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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결정의 비밀 - 뇌신경과학의 최전방에서 밝혀낸 결정의 메커니즘
조나 레러 지음, 강미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예전 직장(…아마도 마지막 직장)에서 나의 가장 큰 임무(?)는 그날의 점심 메뉴를 정하는 일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내게 그런 역할이 주어졌을 리는 없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너무 결정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하는 걸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오늘은 콩나물국밥 어때? 알탕 먹으러 가자, 하는 식으로 제안을 하는 일이 잦았고, 그러면 다들 그러지 뭐 하고 따르더니 어느 순간부턴 점심때가 되면 먼저 내게 ‘오늘은 뭐 먹는 거야?’ 묻게 되었다. 직장인들의 큰 고민이라고 하는 점심 메뉴 정하기에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는 비결이 ‘나의 이성이 냉정하게 결단을 잘 내리고 있어서’라고만 생각했었다. 아,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이런 결정은 감정이 하는 거란다. 이제 보니 난 남들보다 감정적 혹은 감성적 인간이었단 건가?
플라톤은 마음을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에 비유했다. 혈통 좋고 훌륭한 한쪽 말은 마부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지만 다른 한 마리는 마부가 뭘 지시하는지 알 생각도 없고 알 능력도 없다. 그저 제멋대로 날뛰고만 싶어 한다. 당연히, 나쁜 말인 감정의 요동은 억누르고 이성적 마부의 지시를 따라야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합리주의자들은 늘 인간은 이성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이성이 결정을 내리면 최선을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엘리엇이란 남자를 보자. 그는 전두엽 근처 대뇌피질에서 종양제거 수술을 받은 뒤 감정을 잃어버렸다. IQ와 지능은 정상인데 심리적 고통이나 불안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는 결정 능력도 함께 상실했다. 이제 엘리엇은 어떤 식당에 들어가야 할지 계속 비교 분석만 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예전엔 10분 만에 해결하던 일도 어떤 펜을 사용할지 결정하지 못해서 좀처럼 시작도 하지 못한다.
이성은 그대로이나 감정이 없어졌다면 누구보다도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마땅할 텐데 어째서? 종양제거 수술 과정에서 엘리엇이 손상을 입은 부위는 안와전두피질이었고 알고 보니 이 부분은 감정을 이해하고 결정 과정에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단다.
감정은 그냥 이게 좋겠다, 결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경험과 실수를 통해 자기의 감과 확신을 수정하도록 하는 똘똘한 일도 한다.
예측대로 상황이 전개되어 기대가 충족될 때면 도파민이 방출되며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예측이 어긋날 때면 전두대피질에서 실수를 감지하고 삐삐거린다. (소위 ‘이런 제기랄 회로’라나……. 나중에 이 단어만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뭔가 이상한데? 하는 느낌이 든다든지, 심장박동이 빨라지거나 불안으로 인해 땀이 나거나 그런 경보음을 울리면 대개는 행동을 수정하게 되고 비슷한 상황이 다시 오면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
일반론에 대항하느라 감정이 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를 먼저 설명했지만 역시 결정에서 이성의 역할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두 불안에 사로잡혀 떨고만 있을 때 그 상황을 벗어날 지혜를 찾으려면 이성에 의지해야 한다. 사실 (앞에선 아닌 듯 말했지만)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만 뒀다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기 십상이다. 그럴 때 손익을 제대로 따지는 역할은 이성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분석하고 비교해야할 변수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지나치게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종종 이상한 선택을 한다. 간단한 결정의 경우에도 ‘그렇게 결정한 이유를 설명하라’는 주문이 있으면 이것저것 이유를 갖다 붙이다가 엉뚱한 선택을 하는 경우를 보이는 실험을 예로 들며 저자는 설명한다. 너무 고민하다보면 ‘장고 끝에 악수‘를 놓게 되기도 하지 않던가. 그럴 땐 그 문제는 잠깐 덮어놓고 바람이나 쐬고 와서 감정에게 물으라고. 탁월한 결정을 위해선 감정과 이성을 조화롭게 이용하고, 자신의 생각을 너무 확신하지 말고 생각에 대해 생각하란다. 한마디로 감정과 이성의 황금비율이 중요하단다. 에이, 결말이 좀 시시하다. 제목을 ‘비밀’이라고 붙였지만 사실 이게 비밀이랄 순 없으니…….
전작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에서 조나 레러는 감각, 감정보다 한 걸음 뒤쳐진 과학의 모습을 설명해주었다. 이미 예술 분야에서, 소설에서 그리고 요리에서 이용되고 있지만 이론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때 전문가들은 말도 안되네, 어리석은 대중의 착각이네, 무시해왔는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제대로 설명이 되더라는 뒷북 과학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이 책도 이미 현명한 결정을 내린 경우를 찾아보며 그 결정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뇌스캔과 각종 실험으로 뒷북을 친다. 감정의 결정권에 조금 더 힘들 실어주게 된 점은 새로우나 해답으로 제시된 방법에는 그닥 새로울 게 없다. 지나치게 생각하다 머릿속이 꼬이는 것 같을땐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잠깐 머리 식힌다든가, 때론 감을 따르고 때론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건 책을 읽지 않아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비율을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