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 : 기념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7
고수경 외 지음, 조연정 해설 / 열림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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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p.29 그냥 시간을 보낸 거예요. 어떤 아이들한테는, 누군가한테는 그런 곳이 필요하다고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이 그럴 만한 공간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대체로 친밀감을 내포한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장 친밀한 관계, 나를 보호해주는 울타리, 든든한 우군이자 따뜻한 지원군. 그러나 정말로 모든 가족이 그러한가? 일곱 번째 림 소설집인 : 기념은 가족을 소재로 하는 여섯 편의 글을 통해 독자에게 묻는다. 가족이란 반드시 아름다운, 필수불가결한 존재일까?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미묘하게 불편했다. 불편함은 글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한 번도 가족이 불편해본 적 없는 누군가는 이 글들에 영원히 공감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자꾸만 글 밖의 나를 좀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에 대한 이 신선한 글들을 기쁘게 읽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가족이라는 정서는 각기 다른 모양일지언정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갖는 정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는 가족이 없는 사람마저도 가족이 없다라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정서가 된다.

 

: 기념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대체로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이었던 가족, 즉 부모와 자녀 둘 정도로 구성된 가정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어느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다. 어느 글에서는 여동생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어느 부부 슬하의 일남일녀, 굉장히 흔한 가족의 형태로 보이는 이 가족은 별거 중이다. 이들이 서로 형태가 다르다고 해서 누구 하나 가족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고, 그들이 때로는 서로를 갉아먹고, 옮아매고, 또 지지했다가, 또 괴롭게 하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어쩌면 이것이 : 기념의 첫 번째 의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p.142 나와 의견이 다른 이를 굴복시키려는 호승지심이 2할이라면 나머지 8할은 선도에 가까웠다. 상대가 좋은 쪽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 그 믿음은 아집이 강한 아버지와 사는 동안, 기분파에 다혈질인 엄마와 소통하는 동안 서서히 깎여 나간 것 같다.

 

표제작 기념祈念이 굉장히 사랑하는 작가 성해나의 작품인지라 이 책이 더 반가웠을지도 모르겠다. 성해나의 글은 때로 너무 현실적이어서 사람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가, 때로는 너무 나와 동떨어져 보여서 자꾸만 내 스스로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기념祈念은 전자였다. 굳이 병기된 한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문득 깨달은 것은, 기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결혼기념일’ ‘기념 촬영따위의 기념紀念과는 다른 한자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빌 기자에 생각 념자를 쓰는 기념祈念. 글 속의 는 무엇을 빌고 싶었을까. 글의 말미에서는 별다른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상상도 못 할 사고를 쳐 버린 자성의 호적을 파거나, 이번에야말로 기어이 이 부부가 이혼하거나, ‘가 절연을 선언하고 집을 박차고 나가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가족이니까. 그러나 독자는 이 결말에 자꾸만 의문이 남는다. 가족이라는 게, 평온한 방조와 회피를 이어 가며(p.156) 반드시 유지해야만 하는 것인지.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숨 돌릴 곳을 제공해 주던 이선이, 금붕어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진주가 책을 덮고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요한에게 더 부모 같은 이는 이선이 아니었을까, 진주의 가족은 기석이 아니라 그 금붕어이지 않았을까. 비교적 글의 맵시나 관록이 덜함에도 젊은 문학을 읽는 까닭은 바로 이런 글들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기성 문단이 쉽사리 조명하지 않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소재들을 거침없이 사용해 적나라하게 고발하거나 독자를 위로하는 것. 사실상 이쪽이 문학의 본질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이토록 날것인 젊은 작가들의 글을 선보여주는 열림원에 깊이 감사드린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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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식물 도감 - 전 세계 760여 종 식용 식물 총망라!
윤주복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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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음식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는 식용 식물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식물은 잎, 줄기, , 뿌리, 열매 등 다양한 부위를 이용하는데, 각각의 부위는 저마다 고유한 맛과 향, 색깔을 지니고 있으며, 가지고 있는 영양 성분도 제각기 다릅니다.


인간의 의식주는 모두 식물과 역사를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신소재나 금속 제련 기술이 생겨난 현대까지도 나무는 가구 등의 훌륭한 소재로 쓰이고 있으며, , 린넨, 모시 등 식물성 섬유에 대한 수요가 꾸준한 것은 물론이고 쌀과 밀 등의 곡물은 수천 년이 지나도 인간의 주식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식용으로의 쓰임새는 굉장히 다양한데, 주식이 되는 곡류부터 시작해 채소나 열매를 먹는 식물들, 꽃이나 뿌리처럼 흔치 않은 부위를 먹는 식물들도 우리 식탁에 다양하게 존재한다. 심지어는 독이 있는 식물을 익히거나 삭혀 독을 제거하고 먹거나 독이 생기기 전에 채취해 섭취하기도 한다.

 

이렇게 먹을 수 있는 식물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흔히 식탁에서 볼 수 있는 채소나 과일을 생각해보자, 몇 개까지 떠올릴 수 있는가? 적으면 수십 개, 많아도 백여 개 정도가 겨우 떠오를 것이다. 식물생태연구가 윤주복의 먹는 식물 도감은 무려 760여종의 식용 식물을 정리한 도감으로, 한국에서 주로 먹는 식물뿐만이 아니라 해외 식문화에서 볼 수 있는 식물들도 모두 담겨 있어 식용식물 도감으로는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또한 열매채소, 잎줄기채소, 버섯, 당분을 얻는 식물, 약용식물 등 카테고리가 잘 분류되어 있어 특별히 관심 있는 종류의 식물을 상세히 찾아보기도 좋다.



 

p.331 이외에도 식물의 여러 부분으로 차를 끓여 마시거나 음료를 만들어 마신다. 식물은 약으로도 널리 이용하는데, 약용 식물의 일부는 음식을 만드는 데 넣기도 한다. 이처럼 식물 중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식용하는 것이 많다.


사실 시중에는 ‘OO도감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저자의 연구 일화를 담은 에세이나 해당 분야에 대한 설명글의 형식을 한 책이 굉장히 많은데, 먹는 식물 도감은 그야말로 정말 도감이다. 풀컬러로 인쇄된 사진에 식물의 이름, 학명, 디테일한 설명이 빼곡하게 덧붙여져 있어 식물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하루 종일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760여종이나 되는 식물이 실려 있다 보니 평소에 익히 알고 있고 자주 먹어 본 식물도 많이 실려 있었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조차 없고 이걸 먹는다고?! 하고 놀라워하게 되는 식물도 꽤 많이 있었다. 특히 익숙한 식용꽃인 팬지나 베고니아 외에도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많은 꽃이 식용이라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다(다들 카네이션이 식용꽃이라는 거 아셨어요...? 저는 몰랐어요...).

 

K-푸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들 중 하나인 비빔밥에서 볼 수 있듯이, 나물이 빠지지 않는 한식 밥상에서의 식물의 쓰임은 특히 무궁무진하다. 오죽하면 한국 사람들은 나물 비빔밥에 청국장만 먹어도 매일 비건을 실천할 수 있다는 밈이 생길 정도이다. 평소에 그런 식용 식물들이 궁금했던 독자, 식물 탐색이나 요리에 취미가 있는 독자, 식물에는 문외한이지만 도감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 모두에게 자신있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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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류 걸작선 실버 센류 모음집 3
공익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음, 이지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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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 여행 마니아 안 가본 곳이라곤 저승뿐이라네 (旅行好 ってないのは 冥土だけ) 


한때 일본 노인 글짓기 당선작.jpg’ ‘흔한 열도의 작문류의 제목을 달고 인터넷을 떠돌던 문장들이 있었다. ‘연상이 내 취향인데 이젠 없어’ ‘병원에서 3시간 기다렸다 들은 병명 노환입니다등 재치있고 해학적인 문장들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글들은, 단순한 작문이나 시가 아니라 센류라는 일본 시의 한 종류이다. 센류는 5·7·5의 운율을 가진 일본 정형시로, 운율이 정해져 있지 않은 시가 더 익숙한 현대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일반인은 짓기 어려운 고전 순문학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오히려 와카나 하이쿠에 비해 더 가볍고 풍속적인 느낌을 띤다. 요즘에는 샐러리맨 센류’ ‘주부 센류등의 여러 공모전이나 대회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일본 센류 걸작선은 그 중에서도 노인들의 자조나 풍자를 담은 실버 센류모음집이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노화, 건망증, 노인 이슈 등을 담은 센류 100수를 통해 독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책에 담긴 센류들은 하나같이 유쾌하다. ‘불만 있으면 개가 아니라 나한테 말해문화센터엔 선배티 풀풀 내는 아내가 있다처럼 부부 사이의 일을 주제로 하는 센류부터 옛날엔 주당 지금은 맨정신에 갈지자걸음’ ‘늙는다는 건 늘어가는 복용약 줄어드는 기억과 같이 건강과 관련된 센류도 있다. 문장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고 있으면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표현된 모습들에 마냥 웃음이 나지만, 두 번 세 번 다시 읽을 때는 어쩐지 마음 한편에 묘한 씁쓸함이 차오르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아파 병들게 되는데 과연 나는 그렇게 되었을 때, 이토록 유쾌하게 그걸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때로는 깊은 통찰에 감탄하며, 때로는 위트있는 풍자에 키득거리며 읽게 되는 책이다.

 

p.124 이 나이 먹고 끊어서 무엇 하랴 술이랑 담배 (この めてどうする たばこ) 


일본 센류 걸작선은 수상 연도에 따라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부를 넘어갈 때 센류 달인에게 묻는다코너를 삽입해 분위기를 환기하는 동시에 센류에 대한 이런저런 궁금증도 풀어준다. 일본어 원문이 함께 실려 있어 일본어를 아는 독자라면 원문을 따라 읽으며 운율을 느낄 수도 있고 중간중간 삽입된 마치 동화같은 분위기의 삽화가 시의 여운을 오랫동안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노년층에게는 공감을, 젊은 독자들에게는 웃음을 주는 책이다. 60대 어머니는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깔깔 웃으시고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펼쳐 놓고는 한참 바라보며 이것 참 내 이야기 같다며 깊이 공감하시기도 했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노인은 민폐라는 이미지가 점점 강해져가는 씁쓸한 세상이다. 오로지 돈을 벌고 성공하는 방법만을 좇는 세대에서 시나 감성은 너무나도 쉽게 뒷전이 된다. 그러나 일본 센류 걸작선은 그런 사회에 지친 독자들에게 노인도 그저 유머를 즐기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 구성원이라는 점을, 웃으며 인생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기운을 북돋아준다. 이 시리즈가 계속되면 좋겠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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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지옥
김인정 지음 / 아작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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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0 그녀는 자신이 어떤 길을 택할지를 깨달았다. 이것은 예지인가 그렇지 않으면 들끓는 정염이 불러온 망집인가? 그녀 자신이 행할 죄악을 다만 조금 일찍 알았을 뿐인가, 아니면 그렇게 스스로를 속여 잠시 잠깐 죄책감을 잊고자 함인가? 


오래전부터 창작물의 단골 소재였던 이어지지 못할 사랑, 사랑할수록 서로가 힘들어지는 애증 따위를 최근의 독자들은 망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소위 말하는 혐관서사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보다 이런 관계가 주는 드라마틱함이 있다 보니 특정 드라마나 장르 소설의 팬 커뮤니티에서는 일부 커플링을 두고 망한 사랑이라 오히려 좋다는 반응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김인정 작가의 신간 다정한 지옥은 그런 망한 사랑 중독인 독자들을 위한 책으로 동양풍 환상문학으로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작가 특유의 화려한 작품세계가 아낌없이 담겨 있다. 장르 문법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끝없는 도파민을 주는,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취향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만드는 책이다.

 

작중의 어떤 사랑은 너무 순애보여서, 또 어떤 사랑은 시작부터 어긋나 있어서 망한 사랑이 된다. 작가가 섬세하게 설계한 세계에서 꿈과 현실 사이 저마다의 사랑을 품고 사는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지금까지 보아온 보통의 로맨스는 다 허상인 것만 같아진다. 당연한 이야기다. 사랑한다거나, 결혼하자거나, 하물며 내 모든 걸 전부 주겠다는 고백보다도 내 목을 가져가라는 말이 더 와 닿을 수밖에 없다. 목숨보다 사랑한다거나 널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말과는 그 무게나 느낌이 다르다. 대체로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게 사랑이라면 이 책 속의 인물들은 불행해지리라는 걸 알면서도 기껍게 사랑한다. 그 사랑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더라도.

 

p.324 어미의 목숨을 거둔 이를 죽이려고 검을 배웠다. 수행은 힘겨웠고 힘을 기르는 일은 지루하였으며 육신이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피를 흘리고 부딪치고 깨졌으며 비틀렸다. 베는 것은 찰나이건만 베려는 것은 장구하였다. 


단편들은 얼핏 보기에는 별개의 이야기로 보이면서도 읽어나가다 보면 하나의 결을 갖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들이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 정도는 흔쾌히 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함께 있으면 지옥이 되는 줄 알면서도 누군가를 낙원 삼는 바람에 다정한 지옥에서 살게 된다는 점에서. 화선그리고 낙원까지를 나란히 두고 생각해보자. 거북이의 입을 빌려 설화처럼 쓰여진 정령의 이야기와 복수와 애증으로 점철된 무협 서사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해당화 아씨와 연교의 사랑은 어느 정도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종래에 자기를 기다리는 게 영원이 아닌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 수 있는 사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치 눈 위의 동백처럼.

 

볼륨이 작고 후루룩 읽히는 단편과 과몰입을 이끌어내는 긴 작품이 섞여 있어서 차분히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이 책에 매료된다. 낙원을 부수거나, 낙원을 원하거나, 사람을 낙원 삼거나… …. 가장 깊게 몰입하고 서사가 근사하다고 느낀 글은 그리고 낙원까지였지만 어쩌면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짧은 단편 화적의 말미였다. 세상 무엇도(그게 설령 사랑일지라도) 영원한 것이 되어주지 아니하니 반드시 그 끝이 고단할 뿐이라는 자조. 이 부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화선에서도 화적에서도 이토록 덧없는 사랑의 회의감을 날것으로 보여주었지만 그리고 낙원까지에서 결국 사랑이란 둘만의 것이라는 사실도 절절히 보여주어서가 아닐까 싶다. 꽃 정령들이 남자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하고 한탄하던 마음도 책을 모두 덮고 나면 조금은 덜해진다. 어쨌거나 자신의 사랑을 향해 모든 것을 쏟아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근사하니까. 각기 다른 시기에 발표된 작품을 하나의 소설집으로 엮어 작품 바깥에서도 이런 서사를 만들어낸 편집이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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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리얼리티
고하나 지음 / 열림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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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8 굳이 왜 그래야 하냐는 거야. 무엇을 위해서? 시청률 중요하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 진짜를 짜내려고 가짜를 만드는 거잖아. 가장 최악이 뭔 줄 알아? 거기서는 피디의 가장 중요한 일이 진짜라는 이름으로 가짜의 판을 깔아야 한다는 거야.


영화나 드라마 이외의 영역, 특히 예능에서 사람들의 호응을 가장 쉽게 끌어내는 기믹이 바로 리얼리티이다. 저 사람이 정말로 다른 출연진을 좋아하는지, 게임에서 진 팀은 진짜로 밥을 못 먹고 굶었는지, 여행지에서 짐을 홀랑 잃어버린 큰 사건은 실제 상황인지. 그런 부분을 잘라낸 클립은 조회수도 높고 반응도 좋다. 예능신이 도왔다며 재미있어하는 시청자들의 반응 사이에 꼭 이런 댓글이 하나쯤 달린다. “이거 다 대본임.” 고하나 작가의 첫 장편소설 최후의 리얼리티는 그런 리얼리티방송에 커다란 의문을 던진다. ‘리얼하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일까? 보도 윤리와 리얼리티 중에는 무엇이 더 큰 무게를 가질까? 우리가 리얼하다고 믿어온 것들은, 과연 정말로 리얼일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랑과 카이의 귀여운 관계가 독자의 이목을 끈다. 소랑의 시점에서 진행되던 1부가 예상 밖의 상황으로 끝나고, 다시 카이의 시점으로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와 함께 숨은 인연과 과거가 드러나며 2부가 진행된다. 그렇게 다른 삶을 살아왔음에도 결국 만나게 된 둘의 앞에 닥쳐오는 멸망을 3부가 그려낸다. 각자의 신념으로 방송을 만드는 두 주인공을 조명하며 차곡차곡 쌓아온 빌드업이 삐걱이는 부분 없이 결말로 힘차게 달려간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 여성들의 사랑과 연대, 성장과 신념에 푹 빠져들게 된다.

 

p.156 멸망은 생각보다 스펙터클하지 않아. 마냥 빠르고 갑작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느릿하고, 불가해하고, 처절하지. 더 최악인 건, 나도 아름답다고 느낀 멸망이 있었다는 거야.


코앞으로 멸망이 다가올 때, 소랑은 사실 이 멸망의 컷을 따서 인서트로 쓰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는 걸 떠올리면 꽤나 흥미롭다. 우리는 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인생이 뒤바뀌고, 이렇게까지 할 마음이 없었던 일에 골몰하고, 내가 사랑하게 될 줄 몰랐던 사람이나 세계를 너무나도 사랑해버리게 되곤 하니까. 운명처럼 다채롭게 이어지는 시간선을 따라 달리다 3장의 이 문장도 연결 지구 방송국의 피디가 편집한 자막일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길.’이라는 도입부를 보면 별안간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끊임없이 리얼리티 방송에 대해서, 쪼고 컷을 바꾸고 리액션을 이어 붙인 게 과연 진실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책 바깥의 독자들도 작가가 쓴 대로만 읽게 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아이러니하고 의아한 기분이 피어오른다.

 

영상일을 해 보았다면 더 재미있게 몰입할 수 있겠지만, 방송에 대한 별다른 사전 지식이 없이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그저 지구 17호를 비추는 리얼리티 방송을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나는 이 리얼리티에서 한 걸음 떨어져 액션-리액션에서 리액션을 맡은 독자라는 기분으로. 사랑스러운 두 방송쟁이를 계속해서 응원하면 어느새 결말부에 도달해 있다. 흡입력이 대단한 책이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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