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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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책책책을 읽읍시다'던가....뭔가 오락프로에서 어떤 특정한 책을 읽은 사람을 찾는 코너가 있었다.

예를 들면 <무중력 증후군>이란 책이 그주의 책이면, 먼저 그 책을 읽었냐고 물어보고, 주인공 이름이 뭐냐, 엄마가 가출했다 돌아와서 연 가게이름은 뭐냐, 구보가 입사한 회사에선 뭘 만들었냐.... 등등 내용에 대해 질문해서 옳게 기억하는지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거기서 척척 대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와... 난 읽었더라도 기억 못할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도대체 뒷페이지 읽으면 앞페이지가 지워지는 이 기억력, 대체 지금 책을 읽는 거야, 잊는 거야... 자책하던 나의 독서의 시간들. 

그런데 이책의 저자는 다 그런거야....해주고 있다.

몽테뉴는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잊는 건 물론이고, 자신이 쓴 내용조차 잊어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메모를 하며 독서를 해보지만 그게 또 나중에 보면 생경하다. 그렇다면 그는 그 책을 안 읽은 것인가?

난 읽다만 책은 읽었다고 말하면 안된다고 믿고 있었고, 읽은 후 잊어버린 경우는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심지어 귀동냥으로 아는 책, 제목과 배경만 아는 책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논할 자격이 있다고 부추기고, 책 내용에 얽매여 자신의 의견을 잃는 것보다 읽지 않는 편이 낫다고, 그렇게 독서의 무용성, 위험성을 주장했던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똑같은 책도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그사람 내면의 필터를 거치면서, 각자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이 되기때문이다. 자신은 그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책은 작가가 쓴 바로 그 책일 수 없고, 다른 이가 읽은 그 책과도 같을 수 없다. 따라서 한 책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해도, 실제론 모두 같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이 아니게 된다. 또한 읽지 않은 책이라도 제목과 배경 그리고 자신 내면의 책과 합쳐서 개성적인 의견을 가질 수 있으니, 안 읽고서 말해도 결국 마찬가지라는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재미있는, 진실같기도 하고 궤변같기도 한 논리.

아무튼 독서를 멀리하고 독서의 폐해에 대해 말한 작가들이 꽤 있다는 점이 의외.

책에 대한 책들을 보면 어려서부터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이들이 수두룩해 기가 죽기도 하는데, 그런 마음일 때 이 책을 펼쳐보면 심신안정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잃어버린 시간 힘겹게 3권까지 읽고 언제 저걸 다 읽누...했었는데 나도 바야르 씨처럼 SB & HB를 해볼까.

( * 바야르 식 독서구분 :  SB - 뒤적거려본 책 / HB -  귀동냥으로 읽은 책 / FB - 읽었으나 잊은 책 / UB - 접해보지 않은 책)

사실 난 그런 띄엄띄엄 독서를 예전부터 즐겨해서, 어떻게 책을 중간부터 보냔 소릴 듣곤 했다. 까짓거 중간이 재미있고 앞이 궁금하면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면 간단한 걸 왜들 시끄럽게 구는지... 추리소설도 아닌데 중간부터 보면 어떻냐구.  부분부분 읽어서 끼워맞추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또,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미련없이 중단도 잘 하는 편이고....  SB가 내겐 생소하지 않은 편안한 방법인데 요즘 잊고있던 것같다. 

성실한 독서를 강요받다가 면죄부를 받은 느낌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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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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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무중력증후군의 자가진단용 증세를 들여다본다.
-호흡곤란, 오한, 잦은 기침, 관절에서 소리가 난다, 울렁거린다, 환영 또는 환정, 충혈, 초조감, 불면증, 흥분, 충동적 행동
이런 내겐 하나도 없네. 난 지나친 건강체질인게다. 소설에 공감할 수 없을만큼!
대체 어떤 사람들의 증상이지? 홧병이랑, (오염된 공기 속에서 밥도 안 먹고 계속할 정도의) 인터넷 중독, 운동부족을 합치면 저런 증세가 나오려나~~
병명으로 봐선 지구 중력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들의 증세인데 말야...
지구를 떠나고 싶어하는, 지구의 중력을 거부하고 무중력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라면, 성공적으로 지구인으로서의 삶을 꾸려가고 있지 못한 나로선 공감이 갈만한 배경인데, 왜 이렇게 내 얘기야 싶은 부분이 없는 걸까.  직장 옮겨댄 횟수라면 나도 누구에게 지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이 안 되니 신기한 노릇이다.
공감할 거리가 없는 얘기라면 새롭게 '그런 거였어? 아하~' 하고 깨달아지는 부분이라도 있어야하는 거 아닌가?  

소설 속에서 달은 자꾸만 새끼를 친다.
그러나 새 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작아서 맨눈으론 볼 수 없다고 한다.
천체망원경을 지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에겐 보일 리가 없지만 사람들은 새 달의 탄생, 존재를 믿는다. 뉴스에서 끊임없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대중이 뭔가 새로운 것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변명거리. 자신의 일탈을 변명할 이유를.

무중력증후군이란 것도 매스컴에 의해 만들어진 병이었다. 그 병 역시 실재하는 건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사는 게 힘든 이유가 지구의 중력이 버거운 무중력증후군이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으니 그저 환영할뿐.  
소설을 읽는 내가 두번째 달이 생기고 그때문에 사건이 생기길 바라는 이상으로 그 세계의 거주민들도 뭔가가 생기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새로워지지는 못하고 매스컴이 제공하는 정보 대로 행동한다. 만녈필 사건의 유행 조짐이 보인다고 보도하면 만년필을 들고 설치고, 편의점 털이가 기승이라면 편의점으로 몰리고, 무증력증후군이 발생했다고 하면 너도나도 무증력증후군인 것 같다며 병원으로 쇄도하고. 다들 매스컴의 지시대로....
아, 쓰면서 지겹다. 흔히 볼 수 있는 설명이잖아. 매스컴이 상황을 과장해서 쓰면 대중은 그걸 소비하고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키고, 진실은 왜곡되고 새로 쓰이고, 뭐가 진실인지 알 수없어지고.... 잊혀지고.... 다시 처음부터....

각각의 에피소드들도 많이 본 듯한 설정, 들어본 유머...
뉴스거리 하나에 우르르 몰려가고 폴짝거리게 만드는, 똑같은 삶의 지루함을 강조하려 했다면 성공이다. 
소설 속 무중력자들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지구의 중력에 얽매여 행동하듯이, 이 소설도 이미 나도는 이야기들의 중력권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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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조나 레러 지음, 최애리.안시열 옮김 / 지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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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신경과학의 발견들을 예견한 예술가들에 관한 것이다. 이 작가, 화가, 작곡가들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진실들을 발견했고, 과학은 그것들을 이제야 재발견하고있다.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미래의 사실들을 예언한 셈이다. (서론에서)

 

저자의 이력부터가 흥미롭기 그지없다. 조나 레러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신경과학을 전공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뉴욕의 일류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자유 편집자로 일하며 인기 과학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보다 한발 앞선 인물로 이 책에 선정된 이는 여덟 명.

월트 휘트먼, 조지엘리엇,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마르셀 프루스트, 폴 세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거트루드 스타인, 버지니아 울프이다.

몸과 감정의 밀접한 관련성,  뇌의 가소성, 맛을 느끼는 방법, 변화하는 기억, 눈과 뇌가 사물을 보는 방식, 청각이 음악을 받아들이는 방식, 언어의 구조, 그리고 변화하는 자아까지 각자 관심을 가지고 표현하며 과학을 선도해간(실제로 당시의 과학으로부터는 비웃음을 샀지만... ^^;;)  이야기가 펼쳐진다.

 

- 여기서 내가 보기에 튀는 인물이 오쉬스트 에스코피에. 그녀는 요리사이다.  쟁쟁한 예술가들 틈에 웬 요리사인가 싶었다. 저자의 특이한 이력 덕인지 요리의 묘사도 생생하다. 물론 과학적 설명도 충실하고.

과학은 혀가 느끼는 맛은 네 가지뿐이라고 설명한다.  신맛, 단맛, 쓴맛,짠맛을 혀의 어느부분이 느끼는지 교과서에도 나와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진정한 프랑스요리의 창시자인 오귀스트 에스코피에가 가장 중시하는 육수 만드는 법을 보면 그 네가지 맛내기를 피하는 것만 같다. 오직 고기만 끓이고 태우고 우려내고, 짜투리 야채들을 이용하지만 네가지 주요 맛이 날만한 재료는 들어가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맛이라 인정하기 않지만 그녀는 가장 중시했던 그 고깃속 그 감칠맛의 정체의 과학적 표기는 L-글루타메이트이다. 일본 화학자 이케다 키쿠나에는 육수의 감칠맛 우마미(旨味)를 찾아 연구하다 MSG(인공감미료)를 만들어낸다. 1907년의 일이다. 1900년대 초반부터 에스코피에와 이케다는 그것을 확인했고, 대중은 예전부터 느끼고 즐겨왔던 그 맛. 단맛,신맛,쓴맛, 짠맛 이외의 맛을 과학은 21세기에야 인정한다. 2000년에 들어서야 고기맛을 아는 혀의 부분, 즉 글루타메이트 수용체를 발견했고, 그제야 고기맛이란 쾌락주의자의 환상일뿐이라는 과학계의 고집을 포기한 것이다.  

- 과학의 발전으로 눈에 띄게 위기에 몰린 예술이 회화분야였다....고 할수 있을지 모른다. 사진기의 발명으로 말이다.

세상을 그대로 복사하내는 재주야 카메라에 당해낼 수 없어진 상황에서 (전기)인상파 화가들은 순간적인, 빛을 중시하는 화풍을 만들어낸다. 그런 와중에 합류한 (후기)인상파로 불리는 세잔은 '이상한' 그림을 그려낸다.  완전하지 않은 형태, 빈 공간, 길쭉길쭉한 선들이 들어선 그림을. 미완의 그림을. 그렇게 비어있음에도 세잔의 그림에서 우리는 형태를 볼 수 있다.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에서 산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비판을 면치 못했던 이런 그림이 눈과 뇌의 작용이 많이  밝혀진 오늘날에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된다. 

사물이 수정체를 통해 망막에 거꾸로 맺히는 것까지는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보게되는 것일까? 뇌속에 거꾸로 선 난장이가 있어서 그 그림을 제대로 보고 뇌에 설명해주는 건 아닐테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뇌의 각부분들이 각자 자기가 맡은 것만 수용하고 뇌가 다시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부분은 음영을 파악하고 어떤 데선 색을 파악하고.... 그런 정보들을 종합해서 최종적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뇌의 종합력이 고장난 사람들은 (올리버 색스가 소개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처럼) 눈에는 이상이 없으면서, 멀쩡히 보면서도, 전체적인 형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시야 한복판에는  시신경이 망막으로 연결되는 부분에는 눈먼 부분 -맹점-까지 있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우리의 눈먼 부분에 대해 눈 멀어있다. 안보이면서 주위에 보이는 것과 연결지어 보이는 체를 한다. 우리의 뇌는 어떻게든 멀쩡하게 설명을 하려고 한다. 그런 연습을 해온 까닭에 세잔 그림의 빈 부분을 채우는 작업도  수월한 것이다. 과학이 설명해주기 전부터.

 

예술보단 과학을 신봉하던 어리버리.... 한때 새로운 형식이던 글과 그림, 음악이 대중에게 수용되는 것은 예술가들의 변덕이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여진 정도로만 생각해왔는데, 치열한 탐구의 과정이었음을 알게되었다. (어째 너무 상투적 독후감 문구같지만, 진실한 고백임.... -.-;;)

이 책의 역자는 후기에서 예술이나 과학이나 궁극적으로는 사물들 사이의 보이지않는 관계, 보이지 않는 실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하고 있다. 예술과 과학이 조화를 이룰때 진실을 향한 걸음이 더 빨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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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
대니얼 L. 샥터 지음, 박미자 옮김 / 한승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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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오류를 일곱 종류로 분류하고 죄악이라 칭하며 이 책은 시작된다.

단순히 잊어먹는다는 문제가 기억 문제의 다일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가 꼽은 일곱 죄악 중 세가지만이 기억 누락의 문제이고, 나머지 네 가지는 무언가가 기억에 추가되거나 생생해짐으로써 생기는 문제이다. 

첫번째- 소멸의 죄

이거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까맣게 잊는 문제. 더 설명도 필요 없고.

두번째 - 정신없음의 죄

깜빡 하는 문제, 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평소와 다른 곳에 두는 바람에 열쇠를 찾지 못한다든가.... 하는 상황. 역시 많은 사람들이 겪으면서 살 걸?  

요건 해결방법을 살짝 알려주자면, 해야할 일을 '반드시 하게 되는 일'과 연관시킨다. 예컨대, 자기 전에 약을 먹어야 한다, 나는 자기 전에 꼭 양치질 한다.... 그렇다면 양치컵 옆에 약을 두면 안 잊을 수 있다. 약을 보고도 이게 여기 왜 있지? 한다면 치매를 의심해봐야 할거다... -.-;; 

세번째 - 막힘의 죄.

어떤 단어가 혀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 이미지는 떠오르는데 딱 맞는 명칭이 떠오르지 않던 경험, 대부분 있겠지.  그리고 또 그런 경험도 있을 것이다. 떠올리려는 단어와 비슷한 단어가 떠올라 목표단어 재생을 오히려 방해하는 경우. 그런 방해단어를 '못생긴 자매' 라고 부른다나! ^^;;

그런데 막힘이 이런 단순한 단어막힘만 있는 게 아니더라. 충격적인 사건의 경우 기억에서 차단되는 경우도 있다. 프로이트의 억압개념과 닮은 이런 차단의 경우는 나중에 재생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여기서 새롭게 발생하는 문제는 그게 정말 재생된 것인가.... 하는 오귀인의 문제. 바로 다음 죄. 

네번째 - 오귀인의 죄.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를 친구한테 들었다고 착각하는 정도는 애교로 봐줄만한 오귀인의 예이고,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을 실제로 경험했다고 기억하는 오류가 의외로 많다고 한다. 데자뷰를 오귀인의 예로 설명하려는 노력도 있는데, 뭔가 아직 좀 명확하진 못한 설명이다. 

다섯번째 - 피암시성의 죄 

이건 오귀인과 꽤 많은 부분 연결되어 있던데,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질문이나 설명을 듣게 되면, 거기에 스스로 살을 붙어 생생한 기억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용의자들을 보고 처음엔 잘 모르겠다.... 다시 열심히 살펴보고 첫번째 사람 같아요....라고 말한 후 긍정적 피드백을 받으면 다음엔 자신의 기억을 믿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재판에서는, 그 사람이 범인인 게 맞아요. 똑똑히 기억합니다가, 된다.

그러니까 질문을 암시적 내용이 없게 해야 바른 기억을 유도할 수 있다는 건데, 한때 미국에서 자신의 부모를 유아성폭행으로 고소했던 사건중 상당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섯번째 -편향의 죄

어떤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내가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많이 말하는데, 그 사람들 모두 정말 결과를 알게 되기 전에도 그럴 줄 알고 있었을까?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예전부터 자신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왔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일곱번째 -지속성의 죄

잊는 게 문제지, 기억이 지속되는 게 무슨 문제야, 싶지만 커다란 상처가나 실망감 좌절감등이 기억에서 계속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떠오를 때, 어떻게 될까? 외상후장애증후군(PTSD)이나 우울증이 이 나쁜 기억의 지속성때문이다. 

'기억은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인줄로만 알았는데, 이 책에서 거짓기억에 대한 이야기며 지속성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기억은 떠돌이 친구까지 달고 다니며 내키는 곳에 눕고, 맛있는 음식(나쁜 기억)은 한번 물면 절대 내놓지 않는 개'인 모양이다.  

일곱가지 죄악을 설명한 후 저자는 왜 이런 엉성한 기억시스템으로 진화해왔는지 설명하려 애를 쓰는데, 그 설명, 기억 시스템 못지않게 엉성하다. 왜도 어떻게도 말끔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나중에 정리 되면 다시 설명해주쇼, 샥터 씨.

그나저나 이 책을 읽고나니, 대화할 때 남들 말 속에 등장하는 지난시간 이야기가 다 의심스럽고, 나도  말하면서 내 생각, 내 기억에 확신이 안 서고.... 후유증이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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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코필리아 -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김종성 감수 / 알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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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은 최근 몇십 년동안 급속도로 발전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반응을 하고, 행동을 할 때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될지에 대한 지도를그려놓고 있다. 예전엔 면밀한 관찰을 하고 추측을 해야했던 기괴한 행동들도 뇌스캔으로 간단하게 파악하고 어느 부위의 오류인지 설명할 수 있다.
올리버 색스 박사는 이러한 기술의 진보를 반기는 한편으로 지금까지 행해지던 '구식' 관찰의 중요성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력한 것은 환자와 실험참가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경험한 것을 상상하며 그 경험 속으로 들어가보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라고 강조한다.
나도 이 점이 바로 올리버 색스 저서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절망적인 환자에서라도 인간다움의 징후를 찾으려는 그 노력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의 문장들이 말이다.
이 책에서는 특히 음악을 통해 그 희망을 찾아보고 있다.

1. 클라이브 웨어링은 저명한 음악가였다.1985년 그는 치명적 헤르페스 뇌염에 감염되어 기억력에 손상을 입는다. 보거나 느끼기는 하지만 그 기억을 1분도 지속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억도 잊어 2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기억만을 갖고있다. 그가 의식적으로 아는 것은 현재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한정된 지식만 끊임없이 떠벌려대며 순간을 살아가는 고통을 떠올리기를 회피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기억이 없는' 그이지만 자신의 자식들은 알아보고 언제 이렇게 장성했는지 매번 놀라며, 아내는- 비록 어떻게 만났는 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심리적으로 기억하고 모든 것을 의존한다. 올리버 색스는 이 부분에서 기억에도 분명 여러 종류가 있으며 이런 정서적 기억이야말로 가장 심층적인 기억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모든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인간이 늘 그렇듯이 정서적 기억이 가장 우리에게 덜 밝혀진 기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아직 갖고 있는 능력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연주를 할 때면 병에 걸리기 전의 그처럼 자신있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 된다.
공간과 시간에서 뚝 떨어져 나온 그의 삶은 분명 정상적 의미의 삶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기 아내가 책을 냈다고 할때마다 뛸듯이 기뻐하는 현재, 음악을 연주하며 느끼는 현재, 그 현재의 연속이 의미 있다고 보는 것이 올리버 색스의 관점이고 클라이브 웨어링의 아내의 관점이다.
기억은 없지만 순간순간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인생에 대해 누가 기억이 없는 인생이 무의미하다느니 떠들어댈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순간순간이 쾌활하고 평안하며 사랑과 음악으로 충만한 것일진대.

2. 윌리엄스증후군에 대해서는 여기서 처음 접했다. 세상엔 정말 별별 증후군이 다 있구나. 이런 유쾌한 정신질환도 있었다니. 윌리엄스증후군은 자폐증과 정반대라 생각하면 된다.  다운증후군처럼 외모상의 특징으로도 드러나는데 그에 더해 음악사랑-그야말로 뮤지코필리아-으로 알아볼 수 있다.  지능은 현저하게 떨어지나 낯선 사람들에게 친밀하게 말을 걸고, 함께 모여 노래하고 연주하기를 즐긴다.'이들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기초적인 답을 뇌스캔 영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음악을 들을 때 일반인들은 뇌의 일부분만을 사용하지만 이들은 거의 모든 부분이 활성화된다. 그래서 음악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 증후군 아이들 중에 절대음감 소유자가 많은 것도  뇌의 시각영역과 다른 부분이 발달하지 못하면서 청각을 발달시켰다고 지금까지의 뇌의학적 지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만하면 윌리엄스증후군에 대해 '설명완료'라고 마무리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또 올리버 색스 씨는 운명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기도 하나, 그게 다는 아니라고 덧붙인다. 표면적으로 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경험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개성도 분명 존재한다고. 증후군의 '무엇'을 뚫고 '누군'가가 나타나리라 기대하며 아이들을 바라본다. 
윌리엄스증후군인 열아홉의 헤이디는 케이크를 장식하고 디저트를 만들고 싶어 제빵사가 되겠다고 하며 기대에 부푼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최근에는 회복기 환자 요양원에서 활달하게 봉사하며 환자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기쁨을 준다. 그리고 그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하고 있으며 엄마도 그 일이 그 애에게 천직이라 동의한다. 전형적 윌리엄스증후군이던 아이가 주위의 기대와 노력속에 종알대고 노래하며 생기를 전파하는 아가씨가 된 모습이 흐뭇하다. 

세상에는 음악에서 희망을 찾게 되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모든 면에서 정상이지만 음악의 감성,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 올리버 색스는 음악을 접할 때만 생기를 보이는 이들을 존중했듯이, 음악에 무감각한 이들에게선 다른 면에서의 인간다움을 찾아내줄 것이다.
얼마전 자폐인인 템플 그랜딘의 자서전을 읽었다(매우 비음악적인 인물로 이 책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그녀는 시각적으로 생각한다). 그 자서전 말미에서 그녀는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폐인이건 정상인이건 모든 아이들은 제각각 다르며 부모나 보호자가 할 일은 사랑을 주고, 그 아이만의 특별함을 찾아내어 주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든 소음처럼 느끼든, 절대음감 소유자이든 음치이든 인간은 모두가 특별하며 사랑과 존중을 받아야 할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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