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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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여든세 번째 책.

 

★★★☆

 

❝어떤 죄악이 매우 끔찍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또한 그 뿌리를, 그것을 가능케 했던 맥락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172쪽)❞

 

저자와 그의 아들, ‘카림’과의 대화를 통해 오늘날 지구촌의 기아(飢餓) 현실을 보여준다. 사회학자이면서 UN의 식량 조사관 자격의 인권 활동가로서, 생애에 걸쳐 현 인류의 기아와 빈곤 문제를 고찰하고 알린 ‘장 지글러’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기아’를 화두로 정치, 경제, 인류 등으로 관심을 확장하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학술적인 태도를 견지하기보다는 독자들의 감정에 호소한다. 문답이라는 구성으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질문하는 아들의 눈높이에 맞춘 평이한 문장으로 쉽게 읽히지만 사유는 깊고 보여주는 현실은 혹독하다. 책의 주요 목적은 기아 현실을 알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절감해 해결에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기아가 단순히 먹을 것이 부족함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연적이고(기후 위기, 자연 재해 등) 경제적, 사회구조적인(부패한 정치, 무너진 경제, 사회 불균형과 심각한 양극화, 복지 제도의 맹점, 내전이나 전쟁, 등) 다양한 요인들이 많은 방식으로 기아 인구 양산에 기여한다. 원인으로서 이들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킨 모양새로 굶주림을 심화시킨다. 권력자(정치인)의 무능, 자금에 허덕이는 구호 기구와 그들의 비리 같은 것들 역시 기아 상황을 악화시키는 원인이다. 국제 곡물 시장에서 횡행하는 덤핑 전략과 사재기 또한 문제 해결에 좋은 조건은 아니다.

기아는 또한 인류의 비인간성, 추악한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음식은 무기가 되고 협박과 테러의 도구가 되며 악덕의 빌미가 된다.

 

무분별한 개발과 산업화로 인한 삼림 파괴와 생태계의 균형 와해에 따르는 자연 재해, 그에 동반되는 기아는 어느 정도 자업자득의 측면이 있다. 자연(自然)은 이름 그대로 ‘저절로 그러하다’. 그것은 받은 것을 그대로 되돌려줄 뿐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편리함(利器)은 말 그대로 날카로운 무기(利器)가 되어 인간을 위협한다.

 

한편, 기아는 사막이나 가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네온이 눈부신 대도시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농촌의 몰락과 대도시의 출현은 도시의 슬럼화를 야기한다. 일자리도 없고 몸 눕힐 공간도 없으며 사회 복지가 닿지 않는 사각(死角)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빈민 역시 치명적인 배고픔에 시달린다.

 

‘기아’라는 현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원인들 저변에는 ‘자본’이 있다. 저자는 기아 발생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서 ‘자본의 횡포(글로벌 금융 자본의 과두지배)’를 꼬집는다. 다국적 기업의 제국주의적 운영이나 선진국들이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Washington Consensus) 등은 약소국들의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빼앗고 상대를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로 전락, 사회 불균형과 기아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기아는 자국 내 구조적인 원인(내전 같은 국가 혼란, 정치적 부패)도 존재하지만, 더 크게는 신식민주의의 폐해라고 보는 시선이 문제 해결을 위한 근원적인 접근으로 보인다. 이는 권력의 ‘음모’에 비견할 만하다.

 

기아는 단순히 굶주림과 영양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마빈 해리스’가 저서 ≪음식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지적했던 대로,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상당한 양이 인간을 먹이는 대신 육류 생산에 쓰인다. 여기서 비롯된 문제 의식은 육류 소비와 동물 복지, 채식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국가의 기아와 경제적 독립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살바도르 아옌데’나 ‘토마 상카라’ 같은 지도자들이 살해당한 이유는 오늘날 환경, 기후 이슈가 좌파들의 정책, 이데올로기처럼 되어버린 현실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두 명의 정치적 지도자들에게 닥친 비극에 작용한 정치와 경제의 유착, 자본과 시장의 논리라는 당의(糖衣)를 입힌 추악한 이기심,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권력욕 등이 오늘날 환경 운동가들에게 ‘좌파’라는 허울을 씌우고 그들을 공격한다.

 

이쯤에서 시선을 우리에게로 돌릴 필요가 있다.

우리 역시 일제강점기 시절의 곡물 수탈, 한국 전쟁 이후 혼란 속에서 극심한 빈곤과 굶주림을 겪었다. ‘보릿고개’란 말도 ≪전설의 고향≫ 같은 TV시리즈의 단골 소재였지만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현재의 80세 이상의 노인 세대는 그것에 대해 생생히 증언하곤 한다.

브라질은 ‘주요 식량 수출국인 동시에 기아 국가’라는 오명을 벗었다(1999년에 세상에 나온 책이라 내용에 현재(2026년)와의 간극이 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절대적인 기아를 경험하고 걱정해야 하는 국민은 전체 인구의 3퍼센트 미만.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일어난 게 2014년. 아이들의 무상 급식을 두고 설왕설래했던 어떤 정치인도 있었다. 우리는 안심해도 될까.

 

기아의 의미를 단순히 굶는 것을 떠나 영양의 불균형 문제까지 확장한다면, 냉동식품과 반조리 식품, 저질의 인스턴트식품 등으로 거의 매 끼니를 때우는 독거노인들과 1인 가구, 미래의 불안을 안고 사는 비정규직종의 사람들을 무시해선 안 된다. 굶주림을 모면했다는 걸로 우리 사회는 만족할 수 있을까. 고립과 소외, 양극화의 문제는 그냥 모르는 척하면 되는 걸까.

오늘날의 기아는 굶주림과 빈곤의 문제를 벗어난다. 그것이 결국 ‘영양’과 ‘건강’의 문제라면, 서구화된 식습관, 과잉된 칼로리, 저질의 외식이나 건강하지 못한 음식에 길들여진 입맛이 초래하는 영양 불균형까지도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질적 기아). 우리 정부는 이런 문제를 알리고 호소하고 해답을 구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섭식(攝食)’을 떠나 ‘섭생(攝生)’을 고민하고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기아에 관해 가르치지 않는 학교(13장)’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거두고 서로를 향해 안테나를 세우길 촉구한다. 우리가 머나먼 타국의 기아를 대하는 것과 가까이 타인의 불행을 대하는 정서적 방식은 닮아 있다. 저자는 ‘맬서스 이론’이 부자와 권력자들의 논리로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를 정당화하고 강화한다고 비난했지만, 심리학적으로 일말의 진실은 존재한다. 양심의 가책을 없애고 불합리한 비극에 대한 분노와 아이러니를 상쇄하기 위해 끔찍한 현실에 대한 구실, 당위를 만듦으로써 일종의 심리적 쿠션이 만들어진다. 응급 밴드로 가릴 수는 있어도 상처가 아물려면 적절하고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기아’를 논하면서 시작된 책이지만, 저자가 최종적으로, 그리고 거듭 방점을 두는 건, 바로 ‘인류애’다. 그것은 공감하는 능력이고 동지애이며, 인간의 측은지심에 기댄다. ‘MBTI’에서 쉽게 소비되며 그 무게가 많이 훼손되고 희석되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아파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의 가치는 성경책 안에 머물러선 안 된다.

구호 단체, 기구들의 TV 캠페인 영상을 두고 ‘불행 포르노’라는 비난이 빈번하다. 과장된 건 맞다.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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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만나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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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여든두 번째 책.

 

★★★☆

 

‘아나 막달레나’는 일 년 중 8월, 중남미의 어떤 섬으로 여행을 간다. 그 행사의 목적은 죽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서. 중년의 딸은 매년 어머니의 기일에 묘지에 들러 한 다발의 글라디올러스를 바친다.

하지만 문제의 ‘그 날’은 예년과 다르다. 어머니의 묘소를 방문한 후 익명의 남성과 섹스를 한 것. 다음날 아침에 깨어 보니 남자가 돈을 남겼다. 직업적인 매춘부로 취급당한 아나 막달레나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극심한 분노를 느낀다.

이후로 매년 8월, 그 일이 반복된다.

섬으로의 여행, 글라디올러스, 어머니의 무덤, 익명의 남자, 유혹, 그리고 섹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단순한 구성에 지루하게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이야기가 진행할수록 주인공의 복잡다단한 심리가 서서히 드러난다.

첫 번째 남자와 주인공은 감정적으로 굉장히 강력하게 얽힌다. 자신을 저급 매물처럼 매도한 데 복수를 하고 싶어 그를 찾고 기다리다가 결국 원하고 그리워한다. 이 과정에서 만난 다른 남자들과도 육체적인 관계에 빠지며, 이 ‘섹스 여행’은 하나의 루틴이 된다. 주인공은 매년 8월이 기다려진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남편 역시 바람이 났을 거라 믿으며 자신을 투사한다. 하지만 남편의 불륜엔 마땅한 근거가 없다.

주인공의 경험을 불륜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그저 물리적일 충돌, 일탈로 보기엔 뒤에 남기는 감정의 찌꺼기들이 너무 녹진하다.

 

이야기의 추진력은 주인공의 욕망과 갈등 같은 내면적인 것에서 나온다. 섹스 이야기가 줄줄이 나오지만 그것보다 행위와 행위 사이의 감정이 더욱 두드러진다. 끓어오르는 욕망과 나약한 결심,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자기 환멸과 자기애. 관계는 있지만 감정은 없는, 혹은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지만 거기에 서서히 함몰되는 아이러니. 누군가를 갈망하면서 괴롭히고 싶고, 누군가를 외면하면서 원하는 모순.

 

결말에 이르러 생각지도 못한 곳에 묻히고 싶어 한 어머니의 욕망을 이해하면서 주인공은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유대감,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자신을 직시하게 된다. 결혼 제도의 한계 속에서 두 여자는 동변상련의 고통을 감내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가가 원했던 결말이 이런 것일까. 이 부분에서 고개가 살짝 갸우뚱해진다)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주인공의 불안, 그리고 불만은 조금 사그라졌을까.

 

짧은 이야기지만 널을 뛰는 주인공의 내면을 그리는 문장의 밀도가 높다. 그리고 무척 감각적이다. 술술 읽히지만 상상하고 유추하느라 중간에서 읽기를 멈추어야 할 때가 많았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사후에 출간된, 작가의 유작이다. 유작이라고 하기에 조금 민망한 게 작가는 이 작품의 출판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작가의 두 아들(놈)과 편집자가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런 배은망덕한…)

 

아마도 작가의 팬들은 열광했을 것이다. 나는 팬도 아니고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에 두드러기가 돋지만, 일단 책이 너무 예뻐서 샀고 문득 생각 나 읽게 됐다. 짧은 이야기이니 이 정도면 도전해도 되겠다는 욕구가 샘 솟기도 했고.

 

사족.

 

1. 작가가 의도했던 건 ‘아나 막달레나’가 등장하는 시리즈 물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 기획의 첫 책이었고. 이 작품을 쓸 당시 작가는 치매를 앓고 있었는데, 책 말미에 부록으로 수록된 네 쪽의 영인본에서 맑지 않은 정신으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최선을 다 했던 작가를 만날 수 있다. 기획대로 다섯 권의 작품이 모두 완성되어 독자들을 만났더라면…. 아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작가의 머릿속에, 마음속에 있었던 이야기들, 많은 문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2. 짧은 이야기라고 해도 책 두께가 얇은 건 아니다. 본문은 약 100여 쪽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에 두 아들(놈)이 쓴 서문과 편집자 후기, 영인본 네 페이지, 한국 번역가의 후기까지. 그것도 모자라 무슨 종이를 썼는지 종이 두께가 장난이 아니고 활자도 큰 편이다. 챕터마다 종이 한 장씩 끼워놓아 두께 불리기에 최선을 다했으니, 책값(₩16,000)의 가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보면 된다. 출판 시장의 현실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참 처절해 보인다. (수고했어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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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김유나 지음 / 창비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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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여든한 번째 책.

 

★★★☆

 

<이름 없는 마음>은 작가의 등단작이다. 혈육을 책임지고 보살피려는 누나와 자신의 삶으로 도망치려는 동생이 부딪히는 순간의 모습이 담겼다. 이해와 몰이해, 애정과 간섭, 자유와 구속 등이 피를 나눈 사이만이 나눌 수 있는 공감과 연대에 실려 잘 표현됐다.

그가 나의 가족일지언정 나 밖의 영역에 존재하는 타인이다. 같은 가족 구성원이라도 나와 상관 없는 다른 형태의 삶, 더 친밀한 다른 누군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린 종종 망각한다. 진심 어린 도움의 손길조차 때로는 버거운 통제로 작용할 수 있다. 타인의 삶과 방식을 우리는 충분히 인정하고 존중하는지의 질문은 뒤에 나오는 <너 하는 그 일>에서 반복된다.

 

<랫풀다운>은 새로운 시작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는 과거를 끊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너무 매몰차게 들릴까. 가끔은 지난 시간에 갇혀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지 않은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헤어진 애인에 대한 기억과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해 새로운 사랑이 버겁거나, 지난 과오가 남긴 후회가 현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일, 또는 악습을 자신도 모르게 반복함으로써 거듭되는 실패를 경험해야 하는 일이 있다. ‘새 술은 새 푸대에 담으라’는 옛말의 교훈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너 하는 그 일>에서는 서로의 삶에 깊이 상관할 것인가, 아니면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의 질문이 읽힌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본다’는 건 ‘기다린다’는 말이다. 주의를 놓지 않고 유심히 살피며 도움을 청할 때 ‘마침’ 그 자리에 있으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가장 인상 깊었던 <으름 씨 뱉기>에서는 과거(조상의 묘)와 미래(으름 씨), 그리고 현재(채림 가족의 삶)의 모습이 절묘히 겹친다. ‘시간의 영속성’ 안의 인간이 상상된다는 점에서 ‘김연수’의 작품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 안의 몇 작품들이 연상된다. 나를 둘러싼(내가 속한) 우주의 시간을 경험하는 동시에, 한 가족 내의 불통, 인구 문제, 해외 이민, 좀 더 크게 국가의 미래 같은 다양한 이슈들을 아우른다.

 

부부 은행 강도가 등장하는 <부부 생활>은 코믹한 인물과 황당무계한 설정을 활용하여 진행하다가 의외의 결말을 노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친밀한 상대가 낯설어지는 순간의 서늘함이 일품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섣부른 착각이다. 내가 보는 타인의 모습은 내가 그에게서 ‘기대하고’ 있는 바가 반영된 거짓의 상(象)일 경우가 많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건 우리가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다.

 

<물이 가는 곳>은 제목 그대로 낮은 곳, 밑바닥, 인간의 가장 속된 성질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읽힌다. 우리 내면의 바닥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시간을 들여 탐색하라는 작가의 요구는 꽤 진지하지만 복잡한 구성, 과한 설명 등으로 다소 장황해졌다는 점이 다소 거슬린다.

 

<내가 그 밤에 대해 말하자면>은 열 살의 화자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통통 튀는 문체와 아이다운 호기심과 고집, 성격, 주변의 어른들도 각자 개성을 부여받아 인물들이 가장 두드러진다. 반면 방향을 알 수 없는 진행, 모호하기만 한 결말은 작품의 감상을 방해한다. 작가가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가의 첫 소설집. 일곱 편의 작품이 실렸다.

 

이야기들이 쉬우면서도 단단하다. 작가의 관록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술술 잘 읽힌다. 편하고 쉬운 문장으로 가독성이 좋다. 이야기마다 공감할 요소들이 많아 흥미롭다. 은연 중에 드러나는 유머 감각도 좋았고 힘을 뺀 작품들(<으름 씨 뱉기>, <부부 생활>)에서 오히려 작가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던 것 같다. 현실에 천착한 이슈들로 특정 독자층에 호소하기보다 폭넓은 독자들을 아우르려고 한다. 작가의 이런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김유나’ 하면 특정 지을 만한 강점이 보이지 않는 건 약간 아쉽다. 문체는 평범하고 구성이나 진행도 평이하다. 작가의 개성이랄까, 그런 걸 확인할 수 있었으면 더 기억에 남을 텐데. 물론 이런 게 기교뿐인 기교나 자극적인 설정 등을 거부함으로써 이야기의 진정성으로 승부를 보려는 작가적 야심의 증거일 수 있다. 평범하고 별 것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친 장기 자랑을 일삼는 작가들도 더러 있다는 걸 고려하면 오히려 솔직한 태도다. 이건 작가의 분명한 장점으로 보인다.

 

문단에 정식 데뷔한 지 6년만이다. 소설집 한 권 내는 데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하구나, 생각하면 어떤 책이든 허투루 대하기 어려워진다. 이야기를 짓고 쓰는 일이 과히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구나, 그 삶이 참으로 지난하구나 싶다. 새삼 그들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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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다커
앨리스 피니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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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여든 번째 책.

 

★☆

 

‘미스터리’ 장르는 과장의 문학이다. 인물을 과장하고 사건을 과장하고 폭력을 과장한다. 장르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팬들은 오히려 그런 것에 매료된다.

 

미스터리 장르는 철저히 오락의 문학이다. 오랜 시간 갇혀 있어야 하는 비행기나 열차 안, 긴 휴가의 무료함을 달래는 데 적당하다. 수많은 비밀과 수수께끼를 거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결말에 거의 모든 것이 집중된다. 모든 음모가 드러나며 선사되는 카타르시스와 쾌감은 팬들에게 ‘감동’으로 여겨진다. 장르 초기의 작가들은 미스터리 소설을 ‘작가와 독자 사이의 두뇌 게임’으로 간주하면서 ‘페어플레이’를 강조했다. 과거의 대가들이 내세운 여러 규칙들(rules)은 아직 장르 팬들 사이에서 감상의 기준으로 회자되곤 한다.

 

미스터리 문학은 감정의 장르이다. 간혹 ‘가학적’이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하는데 독자가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을 다루는 방법에 원인이 있다. 오리무중에 방치되는 건 고욕이다. 그렇게 독자는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비밀과 진실이 밝혀지는 결말에 이르면 독자는 해방되며 자유로워진다.

 

미스터리 소설은 논증의 문학이다. 범죄를 증명하기 위해 논리가 개입된다.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 추론이나 가정이 있을 수는 있지만 주인공이 휘두를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이성’과 ‘논리’이다.

 

물론 고전적(classical)이고 전통적인(traditional) 미스터리 소설들이 그렇다는 얘기다. 세월이 흐르고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작품들을 써내면서 수많은 서브 장르들이 출현한다. 위에 적은 이렇고 저런 특징들이 전혀 안 먹히는 작품들이 많은 건 문학 장르 역시 진화하고 문학 생태계에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작품은 어떨까.

 

할로윈. 고립된 섬. 물이 차 빠지기까지 한밤중의 8시간. 서로에 대한 감정과 기억이 썩 좋지만은 않은 여덟 명의 인물들(대가족과 한 명의 이방인, 그리고 한 마리의 개). 의문의 시(詩).

그리고 한 명씩 죽어나간다.

 

옛스런 고딕 소설의 완벽한 분위기에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의 조건. 이런 것들에 독자의 자세가 결정된다. 그런데 세팅과 콘셉트가 낯익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 39년)≫를 따라한 티가 난다. 그래도 뭐, 봐줄 수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노골적으로 모방하면서도 성공한 작품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이야기만 괜찮다면 오마주 정도로 퉁쳐주면 되니까. 잔뜩 힘을 준 무대처럼 인물들 역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게 보이지만, 이 작품의 장르를 의식한다면 치명적인 단점은 되지 않는다. 한 시간마다 발견되는 시체도 딱히 거슬릴 건 아니다. 작가는 연극적으로 과장된 설정에 인물마다 적절한 드라마로 현실성을 부여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잘만 꾸린다면 적당해 보인다.

 

오락물, ‘문유석’ 판사의 말대로 ‘쾌락을 위한 독서’로서는 어떨까. 중반까지는 꽤 괜찮다. 악당은 가족들이 과거에 남긴 비디오테이프를 하나씩 던져주고, 그들로 하여금 지난 날들을 상기하게 만든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등 뒤에서 서로에게 눈을 흘기는 가족 분위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중반을 넘으면서 이 소설의 단점이 드러난다. 허점이 너무 빨리 드러나는 건 이 소설의 태생적 한계이다. 어차피 드러날 문제였으니까.

일단 엄청 지루하다. 혼란과 공포에 빠진 인물들을 보는 재미가 없다. 작가의 설정을 연기할 뿐인 인물들은 하나 같이 생동감이 없다. 드라마의 ‘발연기’ 같다. 인물들 스스로가 자신을 보여주고 설득하기보다 그저 역할을 설명하고 독자들에게 주입시키느라 바쁘다.

인물들은 기계적인 행동, 서사 진행에 필요한 딱 그만큼의 행위만 한다.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행동은 아연하고 동기는 미심쩍다. 그리고 거듭되는 설명, 또 설명. 남은 페이지가 아직 많은데,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고?

 

어찌저찌 이야기를 끌어나가긴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말. 더 가관이다.

작가는 크리스티도 모자라 ‘샤말란’의 영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99년)≫까지 끌어온다.

이 정도면 독자랑 싸우겠다고 덤비는 꼴이다.

 

작가는 아주 슬픈 이야기를 구상했겠지만 슬프기는 개뿔, 어처구니가 없다. 황당하고 분노까지 느껴진다. 이 꼴을 보자고 내가 이틀을 이 책에 매달렸던가.

슬프거나 연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다 진상을 알고서도 카타르시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든 지배적인 감정은 짜증과 분노였고, 이 장르에서 기대되는 감정은 아니다.

 

소위 ‘초현실성’을 내세운 미스터리 소설들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가끔 멋지게 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호러는 (감정이 아닌) 감성의 문학이고 미스터리는 논리의 문학이다. 장르가 다르다. 가지고 휘두를 무기가 다르다. 오직 훈련이 잘 된 대가들만이 그 일을 해낸다. 의욕과 아이디어만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오만은 섣부른 아마추어들이나 부린다.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 감정을 추스르고 무대를 떠나는 대단원에서 작가는 엄청난 슬픔, 안타까움, 연민 같은 것을 기대했겠지만 오히려 실소가 터진다. 역할이 전부인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소홀함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작가는 ‘트릭시’에게 이 엉망진창을 밀어주고 자신만 쏙 빠져나온다. 이 파국을 어린 아이가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논리가 개입될 필요도 없고 여지도 없다. 사건만 있고 드라마는 없다. 과정은 생략하고 시작과 끝만 있을 뿐이다.

인물다운 인물도 없다. 작가가 짜놓은 판에 굴러가는 말들만 있을 뿐이다. 기계적인 역할극에 빠진 인물들엔 감정다운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소위 ‘반전’에만 신경 쓰면 이런 작품이 태어나는 것 같다. 반전과 의외의 결말은 다르다.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기보다 결말을 설득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작가의 다른 작품 ≪가위 바위 보(Rock Paper Scissors, 21년)≫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명작 반열에 들긴 어려울지라도 미스터리 장르 안에서 제 할 일을 톡톡히 해냈다. 같은 작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독자들을 이겨먹으려는 욕심이 우선했기에 이런 무리수를 둔 게 아니었을까. 독자는 작가가 이야기의 산을 함께 오를 가장 중요하고 친밀한 동반자이지 싸워 이길 대상이 아니다. 미스터리 소설이 ‘게임’은 될지언정 싸움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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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소장품 -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표 소설집 ㅣ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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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아홉 번째 책.

 

★★★★

 

전기 작가로 널리 알려진 ‘슈테판 츠바이크’의 중단편 여섯 편이 실려 있다.

 

가장 놀랍고 감탄했던 건 작가가 인물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보여주는 방식. 보통 심리 묘사가 훌륭하다고들 하는데, 작가는 그것 이상을 해낸다. 작가는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분석한다. 인물의 심리가 어떤 행동으로 표출되고 그 행동이 또 다른 어떤 심리를 이끌어오는지, 그 흐름의 인과에 독자는 인물들의 행동이 아무리 뜬금없어도 설득이 된다.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가, 라는 평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아찔한 비밀>은 어머니의 외도를 막으려는 어린 아들 ‘에드거’의 고군분투를 통해 아이의 성장을 그린다.

아이들의 성장을 주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성장’이란 단어는 육체와 정신 모두를 아우른다. 에드거의 경우는 어른들의 세계를 엿봄으로서 유아기를 벗어난다. 그가 목도한 현실은 수많은 거짓말이 아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위태로운(105쪽)’ 현실이다. 아이는 선을 넘어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함으로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이는 엄마와 난봉꾼 남작과의 비밀을 남몰래 공유함으로서 완성된다. 에드거는 이 순간을 통과하며 아이로서의 소외를 벗어난다.

자기들이 쉬쉬한다고 아이들이 정말 모를 거라 여기는 어른들의 판단이 재미있다. 그건 증명된 사실이라기보다 어른들의 바람일 것이다. 조심성 없는 어른들을 통해 아이는 어른들의 삶에 노출되고, 부모에게는 ‘내 자식’이 아닌 경계 밖의 타인이 된다. 연애에 방해되는 아들을 밀어내는 엄마의 모습엔 양가감정이 읽힌다. 엄마의 비밀을 아빠에게 함구함으로 아이는 엄마와 공모하지만, 이로써 권력이 역전된다. 성장한(엄마의 약점을 빌미로 한) 아이는 어느새 부모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결말에 드러난 여성성이 시대적 특성을 보여는 것 같아 주목된다. 에드거의 엄마는 연애에 대한 환상을 접고 결국 현실에 주저앉는다. 이는 삶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가정과 아이의 보호자, 남편의 반려자, 주인공이 아닌 조역, 배경으로서의 위치로 전락함으로 읽힌다. ‘쓰고도 달콤한 짐(106쪽)’은 모성에 대한 판타지와 현실을 모두 포함하는 양가적인 표현이다.

 

<불안>은 이 작품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다. 도발적인 오프닝의 위기감이 다른 형태의 자극이 되어 서스펜스를 한 가득 이끈다. 오늘날 ‘서스펜스 심리 소설’의 씨앗이 풍부해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독이 흥미를 가졌을 법한 이야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썼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조종하는 양상이 재미있다. 이야기의 주된 핵은 ‘불륜’을 저지른 ‘이레네’가 죄를 고백하고 자비와 용서를 구하느냐 마느냐의 갈등이다. 이 작품에 의하면 죄를 지은 사람이 갖는 내면의 불안은 실제 처벌보다 더욱 혹독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기독교인이라면 참회와 용서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할 테지만, 요즘의 현실은 어떨까. ‘양심’이란 것과 마찬가지로 ‘수치’란 감정이 아무 소용없는 시대에, 후안무치, 파렴치한들이 오히려 더 당당하다. 이 작품의 시대성이 드러난다. 그때엔 최소한의 양심이 자구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엔딩에 반전이 있다. 이레네의 갈등은 해소되는 듯 보이지만 정말 그럴까. 남편은 음흉한 속임수로 이레네를 위기에서 구해내지만 그것은 폭력과 다름없어 보인다. 결말이 드러나면서 이레네의 죄는 남편에게 전이된다. 이 작품의 최종적인 악당은 과연 누구일까. 남편의 의도는 정말 순수한 걸까. 아내를 지키기보다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 가장 우선이었을 남편의 의도는, 당시의 남녀 지위, 그들에게 주어진(혹은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 경계 등을 짐작하게 한다.

불륜과 협박으로부터 벗어난 이레네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온다. 이는 강요된 여성성, 가정 안에서 위안과 행복을 찾으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여성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모르는 여인의 편지>는 거의 한 평생 남자를 짝사랑하며 행복의 모든 기회를 차단하고 스스로를 우울의 벽에 가둬 불행하게 살던 여인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존재를 몰라준 남자에게 진실을 알리며 복수를 하려는 이야기다.

복수가 아니라고? 여인이 남자에게 정말로 바랐던 것은 무얼까. 남자의 아이를 몰래 낳고 살던 여인은 아이가 죽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진실의 칼날을 벼린다. 여인이 자기 말대로 남자를 정말로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원한 건 분명해 보인다. 남자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과연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인은 자신의 행동을 ‘파괴적인 광기(200쪽)’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역사를 남자에게 알림으로서 그를 지옥에 가두려 한다.

이야기의 화두가 ‘모성’이라는 사실에, 앞의 두 작품과 같은 맥락의 여성이 등장하는 것이 재미있다. 여자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몰래 낳아 키운 아이가 죽자 폭발한다. 그 동안 잘 숨겨왔던 진실을 드러내고 생을 등지기로 결심한 동기엔 아이의 죽음이란 사건이 있다. 아이가 없는 세상은 여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아이가 남자가 남긴 유일한 것이어서, 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여자는 아이의 존재 자체에만 의미를 둔다. 이런 심리엔 여성은 곧 모성이라는 사고가 작용한다. 여성을 가정에 가두고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 교육에 힘쓰라는 무언의 시대적 요구가 읽힌다.

 

<보이지 않는 소장품>은 중편 분량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인데, 임팩트가 상당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의 삶일까 정신의 삶일까. 작가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양쪽에 적절히 배치시켜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주된 요소가 무엇인지 묻는다. 눈 먼 노인은 정작 아무것도 볼 수 없음에도 ‘순수한 기쁨(256쪽)’을 위해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린다. 그런 동안 남은 식구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굶주림에 방치된다. 그의 아내와 딸은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노인의 수집품을 몰래 판다. 노인의 핸디캡을 이용한 속임수를 동원해 위작과 빈 종이로 대체된 컬렉션이 여전히 노인에게 기쁨이 된다는 설정은 작품에 아이러니와 묵직한 페이소스를 부여한다. 자신만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노인은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까. 노인을 속인 아내와 딸의 기만은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삶의 의미와 정직이라는 가치, 신뢰 등을 화두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한다.

노인을 위해 핑계 하나를 대자면, 화자를 만나 자신의 수집품 소개에 열을 올리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무척 공감을 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의 진가를 함께 알아보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의 존재는 정말 귀하고 소중하다. ‘지음(知音)’이란 말이 있다. 아마도 연예인의 ‘팬덤’이 존재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수집가는 단순히 물건을 소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향유하는 건 단순히 물리적 실체가 주는 기쁨만이 아닌, 그것들마다 새겨진 스토리, 기억, 추억 같은 정신적인 어떤 것, 무형의 것들일 테다. 우리가 타인의 역사를 오롯이 이해하기란 정말로 불가능해 보인다.

 

<어느 여인의 24시간>은 도박에 빠진 생면부지의 젊은이를 구하기 위한 중년 여성의 처절한 노력이 그려진다. ‘심판하기보다는 이해한다’는 말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 측은지심이 읽힌다. 타인에 대한,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자세, 즉 이야기 속 인물에 공감하려는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엿보여 재미있다.

‘C부인’의 동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남자를 향한 연모나 애정은 나중에, 정말 우연히 일어난 일이고 애초에 어떤 감정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을까.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도 집을 떠난 C부인이 ‘빈둥지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해도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애정과 관심을 쏟아 부을 대상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구원자’이면서 ‘돌보는 사람’을 자처한 게 아니었을까.

다시 여성들의 모성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작품 속에 은연히 드러난 ‘돌보는 자’, 고난에 빠진 남성을 위로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구원하는 사람으로서의 여성은 작가가 맹렬히 활동한 시기의 ‘바람직한 여성성’의 전형적인 롤 모델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비둘기의 전설>은 오늘날 ‘초단편’ 분량의 짧은 작품이다. 성경 속 ‘노아’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비둘기를 중심으로, 사회에 널리 퍼진 이기와 악, 폭력 등에 경종을 울리려는 이야기다. 전쟁의 트라우마, 이후의 우울증, 작가의 최후를 고려하면, 그리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지구촌 어디선가 지금도 진행 중인 전쟁, 분쟁들을 생각하면 한층 더 마음 아프고 슬픈 이야기로 읽힌다.

 

작품집의 적지 않은 작품들이 그 시대의 바람직한, 받아들여질 만한 여성들의 어떤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예전에 읽은 츠바이크의 두 장편, 성적인 면에서 도발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감정의 혼란≫과 노동자 여성이 사회의 구석구석 존재하는 계급 차이와 불균형을 목격하고 각성에 이르는 ≪우체국 아가씨≫에선 건져 올리지 못한 감상이라 무척 생뚱맞다. 이 작품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편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태도와의 차이는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작품집 속 여성 캐릭터들의 성격적 맥락과 여성들에 대한 대접을 근거로 작가를 여성 혐오자나 성차별로 치부하는 건 지나치게 박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여성들의 시대적 한계, 그 세계를 지배하고 통용됐던 가치관의 모순 등이었다는 게 이 작품집 속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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