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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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하고 부르는 순간 입속에서 푸른 나뭇잎이 돋아날 것만 같다.

 ‘물푸레나무’라는 단어 속에는 오묘한 힘이 있다. 부르기만 하면 마음이 푸르게 정화되는 것만 같다. 가지나 나무껍질을 물에 담가두면 물빛이 푸르게 변한다 해 ‘물푸레나무’라고 한다.

 물푸레나무의 파르스름한 빛깔을 찾아 땅끝 마을 해남까지 간 시인.

 “그 파르스름한 빛깔”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 같다던 시인.

그 마음의 결을 따라 걷다 보면 물푸레나무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파르스름한 빛깔을 찾아서, 이 가을 하늘을 걸어가야겠다. 그런데 하늘로 돌아간 그녀는 그 빛깔을 찾았을까? /이설야 시인

 

 

 

 

무지개 빛깔.. 빨주노초파남보! 그 화려한 빛깔.  

그런데 시인이 좋아하는 빛깔은 무지개 빛깔이 아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명확히 볼수 없는 빛. 물푸레나무의 그 파르스름한 빛...

   

김태정.. 그녀의 삶과 착하고, 순수한 얼굴을 알고 나서는'물푸레나무'라는 시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아, 나의 부끄러운 이 눈물도 물푸레나무 처럼, 파르스름한 눈물이기를... 

 

 

 

물푸레나무

          - 김태정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여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그녀는 파르스름한 물푸레나무를 찾아 해남 미황사에 왔다. 

그리고, 혼자 죽었다...애닯고, 안타까운 죽음이다. 

그래서 선배시인 김사인은 그녀를 위해 다음과 같은 시를 바친다.

 

 

 

 

김태정

   -  김사인

 

 

  1.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하는 사람 이제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구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해주세요

  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께서도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해남군 송지면 해원리 서정리 미황사 앞

 

 

  2.  죽는다는 일은 도데체 무슨 일인가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안 보이는 무슨 깔때기 같은 것이 있어

  그리로 내 영혼은 빨려나가는 걸까요

  아니면 미닫이를 탁 닫듯이 몸을 털썩 벗고 영혼은

  건넌방으로 드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말해주세요

  마당에서 굴렁쇠도 그만 좀 돌리라고

  어지럽다고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만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니 던

  소설공부 다니는 구로동 노동자 공아무개 젖먹이를 도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더라는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되려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겁많은 귀뚜라미처럼 살다 갔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달에 5만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그저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히 내다보며

  그 바닥의 초본 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이제 더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그 집 헐어진 장독간과 경첩 망가진 부엌문에게 고장난 기름보일러에게

  이제라도 가만히 조문해야 한다

  새삼 슬픈 시늉은 할 건 없겠으나, 

 

 

                  *김태정(1963~2011)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한 권을 남김.

 

- 김태정 시인 타계(2011년 9월9일 해남신문)

 

미황사 직원들의 보살핌 속에 병마와 싸워오던 김태정(여·49) 시인이 지난 6일 오전 8시 40분께 눈을 감았다.

김 시인은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이라는 첫 시집을 출판한 시인이다.

해남에 내려와 생활한지 7년.

지난해 말 갑작스런 암 판정을 받고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을 비롯한 미황사 직원들이 그녀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김 씨의 곁을 지키며 열과 성을 다해 병간호를 해왔다.

미황사 관계자는 "김태정씨는 이미 암세포가 골수 깊숙이 번진 상태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었다"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웃을 돕는다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이며 당연한 일이다"고 말했다.

김태정 시인의 가족들은 "미황사 직원들의 따뜻한 보살핌에 감사하다는 말 외에 그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며 "가족처럼 옆에서 챙겨주어 떠나는 길이 덜 외로웠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김 시인은 미황사 가족들의 따뜻한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갖고 있는 것은 미황사에 전달되길 바란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떠났다.

이제 그녀의 두 번째 시집은 영영 만나볼 수 없게 됐다./

 

그렇다! 항상 시급 2000원의 밥과 노동의 정직성을 고민하면서 호마이카상(8,9쪽)에서 궁핍한 끼니를 잇던 그녀.."흰 쌀밥과 미역국. 이 단순한  흑과 백의 영토 안에서 아무려나 생일상 앞에서 만큼은 보수도 진보도 따로 없으려니 자본이든 노동이든 살아남은 값으로 최초의 성찬과 대면하리니...(최초의 성찬 30,31쪽 ) 그녀의 필생의 울음이 물푸레나무 빛이 되어 미황사가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미황사 33,34,35쪽) 하길 간절히 빌어본다.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말간 영혼의 시인... 죽은 그녀는  드들강의 물새가 되어 물푸레나무에 둥지를 틀었을 것이다. 그리고 '꾹꾹' 슬픔을 씹어 삼키며 속울음을 울 것이다.

 

이제는 그녀의 시가  물푸레나무가 되어 우리들 가슴을 '파르스름하게'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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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10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인생 시집 중 하나입니다.....

sprenown 2017-11-1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삶이 너무 애닯고,안타깝습니다. 이 시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