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우습게 봤겠지만
베라 쿠리안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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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1 윌은 개를 걷어차본 남자들과 비슷하다. 그들은 걷어차인 개가 비명을 지르며 다리 사이로 꼬리를 말아넣는 이유는 그저 수천 년 동안 길들이고 훈련해왔기 때문인 것을 잊는다. 그들은 발길질할 때마다 이빨이 달린 개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만다.

 

사이코패스라고 하면 대체로 대중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떠올린다. 일련의 연쇄 살인 사건이나 호러 스릴러 영화의 악역을 연상하기도 한다. 종의 기원한유진이나 드라마 한니발 렉터 시리즈한니발처럼 피해자나 추적자가 아닌 사이코패스 쪽을 주인공으로 두고 구성된 작품도 여럿 있다. 나를 우습게 봤겠지만역시 중심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캐릭터 클로이가 사이코패스인 베라 쿠리안의 장편소설로, 작가의 첫 장편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빠른 속도감으로 진행되는 사건들이 이리저리 교차하고 클로이의 주변을 맴도는 많은 인물들을 하나하나 의심했다가, 남자 주인공 후보로 낙점했다가, 역시 이 자식이 범인 같다고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500페이지 이상의 방대한 분량인데도 막히거나 루즈해지는 부분이 없는, 흡입력이 대단한 소설이다.

 

소설의 분위기 자체는 크게 무겁지 않다. 이따금 평범한 학교생활로 보이기도 하고, 클로이와 찰스, 앤드리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할 때는 이들이 끔찍한 살인범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게 아니라 평범한 학교 과제를 하고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문득 클로이가 사이코패스이고 자신의 복수를 위해 서슴없이 사람을 해할 수 있는(침입이라거나 절도라거나 각종 자잘한(?) 문제들은 차치하고서) 성격이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면, 그리고 클로이와 찰스가 자신이 보이고자 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에 굉장히 능숙하다는 것을 곱씹다 보면 그들을 이토록 무해한 캐릭터로 상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조금 소름이 돋게 된다. 어쩐지 독자마저도 그들을 보고 한눈에 속아 넘어가는 멍청한 대학생 1이 되어버린 것 같아진다.

 

p.319 집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가엾고 아름다운, 폭군 찰리둥이에 관한 딱한 사실이. 윌을 처리하고 나면 찰스를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내 눈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소설의 재미에는 클로이의 거침없는 성격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적진에 쉽게 뛰어들지만 그로 인해 냉장고 속 여자가 되지는 않는다. 능숙하게 주변 인물들을 이용하고 기발한 수법을 생각해낸다. 화를 참지 않고 때로는 그 화를 해결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클로이의 피해는 이나 더럽혀짐이 아닌 분노가 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사랑스러운 여성 캐릭터라고 느껴진다. 클로이가 도덕적인 캐릭터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클로이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소설은 클로이의 시점에서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클로이, 앤드리, 찰스, 와이먼 박사 등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여러 인물의 시선을 짧은 챕터 사이마다 오가며 독자는 점점 더 이 스릴러 속으로 빠져들어 함께 범인을 추리하고 드라마틱한 관계성을 주의 깊게 살펴볼 수밖에 없어진다.

 

주인공은 클로이지만 찰스와 앤드리 간의 대비가 시선을 끈다. 타인의 눈에 의해 사이코패스로 진단된 사람과, 모두가 선망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진짜 사이코패스. 독자는 그 기이한 대비 속에서 책을 덮은 후까지도 과연 우리는 사이코패스를 알아볼 수 있을지,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사실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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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의 시대 공감
명형진 외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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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8 설사 지금 내가 의인이라 할지라도 원수와 똑같은 악인이 될 수 있으며, 누구나 죄를 짓는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보듬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종교적 이야기를 떠나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볼 때가 있다. 결혼이나 퇴직 같은 인생의 전환점을 앞두고 있을 때, 일이 마음대로 잘 풀리지 않아 벽에 부딪혔을 때, 또는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진다. 사제들의 시대 공감은 여섯 명의 사제들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러한 삶의 방향을 함께 성찰해주는 책이었다.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는지, 어떻게 해야 두려움과 싸우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하나하나를 읽어나가다 보면, 자연히 독자들도 자신이 살아갈 방향에 대한 깊은 성찰이 가능해진다.

 

사실 신학 강의처럼 다가오는 딱딱한 이야기들은 학문적 소양을 높이기에는 좋지만 가슴 깊이 파고드는 느낌을 받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제들의 시대 공감은 단순히 신학적 이론을 펼치기보다 사제 개인의 이야기를 신자들에게 내어놓는다. 신학교에서 사제의 길을 두고 고민하던 학생과의 사연, 몽골에서 만난 참새 한 마리를 보고 깨달은 것에 대한 이야기들은 텍스트로 읽어도 마치 곁에서 누군가 들려주고 있는 듯이 따스하게 마음에 다가온다. 게다가 각 챕터는 단지 내밀한 사연을 전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성경 말씀이나 사제의 깨달음을 덧붙여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신자들이 책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p.228 우리의 선함은 다른 이들의 회개와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선함에 기대시어 잃어버린 이를 찾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서도 선함을 택한다. 아무도 모르는 선행일지라도, 나중에 받을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잃은 양을 찾는 지향으로 기꺼이 선택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 깊이 파고든 챕터는 3<사랑, 그늘진 자리에 비추는 빛>이었다.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알면서도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를 자꾸만 미워하게 된다. 그 대상은 때로는 아주 먼 지인일 때도 있고, 가까운 가족일 때도 있고, 심지어는 나 자신일 때도 있었다. 3장에서 한 신자가 다른 말씀은 모두 기꺼이 따를 수 있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지킬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는 이야기에는 조금 웃으면서도 묘하게 공감을 느꼈다. 그러나 방종우 신부는 이 사연에 명쾌한 답을 내린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미움이 너 자신을 갉아먹게 하지 말라는 뜻이라는 사제의 해석을 읽고 어쩐지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껏 내가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구속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계명들이 사실은 내가 더 좋은 길로 갈 수 있도록 지켜주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가톨릭에 큰 거부감이 있는 게 아니라면 비신자도 한번쯤 읽어보아도 좋은 책이라고 여겨진다. 따스한 목소리로 이루어진 책이 독자들의 삶을 보듬고, 위로하고, 응원해준다. 책의 말미 부록에는 이 책을 쓴 여섯 사제의 기도문이 수록되어 있다. 정성스럽게 쓰인 기도문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들을 은총으로 가득 채워줄 것만 같아진다. 오늘밤에는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도를 바쳐 볼까 싶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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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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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6 찌니들은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퀴어 퍼레이드 외의 장소에서 이토록 공개적으로 말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혜진은 자신을 칭칭 묶어놓은 쇠사슬이 툭 끊어지는 해방감을 느꼈다. 


시골 마을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레즈비언을 상상해본 적 있는가? 최근의 트렌디한 문학에서 퀴어 캐릭터는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게 되었지만, 사실 그들의 대다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정지아의 신작 찌니주의보레즈비언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라 다방 레지가 아니냐며 목청을 높이는, 평균 나이 78세의 깡시골 수평마을에 레즈비언 커플을 뚝 떨어트려 놓는다. 그곳에는 억척같이 살아온 윤 선생이 있고 목청 좋고 기세 좋은 월남 며느리 쑤언이 있다. 고된 시집살이를 겪으며 살아온 절골댁과 남편의 바람으로 가슴앓이를 했던 장씨댁도 있다.

 

수평마을과 젊은 레즈비언 여성 찌니들은 나란히 놓고 보면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을 보면 어르신들은 으레 혀를 차기 마련이다. 그런 시골 마을에 무려 레즈비언 커플의 등장이라니, 이 설정만으로 독자는 소설 속 그들의 행보가 궁금해지게 된다. 마을을 떠날까, 아니면 편견에 맞서 싸울까. 그들은 과연 수평마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찌니들이 걱정스러운 동시에 그들이 이 마을에 남아 모두에게 이해받는다는 다정한 미래를 괜히 기대해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런 것들을 기대하고 문학을 읽는지도 모른다.


 

p.165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절골댁이 혜진의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늙으면 펭상 해오든 것도 첨인디끼 낯설 때가 많아야. 근디 잘 모리던 것을 워치케 냉큼 받아들이겄냐.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약이여. 


책의 구석구석이 유쾌하고 신선하다. 성소수자와 아웃팅이라는 다소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를 담고 있는데도 페이지가 쏜살같이 넘어간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은 작가의 나이가 소위 말하는 젊은 작가들보다는 기성세대에 더 가깝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펜촉이 이토록 트렌디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써낸다는 게 때로 놀라워지기도 한다. 지역 방언을 그대로 옮겨 쓰고 시골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생겨나는 작가 특유의 유머가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수평마을도 찌니들도 윤 선생도 이장님도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아지고, 독자는 마치 하나의 시트콤을 보는 기분이 든다. 천지가 무너질 것 같던 이 갈등은 그들의 정체성이나 혐오를 파헤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져버린 마을에서 어느새 그들은 다시 한 밥상에 앉아 서로의 시간을 나눈다.

 

정지아의 글에는 한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게 아들 타령을 해도 아들 덕은 못 본 윤 선생, 남의 집 농작물에 손을 대는 장씨댁의 세대가 막걸리를 지고 와 그 좀도둑질을 수습하는 군청 과장 미자와 이장의 당찬 외국인 아내 쑤언의 세대로, 그리고 닭을 반려동물로 키우고 동성끼리 사랑하며 함께 사는 기희와 찌니들의 세대로 이어진다. 이 세대들을 서로 이어주는 건 거창한 가치관이나 논리가 아니라 뜨끈뜨끈한 호박전이고, 하나로마트 봉투에 담긴 반찬이고, 집집마다 맛이 다른 김장김치다. 누구 하나 미워할 수가 없는,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쏟아져나오는 글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정지아의 글이 좋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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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위픽 클래식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박정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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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너무나도 새롭고, 너무도 달콤했다……. (중략) 그러다 떠오르는 기억에 문득문득 말없이 웃다가도, 내가 정말로 사랑에 빠졌다는 생각에, 그 상대가 그녀라는 사실에, 이게 바로 사랑이구 하는 깨달음에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으레 첫사랑이라고 하면 풋풋하고 서투른 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도 분명히 그런 애타는 첫사랑이 담겨 있지만 이 소설의 결말은 아마 대부분 독자가 예상하는 것과는 다소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그들은 첫사랑을 성공해 결혼에 골인하지도 않고 보통의 첫사랑이 그렇듯 어설프게 흐지부지 잊어버린 채 어른이 되지도 않는다. 생애 처음으로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한 여자가 사실은 아버지의 불륜 상대였다는 파격적인 결말은 마치 K-아침드라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고전임에도 이야기의 인물 하나하나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주인공 블라디미르의 내면 묘사는 전형적인 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나이다의 매력에 빠져 쉽게 질투하고 쩔쩔매는데다, 연상인 상대에게 어린 남자로 보이기 싫어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독자에게도 설렘과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그의 첫사랑 상대 지나이다는 상당히 평이 갈릴 캐릭터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을 쥐락펴락하며 군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 소설이 1800년대에 쓰인 러시아 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당대에는 꽤나 특이한 여성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블라디미르의 아버지 표트르의 앞에서 그녀는 오히려 순종적이다 못해 피학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지나이다가 나는 내가 내려다봐야 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어요, 나는 나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제목의 첫사랑은 블라디미르의 지고지순한 사랑인 동시에, 지나이다가 그의 아버지에게 느끼는 사랑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p.159 두 사람의 사랑은 마치 희미한 어둠 속에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끝내 또렷이 드러나지 않는, 낯설고 아름답지만 위협적인 얼굴 같았다. (중략) 그런 사랑 앞에서는 온갖 설렘과 고통으로 가득했던 내 사랑도 너무나 작고 유치하며 보잘것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애끓는 첫사랑을 소재로 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 블라디미르가 소년에서 한 명의 남성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사랑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또 좌절하게 하고, 또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는 시사점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시사점을 고려해도 굉장히 파격적인 서사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상 노문학이라고 하면 도스토예프스키부터 떠올리는 한국 독자들에게 노문학의 최대 입문 장벽은 끊임없이 등장하는 어렵고 긴 이름들이나 작중 인물들이 보여주는 시대와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철학적 고뇌와 성찰일 것인데, 비교적 첫사랑에서는 그런 점이 덜하기 때문에 노문학의 입문작으로 좋지 않을까 싶다.

 

언제 보아도 위픽 시리즈는 참 예쁜 책이다. 잘 만들어진 각양장 하드커버에 위픽 클래식 특유의 제목 박 부분이 시선을 끈다. 내지도 평량이 두꺼워 뒷장의 글씨가 비치거나 페이지를 넘기다 쉽게 손상되는 일이 없다. 헤드밴드의 컬러까지 표지 컬러와 맞춰져 있는 부분이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출판사에서 이토록 사랑받은 책이라면 분명히 재미있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마저도 들게 한다. 풋풋한 사랑이 그리워지지만 흔한 러브스토리는 지겨워진 한여름, 매운맛 사랑이 궁금해진 사람들에게 첫사랑을 추천한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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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썸머 에디션)
이디스 워튼 지음, 민지현 옮김 / 머묾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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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1 눈부신 햇살과 아침의 일부가 된 듯한 환희가 가슴 가득 차오르자, 지난밤의 비참했던 심정은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혈관 속에서 사랑이 춤추고, 길 아래쪽에서는 루시어스 하니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데,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딸인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로맨스를 기대한다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리얼리즘을 기대한다면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은 철없고 감정적인 소녀 채리티의 사랑을 통해 당대 여성의 삶과 소녀의 내밀한 속사정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마치 여름 초록의 생기처럼 피어나는 정열적인 사랑이 워튼 특유의 시적이고 낭만적인 문장을 만나 더욱 불타오르며 그들의 젊음을 돋보이게 만든다. 불꽃처럼 끓어올랐다가 증오와 절망으로 참담해지기를 반복하는 내면에 대한 고찰, 그가 품은 사랑에 대한 솔직하곧 대담한 묘사는 독자에게 탄식과 설렘을 동시에 선사한다.

 

사실 21세기의 시선으로 읽으면 다소 당황스러운 구석이 있는 책이다. 대부분의 젊은 여성 독자가 로열의 청혼에 여러 번 질색하며 채리티가 하니와의 사랑의 도피에 성공하기를, 또는 채리티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이 100여년 전 전쟁 중에 쓰여졌다는 걸 떠올려보면 여름이야말로 그간 누구도 조명하지 않았던 어린 여성의 성과 사랑, 개인의 삶, 자유의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누구도 채리티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그는 그 시대의 여성으로서 원하는 만큼 하니를 사랑했고, 종래에는 자신과 아이를 지켜줄 로열이라는 현실적 결단을 내렸다.

 

p.125 익숙한 솜씨로 정확하게 움직이는 두 손을 보는 순간 채리티는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자신이 느꼈던 불안한 감정과 그 근원이 되었던 사람 사이에 놓인 불균형이 비로소 보이는 것 같았다.

 

이디스 워튼이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채리티 로열이라는, 이토록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채리티는 당시 사회가 요구했던 여성성과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인다. 당돌하고, 자유롭고, 가감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때로 어쩔 수 없이 여성이라는 틀 안에서 수치스러워하곤 하면서도 그 굳센 심지가 꺾이지는 않는다. 시골, 산 위의 야만적인 빈민 집단 출신,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삶이 워튼의 펜촉을 만나 강렬한 여름 햇살같은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뉴욕의 상류층을 사정없이 파헤쳐 오던 날카로움이 주제부가 다소 다른 여름에서도 가감없이 드러난다. 여름의 정열적 사랑을 묘사하는 순간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낭만적이어서 독자마저도 함께 설레고, 여름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에는 복잡한 감정이 몰아치게 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채리티 로열이다. 하니도, 로열도, 리프도 남자 주인공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직 채리티만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현대의 시각으로 채리티의 삶을 평가하기보다 190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워튼이 말하고자 했던 여성의 자유로운 사랑, 미혼모, 계층적 한계에 대한 고발에 주목해 읽으면 글 속으로 더 깊게 다다르지 않을까 싶어진다. 여름 햇빛의 조각같은 표지 홀로그램의 무지개를 자꾸 매만지게 되는 책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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