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BL] 레퀴엠 : 메모리얼(Memorial) 1 [BL] 레퀴엠(Requiem)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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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 일상의 소요 속에 묻힌 채 살아가며 이젠 저 담 밖과 안의 경계가 명확해졌고 그 선을 긋는 데에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아니, 단지 기만에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단둘이 살다 보니 동화되어 가는 것과는 별개로 그와 자신이 근원적인 부분에서 많이 닮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던, 그래서 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버티는 게 피곤해 차라리 혼자인 게 편했던 과거와 달리 너무나 평화로운 지금은 혼자인 걸 외롭다고 느끼고 있다.

무뎌졌다는 건, 그만큼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거니까.

너무 무뎌져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이렇게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화해하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성격을 제외한 모든 걸 갖고 태어나 그 덕에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고 편하게만 사는 사람이니 이 사람에게도 불편해도 참아야 하는 한 가지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공평하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

오늘만은 저 지긋지긋한 비가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가 좋아진 건 아니지만 그와 함께할 때의 비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아주 가끔뿐이지만.

대부분은 너한테 관심 없어.
분명 그의 말대로, 자신은 타인에게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스쳐 가는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건 잘 알고 있지만 과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남자에게도 관심이 없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어차피 그와 자신의 관계에 끝이 온다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었고 그 끝이 절대 좋을 수 없다는 것 역시 너무 명확한 진실이기에, 지금은 그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현실 도피일 뿐이라도 그게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간 치열하게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며 싸웠지만 어떻게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그 길고 지리멸렬한 전쟁 끝에 자신은 너무나 지친 채였다.
더는 생각을 하는 것도, 뭔가를 시도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젠 편해지고 싶을 뿐이었다.

이제 자신이 진짜 지우고 싶었던 게 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 역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간 평화로운 일상에 익숙해져 잠시 기억의 저편에 묻어 둔 진실들이 흘러나오며 결정의 시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때처럼 도망쳐 버릴지 스스로 선택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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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레퀴엠 : 패럴랙스(Parallax) 2 [BL] 레퀴엠(Requiem) 6
키에 / 링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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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자신이 이 상황을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까지 사람들을 속이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고, 언젠가 최악의 상황에 치달았을 때 닥쳐올 일이 두려웠다.

그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은 대담하지도 않고, 그렇게 절실히 그를 원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세계는 그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그게 그와 자신의 가장 큰 차이였고, 그렇기에 늘 그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분명 그에게 끌리고 흔들리면서도 그 죄악감을 견디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 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정신없이 머릿속을 들쑤시고 있었다.

지금도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와 이렇게 단둘이 평화롭게 지낸다는 건 열여덟의 자신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들고 믿을 수 없었지만, 결국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 역시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독에 닿으면 이성도, 도덕심도, 현실감마저도 마비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가 주는 강렬한 쾌감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도 잊은 채 그 열기에 휩쓸려 그에게만 집중하고 매달리게 된다.

이 질 나쁘고 달콤한 독에 이미 취해 버렸기에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
이 끝이 어디든, 설혹 그 끝에 남은 것이 파멸뿐이라 해도 즐거이 그 최후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그와 함께, 그가 만들어 놓은 그 성 안에서.

점점 어지럽게 흔들리는 머리와 뜨거워지는 몸, 그리고 강하게 맥박치는 심장의 고동.
마치 취한 듯 어지러운 그 느낌은 이 남자가 가진 독(毒)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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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레퀴엠 : 패럴랙스(Parallax) 1 [BL] 레퀴엠(Requiem)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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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삶이 한 사람으로만 가득 차는 건, 좋지 않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 남자 자체가 너무나 강렬하고 기괴해, 도저히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다.

그래,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죽어도 그걸 인정하기 싫어 외면하고 부정했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남자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끌렸던 거라고.

그리고 조금은 서로를 이해해 가고 있다.
지금은 그거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평온할 수 있기를, 조용히 바랄 뿐이다.

그의 품이 편안하다. 그의 체온도 호흡도 이젠 완전히 익숙해져 편안해진 채였다. 그도 자신도 이제 겨우 이 생활에 익숙해져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만 이대로 있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영원히…….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그렇게 평화로운 척 잘 지내 왔다.
누군가 바로 눈앞에 현실을 들이밀기 전까지는.

자신은 그처럼 대담하고 무심해질 수 없고, 단 하나만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열정도 없다.
그게 바로 그와 자신의 가장 큰 차이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와 자신 사이의 시차(視差)를 좁힐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적어도 지금, 이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만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마치 이 세상에 그와 자신 단둘만 남은 것처럼 그의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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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할 정도의 굴욕감과 비참함, 그리고 자존심의 상처에 이번에는 절대 이 녀석에게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수는 두 번이면 된다. 세 번의 실수는 안 된다. 절대로 이 녀석을 믿는 것도, 어떤 희망을 갖는 것도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녀석을 이겨 본 기억이 없다. 겉보기야 어떻든 항상 휘둘리는 건 자신이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약해져 한발 물러서는 것도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을 영원히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건 그 물안개 속에 선 그 녀석을 본 탓이었다.
그 풍경 속에 젖어 든 소년이, 너무나 아름다운 탓이었다.

그 아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 녀석의 기를 꺾어 내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져 가고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이젠 그 욕망 자체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건 단순한 오기였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러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전쟁이다. 서로의 자존심과 헤게모니를 건 치열하고 뜨거운 전쟁이다. 그리고 한번 시작한 전쟁에서는 절대 먼저 물러서는 것도, 패배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그 전쟁에 임했다. 가끔 치열함에 지칠 때도 있었지만 바로 그다음 순간 오는 뜨거움에 도취되어 브레이크를 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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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사람 중 누구 하나도 손을 뻗어 도와주지 않는다는 게, 그리고 이 상황을 외면하면서도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듣고 보고 있다는 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하기만 했다.

오싹할 정도로 차갑지만 동시에 불처럼 뜨거운 그의 시선에, 알아 버렸다. 그가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불행히도 자신 역시 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건 단지 애정 결핍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너무나 쉽게 그에게 안기는 데에 익숙해진 것도, 그의 품이 아주 싫지만은 않은 것도, 단순한 애정 결핍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그뿐이다.

그는 믿지 않고 자신은 거짓말을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 그쪽이 자신은 마음 편하다.
이제 자신이 왜 도망치고 싶어 했는지, 기억한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는지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했는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남은 건 이번엔 제대로 도망치는 것뿐이다. 이번엔 확실하게, 실수 없이, 깨끗하게 사라져야 한다.
되돌릴 수 없다면 지워야 하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도 한 번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과거를 되돌릴 수도, 지울 수도 없다면 그 과거를 끌어안은 채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튀어 나가기 전에, 다른 이들이 그걸 알아채기 전에 그것들을 영원히 소멸시켜야 한다.

자신의 앞에 놓인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뭔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직시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거나 극복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였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와 자신 중 하나가 죽었다 다시 태어나거나 지금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내야 한다. 하지만 전자도 후자도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어떻게 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나긋한 목소리와 조용조용한 말투. 하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 분명한 살의와 증오였다. 지금 그는, 그에게 지난 석 달간의 시간이 어떠했는지를 토로하며, 고통과 회한을 담아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게 인정할 수 없다면 부정하고 도망쳐. 얼마든지 따라가 줄 테니까.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인정하게 될 거야. 그건,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부정하면 할수록 더 선명하고 깊어지고 도망치면 칠수록 집요하게 발목에 휘감겨 오지. 너도, 나처럼 도망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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