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패러독스 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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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 말한 것 같은데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난 로저 애크로이드를 누가 죽였는지 몰랐다. 이 책을 읽기 전엔.
화자인 의사가 범인이란다. <-- 범인은 긁으면 보임 (스포일러라는 항의가 있어서... ㅎㅎ )
애거서 크리스티의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의사의 기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은퇴한 탐정 푸아르에 의해 의사가 범인으로 지목된다.
그렇다면 그 동안 화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 거짓 기록을 믿어도 되는가?  <--이게 이 책의 - 피에르 바야르의 - 첫번째 의문제기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꼼꼼하게 살펴본다.
범행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의도적으로 생략을 했군, 이 표현은 이중적 의미로 쓰였군... 하면서 푸아르의 추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생략된 것일까?? 의사의 말이 진실이고 푸아르가 망상을 끌어안고 자신의 추리에 끼워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추리 소설에선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외의 다른 이들은 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헛다리를 짚곤 하는데
푸아르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는가? 그에게도 맹목이 있고 맹점이 있지 않은가... 그의 망상이 사건을 산으로 끌고 가고 있지 않은가? < -- 요것이 두번째로 제기하는 의문이다.
예를 들면 로저 애크로이드의 양아들이 범인이라는 평범한 주장에 대해 푸아르는 "그에게는 동기가 '너무' 많군요'라며 묵살한다. 동기가 너무 많으면 왜 안 되는가? 오히려 의사에게는 살해 동기가 너무 없다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살인을 저지르기엔 결단력과 심성도 약한 인물로 계속 묘사되고 있었고.
그러면서 피에르 바야르는 양아들을 범인으로 삼아 다시 추리를 펼친다. 그 추리에 의하면 의사보다 더 매끄럽게 범행이 가능한 전개로 소설이 읽힌다...
하지만 그가 범인인 건 추리소설로서 너무 시시하긴 하다.
그래서 바야르 씨는 다시 그럴싸한 범인을 찾아 나서는데~~
(두번째 추리 맘에 들었음! ^^) 
이 책은 또 하나의('두 개의'로 볼 수도 있다...) 추리 소설이기도 하지만 
좀 어려운 표현을 빌려쓰자면 '해석망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망상을 품고 원하는 결과을 지향하는 면만 강조하여 글을 썼을 때,
혹은 원하는 면만 읽고 듣고 수용했을 때 진실이 어떻게 조작되는가 하는 위험에 대하여. 
이 책은 모든 읽기의 한계와 위험에 대한 치밀한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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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결정의 비밀 - 뇌신경과학의 최전방에서 밝혀낸 결정의 메커니즘
조나 레러 지음, 강미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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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직장(…아마도 마지막 직장)에서 나의 가장 큰 임무(?)는 그날의 점심 메뉴를 정하는 일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내게 그런 역할이 주어졌을 리는 없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너무 결정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하는 걸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오늘은 콩나물국밥 어때? 알탕 먹으러 가자, 하는 식으로 제안을 하는 일이 잦았고, 그러면 다들 그러지 뭐 하고 따르더니 어느 순간부턴 점심때가 되면 먼저 내게 ‘오늘은 뭐 먹는 거야?’ 묻게 되었다. 직장인들의 큰 고민이라고 하는 점심 메뉴 정하기에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는 비결이 ‘나의 이성이 냉정하게 결단을 잘 내리고 있어서’라고만 생각했었다. 아,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이런 결정은 감정이 하는 거란다. 이제 보니 난 남들보다 감정적 혹은 감성적 인간이었단 건가?

플라톤은 마음을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에 비유했다. 혈통 좋고 훌륭한 한쪽 말은 마부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지만 다른 한 마리는 마부가 뭘 지시하는지 알 생각도 없고 알 능력도 없다. 그저 제멋대로 날뛰고만 싶어 한다. 당연히, 나쁜 말인 감정의 요동은 억누르고 이성적 마부의 지시를 따라야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합리주의자들은 늘 인간은 이성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이성이 결정을 내리면 최선을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엘리엇이란 남자를 보자. 그는 전두엽 근처 대뇌피질에서 종양제거 수술을 받은 뒤 감정을 잃어버렸다. IQ와 지능은 정상인데 심리적 고통이나 불안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는 결정 능력도 함께 상실했다. 이제 엘리엇은 어떤 식당에 들어가야 할지 계속 비교 분석만 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예전엔 10분 만에 해결하던 일도 어떤 펜을 사용할지 결정하지 못해서 좀처럼 시작도 하지 못한다.

이성은 그대로이나 감정이 없어졌다면 누구보다도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마땅할 텐데 어째서? 종양제거 수술 과정에서 엘리엇이 손상을 입은 부위는 안와전두피질이었고 알고 보니 이 부분은 감정을 이해하고 결정 과정에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단다.

감정은 그냥 이게 좋겠다, 결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경험과 실수를 통해 자기의 감과 확신을 수정하도록 하는 똘똘한 일도 한다.

예측대로 상황이 전개되어 기대가 충족될 때면 도파민이 방출되며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예측이 어긋날 때면 전두대피질에서 실수를 감지하고 삐삐거린다. (소위 ‘이런 제기랄 회로’라나……. 나중에 이 단어만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뭔가 이상한데? 하는 느낌이 든다든지, 심장박동이 빨라지거나 불안으로 인해 땀이 나거나 그런 경보음을 울리면 대개는 행동을 수정하게 되고 비슷한 상황이 다시 오면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

일반론에 대항하느라 감정이 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를 먼저 설명했지만 역시 결정에서 이성의 역할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두 불안에 사로잡혀 떨고만 있을 때 그 상황을 벗어날 지혜를 찾으려면 이성에 의지해야 한다. 사실 (앞에선 아닌 듯 말했지만)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만 뒀다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기 십상이다. 그럴 때 손익을 제대로 따지는 역할은 이성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분석하고 비교해야할 변수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지나치게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종종 이상한 선택을 한다. 간단한 결정의 경우에도 ‘그렇게 결정한 이유를 설명하라’는 주문이 있으면 이것저것 이유를 갖다 붙이다가 엉뚱한 선택을 하는 경우를 보이는 실험을 예로 들며 저자는 설명한다. 너무 고민하다보면 ‘장고 끝에 악수‘를 놓게 되기도 하지 않던가. 그럴 땐 그 문제는 잠깐 덮어놓고 바람이나 쐬고 와서 감정에게 물으라고. 탁월한 결정을 위해선 감정과 이성을 조화롭게 이용하고, 자신의 생각을 너무 확신하지 말고 생각에 대해 생각하란다. 한마디로 감정과 이성의 황금비율이 중요하단다. 에이, 결말이 좀 시시하다. 제목을 ‘비밀’이라고 붙였지만 사실 이게 비밀이랄 순 없으니…….  


 전작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에서 조나 레러는 감각, 감정보다 한 걸음 뒤쳐진 과학의 모습을 설명해주었다. 이미 예술 분야에서, 소설에서 그리고 요리에서 이용되고 있지만 이론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때 전문가들은 말도 안되네, 어리석은 대중의 착각이네, 무시해왔는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제대로 설명이 되더라는 뒷북 과학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이 책도 이미 현명한 결정을 내린 경우를 찾아보며 그 결정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뇌스캔과 각종 실험으로 뒷북을 친다.  감정의 결정권에 조금 더 힘들 실어주게 된 점은 새로우나 해답으로 제시된 방법에는 그닥 새로울 게 없다. 지나치게 생각하다 머릿속이 꼬이는 것 같을땐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잠깐 머리 식힌다든가, 때론 감을 따르고 때론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건 책을 읽지 않아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비율을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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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딜레마 - 의학의 한계에 도전하는 과학자의 사투
조너던 와이너 지음, 박미경 옮김 / 이끌리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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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는 잘 나가는 과학전문 작가입니다. 자신이 과학자는 아니고 과학의 현장을 방문하고 글을 써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해주는 사람이죠.

이 책에서는 ALS에 걸린 환자가 있는 한 가족을 주인공으로 유전공학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실화죠... 와이너 씨는 픽션 작가가 아니에요.

 

헤이우드 집안에는 건장한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형은 엔지니어이고 둘째는 목수, 세째는 대학생...(이던가?)

모두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고 특히 육체노동을 하는 둘째 스티븐이 제일 체력과 체격이 뛰어났죠.

그런데 어느날부터 스티븐의 엄지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열쇠를 돌리지 못하게 되더니, 이게 영 좋아지질 않더라는 거죠. 

고개를 갸우뚱하며 병원에 가보고, 정밀검사를 받아보고.... 결국 ALS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아, ALS가 뭐냐면요, 흔히 말하는 루게릭병이에요.  김명민씨가 살을 쪽 빼 가며 열연한.

이제부터 뇌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는 신체 부위가 점점 많아질테고 결국은  휠체어에 앉아 있다가 호흡기도 기능을 못하게 되면 며칠이나 몇 주동안 헐떡거리다가 죽게 된답니다.

맏형 제임스는 동생이 ALS 진단을 받자마자 초인적으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유전자 치료에 관한  각종 연구 논문을 섭렵하고, 그 분야 최첨단 과학자들과 손을 잡고 유전자 치료 재단을 설립하고  치료술 개발에 매진합니다.  동생의 신체 기능이 조금이라도 덜 훼손됐을 때 시술하려는 생각에 제임스의 맘은 무척 바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두 가지 관점에서 마음 속이 시끄러워지더군요.

첫번째는 인간의 DNA 조작을 어떻게 볼 것이냐.

원래 의도했던 DNA 치료는 법적 제약으로 시도하지 못하였고, 차선책으로 줄기세포 주입을 한 차례 했지만 이건 아무 작용도 (효과도 부작용도) 하지 못했습니다. DNA에 치료에 제동이 걸린 건 다른 팀의 임상 실험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측은 자기네와 방식이 다른데...라며 억울해 하지만~~

아무래도 인간의 오만한 도전이라는 관점, 아직 미숙한 기술로 까딱하면 더 해를 입힐 수도 있다, 프랑케슈타인을 만들어낼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에 찬성하는 측에서도 천천히~~를 주장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가까운 사람의 일이 됐을때는?

사실 저도 DNA 치료는 천천히 부작용을 살피면서 진행해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고 '속도를 늦춰야한다'파인데,

환자가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해보겠다는데 절차와 법이 가로막고 있어서 애타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니 헷갈리더라구요.   

 

두번째 고민은 기대와 현실 수용에 관해서.

스포일러가 되겠습니다만.... 사실 루게릭병의 치료법을 찾았다는 뉴스가 없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예측가능하므로 스포일러랄 수도 없겠죠?

마지막 장에서 비쩍 마른 스티븐은 휠체어에 앉아서 이동하고 자판을 이용해 모니터로 대화를 하는 상태가 됩니다. 스티븐은 사실 처음부터 제임스의 노력에 그리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형이 하고 싶어하니까 협조하는 정도였달까요?

스티븐은 몸은 점점 나빠지지만 한 아이의 아빠로 화목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스티븐과 그 아내는 남은 시간을 받아들이고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할까요...  

반면, 제임스가 ALS 치료법 연구소에만 몰두하는 동안 그의 가정은 그야말로 파탄이 났습니다.  또 치료법 개발에 대해서도 제임스는 아직 희망을 놓지 않고 있지만 법적 문제, 기술적 문제 모두 쉽지 않아 보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 보면 이번 크리스마스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이런 희망을 가지던 사람들이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너무나 낙심해서, 기대를 하지 않던 사람들보다 더 빨리 삶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던데요...  제임스의 아내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 삶을 포기한 건 아니고 가정을 포기했습니다. ) 제임스는 아직도 강한 의지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그 모습이 좀 불안하게 느껴지더군요.

 

제임스란 인물이 활달하면서 좀 과시적이기도 하고 매사 자신만만한 인물이라고 느꼈는데...과연 앞으론 어떤 행보를 걸을까요?. 책은 끝났지만 그는 아직 ing이므로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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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큐를 위한 변명 - 대륙이 만들어낸 중국정신의 두 얼굴
이상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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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큐는 찌질한 주제에 큰소리나 치는 인간이다. 권력이나 물리적 힘에 쉽게 비굴하게 엎드리면서 구경거리만 찾는 그의 모습이 바로 평범한 중국 서민들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루쉰은 보고 있다. 

널따란 대륙을 차지하고 호령하는 호탕한 모습으로도 묘사되는 중국인들이 어째서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을 갖고 있을까. 보통 이는 천하를 통일한 천자의 전제통치, 폭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체득한 태도라 설명한다.

그렇다면 소위 천자라는 이만이 호방하고 아큐적 면이  없었겠구나... 할라치면 저자는 이번엔 천하와 천자라는 단어에 의심을 나타낸다.

광활한 온 세상을 진정으로 파악하고 이 곳은 천하이고 나는 천하의 주인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좁은 울타리 - 알고보면 그리 높지 않은 태산에 올라 내려다 본 범위 - 를 천하라 정의하고 그 곳을 다스리는 자를 천자라고 이름만 거창하게 붙였을 뿐이다. 자기를 비웃는 저들은 애고 자신은 어른이라며 제 혼자 우월하다 여기고 기분 좋아하는 아큐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멀게는 민중이 아큐 기질을 갖도록 한 원흉(?)이랄 수 있는 진시황에게서도 - 이사의 초기 건의와 후기 건의가 180도 다름에도 눈 감아버린 모습을 예로 들며 - 아큐 기질을 찾아내고, 인으로 군주를 교화할 생각은 없이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가 없다고 한탄하는 공자도 아큐적이라 한다. 

아큐의 특징은 지찔함 외에 폐쇄성도 들 수 있다. 자기 외의 사람들 자기가 있는 곳 너머를 보지않고 눈을 감아버렸기에 자신이 최고인 세상에 안주할 수 있는것이다.

공자는 국가의 일은 그것을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이 논해야 한다고 했다. 정보를 접하지 못하면 (민중은) 눈을 뜰 수가 없다. 아큐에 가까워진다. 

그런 공자의 꿈을 실제로 이룬 것이 중국공산당이다. 중국에는 <내부참고>라는 중국공산당 기밀 정보지가 있다. 이 내부 참고도 여러 단계로 나뉘어 발행되어 최고위층와 말단 공산당원이 접하는 정보의 질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고위층이 모든 정보를 파악한 후 대중에게는 당에서 허락한 정보만 공개한다.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 시대. 1999년 중국의 네티즌- 왕민-들이 그런 공사의 이상향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파룬궁  수행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아 당이 감시를 피해 대규모 집회를 연, 중국 지도층에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다.  중국 당국은 계속 인터넷 상의 만리장성이랄 검열 프로그램을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있으며 왕민들도 속속 해킹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며 대항하고 있다. 

 

아큐 기질을 논하느라 폐쇄적 이야기만 늘어놓았는데, 이 책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륙적 하오커 기질과,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성심성의껏 친구를- 나아가서는 친구의 친구도- 환대하고 돕는 모습이었다. 

분명 중국은 폐쇄성만으로 형성된 나라가 아니다. 그랬다면 이리 오랜 세월 유지될 수 없었겠지.

개방성과 폐쇄성이 변주되던 곳인데, 언제 다시 중원이 열릴지.

공론의 장, 기회의 땅이 될 때가 언제 올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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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론
가와카미 하지메 지음, 송태욱 옮김 / 꾸리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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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전 가와카미 하지메는 부유한 나라에도, 일본에도 가난한 사람이 늘어만 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한다. 열심히 일해도 입에 풀칠 하기 어려운 빈곤 문제를 해결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하던 그는 개인의 정신 개조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생활 필수품이 많이 만들어져지만 분배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필수품 생산이 부족하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왜? 부자들의 사치때문에.

그래서 부자들이 사치하지 않는 것을 빈곤 해결의 첫번째 방책으로 보고 있다.  

 

부제를 단다면 선비 경제학자 유토피아를 꿈꾸다 쯤?

이래저래 공자님 생각이 난다. 

첫 느낌이 공자님 말씀이군... 싶고 저자도 책 속에서 공자를 많이 들먹인다.  

가와카미 씨는 인치 (人治)와  덕치 (德治)를 꿈꾸는 공자처럼,  바른 위정자가 등장해서 경제를 바로잡기를, 덕으로써 가난한 이도 생각하는 경제를 운영해주기를 바란다. 

 

부자들이 사치하면 물건 만들어내는 이들이 사치품 생산에 몰리고 그러면 생필품 생산량은 더욱 줄어들면서 가격이 오른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은 생필품 구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러니 부자들이 사치품을 원하지 말하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바로 빈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이들이란 요새말로 하면 '최저생계비를 벌지 못하는 이'를 말하는 거니 생필품 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져도 여전히 그것을 구입할 돈이 없다. 그래서 가와카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자는 공공을 위해 자기 재산을 쓸 각오를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사업가는 돈벌이를 함에 있어서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하고 운운....

그의 이상향은 개인의 마음가짐이 바뀐 사회이다. 장삿꾼이나 생산자나 부자가 공공의 이익을 위하고 가난한 자를 걱정하는 사회, 소비자는 물건을 남용하지 않는 사회. 

개인이 그렇게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는 힘든 일이므로 그런 마음으로 경제를 관리할 위정자가(仁을 아는 이?)가 등장하여 국가가 틀어잡고 관리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본다. 당시(1916년) 전쟁을 위해 경제를 통제하던 독일처럼.

 


올해가 그가 태어난지 130주년이라는데,

왜 100주년이 아닌 130주년에 떠들썩한가? (아, 우리나라선 떠들썩 아니구나... 일본에선 재조명에 열심인 듯하다. )

지난달 아사히 신문 사설에서 이 책을 언급한 걸 보고 읽게 됐는데, 그 글에서는 가와카미 씨가 내린 가난의 정의에 주목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 지능, 영혼. 이 세 가지인데 이를 건전하기 유지하고 발육시킬 경제력이 안 되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한다. " (34쪽)

 

그러면서 교육의 평등이 흔들리는 지금을 우려하던데, 우리나라라고 다를까..

얼마전 '성적은 집값순'이란 기사도 떴었고 (사실 요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싶은 소리긴 해....)

요즘 화제의 중앙에 있는 어떤 인물은 '교육은 추려내는 것'이라며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우리나라도 그가 말하는 가난의 정의에 주목해야할 때이다.

양국 모두 30년 전보다 퇴보, 100년 전과 비슷해진 요즘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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