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김유나 지음 / 창비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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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여든한 번째 책.

 

★★★☆

 

<이름 없는 마음>은 작가의 등단작이다. 혈육을 책임지고 보살피려는 누나와 자신의 삶으로 도망치려는 동생이 부딪히는 순간의 모습이 담겼다. 이해와 몰이해, 애정과 간섭, 자유와 구속 등이 피를 나눈 사이만이 나눌 수 있는 공감과 연대에 실려 잘 표현됐다.

그가 나의 가족일지언정 나 밖의 영역에 존재하는 타인이다. 같은 가족 구성원이라도 나와 상관 없는 다른 형태의 삶, 더 친밀한 다른 누군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린 종종 망각한다. 진심 어린 도움의 손길조차 때로는 버거운 통제로 작용할 수 있다. 타인의 삶과 방식을 우리는 충분히 인정하고 존중하는지의 질문은 뒤에 나오는 <너 하는 그 일>에서 반복된다.

 

<랫풀다운>은 새로운 시작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는 과거를 끊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너무 매몰차게 들릴까. 가끔은 지난 시간에 갇혀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지 않은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헤어진 애인에 대한 기억과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해 새로운 사랑이 버겁거나, 지난 과오가 남긴 후회가 현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일, 또는 악습을 자신도 모르게 반복함으로써 거듭되는 실패를 경험해야 하는 일이 있다. ‘새 술은 새 푸대에 담으라’는 옛말의 교훈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너 하는 그 일>에서는 서로의 삶에 깊이 상관할 것인가, 아니면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의 질문이 읽힌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본다’는 건 ‘기다린다’는 말이다. 주의를 놓지 않고 유심히 살피며 도움을 청할 때 ‘마침’ 그 자리에 있으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가장 인상 깊었던 <으름 씨 뱉기>에서는 과거(조상의 묘)와 미래(으름 씨), 그리고 현재(채림 가족의 삶)의 모습이 절묘히 겹친다. ‘시간의 영속성’ 안의 인간이 상상된다는 점에서 ‘김연수’의 작품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 안의 몇 작품들이 연상된다. 나를 둘러싼(내가 속한) 우주의 시간을 경험하는 동시에, 한 가족 내의 불통, 인구 문제, 해외 이민, 좀 더 크게 국가의 미래 같은 다양한 이슈들을 아우른다.

 

부부 은행 강도가 등장하는 <부부 생활>은 코믹한 인물과 황당무계한 설정을 활용하여 진행하다가 의외의 결말을 노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친밀한 상대가 낯설어지는 순간의 서늘함이 일품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섣부른 착각이다. 내가 보는 타인의 모습은 내가 그에게서 ‘기대하고’ 있는 바가 반영된 거짓의 상(象)일 경우가 많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건 우리가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다.

 

<물이 가는 곳>은 제목 그대로 낮은 곳, 밑바닥, 인간의 가장 속된 성질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읽힌다. 우리 내면의 바닥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시간을 들여 탐색하라는 작가의 요구는 꽤 진지하지만 복잡한 구성, 과한 설명 등으로 다소 장황해졌다는 점이 다소 거슬린다.

 

<내가 그 밤에 대해 말하자면>은 열 살의 화자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통통 튀는 문체와 아이다운 호기심과 고집, 성격, 주변의 어른들도 각자 개성을 부여받아 인물들이 가장 두드러진다. 반면 방향을 알 수 없는 진행, 모호하기만 한 결말은 작품의 감상을 방해한다. 작가가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가의 첫 소설집. 일곱 편의 작품이 실렸다.

 

이야기들이 쉬우면서도 단단하다. 작가의 관록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술술 잘 읽힌다. 편하고 쉬운 문장으로 가독성이 좋다. 이야기마다 공감할 요소들이 많아 흥미롭다. 은연 중에 드러나는 유머 감각도 좋았고 힘을 뺀 작품들(<으름 씨 뱉기>, <부부 생활>)에서 오히려 작가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던 것 같다. 현실에 천착한 이슈들로 특정 독자층에 호소하기보다 폭넓은 독자들을 아우르려고 한다. 작가의 이런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김유나’ 하면 특정 지을 만한 강점이 보이지 않는 건 약간 아쉽다. 문체는 평범하고 구성이나 진행도 평이하다. 작가의 개성이랄까, 그런 걸 확인할 수 있었으면 더 기억에 남을 텐데. 물론 이런 게 기교뿐인 기교나 자극적인 설정 등을 거부함으로써 이야기의 진정성으로 승부를 보려는 작가적 야심의 증거일 수 있다. 평범하고 별 것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친 장기 자랑을 일삼는 작가들도 더러 있다는 걸 고려하면 오히려 솔직한 태도다. 이건 작가의 분명한 장점으로 보인다.

 

문단에 정식 데뷔한 지 6년만이다. 소설집 한 권 내는 데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하구나, 생각하면 어떤 책이든 허투루 대하기 어려워진다. 이야기를 짓고 쓰는 일이 과히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구나, 그 삶이 참으로 지난하구나 싶다. 새삼 그들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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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다커
앨리스 피니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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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여든 번째 책.

 

★☆

 

‘미스터리’ 장르는 과장의 문학이다. 인물을 과장하고 사건을 과장하고 폭력을 과장한다. 장르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팬들은 오히려 그런 것에 매료된다.

 

미스터리 장르는 철저히 오락의 문학이다. 오랜 시간 갇혀 있어야 하는 비행기나 열차 안, 긴 휴가의 무료함을 달래는 데 적당하다. 수많은 비밀과 수수께끼를 거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결말에 거의 모든 것이 집중된다. 모든 음모가 드러나며 선사되는 카타르시스와 쾌감은 팬들에게 ‘감동’으로 여겨진다. 장르 초기의 작가들은 미스터리 소설을 ‘작가와 독자 사이의 두뇌 게임’으로 간주하면서 ‘페어플레이’를 강조했다. 과거의 대가들이 내세운 여러 규칙들(rules)은 아직 장르 팬들 사이에서 감상의 기준으로 회자되곤 한다.

 

미스터리 문학은 감정의 장르이다. 간혹 ‘가학적’이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하는데 독자가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을 다루는 방법에 원인이 있다. 오리무중에 방치되는 건 고욕이다. 그렇게 독자는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비밀과 진실이 밝혀지는 결말에 이르면 독자는 해방되며 자유로워진다.

 

미스터리 소설은 논증의 문학이다. 범죄를 증명하기 위해 논리가 개입된다.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 추론이나 가정이 있을 수는 있지만 주인공이 휘두를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이성’과 ‘논리’이다.

 

물론 고전적(classical)이고 전통적인(traditional) 미스터리 소설들이 그렇다는 얘기다. 세월이 흐르고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작품들을 써내면서 수많은 서브 장르들이 출현한다. 위에 적은 이렇고 저런 특징들이 전혀 안 먹히는 작품들이 많은 건 문학 장르 역시 진화하고 문학 생태계에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작품은 어떨까.

 

할로윈. 고립된 섬. 물이 차 빠지기까지 한밤중의 8시간. 서로에 대한 감정과 기억이 썩 좋지만은 않은 여덟 명의 인물들(대가족과 한 명의 이방인, 그리고 한 마리의 개). 의문의 시(詩).

그리고 한 명씩 죽어나간다.

 

옛스런 고딕 소설의 완벽한 분위기에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의 조건. 이런 것들에 독자의 자세가 결정된다. 그런데 세팅과 콘셉트가 낯익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 39년)≫를 따라한 티가 난다. 그래도 뭐, 봐줄 수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노골적으로 모방하면서도 성공한 작품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이야기만 괜찮다면 오마주 정도로 퉁쳐주면 되니까. 잔뜩 힘을 준 무대처럼 인물들 역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게 보이지만, 이 작품의 장르를 의식한다면 치명적인 단점은 되지 않는다. 한 시간마다 발견되는 시체도 딱히 거슬릴 건 아니다. 작가는 연극적으로 과장된 설정에 인물마다 적절한 드라마로 현실성을 부여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잘만 꾸린다면 적당해 보인다.

 

오락물, ‘문유석’ 판사의 말대로 ‘쾌락을 위한 독서’로서는 어떨까. 중반까지는 꽤 괜찮다. 악당은 가족들이 과거에 남긴 비디오테이프를 하나씩 던져주고, 그들로 하여금 지난 날들을 상기하게 만든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등 뒤에서 서로에게 눈을 흘기는 가족 분위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중반을 넘으면서 이 소설의 단점이 드러난다. 허점이 너무 빨리 드러나는 건 이 소설의 태생적 한계이다. 어차피 드러날 문제였으니까.

일단 엄청 지루하다. 혼란과 공포에 빠진 인물들을 보는 재미가 없다. 작가의 설정을 연기할 뿐인 인물들은 하나 같이 생동감이 없다. 드라마의 ‘발연기’ 같다. 인물들 스스로가 자신을 보여주고 설득하기보다 그저 역할을 설명하고 독자들에게 주입시키느라 바쁘다.

인물들은 기계적인 행동, 서사 진행에 필요한 딱 그만큼의 행위만 한다.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행동은 아연하고 동기는 미심쩍다. 그리고 거듭되는 설명, 또 설명. 남은 페이지가 아직 많은데,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고?

 

어찌저찌 이야기를 끌어나가긴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말. 더 가관이다.

작가는 크리스티도 모자라 ‘샤말란’의 영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99년)≫까지 끌어온다.

이 정도면 독자랑 싸우겠다고 덤비는 꼴이다.

 

작가는 아주 슬픈 이야기를 구상했겠지만 슬프기는 개뿔, 어처구니가 없다. 황당하고 분노까지 느껴진다. 이 꼴을 보자고 내가 이틀을 이 책에 매달렸던가.

슬프거나 연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다 진상을 알고서도 카타르시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든 지배적인 감정은 짜증과 분노였고, 이 장르에서 기대되는 감정은 아니다.

 

소위 ‘초현실성’을 내세운 미스터리 소설들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가끔 멋지게 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호러는 (감정이 아닌) 감성의 문학이고 미스터리는 논리의 문학이다. 장르가 다르다. 가지고 휘두를 무기가 다르다. 오직 훈련이 잘 된 대가들만이 그 일을 해낸다. 의욕과 아이디어만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오만은 섣부른 아마추어들이나 부린다.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 감정을 추스르고 무대를 떠나는 대단원에서 작가는 엄청난 슬픔, 안타까움, 연민 같은 것을 기대했겠지만 오히려 실소가 터진다. 역할이 전부인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소홀함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작가는 ‘트릭시’에게 이 엉망진창을 밀어주고 자신만 쏙 빠져나온다. 이 파국을 어린 아이가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논리가 개입될 필요도 없고 여지도 없다. 사건만 있고 드라마는 없다. 과정은 생략하고 시작과 끝만 있을 뿐이다.

인물다운 인물도 없다. 작가가 짜놓은 판에 굴러가는 말들만 있을 뿐이다. 기계적인 역할극에 빠진 인물들엔 감정다운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소위 ‘반전’에만 신경 쓰면 이런 작품이 태어나는 것 같다. 반전과 의외의 결말은 다르다.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기보다 결말을 설득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작가의 다른 작품 ≪가위 바위 보(Rock Paper Scissors, 21년)≫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명작 반열에 들긴 어려울지라도 미스터리 장르 안에서 제 할 일을 톡톡히 해냈다. 같은 작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독자들을 이겨먹으려는 욕심이 우선했기에 이런 무리수를 둔 게 아니었을까. 독자는 작가가 이야기의 산을 함께 오를 가장 중요하고 친밀한 동반자이지 싸워 이길 대상이 아니다. 미스터리 소설이 ‘게임’은 될지언정 싸움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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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소장품 -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표 소설집 ㅣ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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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아홉 번째 책.

 

★★★★

 

전기 작가로 널리 알려진 ‘슈테판 츠바이크’의 중단편 여섯 편이 실려 있다.

 

가장 놀랍고 감탄했던 건 작가가 인물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보여주는 방식. 보통 심리 묘사가 훌륭하다고들 하는데, 작가는 그것 이상을 해낸다. 작가는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분석한다. 인물의 심리가 어떤 행동으로 표출되고 그 행동이 또 다른 어떤 심리를 이끌어오는지, 그 흐름의 인과에 독자는 인물들의 행동이 아무리 뜬금없어도 설득이 된다.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가, 라는 평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아찔한 비밀>은 어머니의 외도를 막으려는 어린 아들 ‘에드거’의 고군분투를 통해 아이의 성장을 그린다.

아이들의 성장을 주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성장’이란 단어는 육체와 정신 모두를 아우른다. 에드거의 경우는 어른들의 세계를 엿봄으로서 유아기를 벗어난다. 그가 목도한 현실은 수많은 거짓말이 아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위태로운(105쪽)’ 현실이다. 아이는 선을 넘어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함으로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이는 엄마와 난봉꾼 남작과의 비밀을 남몰래 공유함으로서 완성된다. 에드거는 이 순간을 통과하며 아이로서의 소외를 벗어난다.

자기들이 쉬쉬한다고 아이들이 정말 모를 거라 여기는 어른들의 판단이 재미있다. 그건 증명된 사실이라기보다 어른들의 바람일 것이다. 조심성 없는 어른들을 통해 아이는 어른들의 삶에 노출되고, 부모에게는 ‘내 자식’이 아닌 경계 밖의 타인이 된다. 연애에 방해되는 아들을 밀어내는 엄마의 모습엔 양가감정이 읽힌다. 엄마의 비밀을 아빠에게 함구함으로 아이는 엄마와 공모하지만, 이로써 권력이 역전된다. 성장한(엄마의 약점을 빌미로 한) 아이는 어느새 부모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결말에 드러난 여성성이 시대적 특성을 보여는 것 같아 주목된다. 에드거의 엄마는 연애에 대한 환상을 접고 결국 현실에 주저앉는다. 이는 삶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가정과 아이의 보호자, 남편의 반려자, 주인공이 아닌 조역, 배경으로서의 위치로 전락함으로 읽힌다. ‘쓰고도 달콤한 짐(106쪽)’은 모성에 대한 판타지와 현실을 모두 포함하는 양가적인 표현이다.

 

<불안>은 이 작품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다. 도발적인 오프닝의 위기감이 다른 형태의 자극이 되어 서스펜스를 한 가득 이끈다. 오늘날 ‘서스펜스 심리 소설’의 씨앗이 풍부해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독이 흥미를 가졌을 법한 이야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썼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조종하는 양상이 재미있다. 이야기의 주된 핵은 ‘불륜’을 저지른 ‘이레네’가 죄를 고백하고 자비와 용서를 구하느냐 마느냐의 갈등이다. 이 작품에 의하면 죄를 지은 사람이 갖는 내면의 불안은 실제 처벌보다 더욱 혹독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기독교인이라면 참회와 용서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할 테지만, 요즘의 현실은 어떨까. ‘양심’이란 것과 마찬가지로 ‘수치’란 감정이 아무 소용없는 시대에, 후안무치, 파렴치한들이 오히려 더 당당하다. 이 작품의 시대성이 드러난다. 그때엔 최소한의 양심이 자구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엔딩에 반전이 있다. 이레네의 갈등은 해소되는 듯 보이지만 정말 그럴까. 남편은 음흉한 속임수로 이레네를 위기에서 구해내지만 그것은 폭력과 다름없어 보인다. 결말이 드러나면서 이레네의 죄는 남편에게 전이된다. 이 작품의 최종적인 악당은 과연 누구일까. 남편의 의도는 정말 순수한 걸까. 아내를 지키기보다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 가장 우선이었을 남편의 의도는, 당시의 남녀 지위, 그들에게 주어진(혹은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 경계 등을 짐작하게 한다.

불륜과 협박으로부터 벗어난 이레네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온다. 이는 강요된 여성성, 가정 안에서 위안과 행복을 찾으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여성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모르는 여인의 편지>는 거의 한 평생 남자를 짝사랑하며 행복의 모든 기회를 차단하고 스스로를 우울의 벽에 가둬 불행하게 살던 여인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존재를 몰라준 남자에게 진실을 알리며 복수를 하려는 이야기다.

복수가 아니라고? 여인이 남자에게 정말로 바랐던 것은 무얼까. 남자의 아이를 몰래 낳고 살던 여인은 아이가 죽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진실의 칼날을 벼린다. 여인이 자기 말대로 남자를 정말로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원한 건 분명해 보인다. 남자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과연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인은 자신의 행동을 ‘파괴적인 광기(200쪽)’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역사를 남자에게 알림으로서 그를 지옥에 가두려 한다.

이야기의 화두가 ‘모성’이라는 사실에, 앞의 두 작품과 같은 맥락의 여성이 등장하는 것이 재미있다. 여자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몰래 낳아 키운 아이가 죽자 폭발한다. 그 동안 잘 숨겨왔던 진실을 드러내고 생을 등지기로 결심한 동기엔 아이의 죽음이란 사건이 있다. 아이가 없는 세상은 여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아이가 남자가 남긴 유일한 것이어서, 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여자는 아이의 존재 자체에만 의미를 둔다. 이런 심리엔 여성은 곧 모성이라는 사고가 작용한다. 여성을 가정에 가두고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 교육에 힘쓰라는 무언의 시대적 요구가 읽힌다.

 

<보이지 않는 소장품>은 중편 분량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인데, 임팩트가 상당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의 삶일까 정신의 삶일까. 작가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양쪽에 적절히 배치시켜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주된 요소가 무엇인지 묻는다. 눈 먼 노인은 정작 아무것도 볼 수 없음에도 ‘순수한 기쁨(256쪽)’을 위해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린다. 그런 동안 남은 식구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굶주림에 방치된다. 그의 아내와 딸은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노인의 수집품을 몰래 판다. 노인의 핸디캡을 이용한 속임수를 동원해 위작과 빈 종이로 대체된 컬렉션이 여전히 노인에게 기쁨이 된다는 설정은 작품에 아이러니와 묵직한 페이소스를 부여한다. 자신만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노인은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까. 노인을 속인 아내와 딸의 기만은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삶의 의미와 정직이라는 가치, 신뢰 등을 화두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한다.

노인을 위해 핑계 하나를 대자면, 화자를 만나 자신의 수집품 소개에 열을 올리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무척 공감을 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의 진가를 함께 알아보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의 존재는 정말 귀하고 소중하다. ‘지음(知音)’이란 말이 있다. 아마도 연예인의 ‘팬덤’이 존재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수집가는 단순히 물건을 소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향유하는 건 단순히 물리적 실체가 주는 기쁨만이 아닌, 그것들마다 새겨진 스토리, 기억, 추억 같은 정신적인 어떤 것, 무형의 것들일 테다. 우리가 타인의 역사를 오롯이 이해하기란 정말로 불가능해 보인다.

 

<어느 여인의 24시간>은 도박에 빠진 생면부지의 젊은이를 구하기 위한 중년 여성의 처절한 노력이 그려진다. ‘심판하기보다는 이해한다’는 말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 측은지심이 읽힌다. 타인에 대한,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자세, 즉 이야기 속 인물에 공감하려는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엿보여 재미있다.

‘C부인’의 동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남자를 향한 연모나 애정은 나중에, 정말 우연히 일어난 일이고 애초에 어떤 감정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을까.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도 집을 떠난 C부인이 ‘빈둥지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해도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애정과 관심을 쏟아 부을 대상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구원자’이면서 ‘돌보는 사람’을 자처한 게 아니었을까.

다시 여성들의 모성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작품 속에 은연히 드러난 ‘돌보는 자’, 고난에 빠진 남성을 위로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구원하는 사람으로서의 여성은 작가가 맹렬히 활동한 시기의 ‘바람직한 여성성’의 전형적인 롤 모델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비둘기의 전설>은 오늘날 ‘초단편’ 분량의 짧은 작품이다. 성경 속 ‘노아’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비둘기를 중심으로, 사회에 널리 퍼진 이기와 악, 폭력 등에 경종을 울리려는 이야기다. 전쟁의 트라우마, 이후의 우울증, 작가의 최후를 고려하면, 그리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지구촌 어디선가 지금도 진행 중인 전쟁, 분쟁들을 생각하면 한층 더 마음 아프고 슬픈 이야기로 읽힌다.

 

작품집의 적지 않은 작품들이 그 시대의 바람직한, 받아들여질 만한 여성들의 어떤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예전에 읽은 츠바이크의 두 장편, 성적인 면에서 도발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감정의 혼란≫과 노동자 여성이 사회의 구석구석 존재하는 계급 차이와 불균형을 목격하고 각성에 이르는 ≪우체국 아가씨≫에선 건져 올리지 못한 감상이라 무척 생뚱맞다. 이 작품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편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태도와의 차이는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작품집 속 여성 캐릭터들의 성격적 맥락과 여성들에 대한 대접을 근거로 작가를 여성 혐오자나 성차별로 치부하는 건 지나치게 박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여성들의 시대적 한계, 그 세계를 지배하고 통용됐던 가치관의 모순 등이었다는 게 이 작품집 속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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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ㅣ 네오 클래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주)열림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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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여덟 번째 책.

 

★★★

 

읽지도 않았는데 읽었다고 착각하는 소설 작품들이 몇 개 있다. ≪작은 아씨들≫, ≪빨강머리 앤≫, 그리고 바로 이 소설.

그런 데엔 소설의 유명세가 가장 큰 이유다. 원작이 워낙 유명하니 이런 저런 곳에서 어떤 이야기인지 주워들을 기회가 충분했고,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영화 등도 많이 나와 있으니 소설보다 그것들에 이미 익숙해졌던 것. 이 작품 역시 일찌감치 영화로 접했고, 이십여 년 후 새로 만들어진 영화를 또 봤으니, 책을 읽으면서 내내 ‘로버트 레드포드’와 ‘리나르도 디카프리오’, 두 배우의 얼굴이 오락가락했던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막상 읽고 나니 어땠을까.

 

소설 자체로만 보면 눈에 띄는 요소는 딱히 없어 보인다. 계급 차이와 형편없는 주머니 사정 탓에 사랑을 포기했던 남자가 다소 의뭉스러운 방법으로 부자가 되어 여자 앞에 다시 나타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장벽에 걸려 좌절하고 파멸하는, 다소 평범한, 그리고 충분히 뻔한 이야기.

불륜과 사고, 의심과 오해, 질투와 살인 등의 요소는 이야기에 다이내믹함과 멜로드라마성을 부여하지만, 이런 서사적 장치 역시 크게 주목할 만한 건 아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화려하지만 우울한 정서, 그것에 기인한 독특한 질감은 꽤 좋았다. 일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재즈 시대’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던 걸’이나 ‘모던 보이’들이 오늘날 ‘셀럽’, ‘패셔니스타’ 같은 대접을 받았던 우리의 일제강점기 시절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하지만 전쟁 후 경제 부흥과 몰락을 앞둔 미국과 식민지 조선은 문화를 소비하는 행태나 심인적 동기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개츠비’는 법을 어겨가며 돈을 모으고, 아무리 첫사랑이라지만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데이지’에게 추근거리다가 낭패를 본다. 작가는 이 사람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작가는 주인공을 소위 반면교사의 인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돈에 대한 개츠비의 욕망만 본다면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해 보여 오히려 인간적이다. 물질만능주의나 배금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고안된 인물이라면 과연 적절한 인물일지 의문이 든다. 개츠비의 욕망은 ‘이카루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의 금주법에 반하여 밀주 사업을 벌인 건 범법행위라고 쳐도, 특히나 전쟁이 남긴 폐허에서 살아남으려는 욕망이 팽배한 분위기라면 사람들은 더욱 물불 안 가리지 않았을까. 가난해서 사랑의 기회를 잃은 개츠비 같은 남자라면 더 그랬을 터.

 

개츠비의 파국은 그의 내면에서 온다. 사랑이 너무 지나쳤달까. 이기적인 속도로 폭주했다는 말도 가능하겠다. 당시엔 불륜이나 혼외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어떤 법적인 장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이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개츠비의 행동은 너무나 순수하고 외곬수인데다, 치열하다 못해 찌질해 보이기까지 한다. ‘톰’ 부부를 앞에 두고 자신과 데이지의 관계를 털어놓는 장면(7장)에선 ‘뭐 저런 자기 혼자만 알고 경우도 없는데다 머리까지 나쁜 인간이 있나’, 싶기도 했다. 제목의 ‘the Great’가 이런 뉘앙스였을지도.

 

내겐 이 소설이 비극적인 결말의 로맨스 소설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눈이 돌아갈 듯 모든 것이 변화무쌍한 요즘, 모든 동력의 저변에 돈이 흐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만능주의 어쩌구 하는 경고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할까 의심쩍다. 돈을 숭배하듯 하는 오늘의 세태가 위험한 건 사실일지라도 비상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이 작품은 극히 평범한데다가 ‘올드’하기까지 하다. 이 화두가 2026년의 독자들에게 먹히려면 이 이상의 뭔가가 더 있어야 한다.

 

세상에 나온 지 꼬박 백 년이 된, 대단히 미국적인 이 소설이 당시의 미국과 서양 독자들을 각성시키고, 더 나중의 독자들에겐 대공황의 징조를 품은 선지자 같은 작품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적 배경을 걷어내면 남는 거라곤 화려함과 사치, 이후의 몰락, 치정과 살인 등이 엮어내는 한 남자의 비극일 뿐인 이 작품이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독자들에게 여전히 읽히고 고전으로 회자되며 추앙받는 이유는 뭘까 궁금하다.

 

고전이 시대를 관통해서 백 년 이후의 독자들에게 와닿는 건 이야기의 보편성, 원형성이 여전한 힘을 갖기 때문일 테다. 사실 이 작품엔 특별한 구석이 별로 없다. 통속적인 소재에 남발하는 우연, 자세히 들여다보면 플롯에 구멍 등, 구조적인 측면에서 봐도 흠결이 많다. ‘재의 고개’나 부릅뜬 눈이 그려진 빌보드 같은 상징도 다소 노골적인데다 메시지도 이미 낡았다.

그럼에도 부(富)를 향한 욕망, 일편단심의 사랑, 희생, 이성을 마비시키는 질투, 폭력성, 이기심과 자기 보존 욕구 등의 아주 보편적인,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 본연의 성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데 작품의 매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주 비슷하면서도 다른, 비슷한 시기에 쓰이고 발표된 ‘윌라 캐더’의 소설 ≪로스트 레이디(A Lost Lady, 23년)≫가 생각난다. 부유한 사업가의 안주인을 동경하는 마을 소년(이 작품에선 ‘닐’)의 시선으로, 그녀의 몰락과 그 이후의 이야기가 그려지는데, 이 작품에서도 ‘돈’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다뤄진다. 남편이 죽고 재산을 잃어가는 귀부인이 세상물정 몰랐던 자신을 닦아세우며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구성, 세대가 교차되는 시기의 갈등과 혼란, 가치관의 대립 같은 화두는 두 소설이 공통적이지만, 윌라 캐더는 ‘돈’과 ‘물질’을 경계하는 관점은 지양하고 있는데 그런 지점에서 ‘피츠제럴드’의 소설과 차별된다. 윌라 캐더의 소설 역시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결말의 행간엔 희망이 스며있다는 점도 두 소설이 다른 점이다.

 

사족.

 

1. 한글 번역이 아주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미 소설 중 하나라고 한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대개 그렇다고. 그 중에서 번역이 가장 유려하기로 소문난 ‘김석희’의 번역으로 출간된 ‘열림원’의 책을 골랐는데, 글쎄…, 번역 소설의 한계인가 싶기도.

 

2. 이 소재가 만약 당시의 미스터리 작가들의 손에 들어갔다면 어떤 소설이 태어났을까. 이 소설엔 미스터리 소설에 필요한 재료들이 모두 다 있다. 의혹에 싸인 과거를 안고 다시 나타난 남자, 삼각관계, 연적, 의문의 죽음, 시간 차 알리바이, 진실을 암시하는 메타포, 용의자들과 의외의 진상까지. 이 책을 읽는 도중, ‘애거서 크리스티’의 숨겨진 걸작 ≪파도를 타고(Taken at the Flood, 48년)≫가 생각났는데, 은근히 겹치는 설정들이 많아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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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 - 모호한 아이디어를 독자에게 전달되는 말로 바꾸는 힘
오가와 사토시 지음, 박대겸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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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일곱 번째 책.

 

★★★☆

 

❝소설을 읽는다는 건,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얼굴도 모르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비일상적인 행위다. (69쪽)❞

 

❝소설은 작가가 무엇을 표현했는지가 아니라 독자가 무엇을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160쪽)❞

 

저자가 소설에 방점을 두는 건 ‘재미’다. 저자는 소설의 ‘보편적 승리’는 독자들로 하여금 ‘재미있게’ 읽게 만드는 거라고 주장한다. 독서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성이 깊을수록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성은 뭘까?

 

‘저자는 독자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독자는 말해진 내용을 읽고 저자가 전하려는 바를 이해하려 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화자가 청자에게 적절한 정보를 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명료할수록 좋다. (75쪽)’

 

소설은 항상 독자(타자)를 향해 있어야 한다. 소설을 평가하는 기준은 항상 독자가 재미있다고 느끼는지 어떤지(107쪽)이다. 이런 면에서 소설가는 예술가로서의 태도와 상업 작가로서의 태도, 두 가지 면이 요구된다(162쪽)고 말한다.

 

소설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150쪽)는 말에 공감했다. 소설이란 작가가 자신의 언어를 자신의 방식으로 탐구해 가는 과정에서만 존재(150쪽)한다고 하니, 독자들마다 독법이 다르듯, 작가들도 소설을 쓰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저자는 ‘소설법(15쪽)’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단순히 취향이나 선호도 같은 의미를 포함하면서 넘어서는 것으로 이해된다. 소설의 행간에 흐르는 어떤 흐름, 구조적인 조건들, 형태에서의 불문율 같은 것일 테다.

간혹 읽기 곤혹스러운 소설을 만날 때마다 작가 탓을 하거나 나의 수준을 저주해왔던 나로서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였다. 저자에 의하면 작가와 독자의 ‘소설법’이 다를 뿐이다. 그러면서 ‘독자의 고집대로 소설을 읽는 게 바로 재미(19쪽)’라고 조언한다. 소설법이 맞지 않는 저자의 작품을 읽으면 대부분의 경우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19쪽)는 말은 위안이 된다.

 

우리가 (소설을 포함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메커니즘은 압축된 작품을 해제하여 그 근본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작가)의 인지’를 발견하고 수용하여 ‘그 너머’의 세계로 넓혀가는 과정(148~149쪽)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독’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관점이 상당히 재미있다.

저자는 독자의 오독을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독자의 경험에 접속하고 정보를 전달한다는 커뮤니케이션 본래의 역할을 이탈하여, 거기에 존재할 리 없는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일(80쪽)’, ‘각각의 해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 작가가 제시한 작품이 작가가 의도한 것과 서로 다른 것을 환기하는 것(150쪽)’이라 보며,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받는 작품일수록 오독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150쪽)’고 말한다.

작가의 손을 떠나 시장에 나온 작품은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다. 독자가 그 작품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엔 독자 자신의 삶과 체험에 영향을 받으므로 작품이 독자들에게 스며드는 정도와 양상은 천차만별일 테니, 저자는 그것을 당연한 감상,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보는 것 같다. 내게는 있어야만 하는 일로도 보이는데, 감상이 다양해질수록 작품이 생명력을 얻으리란 믿음 때문이다. 이는 곧 독서가 작가와 독자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저자의 말, 고집대로 읽으라는 조언과도 상통한다.

 

독법을 제시하고 일종의 방향을 제시하는 비평이나 리뷰의 역할에 대해서도 저자는 첨언하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것들이 독자들에게 색다른 결의 소설을 보여주어 감상을 확장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했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 난 약간 회의적이다.

오늘날 소설 비평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 가장 원초적인 솔직함이 미덕인 독자 리뷰조차 도서를 협찬 받는 형식에 의해 훼손되고 있지는 않은지, 내 불신이 탄력을 받는다.

 

저자인 ‘오가와 사토시’는 문단 데뷔 11년차인 일본의 중견 소설가로 장르를 넘나드는 전천후 작가다. 소설을 두 권 갖고 있으나 읽기를 미루고 미루다가, 어찌 먼저 읽은 게 이 책이다.

이 책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 쓴 소설에 관한 에세이 성격이 강하다. 저자 스스로는 작법책이 아니라고 말을 하는데, 소설가가 소설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작법에 대해 쓰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작정하고 쓴, 교과서적인 작법책은 아니더라도 작가 자신의 집필 습관이라거나, 소소하게 터득한 know-how 같은 것이 심심찮게 나온다. 추상화와 개별화, 문체, 복선, 아이디어, 작풍 등은 작법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미) 써버린 것에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고 아이디어도 발견(113쪽)’한다거나 ‘소설의 재미는 집필 과정에서 발생(97쪽)’한다는 걸 보면 ‘일단 쓰고 본다’는 작가의 평소 지침이 엿보인다.

 

짧은 분량에 그리 어렵지 않은 것들을 저자가 수다 떨 듯 하고 있어 쉽게 읽히지만, 번역의 장벽에 자주 걸려 넘어졌다. 번역이 그리 잘 된 것 같지 않다. 일본어 특유의 표현이나 일본 문장을 한글로 옮겼을 때의 특이한 어색함 등이 난무한다. 도대체 ‘탈법소설(22쪽)’은 무엇이며, ‘열화판(158쪽)’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단어들이 더러 눈에 띈다. 앞뒤 문맥으로 의미는 대강 ‘통밥’으로 때린다 쳐도, 어쩔 수 없이 일본 단어 그대로 풀었으면, 각주를 달던가, 한자라도 남겨 놓던가. 독자와의 소통을 이야기하는 책을 번역하면서 번역자야 말로 독자와의 소통은 아랑곳 않는 것처럼 보이니, 정말 어이없다.

 

에필로그로, 독자와 원활한 소통을 원하는 편집자와 고집을 부리면서도 독자 곁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한 작가의 티격태격, 고군분투, 아웅다웅을 보여주는, 짧은 소설이 실렸다. 이 책을 위해 따로 쓴 소설처럼 보이는데, 책을 마무리, 총정리해주는 느낌이랄까.

본문 어딘가에 나온 문장을 인용하자면, 이런 거다.

 

❝작품이 닿기를 원하는 상대에게 부족함 없이 전해지도록(가급적 정확하게), 쓸데없는 시간을 뺏지 않도록(가급적 단도직입적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상대가 나에게 일절 관심이 없다는 전제로(가급적 상대를 생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151~152쪽)❞

 

‘상대가 나에게 일절 관심이 없다는 전제로’. 전율이 흐른다. 맞는 말이다. 나는 소설가에겐 관심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건 그들이 쓴, 지어낸 이야기, 즉 소설 작품이다.

 

사족.

 

위의 인용된 문장에서도 번역에 실수가 있다. ‘쓸데없는 시간을 뺏지 않도록’이 아니고 ‘쓸데없이 시간을 뺏지 않도록’이 맞는 문장이다. (어으.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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