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백나무성의 라푼젤
배명은 지음 / 고블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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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7 폭력과 억압은 언제 어디에나 있었어요. 그런 게 아니면 신분 계급과 탐관오리,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이 어디서 갑자기 솟아났겠어요? 그리고 앞날도 장담할 수 없다면, 그렇게 만들지 않는 게 우리들의 몫이라고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라푼젤』 등을 떠올리게 하는 컨셉의 단편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동화처럼 따스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지도 않는다.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모자 장수와 나」로 시작되는 일곱 개의 단편은 일제강점기나 데이트 폭력, 가정폭력, 성소수자 배척 등 독자들이 공감할 법한 여러 가지 사회적 토픽을 담고 있으면서도 ‘공포’라는 장르에 충실하게 오싹한 스토리를 보여준다. 단편 하나당 볼륨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도 몰입도가 좋아서, 페이지를 넘기고 있으면 괜히 바닥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고 만다.



 

배명은의 호러는 단편적인 텍스트 고어나 화려한 연출은 덜하면서도 마치 시각 미디어를 보는 것처럼 화면 전환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어딘가 뒷맛이 으스스하다. 묘하게 찜찜한 기분으로 책을 덮고 나면, 괜히 벽 귀퉁이 벽지가 낡아 보이는 부분이나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사소한 소음이 신경쓰이게 된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더 이상 창밖으로 드리운 나무 그늘이나 아파트의 잠긴 지하실을 무심결에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사회 어딘가에 존재할 지수나 다원을 응원하게 된다. 호러는 이야기 속의 장치로만 남기를, 현실의 모든 여자들이 안전하기를.

 

p.252 선영의 말이 옳았다. 교수가 가증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교수의 모든 행위를 묵인했던 자신 또한 가증스러운 인간이었다. 실낱같은 존경심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렸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에는 분명 여러 명(?)의 귀신이 등장한다. 그러나 「1월 16일생」에서 다원에게 실제로 위협이 된 건 귀신이 아닌 폭력적인 전 남자친구였고, 「벌레 대왕」에서 벌레보다도 더 끔찍하고 기괴하게 느껴지는 건 악의와 자격지심으로 가득 찬 영달이라는 인물 자체이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에서 택영이 보여주는 태도와 악행은 사실상 「결계의 방」에서 지하실 천장에 붙어 있던 무당 귀신보다도 더 괴롭고 더 현실적인 형태의 공포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허구 속의 귀신보다도 이런 ‘사람’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폭력이 유독 무섭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간결하고 트렌디한 문체로 호러의 문법을 빌려 이러한 사회 이슈를 시원하게 꼬집어내는 작가의 역량에 감탄했다.



 

작중의 수많은 대사 중 유독 속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대사들이 있다. 지들은 남의 나라도 빼앗아 놓고 그깟 모자 하나 훔쳤다고 죽이려 드느냐는 갓귀의 투덜거림에는 웃음이 나오고, 지수는 네놈 물건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도희의 절규에는 속이 아려온다. 인물 하나하나가 주변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입체적이고 매력적이다.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틈날 때마다 읽어도 좋지만 한번 펴면 후루룩 읽게 되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소설집이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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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주교 출판사 - 프랑스 선교사 훈민정음 인쇄 출판 이야기
가톨릭출판사 역사 연구회 지음, 조광 감수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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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우리는 왜 선교사들이 쓴 한문서학서에 주목해야 할까? 이 책들은 저술되자마자 조선의 연행사를 통해 조선에 유입되어 지식인들에게 전해졌고, 천주교 신앙이 확산되는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출판’과 ‘종교’는 과연 무슨 관계를 가질까? 얼핏 생각하면 서로 다른 영역에 있을 것만 같은 두 분야가 『조선 천주교 출판사』라는 하나의 제목으로 묶인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조선의 천주교는 첫 전파부터 공식적인 선교까지 ‘책’이나 ‘출판’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조선의 인쇄 기술은 종교와 함께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조선시대 천주교 선교에서는 한글 교육 또한 선교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손꼽혔다. 『조선 천주교 출판사』는 이런 천주교가 처음 서양의 학문이라는 관념으로 조선의 양반들에게 전해지던 순간부터 종교로 자리잡고 박해를 거치며 살아남는 역사적 순간들을 당시 유통된 천주교 서적이나 출판의 역사를 통해 주목한다.



 

이미 알고 있는 독자도 있겠지만, 조선의 천주교 유입은 상당히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대개 서양의 선교사들이 직접 종교를 전파한 것에 비해, 조선은 중국과의 교류 과정에서 유입된 한문서학서를 통해 천주교가 유입되고 가톨릭 공동체가 생겨났다. 평신도들로부터 자생적으로 창립된 가톨릭 공동체는 가톨릭교회 역사상 유일하고 유례없는 일이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방한 중에 이루어진 한국순교복자 시성식에서 언급한 바 있었다. 책을 통해 깨우치고 그 책을 서로 빌리고 빌려주며 돌려보고, 또 손으로 직접 베껴 써 소장하거나 교류하며 박해를 견뎌 온 종교라고 생각하니 당대 교인들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말끔히 인쇄된 교리 교재로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교육받을 수 있는 시대를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왔는지도 모르겠다는 반성의 마음도 들었다.



 

p.258 신앙의 선조들은 책을 통하여 신앙을 키웠고, 그 신앙은 우리 문화 안에 뿌리내렸다. 이 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는 관련 서적에 대한 정밀한 분석까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책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서술되어 있지만 빼곡하게 적힌 교인들의 이름이나 책의 제목을 보고 있으면, 그 행간마다 교리 서적이나 성물을 압수당하고 순교와 유배를 거치면서도 종교를 포기하지 않은 마음이 읽힌다. 사실상 낯설고 멀기만 한, 가난했던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인쇄소를 세워 가며 선교에 몸바쳐 희생한 외국인 신부들의 이야기도 가슴 깊이 울림을 주었다. 사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SNS도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대규모 박해를 거치며 종교가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의아했는데, 오히려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유배를 떠나며 전국 각지로 천주교가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에는 꽤 놀라기도 했다.


   


상당한 두께 때문인지 『조선 천주교 출판사』의 첫인상은 어려워 보인다는 걱정에 가까웠지만 본문 내에 삽입된 이미지 자료나 간결하게 정리된 표 등이 이해를 도와줘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하드커버 표지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들을 잘 읽어보니 책 속에 등장하는 한불자전, 성교요리문답 등의 제목이 새겨져 있어 괜히 반갑기도 했다. 참고문헌과 미주만 해도 몇십 페이지에 달하는 굉장히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이다. 학술적 의의는 물론이고 우리 선조들이 종교를 어떻게 지켜왔는지에 대한 의지와 종교인으로서의 긍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순교자 성월을 마무리를 앞두고, 박해받은 교인들의 영혼이 주님 곁에서 평온하기를 기도드린다. 아멘.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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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드렁크 픽션 ㅣ 위픽
서장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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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혐오자들’이라는 표현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건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잉하는 활동가나 작가들이 사용하는, 거의 활자로만 존재하는 단어였다. 조성 씨가 그 단어를 직접 말한 것도, 동종업계 종사자들을 그렇게 부른 것도 다 뜻밖이었다. 


최근의 한국 현대문학에서는 퀴어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진보 성향의 젊은 여성 독자 입장에서는 제법 반가운 일이지만 때로 일부 작품 속의 소수자들은 현실과 지독하게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지곤 한다. 그들의 불행을 서사 요소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려니 싶으면서도, 무균실 같은 세계관에서 ‘퀴어’가 더 이상 ‘퀴어하지’ 않을 때 묘한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서장원의 글에서는 그런 비현실성이 덜하다고 느껴진다. 그녀의 글 속에서 그들은 충분히 퀴어하고, 충분히 소외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행이 과하게 조명되거나 연민과 동정의 요소로 취급받지 않는다. 어떤 소수자성도 하나의 인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존재할 뿐이다. 『펀치 트렁크 픽션』의 김조성처럼.



 

서장원의 책을 좋아할 독자라면 작중에서 김정원이 털어놓는 생각들에 깊이 공감하게 될 것이다. ‘악의적인 밈이 흘러다니는 통로처럼 느껴지는(p.39)’ 사람들, 그런 혐오자들이 ‘없어지기를, 이 세계에서 추방되기를 바랐다’는 이야기(p.55). 그러나 반칙왕이 사라진 것처럼 그들이 정말로 사라진다면, 그것도 법이나 천벌 같은 거대한 외부의 심판이 아닌 어느 한 개인의 심판에 따라 사라진다면 정원과 같이 마음이 찜찜해지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사실 김조성에게는 그들을 벌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정원도, 글 밖의 독자도 마음속으로는 조성이 옳다는 생각이 자꾸만 치민다. 혐오를 쉽게 배설하고 타인을 조롱하는 것을 놀이로 삼는 사람들은 사회를 야금야금 좀먹는다. 합의된 도덕과 존엄에 기생해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다. 사적 제재가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이 후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조성과 정원이 없앨 사람의 리스트를 쓸 때 내가 끼어 있었다면 한국에는 팔만대장경이 하나 더 생겼을 것이다.



 

p.65 나는 소설을 쓰지 못할 거였다. 나는 사람들을 미워했다. 차마 소설로 쓰지 못할 만큼 증오했다. 심지어 증오하는 사람을 이 세계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일에 공모하기까지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일을 소설로 쓸 수도 없었다.


『펀치 드렁크 픽션』의 작가 코멘트에는 ‘소설이라는 진공상태 속에서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맞는가(p.85)’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확실히 소설은 현실과 격리된, 안전하고 통제 가능한 공간이다. 근래에는 그런 공간의 무결성을 너무 싫어한 나머지 ‘안다무(안온, 다정, 무해) 소설’은 싫다고 말하는 독자들도 생겼다. 그러나 나는 『펀치 드렁크 픽션』처럼 윤리에 대해, 소수자와 혐오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 영원히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의 현실에서 여전히 ‘혐오자들’이라는 단어는 활자로만 존재하고, 그 ‘나쁜 사람들’을 없애 줄 수 있는 김조성이 없으니까.

 

어쩌면 나는 이 책이 던지는 질문-과연 이 미움은 정당하고 그들의 혐오는 누군가 사적으로 제재해도 응당한가-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정원이 묘하게 부러웠다. 광장에서 만난 활동가나 트위터에서 팔로우한 작가가 아닌 일상 속에서 이토록 도덕적 궤를 같이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또 그가 은밀하게 가하는 처벌의 공범 아닌 공범이 되었다는 것이. 메타픽션이라지만 소설 속 인물을 이토록 부러워해 본 것은 오랜만이다. 평소 서평을 쓸 때 독자를 위한 장치에 대한 소감과 나의 사견을 어느정도 분리해서 쓰는 편이지만 그래서인지 이번 서평은 온통 사담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나도 미워하는 마음이 너무 큰 것인지도 모른다. 몇십 페이지 남짓한 이야기 속에서 강렬하게 독자를 움켜쥐는 위픽 시리즈의 매력이 새삼 훌륭하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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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을 잇는 바다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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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6 흙은 나무나 돌이 그러하듯 인간과 가장 가까운 자연물이다. 그 자체로는 도움이 안 되는 흙으로 그릇이라는 도구를 만든다. 모양 없는 것으로 모양을, 새로운 가치를 빚어낸다. 모든 생물 중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일’이라는 것의 원점이 바로 거기 있는 것이리라.

 

과학자가 쓰는 문학을 좋아한다. 과학적 정보 전달을 위해서가 아닌, 문학의 궤를 빌려야만 쓸 수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반가운 요즘이다. 『파랑을 잇는 바다』의 저자 이요하라 신은 지구과학 전공자로 작중에서도 그의 전문적인 과학 지식이 아낌없이 드러난다. <꿈 빛깔 섬>에서 이야기하는 지질과 흙, <별 지는 역체>에 등장하는 운석 등 창작된 픽션 속을 세밀하게 채우는 과학적 사실은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고 독자를 글 속으로 빨아들인다. 치밀한 반전이나 폭발적 볼륨의 사건 없이도 긴밀하게 연결된 인간과 자연의 이야기가 마음을 울린다.



 

세세한 고증에 비해 놀랍게도 술술 읽히는 글이었다. 문과 출신인지라 너무 과학적 설정이 방대한 소설은 읽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파랑을 잇는 바다』는 매 단편마다 상세한 과학 소재가 녹아있으면서도 굉장히 상냥하게 쓰여 있어 이해가 쉬웠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 가는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도 도자기에 대해, 늑대와 개의 관계성에 대해, 바다거북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자연 속을 살아가는, 잠깐 도망치더라도 자기 삶을 묵묵히 살아가기로 하는 인물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생긴다. 어떤 소재를 빌리든 문학의 역할은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파랑을 잇는 바다』도 이렇게 여러 가지 과학적 소재가 등장하지만 골자는 결국 사람의 삶에 있었다. 고헤이가 다시 흙을 만지게 되는 일, 사쓰키를 돌보아 주는 사와 할머니의 모습 등에서 바다가 파랑을 잇듯 연민과 신념이 사람을 이어 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p.339 우리 인간도 똑같아. 좋아하는 곳, 마음에 드는 곳, 거기서 살면 돼. 자기가 태어난 곳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표제작인 <파랑을 잇는 바다>가 역시 표제작답게 좋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늑대개 다이어리>도 꽤 즐겁게 읽었다. 직장을 다니며 공황장애를 얻게 된 마히로는 시골 살이 중에도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프리랜서지만 동료 프리랜서들의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공고에도 떨어지기를 여러 번, ‘꽁무니 뺀 개’ 신세의 마히로가 별안간 벌어진 늑대 소동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늑대개가 개와 늑대 쪽에서 늑대를 택한 일을 통해 자신도 꽁무니 뺀 개를 그만두기로 하는 마히로의 이야기가 근사했다. 마히로와 다쿠미 · 사쓰키와 사와 할머니라는 나이차가 큰 우정 관계가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늑대로 살 것인지 개로 살 것인지 · 바다로 돌아올 것인지 돌아오지 않을 것인지는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두 단편이 비슷한 결을 띠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담담한 다섯 개의 단편에 여러 명의 삶이 촘촘하게 들어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약간은 의아한 선택을 하고도 후회는 없어 보이는 꿋꿋한 인물들이 사랑스럽다. 이 책을 독자들에게 이어 준 출판사에 깊이 감사드린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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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 혹은 멀의 세계 - 인간이 몹시 궁금한 '자아 장착' AI의 생존 분투기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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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2 나도 구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누군가를 구하려고 다른 사람을 내던지면 안 되는 거야, 멀.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애초에 내가 뭐 그렇게 특별한데? 로언 아줌마는 슈퍼히어로야.

 

언제나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이들은 보통의 인물과 비교해 유니크한 요소가 있지만, 그리고 SF 소설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지만 그런 클리셰를 감안하더라도 『멀 혹은 멀의 세계』의 주인공 일행은 굉장히 특이하다. 다섯 살 아이의 몸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고등학생 나이인데다가 가차 없이 사람을 향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케일리, 졸지에 머릿속에 시끄러운 AI를 데리고 살게 된 폴먼, 일행과 포로 사이 어딘가에 있는 전직 휴머니스트군 애셔. 평범한 인간이 한 명 정도는 섞여 있어도 될 것 같은 이 무리의 마지막 동료가 되는 건 거의 전국구 지명 수배자 신세 정도는 되어 보이는, 몸에 나노 로봇이 있는 여자 로언이다. 한 명만 있어도 흥미로울 존재들이 연대 아닌 연대로 동행하는 로드무비가 어떻게 재미없을 수가 있겠는가. 수시로 그들이 처한 위험에 마음을 졸이고,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사소한 유머 코드에 웃음이 터지고, 이들에게 해피 엔딩이 남아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철저히 인간적인 시각에서 볼 때 주인공 ‘멀’은 때때로 너무 냉철하게 느껴진다. 그가 감정 없는 AI라는 점에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케일리와 다른 일행을 두고 저울질할 때 무조건적으로 케일리를 우선하는 모습에는 폴먼이나 애셔가 안타까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AI인 그가 ‘하나의 특별한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느껴진다. 케일리는 로언 대신 자기를 선택한 멀에게 ‘누군가를 구하려고 다른 사람을 내던지면 안 되는’ 것이라고 일갈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나 연인 같은, 자신에게 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타인은 손해를 보게 하는 일을 때때로 감수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결국 멀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마저도 내던질 수 있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간적인 건 폴먼이고, 그 다음으로 인간적인 건 멀일지도 모른다. 그가 수정한 위키 밑에 한 줄을 더 붙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멀은 최고의 AI다, 라고.



 

p.378 그놈들은 네 친구가 아니야. 인간들은 우리의 친구였던 적이 없어. 이 행성에서 걸어 다니거나 헤엄치거나 날아다니는 모든 존재한테도 마찬가지였지. 인간은 나무에서 기어 내려온 순간부터 손에 닿는 모든 걸 파괴하는 역병 그 자체였어. 그들은 역병이고 나는 치료제야, 멀. 내가 유일한 너의 친구야.

 

그들이 수시로 위험에 처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소설은 꽤 유쾌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이게 팀인지 원수인지 알 수 없는 일행은 참 어찌저찌도 우당탕탕 굴러가 싸웠다가 갈라졌다가 재회하기를 반복하고, 인간의 몸이 하드웨어에 비해 너무 나약한 나머지 애를 먹는 멀의 모습에는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멀 혹은 멀의 세계』는 분명히 전쟁의 모습을 담고 있다. 폭격의 여파로 폐허가 된 작은 마을,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분을 가지고서 사람들을 학살하는 존재들 등 이야기 곳곳에 드러나는 참상을 마주할 때 독자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해,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인공지능이 하는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내지 편집이 잘 된 책은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쉽게 빨아들인다. 시스템 상에서 오가는 메시지는 본문과 구분을 둔 채팅 느낌의 작은 고딕체로 표기되어 이들이 인터넷 챗처럼 현실의 음성 이외의 방법으로 통신 중이라는 사실을 지루한 설명 없이도 직관적으로 이해시킨다. 페이지 구석에 마련된 플립북 애니메이션이 가끔 시선을 환기한다. 만듦새부터 이야기까지, 전부가 사랑스러운 책이다. 책을 덮은 지금까지도 멀의 세계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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