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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가난한 사람들 ㅣ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출생했는데 톨스토이가 1828년에 태어났으니 톨스토이보다 7살 형이다. 근데 톨스토이가 더 나이가 많은 이미지로 기억되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인터넷이나 책날개에서 접하는 그들의 사진 때문일 것이다. 흰수염에 인상쓰고 있는 만년의 톨스토이 이미지가 강하다.
이 책은 ‘열린책들’에서 2008년 3월 10일 2쇄로 발행한 것인데, 싼값에 고전을 널리 보급하고자 하는 출판사의 의도 때문이겠지만 430여 페이지로 상당한 부피인데도 정가가 7,800원으로 저렴하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아쉬운 점은 줄 간격이 너무 좁아 글이 빡빡하다. 읽다가 토나올 뻔 했다! 게다가 작품 발표순서상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오고, [분신]이 나중에 와야 할 것 같은데 표지의 제목 순서를 바꾼 이유는 뭘까? (책 본문은 위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분신]을 알리려는 의도일는지...)
[가난한 사람들]
중년의 하급관리 제부쉬낀(마까르 알렉세예비치)과 병약한 처녀 바르바라(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사이의 편지글 형식의 소설이다. 서간체 소설은 독일에서 요한볼프강 폰 괴테가 1774년 발표한 [젊은 베르테르(베르터)의 슬픔(고뇌)]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자, 이에 힘입어 프랑스에서도 1782년에 쇼데들로 드 라클로가 [위험한 관계]를 출간하여 상당한 재미를 본 소설양식으로, 도스또예프스끼도 그 유행의 끝물에 편승한 듯 하다. 공병학교 졸업후 그의 나이 24세인 1845년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여 러시아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먼 친척뻘 되는 처녀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편지에 플라토닉한? 사랑고백을 하거나 관청에서의 일이나 주변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다는 것은 남사스럽고 사삭스럽다. 러시아 소설의 인물들은 왜 이리도 수다스러운지... 첫편지에서 부터
“더없이 소중한 나의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 당신 창문의 커튼 끝자락이 접혀 봉선화 화분에 걸쳐져 있더군요. 바로 그때 당신의 얼굴이 창가에 어른거린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제 방쪽을 보시며 제 생각을 하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소중한 당신, 하지만 당신의 고운 얼굴을 똑똑히 볼수 없어서 저는 얼마나 골이 났었는지 모릅니다! 소중한 나의 아가씨, 제게도 모든 걸 훤히 잘 볼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답니다. 늙는다는 것은 참으로 서러운 일이지 뭡니까!”(13쪽) 결말부분에서는 바르바라가 맘에 들지 않지만 가난 때문에 시골 지주에게 시집가버려 결국은 ‘닭쫒던 개’ 보신탕 신세가 되긴 했어도 결혼준비를 위한 망사레이스, 주름장식 등 온갖 심부름을 다해주고도 마지막 편지에 “나의 친구여 ,안녕히. 행복하게 사셔야 해요. 건강하시고요. 저는 언제나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192쪽)라며 소갈머리없는 소리나 해대는 것이다. 어찌보면 정말 대책 없이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다.
이들이 사는 집안구조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몇 개의 (하숙)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 한데, 우리 소설 김원일의 소설[마당깊은 집]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들 모두 가난하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가난과 궁핍’을 주제로 한 빈궁 소설은 우리문단에서는 1925년 최서해의 [탈출기]를 필두로 주로 자연주의 문학에서 흔히 다루어 진다. 외국소설로는 작년에 인상깊게 읽은 에밀졸라의 [제르미날]도 그렇고,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영감을 받은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에서도 그렇다.
“가난한 것이 죄는 아니잖습니까.”(155쪽) ‘가난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대립구조. 자신도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도 더 불쌍한 사람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선행. “아내도 아이들도 굶고 있습니다.10꼬뻬이까짜리 은화 한 닢이라도 좋습니다. 제게 남아 있던 돈은 20꼬뻬이까가 전부였고, 내일 꼭 필요한 것을 사려고 둔 돈이었죠.~ 저는 서랍에서 20꼬뻬이까를 꺼내서 그냥 다주어 버렸습니다. 나의 소중한 이여, 좋은 일 아닙니까! 에이, 빌어먹을 가난 같으니라고!"(161쪽)
또한 도스토 옙스키의 성향이 반영 되어서이겠지만 가난하면서도 이들의 책과 문학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다. 이 소설에서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르바라의 수기에서 가난한 뽀끄로프스끼와의 순수한 사랑얘기, 그리고 죽은 뽀끄로프스끼의 장례식에서 그의 아버지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마부가 속력을 냈다. 노인이 그 뒤를 쫒아가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옷에 달린 주머니에서는 온통 책들이 비어져 나왔다. 그가 내내 꼭 쥐고 있던 커다란 책은 여전히 손에 들려 있었다. ~ 그의 주머니에선 계속 책들이 빠져나와 진흙탕 속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그를 멈춰 세우고 떨어뜨린 물건을 가리켜 보였다. 그는 그것을 주워 들고 다시 관을 쫒아 달렸다.”(72,73쪽)
아버지는 아들이 좋아하던 책들을 끝까지 지키고, 챙기려 했던 것이다. 마치 책들이 죽은 아들의 ‘분신’인 것처럼.
[분신]
도스토 옙스키의 아버지는 자선병원의 의사였다. 당시의 의사들은 대부분 내,외과를 담당한다. 이때에는 당연히 정신과 전문의는 없었을 것이니까.도스토 옙스키가 앞서 [가난한 사람들] 성공에 고무되어 이듬해인 1846년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인 9등 문관 야코프 뻬뜨로비치 골랴드낀이 서서히 미쳐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다. 가만보니 1835년 발표한 러시아의 작가 고골리의 일기체 소설 [광인일기]와 비슷하다. [광인일기]의 내용은 자신이 9등문관이란 미약한 하급관리가 아니고 에스파냐의 국왕이라고 공상함으로써 현실의 굴욕감을 극복하려고 한다. 주인공의 수기라는 형식을 통하여 관료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함과 아울러, 광기와 착란의 세계에서밖에 살 수 없는 하급관리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루쉰이 1918년 발표한 소설제목도 [광인일기]다. 루쉰이 고골리의 [광인일기]에서 모티프를 얻어 수기 형식으로 쓴 것으로서 광인의 심리를 빌어 가족제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유교사상의 봉건적 모순을 인간본능의 공포감으로 폭로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E.H.Carr의 [도스또옙스키 평전]을 읽은 적이 있다. 도스또옙스키는 간질환자에 심각한 도박중독자다. 천재의 광기이겠지만, 의식분열과 심리적 불안이 그의 거의 모든 소설에 반영되어 있다. 오늘의 위대한 작가 도스토 옙스키가 탄생하게 한 일등공신은 첫 번째 아내가 죽고, 시베리아 유형 경험이 녹아 있는 [죽음의 집의 기록] 발표한 후[ 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에 연재하면서 [악령]도입부를 쓰던 45살. 여전히 도박에 빠져 소설 쓰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고용한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뜨끼나’다. 이 여자 정말 대단하다. 이 중증 도박중독자의 아내가 되어 그가 구술한 소설을 속기하면서 도박자금도 대준다. 도스토 옙스키는 아내의 희생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나중에는 도박을 끊는다. 항상 돈에 허덕이는 도스토 옙스키를 위해 직접 인쇄, 출판까지 하면서 말년에는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의 도입부 역시 골랴드낀이 내과 및 외과 전문의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루쩬쉬삐쯔에게 정신상담을 받고 약을 받아 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날부터 4~5일간의 골랴드낀의 생활과 체험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집에 가는 길에 자기와 똑 닮고, 이름도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도플갱어’<현대 정신의학 용어로는 오토스카피 (Autoscopy : 자기상 환시)>다. 황당하고, 환장할 상황이다. 주위사람들의 반응은 더 미치게 한다. 나만 바보가 되는 기분. 마치 악몽을 꿀 때 귀신에 쫒기는 상황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답답함, 안타까움이라고 할까? 그러니 갈수록 광증이 심해진다.
“형편없는 몰골, 잔뜩 흥분한 모습, 어지러운 손짓, 공중에다 대고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알아들을수 없는 말들.~ 탁자 위에는 누군가 방금 식사를 했는지, 더러운 접시와 입 닦은 휴지, 그리고 이미 사용한 칼,포크,숟가락 등이 널려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은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먹고 난 흔적일까? 난가?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모르게 식사를 한 거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눈을 번쩍 치켜뜬 골랴드낀 씨는 옆에 서서 뭔가 말하려던 종업원을 보았다. 「여보게, 내가 얼마를 내야 하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골랴드낀 씨 주위에서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365,366쪽)
이런 광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대개 관료제사회의 경직성과 부정직함,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산업사회에 진입하는 과정에서의 귀족과 부르주아의 허영심 또는 무지한 민중에 대한 풍자거나 착하고, 순수한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을 주제로 삼는다. 이 소설은 도스토 옙스키가 상당한 기대를 하였으나 당시 평론가와 독자들에게 혹평을 받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나는 꽤나 흥미있게 읽었다. 게다가 이 소설을 그의 작품목록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이유는 나중에 그의 위대한 대작들을 위한 자양분 또는징검다리가 되는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