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의 여름
루시 스티즈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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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한 번째 책.


★★★

 

‘내셔널갤러리’ 안. ‘성찬’이란 제목의 그림. 13인분의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그린 대작이다. 그림의 어두운 한 구석에 ‘에두아르 타르튀프’라는 화가의 사인이 보인다. 그 앞에 초로의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그 그림이 36년 전, 불에 전소됐음을 기억한다. 그녀 자신이 그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그녀가 마주한 그림은 바로 그 그림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짧은 프롤로그엔 이야기 전체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 숨겨진 동시에 가장 핵심적인 스포일러를 흘리기도 한다. 과거에 불에 타 사라진 그림이 지금 눈앞에 있다면, 그건 뭐다?

 

시간을 거슬러 1920년. 인물들이 소개되고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어떤 사정인지 대강 짐작이 된다. 하지만 그 사정이란 게 절대 수월하지 않다.

 

‘빛의 거장’으로 불리는 타르튀프(타타)는 은둔한 화가다. 그의 작업과 생활 전반을 관리하며 돕는 사람은 그의 조카인 ‘실베트(에티)’. 두 사람의 조용하고 틀에 짜인 일상은 타르튀프에 대한 기사를 쓰려는 기자 ‘조지프’의 출현으로 조금씩 흔들린다.

사실, 이런 표현은 조지프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이다. 그의 등장으로 타타와 에티 사이의 갈등이 좀 더 가시화된 건 사실이지만, 그 조짐은 벌써부터 존재해 왔다. 촌구석에 틀어박혀 집안일이나 잔심부름에 얽매인 삶이 젊은 에티에게 만족스러웠을까. 타타의 은둔은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 행동은 필요와 욕구에 의한 결과라고 볼 때, 타타의 은둔엔 어떤 동기가 작용했을까.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독(毒)인 사람도, 약(藥)인 사람도 없다. 약을 주려고 했는데 독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타타와 에티는 서로에게 악당이고 은인이다. 두 사람을 삼촌과 조카가 아닌,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 그 외에 양가적인 감정이 사이에 진득하니 흐르고 있는 어떤 관계로 상상해도 그림이 된다. 각자의 욕망은 얽히고설키다가 결국 비틀리고 날카로워져 서로를 찌르고 만다. 작가는 이들의 갈등을 사회 전반(특히 예술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성차별로 발전시키다가 다시 개인의 영역으로 데리고 와 폭발시킨다.

 

‘개인의 영역으로 데리고 왔다’는 표현엔 다소 주저앉은 감상을 포함한다. 에티의 결말 때문이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면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타타가 ‘제 몸에 흐르는 피 같은’ 작품의 소실로 벌을 받았다면, 에티에겐 어떤 처벌이 가해졌나?

에티의 기만적인 (동시에 어리석고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에 어떤 설명이나 핑계가 있을 수 있을까. 심리학 도구들을 동원한다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액면 그대로 본다면 에티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다.

캐릭터 성의 시너지 효과로 에티의 행위에 동정과 연민과 더불어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쳐도, 결말에서 타타를 취급하는 작가의 방식엔 변명이 어렵다. 타타 역시 희생자고 피해자다. 어린 조카딸과 함께 촌구석에 처박힌 이유도 에티와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하물며 화마에 희생된 일생의 작업물들을 생각한다면…. 예술가, 창작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의 가장 참혹한 피해자는 바로 타타가 아닐까. 그런데 결말에서 타타를 작가가 어떻게 대하는지 보라. 그 사람이 아무리 악인이었어도 이야기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그에 합당하고 적절한 퇴장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게 바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고 마땅한 예의다. 하지만 작가는 그냥 타타를 슬그머니 무대 밖으로 밀어낸다.

타타에 대한 작가의 푸대접은, 에티와 조지프의 시점이 교차되어 진행되는 작품의 구성에서도 보인다. 사실 조지프는 개인의 서사도 있고 중요한 인물인 척하곤 있지만, 불쏘시개 역할을 빼고는 거의 하는 일이 없다. 그보다 내면에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타타가, 이야기에 헌신하고 기여하는 정도만 보더라도 훨씬 중요한 인물이다. 이야기의 균형은 둘째치더라도, 에티와 조지프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타타의 모습은 독자로서 어딘지 부족해 보인다. 그 인물에게 뭔가, 드러나지 않은, 독자들만 볼 수 있는 내밀한 뭔가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에티는 자신의 분노를 엉뚱한 방법으로 푸는 대신 좀 더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다. 이 말이 피해자를 향한 이차 가해로 들릴까? 에티와 타타는 서로에게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영원히 맴도는 ‘우로보로스’처럼 두 사람의 갈등과 애증은 영원처럼 보인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강한 결단이 필요하다. 행동에 나선다면 누구에게 수월했을까. 그림이 인생의 전부이고 은둔 생활에 비교적 만족하는 타타보다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에티에게 좀 더 많은 동기와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그녀 스스로도 절실히 원하던 바이기도 하고.

 

‘폴 세잔느’, ‘페기 구겐하임’ 등의 실존 인물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특히 폴 세잔느는 복잡하고 더러운 사생활로 파렴치한 악당 역할을 부여받는데, 알고 보니 작가의 상상이랜다. 실존 인물에게 작가의 상상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오명을 씌워도 괜찮은가?

덕분에 작품은 역사 소설의 냄새를 살짝 풍긴다. 본격적인 시도는 아니고 약간 그런 척만 한다. 출판사는 로맨스+미스터리 장르로 선전하고 있던데, 로맨스로서는 너무 빤하고 미스터리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읽기엔 처절한 심리 소설, 싸이코드라마에 더 가깝다. 타타와 에티의 소설 속 심리를 다룬 에세이나 소설 비평이 나온다면 기꺼이 읽고 싶다.

 

사족.

 

온라인 서점의 이 책 페이지를 보면, 책 소개보다도 작가 소개가 더 눈에 들어오는데, 뭐, 신인 작가라 그럴 수도 있지만, 책에 대해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혹은 할 말이 많지 않으면) 작가 홍보로 때우나, 그런 생각 잠깐. 그렇다고 이 책이 아주 형편없었다는 말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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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읽고 말하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전화윤 옮김 / 현암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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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 번째 책.

 

★★★

 

❝살아 있잖아, 살아 있잖아요. (336쪽)❞

 

‘카페 시트론’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독서 모임이 열린다.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됐다. 이름 하여, ‘언덕 중간의 책 읽는 모임’. 참가자는 78세에서 92세까지의 노인 여섯 명. 여기에 고모를 대신해 운영을 맡게 된, 카페의 매니저 ‘얏쿤’이 최근 합류한다. 얏쿤은 등단한 소설가이지만, 어떤 이유로 쓰기를 멈췄다.

 

아기자기한 분위기와 낭만적인 배경, ‘책’이라는 소재와 ‘읽기’라는 활동을 주재료로 삶과 죽음, 인간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사랑과 관용, 연대와 위로를 전달한다.

 

독서 모임 참여자 개개인의 스토리를 상세히 드러내기보다 겉보기엔 비슷해 보이는 노인들을 한데 모아놓고, 무리 안에서 한 개인을 차별화시키는 요소들, 개성과 인격, 사람됨, 그(혹은 그녀)다움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한다. 그런 탓에 기대했던 드라마틱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대신 삶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연속성, 외형은 변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간직되는 개인의 본질과 성격의 핵심, 개별성을 지닌 각자로서의 개인이 타인과 우연히 만나는 순간, 그 교차점에서 불꽃이 튀듯 보이는 유사성 등이 책읽기라는 공통된 행위를 중심으로 보이고 탐구된다.

 

젊은 소설가가 슬럼프에 빠져 쓰기를 중단한 이유도 이야기의 작은 핵을 이룬다. 얏쿤의 그런 사정은 ‘작가’는 과연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며 어떤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쓰는 사람’으로서 작가는 그저 받아 적는 사람, 옮겨 적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글감과 소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타인의 삶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렇게 쓰인 글을 작가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상과는 많이 달랐던 작품이었다. 좀 더 차분하고 건조하며(독자의 태도에 따라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읽는 내내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삶에 대한 자세랄까. “살아 있잖아요.(336쪽)”라는 ‘쇼코’의 외침은 이 세상을 사는 모든이들을 위한 응원처럼 들린다. 이건 살아 있음에 대한 찬미로서 삶에 대한 집착만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 지나온 시간에 대한 경의와 동경, 그리움이랄까. 살아 있다는 것. 호흡하고 감각하고 유기생명체로 존재하는 것, 우리에게 기대할 수 있는 미래와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 일인지.

 

작품 속, 독서 모임에서 텍스트로 삼는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라는 작품(실제로 존재하는 판타지 동화이고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적이 있다)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그 부분에 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공감할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쉽다. 이 동화에 대해 잘 알았더라면, 이 작품에 대한 감상도 좀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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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공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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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예순아홉 번째 책.

 

★★★☆

 

❝문학의 악덕에는 치료제가 없는 것 같다. 감염된 이들은 거기서 더 이상 쾌락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 - W. G. 제발트 (70쪽)❞

 

글도 쓰고 문학 강의도 하는 ‘나’는 최근에 선배이면서 스승이기도, 멘토이면서 연인이기도 했던 남자의 자살을 겪고 충격에 빠졌다. 와중에 그의 세 번째 부인으로부터 그가 키우던 개, ‘아폴로’를 맡게 된다. 늙은 개는 화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의 기억을 곱씹게 만든다. 고인이 된 연인의 개를 보살피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상실과 애도, 위로,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 젊음과 노화, 죽어감, 예술과 문학에 대한 사유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애초에 상상했던, 인간과 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난 오히려 이게 더 좋았다. 제목의 ‘친구’는 화자와 아폴로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화자와 고인의 관계이기도 한데, 화자의 애도 방식은 약간 특이한 구석이 있다.

 

지난주에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 ≪그해 봄의 불확실성≫과 공통점이 많다. 소설과 에세이의 모호한 경계, 작가인 화자, 1인칭 시점, 동물(앵무새가 나오더니 여기는 그레이트 데인 종의 초대형견)을 중심으로 한 기둥 이야기, 자유로이 흘러가는 의식, 다양한 이슈의 사유, 특히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

 

가장 최근작(2023년 출판)인 ≪그해 봄의 불확실성≫을 먼저 읽은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한 (처음의 호기심과는 달리) 만족도는 그리 크지 않다. 비슷한 형식에 거의 흡사한 구성은 식상하기까지 하다.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 들렸던 작가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읊조리는’ 것에 가까웠다면, 이 책에서의 작가는 거의 ‘주절거리는’ 것으로 들린다. 이 책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활동 기간 동안 내내 ‘자기 복제’를 일삼는 예술가(창작자)가 적지 않으니, 작가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면, 같은 작가의 책을 거의 연달아 두 권이나 읽은 나에게 문제가 있지 않을까. 아마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감상은 또 달랐을 터.

 

이 책만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이 작품은 문제가 없다. 작품 안에서 작가는 더 깊이 있는 사유를 펼친다.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 작가의 생각이 여기서 저기로 널을 뛴다는 점이 없지 않았다면,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수의 이슈에 집중한다. 바로 삶(죽음)과 글쓰기.

 

작품의 포문을 여는 사건이 ‘자살’이므로 작품 전반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와 그 대척점에 놓인 삶에 대한 사유는 어쩔 수 없다. 화자는 그 슬픔에 내내 짓눌린다.

 

❝일정한 나이가 된 사람에게는 그것(자살)이 합리적인 결정일 수 있다고. 완벽한 선택이, 심지어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고, 젊은 사람이 자살하면 실수일 수밖에 없지만 그 경우와는 다르다고. (12쪽)❞

 

화자는 고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슬픔과 충격에서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는 자신을 이렇게 항변하기도 한다.

 

❝자살은 이기심과 자기 연민으로 꽉 찬 괴물이죠. 고귀한 선물인 생명을 그렇게 배은망덕하게 내치다니. 또 자살자들은 자신을 증오했겠지만, 자살이 망친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남은 친지들이었죠. (180쪽)❞

 

자살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자살자들의 상황과 심리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덮어놓고 무조건 ‘자살은 자신을 향한 범죄’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사회에서 자살(죽음)에 대한 자유롭고 솔직한 논의는 불가능해 보인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솔직하고 열린 마음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작가들은 물론이고 독자라는 존재들에게 더 할 나위가 없는 좋은 충고처럼 들린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난 작가에게서 작품을 구원하는 것은 독자 리뷰, 140쪽), 오해와 오독(내가 사람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근사한 쇠고기 스튜를 대접하자 다들 맛있게 먹고 이렇게 말합니다. 와, 맛있네요. 먹어 본 중 최고의 양고기 스튜인 걸요! 그게 어때서요? 손님들이 잘 먹은 게 핵심 아닌가요?, 140쪽), 작가의 특권과 저술(글쓰기)라는 소명(저술이 엘리트 위주의 자기중심적 행위라는 점은 부인 못 해요. 관심을 받고 출세하려고 글을 쓰니까요. 세상을 더 정의로운 곳으로 만들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니고요. 물론 거기에는 약간의 수치심이 수반되겠지만, 223쪽), 등의 질문을 통해 오늘날 한 권의 책, 출판시장, 작가(저술가)의 현실을 되짚고 비판한다.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란 이름으로, 허구가 아닌 픽션(아이러니하게 들린다)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거듭 듣고 있으니, 내겐 마치 작가의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평범한 개인의 삶에서 추려 낸 이야기들이 필요해요. 지어내지 않은 이야기. 필자의 관점이 개입되지 않은 이야기. (222쪽)❞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실제로 고초 속에서 사는 이들이 제대로 말하는 게 목적이고, 작가의 역할은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하는 데 국한된다(222쪽)’는 말은 현재의 퀴어 문학이나 페미니즘 문학이 귀 기울여야 할 충고 같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그야말로 대표작이고 출세작(2018년 전미도서상 수상작)이다. 번역도 무려, 영문학 번역계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공경희’. 작가를 처음 접한다면 (내가 읽은 두 권 중에) 이 책을 가장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다.

 

책꽂이에 작가의 다른 책(‘줄리앤 무어’ 주연으로 영화화된 책)이 보인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나중에 읽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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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할 세계 -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문경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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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예순여덟 번째 책.


★★★☆

 

환갑을 앞두고 때 아닌 죽음을 맞은 국어교사 ‘정윤옥’의 삶을 그린다.

 

교사로서 윤옥은 투사에 가깝다. 전교조 가입으로 해임됐다가 복직했으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원대한 꿈을 함께 품었던 동료가 육욕에 굴복하고 돈과 명예에 변절하는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동료 교사들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지 못하는 단단하고 꼿꼿한 원칙주의자고, 거의 모험에 가까운 수업으로 학부모들의 원성을 듣지만 무시할 정도로 배짱이 있다.

 

개인으로서 윤옥은 슬픈 가족사를 지닌 비운의 주인공이다.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는 동생 ‘지호’를 포기하는 엄마를 방관하고 어린 나이에 임신한 제자의 아이를 거두어 키운다. 정체가 모호한 시설에 떠맡겨진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기억은 윤옥의 일생을 지배한다.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교육에 헌신하는 모습은 과거의 속죄일 수 있다.

 

내겐 ‘좋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몇 명의 선생님이 생각나긴 하는데, 거의 초등학교 시절에 만난 분들이었다.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을 때.

그런데 그 시기에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적어도 어느 선생님이 친절하고 누가 아이들에게 진심이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대강 눈치채고 있지 않았을까. 어리고 세상 모르고 행동과 반응은 굼떴어도 분위기를 읽는 건 빠르고 정확한 편이었으니까. (눈치가 빠르다고 뭐를 어떻게 반응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선생님이란 존재를 절대 좋아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떠나서 그들은 내가 절대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요구했고 내 실패에 대해선 매우 엄격했다.

 

굳이 내 과거를 거울 삼지 않아도 윤옥이라는 캐릭터는 비현실적이다. 너무나 일관된 모습뿐이라 얇은 종이처럼 팔랑거린다. 그 영웅적인 모습은 소위 교육계의 히로인, 어벤저스 대접을 받을 만하다. 이런 사람이 있다고? 아니, 이런 선생님이 있다고?

 

소설이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이 위인에 가까운 인물임이 분명해도 정의와 올바름에 선다는 건 내게 일종의 각성이 되었다. 나, 자신이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면 정의와 올바름에 마음이 기우는 건 인지상정 아닐까. 정의롭게 행동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그러기 위해선 용기와 자신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그것은 나의 미덕이 아님을, 내게 그것이 충분치 않음을 깨달을 때 수치스러워야 할까. 아니면 부러움?

 

이야기는 윤옥이 한 일보다 그녀의 삶 자체에 집중한다. 그래서 굉장히 바쁘다. 초반엔 산만해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여러 일이 일어나는데 깊이는 없다. 큰 위험도 위기도 없다. 뭔가 일이 터질 만하면 운 좋게 잘 넘어간다. 다이나믹(dynamic)하기보다 파노라믹(panoramic)하다. 이런 이야기에서 흔히 보이는 건데 교훈을 너무 노골적으로 외치고 있다. 불필요한 사건들도 많다. 적어도 윤옥은 왜 죽어야 했는지, ‘영숙’은 왜 자살한 건지, 등은 설명 내지는 이유가 필요하다. 출판을 위해 분량을 많이 줄였다고 하는데(목차 포함 244쪽), 지금보다 좀 더 길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서이초 교사 자살 사건’이 작가에게 계기가 됐다고 하는데, 그 이슈를 정면에서 파고든 작품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교권침해’, ‘학부모의 갑질’ 같은 이슈가 등장하긴 하는데, 다른 이슈들에 파묻혀 유야무야된다. 할 이야기는 많고 분량은 정해진(짧은) 탓에 진중하게, 사건의 드라마성을 차분히 다룰 공간이 없다. 오히려 ‘서이초’ 사건에 대한 정보는 이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책을 손에 드는 게 낫다.

 

그럼에도 (주인공의 한결같이 영웅 같은 면모를 무시하면) 작품은 꽤 읽을 만하다. 작품에서 힘이 느껴지는데 그게 이야기에서 나온다기보다 캐릭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윤옥에게서 우러나오는 에너지는 여전사의 기개에 가까워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다. 간결하고 안정적인 문장이 눈에 착 붙는다. 윤옥의 죽음을 서두에 두고 그녀의 삶을 되짚는 세 장(chapter)의 구성도 적절해 보인다. 초반의 산만함은 오륙십 쪽을 넘어서며 질서를 찾아간다. (대사는 살짝 오골오골하다) 교육 현장에 관한 디테일이 상당하다. (그 바닥을 전혀 모르므로 그렇게 보인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작가의 본업이 교사이니 아마도 실제 지식과 경험에서 온 디테일일 것이다. 선생님이 주인공이 아닌, 학교가 무대가 아닌 소설도 작가가 잘 쓸까, 이런 의심 살짝 해본다.

 

결말에 대해서.

윤옥은 자신이 치른 전쟁에서 이겼을까. 그건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에 따라 다르다. 여러모로 이런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윤옥의 상대는 거대한 시스템과 삶 자체였다. 결과를 떠나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그 가치는 빛난다. 윤욕은 용감했고 자신을 희생했고 행동하며 버텼다. 삼가 정윤옥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제13회 (2023년)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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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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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예순일곱 번째 책.


★★★☆

 

몇 년 전, 전 세계를 얼어붙게 만든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무대로 한다. ‘얼어붙게 만든’이라는 표현은 (돌이켜 보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말 그대로였다는 걸 모두가 안다.

 

작품은 그 시기를 지나는 한 개인(아마도 작가 자신)의 사적인 기록이다. 친구의 지인 집에 머물며 홀로 남은 앵무새를 돌보게 된 이야기를 기둥으로 남성과 여성, 문학과 예술, 글쓰기, 삶과 죽음, 유머의 힘, 선과 악, 타 생명체에 대한 예의와 책임감, 환경 문제 등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다양하게 흘러나온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대한 윤리 의식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다. 이슈는 곧바로 환경 문제로 이어지고, 환경 운동이 어떻게 좌파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는지 설파한 ‘데릭 젠슨’의 저서 ≪거짓된 진실 (아고라, 2008년 刊≫을 생각나게 해서 흥미로웠다. 또한 작가는 ‘제인 구달’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팬데믹 시절에 본,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의 출현에 대해 ‘야생 동물 학대’, ‘지구촌 빈곤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부재’에 원인을 둔 제인 구달의 인터뷰 영상도 생각났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기적 행동과 태도를 악(惡)으로 규정지으려는 노력은 의외로 드문 것 같다. 선함과 악함, 둘 모두 인간 본성의 속성이라면, 대개 선함보다 악함이 더 쉽게 드러나는 것 같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몰인정함보다 예측하기 쉬운 게 있을까? 그게 얼마나 이른 나이에 시작되는지 목격하는 것보다 섬뜩한 일이 있을까? (151~152쪽)❞

 

❝나는 세상에 악한 사람들보다 선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는다. 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해서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반드시 고려에 넣어야 할 점은, 특정 상황에서는 악이 선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만들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특정 목적-이를 테면 전쟁에서의 승리-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219~220쪽)❞

 

이 소설엔 (굳이 첨언한다면) 플롯이 없다.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허문다는, 혹은 두 장르를 혼용한다는 점에서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 멀리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이 떠오른다.

소위 ‘에세이 소설’들 대해 적어도 독자로서의 나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 즉 거짓의 이야기(하지만 진실을 말하는)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 내게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소설은 우리 시대에 주요 장르로서의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아직 죽지 않았을 수는 있어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중략) 여전히 인물의 성격과 체험을 그려 내는 강력한 도구로 남아 있지만, 허구의 이야기는 점차 핵심에서 벗어난 인상을 줄 것이다. 점차 작가들은 ‘당신은 왜 지어낸 이야기를 하죠?’라고 묻는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288쪽)❞

 

작가의 말대로 이 주장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까. 작가의 주장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역사와 성찰을 담은 문학(289쪽)’일까.

작가는 이란의 영화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셰에라자드와 왕의 시대-이야기의 시대-는 끝났다. (289쪽)❞

 

소설이 어떤 모습이든, 혹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든 분명한 게 있고 이건 내게 위로와 힘이 된다. 작가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말을 인용한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소설을 쓰지 않는다. (220쪽)❞

 

매력적인 인물이 등장하고 그, 혹은 그녀에게 일어나는 드라마틱한 사건과 클라이맥스, 반전의 결말 등을 이 작품에 기대하는 건 무리이다. 그리고 문학, 특히 소설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작가의 주장엔 아직까지 동의하기 힘들다. 하지만 잔잔히 물 흐르듯 작가의 의식을 쫓으며 조곤조곤 읊조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 분명 편안하고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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