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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다커
앨리스 피니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6년 3월
평점 :
26년 여든 번째 책.
★☆
‘미스터리’ 장르는 과장의 문학이다. 인물을 과장하고 사건을 과장하고 폭력을 과장한다. 장르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팬들은 오히려 그런 것에 매료된다.
미스터리 장르는 철저히 오락의 문학이다. 오랜 시간 갇혀 있어야 하는 비행기나 열차 안, 긴 휴가의 무료함을 달래는 데 적당하다. 수많은 비밀과 수수께끼를 거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결말에 거의 모든 것이 집중된다. 모든 음모가 드러나며 선사되는 카타르시스와 쾌감은 팬들에게 ‘감동’으로 여겨진다. 장르 초기의 작가들은 미스터리 소설을 ‘작가와 독자 사이의 두뇌 게임’으로 간주하면서 ‘페어플레이’를 강조했다. 과거의 대가들이 내세운 여러 규칙들(rules)은 아직 장르 팬들 사이에서 감상의 기준으로 회자되곤 한다.
미스터리 문학은 감정의 장르이다. 간혹 ‘가학적’이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하는데 독자가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을 다루는 방법에 원인이 있다. 오리무중에 방치되는 건 고욕이다. 그렇게 독자는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비밀과 진실이 밝혀지는 결말에 이르면 독자는 해방되며 자유로워진다.
미스터리 소설은 논증의 문학이다. 범죄를 증명하기 위해 논리가 개입된다.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 추론이나 가정이 있을 수는 있지만 주인공이 휘두를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이성’과 ‘논리’이다.
물론 고전적(classical)이고 전통적인(traditional) 미스터리 소설들이 그렇다는 얘기다. 세월이 흐르고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작품들을 써내면서 수많은 서브 장르들이 출현한다. 위에 적은 이렇고 저런 특징들이 전혀 안 먹히는 작품들이 많은 건 문학 장르 역시 진화하고 문학 생태계에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작품은 어떨까.
할로윈. 고립된 섬. 물이 차 빠지기까지 한밤중의 8시간. 서로에 대한 감정과 기억이 썩 좋지만은 않은 여덟 명의 인물들(대가족과 한 명의 이방인, 그리고 한 마리의 개). 의문의 시(詩).
그리고 한 명씩 죽어나간다.
옛스런 고딕 소설의 완벽한 분위기에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의 조건. 이런 것들에 독자의 자세가 결정된다. 그런데 세팅과 콘셉트가 낯익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 39년)≫를 따라한 티가 난다. 그래도 뭐, 봐줄 수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노골적으로 모방하면서도 성공한 작품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이야기만 괜찮다면 오마주 정도로 퉁쳐주면 되니까. 잔뜩 힘을 준 무대처럼 인물들 역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게 보이지만, 이 작품의 장르를 의식한다면 치명적인 단점은 되지 않는다. 한 시간마다 발견되는 시체도 딱히 거슬릴 건 아니다. 작가는 연극적으로 과장된 설정에 인물마다 적절한 드라마로 현실성을 부여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잘만 꾸린다면 적당해 보인다.
오락물, ‘문유석’ 판사의 말대로 ‘쾌락을 위한 독서’로서는 어떨까. 중반까지는 꽤 괜찮다. 악당은 가족들이 과거에 남긴 비디오테이프를 하나씩 던져주고, 그들로 하여금 지난 날들을 상기하게 만든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등 뒤에서 서로에게 눈을 흘기는 가족 분위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중반을 넘으면서 이 소설의 단점이 드러난다. 허점이 너무 빨리 드러나는 건 이 소설의 태생적 한계이다. 어차피 드러날 문제였으니까.
일단 엄청 지루하다. 혼란과 공포에 빠진 인물들을 보는 재미가 없다. 작가의 설정을 연기할 뿐인 인물들은 하나 같이 생동감이 없다. 드라마의 ‘발연기’ 같다. 인물들 스스로가 자신을 보여주고 설득하기보다 그저 역할을 설명하고 독자들에게 주입시키느라 바쁘다.
인물들은 기계적인 행동, 서사 진행에 필요한 딱 그만큼의 행위만 한다.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행동은 아연하고 동기는 미심쩍다. 그리고 거듭되는 설명, 또 설명. 남은 페이지가 아직 많은데,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고?
어찌저찌 이야기를 끌어나가긴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말. 더 가관이다.
작가는 크리스티도 모자라 ‘샤말란’의 영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99년)≫까지 끌어온다.
이 정도면 독자랑 싸우겠다고 덤비는 꼴이다.
작가는 아주 슬픈 이야기를 구상했겠지만 슬프기는 개뿔, 어처구니가 없다. 황당하고 분노까지 느껴진다. 이 꼴을 보자고 내가 이틀을 이 책에 매달렸던가.
슬프거나 연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다 진상을 알고서도 카타르시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든 지배적인 감정은 짜증과 분노였고, 이 장르에서 기대되는 감정은 아니다.
소위 ‘초현실성’을 내세운 미스터리 소설들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가끔 멋지게 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호러는 (감정이 아닌) 감성의 문학이고 미스터리는 논리의 문학이다. 장르가 다르다. 가지고 휘두를 무기가 다르다. 오직 훈련이 잘 된 대가들만이 그 일을 해낸다. 의욕과 아이디어만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오만은 섣부른 아마추어들이나 부린다.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 감정을 추스르고 무대를 떠나는 대단원에서 작가는 엄청난 슬픔, 안타까움, 연민 같은 것을 기대했겠지만 오히려 실소가 터진다. 역할이 전부인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소홀함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작가는 ‘트릭시’에게 이 엉망진창을 밀어주고 자신만 쏙 빠져나온다. 이 파국을 어린 아이가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논리가 개입될 필요도 없고 여지도 없다. 사건만 있고 드라마는 없다. 과정은 생략하고 시작과 끝만 있을 뿐이다.
인물다운 인물도 없다. 작가가 짜놓은 판에 굴러가는 말들만 있을 뿐이다. 기계적인 역할극에 빠진 인물들엔 감정다운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소위 ‘반전’에만 신경 쓰면 이런 작품이 태어나는 것 같다. 반전과 의외의 결말은 다르다.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기보다 결말을 설득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작가의 다른 작품 ≪가위 바위 보(Rock Paper Scissors, 21년)≫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명작 반열에 들긴 어려울지라도 미스터리 장르 안에서 제 할 일을 톡톡히 해냈다. 같은 작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독자들을 이겨먹으려는 욕심이 우선했기에 이런 무리수를 둔 게 아니었을까. 독자는 작가가 이야기의 산을 함께 오를 가장 중요하고 친밀한 동반자이지 싸워 이길 대상이 아니다. 미스터리 소설이 ‘게임’은 될지언정 싸움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