 소동을 그린 <어떤 냄새>, <패배한 사랑>이 <세 편의 작은 환상 작품>이란 제목으로 묶여 있다.

 

그 외, ‘자기 방귀 구린 줄 모르고 남 방귀 타박준다’는 우리 속담이 생각나는 <여행자가 자기의 조국으로 돌아가다> 등이 실렸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작가다. 아르헨티나 출신이지만 그저 남미 작가로 퉁쳐지는 데엔 아쉬움이 있다.

작품들마다 매력이 있는데, <카토>가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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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결혼
미셸 리치먼드 지음, 김예진 옮김 / 시공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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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사회적인 약속이지만 당사자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깨질 수 있다. 콘크리트가 아닌 유리 같은 관계랄까. 하지만 이 위태로운 약속에 ‘강제성’이 끼어든다면? 이를테면 이런 거. 두 사람은 바람을 피우거나 배우자가 아닌 이성에게 플러팅 비슷하거나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면 절대 안 된다. 이 정도까지는 이해가 된다. 분기별로 서로에게 선물을 하고 부부만의 여행을 가고, 기타 등등, 이런 사항들이 의무가 된다면 어떨까.

그리고 이를 어기거나 이행하지 못할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딘가로 끌려가 감금되거나 육체적인 처벌이 가해진다면 어떨까.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갓 결혼한 ‘앨리스’와 ‘제이크’ 부부는 ‘협약(the Marriage Pact)’에 참가할 것을 제안 받고 서류에 사인하고 그들의 일원이 된다. 호기심 반 장난 반이었으나 일이 점점 커진다. 그들을 감시받고 평가받는다. 사소한 오해와 실수로 두 사람에게 가해지는 심리적, 육체적 고문이 현실화된다. 그리고 그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단순히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잘 살아’ 정도가 아니라 ‘잘 살지 않으면 죽여버릴 테다’ 이런 수준이니, 그냥 ‘나 안 할래’ 하고 탈퇴하던가 경찰에 신고하던가 그럼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도 안 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부부는 어떻게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작가가 그럴 듯하게 설득한다. 판이 짜이고 나니 모든 상황에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사랑과 결혼이 과연 어떤 모양이어야 할까, 독자 스스로 질문하게 만들려는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협정’이라는 집단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 싸움까지 더해지고 폭력의 강도가 수위를 높이니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더 복잡해지고 흥미진진해진다. 두 사람의 앞날이 진심으로 걱정된다.

 

작가가 결혼에 무슨 한이 졌나, 싶을 정도로 가학적인 이야기인데 불편하면서도 그 재미가 쏠쏠하다. 위험천만한 협정의 테두리 안에서 인물들의 아슬아슬한 내면이 잘 그려졌다. 긴장감 하나는 끝내준다. 분량이 좀 많다 싶은데(607쪽) 휘리릭 읽힌다. 암담한 엔딩은 여러 상징적 의미를 유추하게 만들어 여운이 길다.

 

전반적으로 ‘스티븐 킹’의 단편, <금연주식회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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