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 삶을 파괴하는 말들에 지지 않기
아라이 유키 지음, 배형은 옮김 / ㅁ(미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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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파괴하는 말들에 지지 않기


'말이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말이 스스로

무너질리 없으니 '말이 파괴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사람의 존엄성을 상처 입히는 언어가 발화되어 생활

영역에 뒤섞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감각이 흐려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증오 표현을 퍼뜨리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정의를 부르짖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근차근 따져보면 흔하디 흔한 

혐오감 위에 비속한 정의감을 뒤집어씌웠을 뿐인 경우가 많다.


사람과 사람의 토론이나 교섭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말 자체에

'담보'로서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입 다물게 하기 위한 말'이 내리쌓이면 '입을 다물게

하는 압력'도 반드시 높아질 것이다. '삶의 괴로움을 떠안은

사람'이 '도와줘'라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압력이다.


어떤 시점에서 보기에는 이른바 미친 상태라고 해도 그것이

억압에 대한 반역으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상태라면 그 자체는

정상입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말은 무력하다"고들 한다. 무슨 말을

해도 "허울 좋은 말"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뛰어넘어야 할 벽을 헷갈리지 않기 위해서는 '냉철하게 자신을

바로보는 일(자기 응시)'이 필요한 것이다. 공생 사회로의 길을

가로막는 벽은 어딘가 먼 곳에 있지 않다. 그 벽이야말로 우리의

'이웃'에 있다.


'누군가'를 망설임 없이 증오하는 사회는 '나' 또한 망설이지

않고 증오할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싫다면 지금 '침묵한다'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범람하는 언어에는 반론하기 어려운 성격이 

있습니다. 익명으로 넘쳐나는 언어에 정면으로 대응하고자 하면

중요한 논점이 빗나가기 쉽습니다.


'사는 의미'에 대해 제3자로부터 설명을 요구받을 이유는 

없을뿐더러, 사회에 그 의미를 증명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쓸모없다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공포'란 '나는 살 가치가

없으니 스스로 죽어야 한다'는 심리 상태로 몰아넣는다.


'문학자가 해야 할 일'은 아주 많지만 그중 하나는 [없는 말]을

찾아내기라고 생각한다.


'애당초론'은 쓰기에 따라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한다.

'애당초 생산성이 없는 사람에게 세금 써봤자' 같은 주장에

쓰이면 사회가 경직되어 숨이 막힌다.


어느 정도의 '사양'은 미덕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목숨이 걸린 사양을 강제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구원받은 느낌을 주는 것,

그 존재를 믿으려는 마음의 움직임. 그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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