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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후회하고 반성하며 읽은 리영희 선생의 일생

책 이야기에 앞서 개인적인 이야기.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전환시대의 논리]가 많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충격을 주고 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한 몇몇 책 때문에 반공법으로 구속되었던 리영희 선생도 만기출소 했던 때다. 그때 태어난 나는 자라면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지도, 리영희 선생의 이름을 듣지도 못했다. 서른이 넘어서야 선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돌아가실 즈음에서다.

2010년 12월, 신문매체론 종강 후 학교 앞 조그만 치킨 집에 모인 우리의 화제는 15일 돌아가신 선생이었다. 교수님은 ‘언론계에서 존경할 만한 분이 많지 않은데 리영희 선생님은 큰 어른 역할을 해주셨다’고 이야기하셨다. 부끄러웠다. 신문방송을 전공한 건 아니었지만 언론을 공부하겠다고 학교에 다니면서 리영희 선생도 모른다는 게, 부끄러웠다(우린 강준만 세대라고 변명해봐야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다. 나는 강준만 선생의 책도 많이 읽진 않았다). 내가 리영희 선생을 알지 못했던 건 그럴 필요가 없는 세대였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대표작 [우상과 이성]을 구입했다. 하지만 먼저 읽게 된 건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이었다. 이것 역시 게으름 때문이지만, 나름 생각으로는 무작정 저작에 접근하는 것보다 선생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제법 시간을 들여 [리영희 평전]을 읽어낸 후에야, 또 다른 후회를 했다. 소중한 것을 잃고 난 뒤에 그리워한다던가. 그 분이 살아계실 때 한번이라도 뵐 기회가,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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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을 통해 읽은 선생의 인생과 글은 (감히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매우 훌륭했다. 수십 년 전 쓴 글인데도 낡음이 없고, 선명하면서도 탄탄한 지식과 필체가 살아있는 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조건반사의 토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은 어느 사상가보다도 통찰력과 호소력을 갖는 표현들이었다. [리영희 프리즘]에서 고병권 선생이 쓴 글은 리영희 선생의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각성케 하는 모든 존재에 부여할 수 있는 이름이다.”

신문기자로서 선생이 탁월한 기자였다면, 혼탁한 언론계를 꾸짖을 수 있는 스승이기도 했다. 한국기자협회보에서 청탁받아 쓴 ‘후배 기자들에게 당부- ‘신문지’를 만들지 말고 ‘신문’을 만들자’는 글이다. “지난 한 세월 동안 내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紙, 종이)’는 내게 조석으로 배달되어 왔지만 ‘새 소식(신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소식이라는 것도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락은 것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言論人)’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왔다.”(443쪽)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지금은 신문의 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이 신문을 읽는 것 자체가 낡은 일이 되어버렸다. 소식은 이미 인터넷 등을 통해 무엇보다 빨리,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종이 신문들은 그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지금 색깔논쟁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신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선생이 조금 더 오래 펜을 잡고 활동하셨더라면 방향을 일러주시지 않았을까. 적어도 고민하라고 혼을 내지 않으셨을까. 어쩌면 이 책에도 언급되는,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출판기념회에서 말씀하신 것이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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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은 리영희 선생의 굴곡진 인생을 잘 풀어내기도, 또 선생의 글을 적절히 인용하기도 했지만 곳곳에서 과잉된 표현들도 눈에 띈다. “리영희가 유럽 중세에 태어났으면 이단심문소에 끌려가 화형을 당했을지 모르고, 나치시대에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살았으면 레지스탕스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춘삼월 날씨가 풀리면 만화방초가 다투어 피어나지만, 동짓달 서릿발 치면 소리 없이 시들고 잎이 진다. 송백이나 국매쯤 되어야지 오연하게 푸름을 지키고 꽃송이를 돋운다.” 이런 표현들과 고문들을 인용한 추앙(?)은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잃어버린 부분도 있지 않은가 싶다. 물론 리영희 선생의 평생은 인간적인 면모를 넘어서기도 하지만. 선생은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비인간적(?)으로 훌륭하셨다. 2009년 7월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인권실천시민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 강연은 여전히 시퍼런 서슬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일 년 동안 이명박 통치시대는 비인간적, 물질주의적, 반인권주의적 파시즘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42쪽)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답답함도 꽤 느꼈다. 우리, 적어도 나는 따라갈 수 없을 것만 같은 큰 그림자를 느꼈다고 할까. 그 그림자를 벗어났을 때의 시퍼런 바람을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서평마다 쏟아지는 찬사도 약간은 불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며 종종 투덜거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불만이 선생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나 보다. 선생의 인생이나 글에 대해 좋지 못한 말이라는 걸 전혀 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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