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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요, 투우사여 ㅣ 암실문고
페드로 레메벨 지음, 임도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6월
평점 :
❝사랑이라는 게임을 할 땐 늘 실수할 위험이 있으니까. 무엇보다 세상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255쪽)❞
‘피노체트’ 독재 시절의 칠레. 식탁보 따위에 손자수를 놔주며 벌어먹고 사는 늙은 게이(혹은 트랜스젠더) ‘앞집 미친년 로카’가 사랑에 빠진다. 상대는 무장 테러로 독재 정권의 전복을 꾀하는 지하 저항세력의 핵심 요원 ‘카를로스’. 로카가 아는 카를로스란 이름은 본명도 아니고 로카는 앞집 미친년이지만 앞집 미친년이 아니다. 극 중 누구도 그녀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로카와 카를로스는 서로 어울리는 상대일까. 손에 실과 바늘을 들기 전엔 잘 나가던 ‘드랙 퀸’이었던 로카는 ‘무식한 촌년’이고 이미 바닥을 친 늙은 ‘퇴물’이다. 반면 카를로스는 이십대 초반의 푸릇푸릇한 나이에 똑똑하고 잘생기기까지 한 대학생이다. 무엇보다 로카는 뼛속까지 동성애자이지만 카를로스는 그렇지 않다. 우연히 만난 카를로스에게 홀딱 빠진 로카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시작된 그들의 관계(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
‘늙고 무식한 촌년’인 로카는 오히려 현명하고 용감하고 우아하다. 카를로스가 로카를 (어느 정도는) 이용을 했더라도 로카는 카를로스를 진심으로 (거의 충심을 다해) 사랑한다. 자신이 연인에게 이용될 가치와 희생될 덕목을 갖고 있다는 걸, 시작부터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카를로스와 그 집단의 의도와 목적, 수단에 대해 온전히 무관심한 척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카를로스는 로카를 사랑했을까.
로카에 대한 카를로스의 감정은 감사와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다가 사랑으로까지 여겨지는 감정을 보이지만, 엄연한 착각일 뿐이다. 그렇다고 카를로스가 목적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나쁜 놈이냐. 그렇지 않다. 카를로스는 로카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녀의 안위를 걱정한다. 모든 일을 비밀로 하고 ‘그 일’에 대한 대화를 최대한 삼간다. 로카에 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지금 있는 그대로, 당장 보이는 대로의 모습으로 그녀를 인정한다.
독재 정권과 시위대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86년의 칠레를 무대로 하지만, 관련한(정치적인) 장면들은 별로 없다. 그녀가 한 모든 정치적인 행동은 오직 카를로스를 위해서였다. 카를로스도 그녀를 자신의 일에서 되도록 멀리 떼어놓으려 한다. 조국의 현 상황에 눈을 뜨라고 보채는 일도, 그렇지 못함을 나무라는 일도 없다. 이런 태도가 로카와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서로를 위한 배려는 결국 서로에게 옳은 것이었다.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던 로카는 끝까지 ‘순진한 게이’로 남는다. 하지만 그녀의 내부엔 조용하고 느리지만 확실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진다. 의뢰받은 식탁보를 전달하러 방문한 국회의원 저택에 느껴지는 어떤 반감, 도심에서 맞닥뜨린 최루가스, 우연히 끼게 되는 여성들의 집회 들은 그녀에게 모종의 자극이 된다. 남성의 육체에 여성의 삶을 사는 정체성의 약점이 위기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는 수단이 되는 아이러니도 정체성(경계)의 모호함, 현실의 혼란을 암시하는 것 같다.
칠레의 당시 정치적 상황이나 등장인물들을 보면, 약간이라도 서스펜스 두드러지는 스파이 소설 같은 장면을 예상할 수도 있겠으나, 그저 언급하거나 짧게 보여주고 만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러브스토리’로 일관한다. 마치 ‘사랑’에 오로지 그것 말고는 모두 방해 요소일 뿐이라고 조용히, 그러나 절절히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소설의 대부분이 로카의 삶과 내면에 집중되어 있지만, 독재자의 모습이 막간처럼 등장하는데, 상상하는 그런 모습(실제로 피노체트의 독재는 세계적으로 악명이 자자했다고)이 아닌, 그저 생활에 찌들고 와이프의 바가지에 지쳐 있으며, 테러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경이 곤두선 ‘늙다리’ 정도로 묘사되고 있는 게 재미있다. 알고 보니 한심하고 게으른 늙은이인 피노체트와 알고 보니 그냥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인 로카를 나란히 놓고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대유(代喩)하는 장치로 보인다.
소설에 표현된 사회, 국가적 상황들이 그 시절의 대한민국과 닮은 점이 많아 겹쳐 보였다. 당시의 우리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들(특히 영화)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가난한 고학생을 뒷바라지하는 호스티스나 우연히 시위대를 돕다가 위장취업한 운동권 대학생(학출)과 사랑에 빠지는 여공. 우울한 분위기. 결국 배반하는 남자들. 여자들의 결말은 언제나 불행하고(정신병원에 갇히거나 자살), 소비되고 버려지는 여성성, 불쌍한 여자들을 앞세운 이야기들.
로카의 결말은 어떨까. 약간은 열려 있고 조금은 약간 행복에 기울어 있어, 저런 클리셰들에서 비껴나 있다. 그녀는 함께 쿠바로 가자는 카를로스의 제안을 거절한다. 카를로스를 사랑하지만 그 한계를 무엇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로카는 자신이 준 사랑을 되돌려받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진짜 사랑을 누군가에게 주었다는 사실만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보다 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에 임하는 그녀의 용기와 현명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강렬하고 아름다우며 슬프지만 희망적인 마지막 장면은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오랫동안 벅찬 여운으로 남는다.
어쩌면 평범한 퀴어 로맨스에 단지 인물과 배경에 변화를 준 것뿐인데, 마치 완전 다른 시도, 새로운 장르인 듯 감상이 특별하다. 시인이자 퀴어 논픽션 작가, 조형 예술가였던 작가의 유일한 소설이라고 한다. 유난히 시적인 문장들이 슬픈 왈츠를 추며 다양한 감정을 독자의 피에 새겨 넣는다. 한동안 로카와 카를로스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