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의 올해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그의 작품에 대한 좋은 리뷰가 많다.(특히 cyrus님이 가즈오 덕후로 인정한 레삭매냐님의 리뷰는 매우 충실하고 훌륭하다) 그래서 리뷰를 쓰지 않을까도 생각했지만, 읽으면 쓴다는 원칙하에 암용 케리그의 입김이 내 독서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전에 리뷰를 남기기로 한다.

 

"당신이 그곳을 보았다면 구불구불한 오솔길이나 평온한 초원같은 것이 어디 있나 한참 찾았을 것이다."로 시작되는 문장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5~6세기의 영국, 황량한 황무지가 수킬로미터 펼쳐져 있고 바위투성이 산이나 음산한 황야가 펼쳐진 곳이다.('폭풍의 언덕'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은 황야의 거대한 습지주변에 살고 있는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아들을 찾기 위한 판타지 모험담이다. 그러나 그 여행의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고, 그들 노부부가 도달한 여행의 끝은 묵직한 것이다.(결말에 아들 찾아 떠난 이 여행의 의미가 드러난다)

 

위의 첫 문장처럼 작가는 이 소설을 전지적 작가시점(예외적으로 후반부 가웨인의 몽상과 마지막부분 죽음의 사신 뱃사공편은 1인칭 시점임)에서 당시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다 현재 시점으로 갑자기 끼어들기도 한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 주듯이 "그 시절  드넓은 지역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며 그것이 단지 믿을 만한 나침반과 지도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밝혀두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들판과 길과 목초지를 친절하게 구획해 놓은 산울타리가 그 당시에는 없었다."(47쪽) 

 

 

이것은 작가의 의도에 의한 것일 텐데, 사실 이런 개입이나 상황설명들은 독자의 책읽기에 방해된다. 아무튼,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을 찾아 떠나는 길.. 두 노친네들은 다정하고, 사랑이 넘친다. "두려움이 밀려와 비어트리스는 이따금씩 "지금도 거기 있나요, 액슬? "이라고 물었다. 그러면 액슬은 늘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라고 답하곤 했다."(48쪽) 철없으나 듬직한 늙은 슈렉과 강하면서도 애교많은 피오나 공주가 떠오른다. 환상적인 닭살 커플인 것이다.(사랑과 헌신을 통한 아름다운 이 노년의 모습을 작가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닐까?) 

 

이후 여행과정에서 토끼가 나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와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기괴한 수도원 분위기, 세익스피어 희곡 같은 대사, 브리튼족과 색슨족간의 전쟁과 복수에 대한 회상,아서왕을 매개로 한 가웨인과 액슬,위스턴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 그리고 입김을 통해 모든 기억을 지우는 암용 케리그..

 

결말부분인 426쪽에 이르러 기사 가웨인(세르반테스의 바보같지만 순박,우직한 기사, 돈키호테를 연상시킨다)과 전사 위스턴(옮긴이는 영국의 고대서사시에 나오는 영웅, 베어울프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의 대화를 통해 작가는 이 소설의 주제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 일에서는 아서왕의 뜻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행한 거여. 이 암용의 입김이 아니었다면 평화가 올 수 있었겠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봐요! 이 마을 저 마을 모두 오랜 적들이 형제처럼 지내고 있지 않소. 저 입김이 끊긴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이 땅 곳곳에서 어떤 기억들이 깨어나겠소! 좋소, 인정하오. 우린 강자든 약자든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학살했소. 하느님이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전쟁을 없앴소. 부탁하오 , 이 땅을 그냥 두고 떠나요."

"잘못된 일이 사람들에게 그냥 잊힌 채 벌받지 않기를 바라는 신은 어떤 신인가요?"

 

용을 무찌른 후 전사 위스턴는 어이없게도 정의와 복수를 위한 정복전쟁을 이야기한다.작가는 이처럼 독자들을 황당한 이야기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작게는 액슬부부간의 소소한 애정문제에서부터 종족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인류 전반에 걸친 '망각과 기억'의 문제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려는 듯하다. 그러나 그 '망각과 기억'이라는것은 야심가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아서왕의 전설(정의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엑스칼리버와 피비린내 나는 영국의 왕위 계승싸움)을 차용하여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과 일본의 침략,정복전쟁의 불가피성을 은유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일본인으로서 영국에서 성장한 작가의 피해의식이 반영된 게 아닐까? "까불지 마, 점잖은 척 하지만 너희 영국놈들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작가는 이제 화해와 용서,헌신적 인류애를 이야기 한다. "더디게 낫는 상처도 결국 다 낫게 마련이지요."(468쪽) 이 소설이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하기로 결정되었다는데 서사가 빈약한 이 스토리가 어떻게 구성될 지 자못 궁금하다. 원작에 충실한다면 흥행에 실패하게 뻔하니 시나리오 단계에서 엄청난 수정과 가공이 필요할 듯 싶다.

 

책 뒷표지에 세계 유명언론들의 현란한 찬사!  그런데 솔직히 영국독자들이나 영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서양인들에게는 모를까 우리 한국독자들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이야기가 아닐런지? 취향의 문제이거나 이해부족 일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지루한  이야기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차라리 장강명을 포함, 재기발랄한  우리 작가의 소설을 읽어야 겠다는 결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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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6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의 리뷰에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됩니다. ^^

sprenown 2017-10-16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럴려구요.. 이제 이곳의 분위기에도 적응됐으니.. 자유로운 독서와 비판적 글쓰기를 힘 닿는데 까지 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