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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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여섯 번째 책.

 

★★★☆

 

1800년대의 미국.

초라한 무대에 오르지만 ‘제니’는 마술에 진심이다. 실력이 꽤 출중한 마술사로서 그녀는 자신의(그리고 모든) 마술을 설명이 가능한 속임수, 약간의 기술이 동원된 손재주로 간주한다.

어느 날 쇼를 끝낸 제니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탐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제니에게 일을 제안한다. 당시 유명했던 영매(靈媒)인 ‘폭스 자매’의 비밀을 알아내 달라는 것. 많은 보수에 이끌린 제니는 그녀들의 강령회에 참여하여 은밀히 접근한다.

 

이야기의 중심엔 ‘사후 세계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세계의 존재들과 소통하는 게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유물론자이고 회의론자인 제니는 폭스 자매의 속임수를 밝히려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과학과 이성으로 무장된 제 신념을 흔드는 경험을 하고 난 뒤 태도가 살짝 변한다. 의심은 호기심으로 바뀐다.

 

이야기는 폭스 자매의 강령술을 속임수, 이단 행위, 사기 행각이라는 전제를 두고, 믿음(어쩌면 신앙)에 대한 사유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방향을 살짝 튼다.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강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고, 이것은 폭스 자매의 ‘딱’ 소리에 얽힌 비밀과 부딪힌다.

어디까지 믿을 수 있고 무엇을 가짜로 치부해야 하는지, 작가는 진짜와 가짜를 섞어놓으며 그 경계를 흐린다. 이런 혼란은 인물들의 대립 관계를 흐리게 만들고 그들을 상처 받고 슬픔이 많은 보통의, 동등한 인간들로 만든다.

아버지의 유품인 보잘것없는 마술 안내서에 집착하는 제니, 누가 아버지의 진정한 아들인가 증명하기 위해 대립하는 ‘로버트-윌리엄’ 형제, 우연한 사건으로 본의 아니게 쇼 비즈니스 계로 내몰려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폭스 자매의 갈등은 서로를 위로하며 감긴 눈을 뜨게 도우면서 잦아든다. 모종의 종교 행위로 시작된 이야기는 각자의 마음속 묻힌 상처와 아픔을 다독이는 결말을 맺는다.

 

영혼 운운하는 게 비이성적이고 야만의 찌꺼기라는 결론은 없다. 그것이 실재하니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도 없다. 이야기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추고 있는데, 결국 아픔을 뒤로 하고 삶을 재정비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동시에 ‘믿음(신앙, 종교, 뭐든지…)’에 대한 메타포로 읽히기도 한다. 작품은 이런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슬픔과 좌절의 나락에 빠졌을 때, 우리를 안아 일으키고 구렁에서 건져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런 기능만 중시할 때, 우리가 빠질 수 있는 함정,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은 무엇일까.

나아가 진짜 종교와 사이비의 경계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믿음은 다른 이들에게 미신일 수 있지만, 테두리 밖에서 본다면 의심스럽게 보이는 건 거대 종교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믿음이 내게 진정한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 가치 있는 것일 텐데, 그것이 만약 속속들이 거짓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의도를 지니고 좋은 결과로까지 이어진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선일까 악일까.

 

사후 세계란 실재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어떻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확인할 수도 없고 확인된 바도 없으니 어떤 말도 섣부를 테고, 유일하게 확인할 방법은 스스로 경험하는 것일 텐데 그러기엔 증명하기에 너무 늦었으니, 우리 산 사람들은 결코 모를 일이다.

그런 걸 두고 있네 마네, 사기네 어쩌네 하면서 입씨름해봤자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체력 낭비에 지나지 않으니, 그냥 잠자코 있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2011년의 영화, ≪디 어웨이크닝(The Awakening)≫과 구조가 비슷하다. 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한 영국을 배경으로 영매들 ‘털기’ 전문인 여성 수사관이 으슥한 고성에서 진짜 유령을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상당히 재미있다.

소재로 비슷하기는 ‘사라 페너’의 소설 ≪런던 비밀 강령회≫도 떠오르는데, 이 소설은 (내가 읽기에) 완전 개망, 폭망이다.

무당 ‘김금화’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만신(2014)≫도 생각난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무교(武敎)’가 ‘무속(-俗)’이란 멸칭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힘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토속 종교를 주류 사회에서 어떻게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는지에 관해서라면 이 작품과 관련이 많다. 거대 시스템의 횡포라면 우리 영화 ≪불신지옥(2009)≫도 생각난다. 기독교 중심적인 시선으로 한 가정 내의 비극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사족.

 

1. 작품 속 ‘폭스 자매’와 ‘로버트-윌리엄’ 형제 모두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핑커튼 탐정 회사’ 역시 현재까지 존재하는 실제의 기업이다. 지금은 보안 업체에 매각되어 명맥만 유지하는 중이라고.

 

2.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작가는 프랑스인이다. 여성 캐릭터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잘 그렸는데 작가는 남자다. 이런 발언도 차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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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는 주검 은밀한 애도
오가와 요코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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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다섯 번째 책.

 

★★★

 

열한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연작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들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단 큰 역할은 없더라도 공통된 공간 배경이 언급된다. 그리고 인물들이 서로 겹치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 스치듯 나왔던 인물이 다음 작품에 중요하게 다뤄지고, 그 작품의 단역이 또 다음 작품의 주요 인물이 되고… 이야기들이 이렇게 조금씩 겹치다가 마지막 작품은 첫 작품으로 되돌아오는, 그런 식의 구성이다.

 

이야기들로 말할 것 같으면 제목처럼 ‘죽음과 애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기엔 조금 모호한 작품들이 있다. 작가는 죽음을 생(生)의 반대 개념으로서만이 아니고 ‘존재의 사라짐’으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 ‘애도’라는 단어도 행위보다는 감정과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단어로 보이는데, 작품들마다 기저에 흐르는 감정이란 게 약간 독특하다. 쓸쓸하면서 서늘하달까.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집은 적당히 흥미롭고 예쁘게 꾸며졌지만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동굴이 도사린 ‘인형의 집’ 같다. 작품들마다 슬픔과 외로움, 한탄과 애수, 아련한 노스탤지어 등이 적절히 배어있고 여기에 이야기의 그늘 아래 은밀한 어둠, 사악함, 기괴함 등이 어우러져 왜곡된 아름다움 같은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작정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의도한 것도 아니고 첫사랑 같은 설렘도 없고 눈물샘 자극하는 신파도 없는, 독특하면서도 밍밍한, 일본 소설 특유의 맛이랄까, 분위기랄까, 그런 걸 느꼈는데, 이는 일본 소설에 대한 편견일 수 있다.

 

각각의, 혹은 전체의 이야기들은 어떤 의미일까. 아리송하다. 모든 소설 작품에 의미란 게 있을 리가 없고 또 그것을 굳이 캐내려는 노력이 그야말로 무의미하다고 말들은 하지만, 난 솔직히 그런 독자고 그런 식으로 책을 읽어 왔다. 내가 소설을 읽으며 필요한 건 ‘이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이다. 적어도 작가가 ‘왜 이런 작품을 써야만 했던 건지’ 그 의도라도 짐작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집은 ‘글쎄올시다’라는 감상이 적절하겠다. 강렬하면서 동시에 편집증적인 이미지를 주기 위한 시도라면 일단은 성공했다. 하지만 의미가 있는 읽을거리로서는 약간 미심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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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를 누르세요 ■ ㅣ 아작 YA 8
존 발리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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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네 번째 책.

 

★★★☆

 

독신에 싱글, 거의 은둔형 외톨이로 살고 있는 ‘빅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합성된 기계 음성으로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이웃에 사는 ‘클루지’에게 당장 가봐야 하며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그 후엔 적절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 할 일이란 뭘까? 그리고 보상이란 건 또 뭘까? 빅터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웃집을 향하는데, 그곳에서 죽은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집안을 가득 채울 정도의 컴퓨터와 어마어마한 양의 약물.

후에 경찰이 오고, 컴퓨터에 저장된 클루지의 유언이 발견되는데, 그 내용인 즉, 모든 재산을 빅터에게 남긴다는 것. 그저 눈인사 정도만 나누던 남자의 호의치곤 너무나 뜬금없고 엄청난데다 클루지의 사인도 자살인지 타살인지 의심스럽다. 컴퓨터 전문가인 ‘리사’가 수사에 투입되고 빅터 역시 사건에 말려든다.

 

미스터리의 얼개를 지닌 SF 이야기다. 읽다 보면 흔히 요즘 상상하는 SF의 전개와는 거리가 좀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80년대 중반. 당시의 미국 가정에 컴퓨터 보급률은 고작 10퍼센트였다고. 그것이 여전히 미지의 영역, 용도를 확정할 수 없는 기계, 비씨기만 한(없어도 되는) 사치품, 대중화되기 이전의 최첨단 기술이었음을 고려할 때, 작품의 SF적인 상상력이 아우른 영역이 지금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음은 분명하다. 당시의 대중이 그것에 대해 가졌던 호기심, 두려움은 오늘날 우리가 A.I. 기술이나 사람을 대신한다는 로봇에 대해 갖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작품 안에서 컴퓨터라는 소재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조금 더 분명해진다. 이야기 속 컴퓨터(정확히는 통신망)는 50~60년대 SF 영화에 나오는 살인 광선이나 지구에 떨어진 외계 생명체의 알처럼 취급된다. 그것은 사용자를 조종하고 두뇌를 마비시키고 세뇌시킨다. 각각의 기계들은 그 자체로도 괴물이지만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 더 큰 위용을 드러낸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능을 갖게 되어 수뇌인 정보국을 통해 대중들을 통제하고 감시한다(‘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난다). 그것은 오늘날처럼 업무와 실생활에 활용하고 게임 등의 여가를 즐기는, 그런 친밀한 기계와는 달랐다.

(현재의 독자가 80년대의 SF 소설 속 컴퓨터를 보는 방식과 80년대의 작가가 자신의 소재와의 유사성을 30년 전 SF 영화에서 찾는 것과 닮았다.)

 

충분한 유머가 있음에도, 이야기 전반엔 공포와 불안이 녹진하게 흐른다. 컴퓨터라는 소재는, 낯섦,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란 감정을 기반으로 당시의 자국 내 과장된 안보의식, 소련에 대한 적대감, 첨예한 긴장, 과거 전쟁의 트라우마 등과 얽히고설켜, 작품 안에 현재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공포를 적절하게 심어놓는다. 한국 전쟁 트라우마가 있는 빅터와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였던 리사는 캐릭터의 쓸모가 너무나 눈에 띄지만 이야기 안에 잘 스며든다.

 

미스터리, 범죄 소설이 아니므로 그에 상응하는 해답 같은 건 없다. 결말은 대체적으로 모호하다. 다만 특정 짓기가 어려울 뿐, 독자는 이 비극적인 이야기 뒤에 도사린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미래, 그리고 그에 따른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기술 개발의 주체는 우리 인간이지만 인류가 과연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뒤처지고 도태되어 오히려 기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고전적인 두려움. 그런 것들은 항상 존재했던 것 같다. 글쎄. 그건 동전의 양면 아닐까.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느니,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로봇으로 대체된다느니, 이런 예측들. 오늘날의 기후 위기 역시 같은 맥락의 위협이다. 반대로 과학과 기술의 덕을 보는 부분도 있으니, 그것이 주는 비전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균형일 텐데, 그게 어려운 거다.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지 꽉 채워 40년. 당시엔 하이 테크놀러지 SF 대접을 받으며 해당 장르의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명실상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한 컴퓨터가 이리도 무서운 존재였나, 하는 생각에 격세지감을 느끼는가 하면, 가상의 통신망이 우리에게 가할 수 있는 해악이 요즘에도 분명 존재하므로, 시기와 위상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인 건 여전한 것 같다.

 

사족.

 

1. 출판사 ‘아작’은 ≪The John Varley Reader; 30 Years of Short Fiction≫이란 미국에서 2004년 출판된 중단편 선집을 ≪베스트 오브 존 발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는데,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편 세 편을 따로 뽑아 ‘아작 YA’ 시리즈의 단행본으로 낸다. 당연히 ‘베스트 오브 존 발리’에는 빠져 있다. 이 책도 그렇게 우리나라 독자들을 만나는데, 출판사 하는 짓이 참 얌체 같다가도 출판 시장 형편을 생각하면 좀 짠하기도 하고.


2. 그런데 미국의 원작엔 각각의 단편 앞에, 작가가 작품을 소개하는 ‘사설’이 실려 있는데, ‘아작’은 이 사설들만 떼어 전자책으로 출판한다. 얌체를 떠나 좀 구질구질해 보인다.


3. ‘영 어덜트’ 독자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한 시리즈로 짐작하는데,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성적인 장면, 표현들이 흔하게 나온다. 행간에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아시아에 대한)편견도 작가는 서슴없이 드러내는데 괜찮은 건지?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YA’가 그 의미 아닌 건가?


4. 제목의 ‘■’ 기호는 오타나 글씨가 깨진 게 아니다. 아마도 커서 같은데,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을 그대로 옮긴, 작가의 유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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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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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년 일흔세 번째 책.

 

★★☆

 

김연수의 작품집. 여덟 편의 작품이 실렸다.

오롯이 개인적인 감상이다.

 

작가의 전작을 섭렵한 건 아니지만, 내가 읽은 김연수의 작품집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처음 든 느낌. ‘백가흠’의 소설집, ≪같았다≫를 읽고 난 후와 비슷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대가’ 대접은 조금 이를지라도 ‘노련한 중견’ 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무너지나, 하는 생각. 어딘지 아등바등해 보인다고나 할까, 처연해 보인다고나 할까. (내가 읽은) 전작들에 비하면 약간 쥐어짜는 듯, 안간힘을 쓰는 듯해서 안쓰럽다는 생각도 조금은 했던 것 같다. 작가의 개성이나 장점들이 이 작품집에선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작품들이 공허하다. 실체가 없다. 아이디어와 설정, 개념을 소개하고 끝나는 이야기들이 많다.

심하게 표현하면 겉만 번드르르하다. 뭔가 알록달록 그럴 듯한 포장을 벗기고 나면 모래 한 줌 들어 있는 선물 상자 같다.

 

관념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문장들도 한몫한다. 좋게 말하면 시적이고 감각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당의(糖衣)를 입힌 듯, 현혹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문장들이 많이 거슬린다. 달큰하고 화사한 색깔의 솜사탕을 주먹에 쥐면 설탕 한 줌 남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 비슷하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으나, 이 작품집에선 하루키 ‘짝퉁’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올드’한 느낌이 강하다. 작가의 경력이나 연령을 고려하면 이상할 것도, 딱히 거슬릴 것도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이나 인식과 시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어떤 작품에서 작가는 여전히 과거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젊은 척을 하라는 게 아니다. 현재의 물결에 잘 적응한 작가로서의 스탠스랄까. 그런 점이 아쉽다. 다른 작가와 비교하는 건, 이 작가에게나 저 작가에게나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이청해’의 21년 출간된 소설집, ≪어디까지 왔나≫와 비교를 하게 된다. 팔순이 다 된 작가가 쓴 작품들에선 이런 ‘촌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삶의 긍정성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읽히는데 전반적으로 설득력은 떨어진다. 독자가 ‘아!’하는 지점이 없다. 현재와 미래, 과거라는 시제에 대한 어떤 개념, 아이디어는 흥미롭지만 작품은 이를 설명하느라 바쁘다. 그게 전부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표현은 이 작품의 핵심처럼 보이는데, 대체로 의미가 모호하다. ‘최진영’ 역시 23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단편, <홈 스위트 홈>에서 똑같은 문장을 쓴 바 있다. 하지만 최진영의 그 문장은 이야기 안에서 ‘시간은 발산한다’는 표현과 어우러져 받아들이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다. 이야기와 인물에 잘 녹아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연수의 이야기에선 이야기랄 것도 없고 인물들 역시 극적으로 과장된 캐리커처들(관심종자)뿐이라 독자들이 감응할 여지가 없다. 작가는 이런 빈틈을 메우기 위해 여기저기서 많은 것들을 끌어넣는데 그 통에 산만하고 정신이 없다. 집약적인 간결함이란 단편소설의 미학적 측면에서 봐도, 이 작품에 점수를 후하게 주지 않을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난주의 바다에서> 역시 산만하게 읽힌다. 여기저기서 데려온 것들로 크게 부풀려진 덩치에 비해 속은 텅 비어 있다. ‘정난주’의 이야기가 작품 안에서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는 탓에 막상 주요 인물인 ‘통계학과 은정이’의 시름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 주객이 전도됐다고 할까. 추자도 관광 홍보 영상에 어울릴법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소설 작품으로는 무리다.

어중간한 곳에서 멈추지 않고 경험의 극대치를 찍자는, ‘끝까지 가본다’는 메시지는 좋았다.

 

<진주의 결말>은 이 책에서 그나마 눈에 띈 작품이었다.

‘유진주’라는 인물의 행위와 의도를 알려는 노력,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그 끝을 말끔히 보여주지 않는 미완의 결말이 매력적이었다. 범죄 수사 드라마나 사이코스릴러에 어울리는 소재도 난 잘 쓸 수 있어, 라고 작가가 말 하는 듯하다. 썩 잘 한 것 같다.

한 인간을 파악하는 것,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은 언제나 유효하다. 동시에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혼돈 그 자체’다. 인간에게 ‘진심’이란 없다는 전제 아래, 오로지 임시방편의 핑계와 구실만 있고 그건 ‘참’이 아니라는 사유는 흥미로웠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몽골에 대한 환상이 있는 나로서는 대단히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었다. 특히 수려한 자연 풍광의 묘사나, ‘빅토르 위고’를 인용하면서 밤의 신비로움을 표현한 부분은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연애 이야기를 이다지도 진부하고 장황하고 재미없게 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다. 이해할 수 없는, 도무지 무슨 감정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인물을 보면서, 작가가 작품에 과한 치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 약간 허세랄까, 현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독자의 공감, 독자와의 교감과는 크게 상관없는 것에 더 힘을 쓰고 있지는 않았는지 우려가 들었다.

 

<엄마 없는 아이들>에서는 이혼과 외부모 가정,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고루한 상상력, 때 늦은 현실 감각 등이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 작품 역시 독자의 감정이 얼마나 움직이느냐가 중요한 작품처럼 읽히는데, 공감이 쉽지 않았다.

가장 단 적인 예로, ‘명준’과 ‘혜진’을 같은 수위에 놓고 마치 땡처리 하듯 취급하는 작가의 태도가 거슬렸다. 엄마 없는 가정에서 크긴 했어도 명준과 혜진이 품은 내면의 결은 완전히 다르다. 명준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큰 사람인 반면, 혜진이 엄마에게 지닌 감정은 ‘분노’가 대부분일 것이다. 명준은 엄마 없이 자란 자신의 숙명에 순응했을 테고, 혜진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반항하고 저주처럼 여겼을 것이다. 두 사람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독자는 누구에게 감정을 줘야 하는가. 두 인물의 내면이 합쳐졌을 때 시너지가 생겨 이야기가 의도한 효과가 날 텐데, 서울과 부산을 한데 엮으려니 무리가 생긴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설정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타인의 기억 속의 나, 기억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의 나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잊히는 건 정말 두려운 일일까.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 좋기만 한 일일까. 잊히는 것과 기억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위로’에 대한 화두도 엿보였는데, 진정한 위로란 의외로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서 오는 게 아닐까, 보잘 것 없는 삶이라도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위로란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제 상처를 어루만지고 살필 수 있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 빤하지만 행동이 어려운 그런 생각들을 했다.

반면, 결국 ‘희진’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메일이란 수단과 다른 인물을 동원한, 이유 없이 복잡한 얼개는 흠처럼 보인다.

 

<사랑의 단상 2014>는 사랑에 실패한, 이별을 겪고 상처받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남자가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을 다시 세우는 회복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이국적인 여행지와 낯선 소재들이 제법 나오는데, 이런 멋부림이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이 작품에서는 썩 어울린다. ‘몸은 무죄, (늦된) 마음은 유죄’라는 문장 역시 매우 트렌디하게 들려 이 작품의 정서에 잘 스민다. 자칫 바람 맞은 남자가 징징거리는 공허한 이야기로 읽혔을 법도 하지만, 작가는 형식적인 면에서 기교(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모호한 대화 구성과 영화의 오버랩(overlap)같은 장면, 등)를 부려 위험을 극복한다.

마지막에 ‘세월호 참사’ 이야기는 정말 뜬금없다. 본 이야기에 잘 섞이지 않을뿐더러 이런 식으로 그 사건을 ‘소비’해도 되는지, 작가가 무슨 생각이었을지 궁금하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연상케 하는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의 중요한 화두는 ‘시간’이다. 그런 이유로 책 머리에 실린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변주처럼 읽히는데, (작품이 어땠는지와는 별도로) ‘시간’이라는 소재를 작가 자신의 말로 좀 더 잘 풀어낸 것 같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 영원한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과거는 현재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리고 현재의 나는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이런 사유가 가능했다.

과거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나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의 나는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므로 나는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나의 육체는 머지않아 사라질 테지만 ‘실재하지 않음’의 상태로 나는 존재할 것이다. 과거에도 나는 존재했다. 시간의 영속성(eternity) 위에서 우리는 어쩌면 영원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분명한 경계로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고 겹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시간의 연속성(continuity) 위에서도 우리는 영원하다.

(작품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과는 달리 글로 적으려니 뭔가 횡설수설하게 된다)

존재와 시간, 철학과 과학, 심지어 영성적인 색채까지 어우러져, 작품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풍성했는데, 이야기 자체보다 이런 상상들이 더 재미있었다. 반면, 시간이 중첩되고 서로 원인을 제공하고 결과를 야기한다는 개념이 언제나 세계의 확장, 존재의 확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나, 꼬리를 물고 영원히 도는 우로보로스의 뱀이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은 인간의 내면, 인식을 고립시키는 설정이 되기도 한다. SF-호러 장르나, 다크 판타지 장르의 다수의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서사 장치이기도 하다.

‘소설=이야기’라는 엄격한 기준 아래라면, 이 작품 역시 앞의 몇 작품과 마찬가지로, 극화, 이야기화, 소설화에 실패한, 소재와 개념에서 주저앉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는 대신 기존의 무언가를 끌어다 지면을 때운 것처럼 보인다. 하나마나 한 말이지만, 이는 독자에 따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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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특히 소설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독자마다 다르다. 그건 취향이나 선호도의 문제 이상이다. 보다 먼저, 소설이 무엇인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독자 스스로의 고민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독자는 자신의 결정에 따른다. 자신의 기준으로 소설을 읽을 권리가 있다. 그건 또한 독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작가의 손을 떠난 한 권의 책은 멀리 나아가 세상의 파도에 휩쓸린다. 세파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되는 것도, 고이 모셔져 성물(聖物)로 숭배받는 것도 모두 작품의 운명이다. 그리고 그건 온전히 독자에게 달려 있다.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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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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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두 번째 책.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여섯 번째 책.

 

★★★★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중편 ≪쥐덫(the Mousetrap)≫과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작가는 일찌감치 자신의 소설 작품을 희곡으로 각색하여 무대에 올려왔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희곡 작가로서 작가의 인기와 성공의 정점을 찍은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작품은 영국 왕실, 메어리 공주의 생일 선물을 위한 라디오드라마 극본(원래 제목은 ≪Three Blind Mice, 47년≫)이었다. 이후에 소설로 개작된 것이 이 책에 실린 것이고 나중에(52년) 희곡으로 각색, 무대에 올라 지금에 이른다. 연극 ≪쥐덫≫은 지금도 공연되고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롱런한 연극 작품으로 ‘기네스 북’에 이름을 올린다.

 

소설로서 ≪쥐덫≫은 클로즈드 서클(closes circle) 미스터리의 고전적인 작품이다. 폭설로 고립된 산장이라는 매력적인 무대와 그곳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여기에 ‘아동 학대’라는 사회적 이슈가 범죄 동기로 드러난다. 전형적인 후던잇(whodunit) 작품으로 구성이 지나치게 도식적이지만 이야기가 주는 긴장감과 수수께끼는 언제 읽어도 생생하다.

작가는 범인은 누구일까, 하는 문제에는 물론이고 과연 다음에 누가 죽을까, 에도 힘을 쏟는다. 이 작품의 피살자들은 모두 과거의 어떤 사건에서는 가해자였다.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범죄의 동기가 ‘복수’라는 게 서서히 드러나는데,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범인을 향한 양가감정이 감상의 핵심이다. 살인이 성공하면 복수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는 범인에게 독자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45년 영국, 위탁 가정에서 실제 발생한 ‘데니스 오닐(Dennis O’neill) 학대 치사 사건’이 모티프가 됐다고 한다. 작가가 처음의 라디오드라마 극본을 단 일 주일만에 써냈다는, 혀를 내두를만한 일화도 전해진다.

 

그 외에 실린 단편 작품들은 작가가 과거에 잡지에 발표한 단편들을 추려 모은 것들인데, 출연진(?)이 화려하다. ‘포와로’, ‘미스 마플’, 그리고 귀하디귀한 ‘할리 퀸’까지. 작가의 팬이라면 화려한 상차림 앞에서 군침만 흘려도 분명 행복할 터.

 

죽은 삼촌이 남긴 유산을 찾으려는 커플의 이야기인 <이상한 사건>, 질투와 열등감에서 비롯된 살인을 해결하는 <줄자 살인사건>, ‘완벽함’ 뒤에 도사린 사악함을 경고하는 <모범 하녀>, 화려하고 비밀스러운 연막 뒤에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는 <관리인 노파>에선 미스 마플이 활약한다.

그리고 이기심에 의한 치정 살인을 고발하는 <4층 아파트>, 유괴된 아이를 구하는 이야기인 <조니 웨이벌리의 모험>, 습관과 일관성에 어긋난 행동을 단서로 범죄를 추적하는 <24마리의 검은 티티새>에서는 포와로가, 살인 사건을 두고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커플의 자백을 앞에 두고 진위를 밝히는 <연애 탐정>엔 할리 퀸이 등장하여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 작품집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작가의 다른 장편들과 비슷한 단편들이 무려 두 편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관리인 노파(the Case of the Caretaker, 42년)>는 ≪끝없는 밤(Endless Night, 67년)≫과 비슷하고 <연애 탐정(the Love Detective, 26년)>은 미스 마플의 데뷔 장편인 ≪목사관 살인사건(the Murder at the Vicarage, 30년)≫을 연상케 한다. 각각의 작품들을 짝을 지어 두고 비교하면 단편을 장편으로 발전시킨(다시 쓴) 경우라고 여겨지는데, 작가가 플롯을 재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걸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족

 

태어나 처음 관람한 연극이 바로 ≪쥐덫≫. 아직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이었고 정동의 ‘마당 세실극장’을 향해 가는동안 입에서 피어오르던 입김, 발 아래 사박사박 눈 밟히는 소리가 지금도 눈과 귀에 선하다. 생전 처음의 연극.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라니. 그 흥분, 그 설렘.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가.

내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았던 누나가 데리고 갔었는데, 정작 누나는 그걸 기억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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