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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비운의 왕세자 소현! 그의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 가장 힘을 얻고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학질에 의한 병사로 기록된 듯 하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소현의 죽음은 최소한 아버지 인조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타살 또는 인식있는 과실로 인한 치사로 봐야 할 것같다.
1623년 서인주도의 반정 성공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시절의 유연한 중립적인 외교노선을 버리고, 서인의 대명의리론에 입각한 외교노선을 택한다. 그 결과 정묘호란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을 맞게 되고, 강화도로의 피난이 여의치 않아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티다 드디어 청 태종앞에서 항복하게 된다. (임진왜란때의 선조를 비롯하여 무능한 왕들은 전쟁이 나서 위협을 느끼면 백성을 버리고, 자기목숨만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치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전통은 1950년 6.25 한국전쟁에서 초대 대통령이였던 이승만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불쌍한 백성들..)
우리역사의 최대치욕인 삼전도의 굴욕! 인조는 항복의 예로써 청 태종에게 3배 9고두례를 해야만 했다. 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 것. 그 치욕스런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삼전도비가 송파 호수공원의 근처에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있다.(오랫동안 보존되어 역사적 교훈으로 삼을 일이다.)
소현세자는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청에 끌려가 아담샬과의 만남을 통해 천문학 등 서구의 과학기술 발달에 주목했고, 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이 임금자리에 쫒겨날까 두려워한 인조의 미움을 받게 되고, 그토록 그리던 고국에 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죽게 된다
언젠가 우리나라 역사교사들이 가장 안타까운 순간으로 꼽은 장면도 소현의 죽음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현이 조선왕이 되어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고, 개방정책을 펼쳤다면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역사란 가정이 없는 법. 그는 무능하고, 의심 많은 아비와 명나라와의 의리만을 생각하는 수구 보수신하들 사이에서 억울하게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는 서인의 주도세력 노론이 지배하는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국혼물실(國婚勿失)의 기조하에 외척의 득세와 부정부패. 이러한 조선왕조가 1910년 일제에 패망하기까지 유지되었다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인 것같다.(홍경래난을 비롯하여 동학농민운동(난?, 혁명?, 전쟁?)에 이르기 까지 모두 진압되었으니 우리나라는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민중에 의한 혁명이 성공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소설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서 소현세자의 고독과 아픔, 열망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지는 못한 듯 하다.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나 주변묘사만으로는 극적 긴장감을 살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전개에 따라 소현의 눈을 통한 1인칭시점으로 소현의 내면묘사에 집중하거나 또는 왕세자비의 시선에 의한 서술과 묘사, 인조와 그 신하들의 대화 등을 교차하여 구성하였다면 보다 다이내믹하고 사실감이 있게 되어 독자들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다소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