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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IT 디스 이즈 잇
얀 케르쇼트 지음, 방기호 옮김 / 씨아이알(CIR) / 2024년 7월
평점 :
처음 한번 읽을 때는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했습니다. 이것은 책인가, 세상에 대한 푸념일까. 버젓이 책을 출판하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펼쳐놓아 ‘버려라‘, ‘놓아라‘, ‘이순간을 잡아라‘는 가르침을 주려고 우주적인 농담을 하는걸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있음은 잡는 순간 도망쳐 버린다.
그것은 물로 가득 찬 욕조 안 비누와 같다.
잡을 순 없지만 분명히 있다. 애써 잡을수록 빠져나간다.
있음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여기 있지만, 당신은 실행할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는 이유는 당신이 이미 제대로 실행 중이기 때문이다...
있음은 개인 소유가 아니고 경계선도 없다.
있음은 언제 끝나는가? 그것은 끝을 모른다.
있음은 시간도 경계도 없기에 분리될 수 없다.
38p
이 무슨 알쏭달쏭한 소리일까요. 이분(두개)을 부정하는 비분법인 고대의 아드바이타가 현대에서는 아드바이타 삿상(satsang)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게 믿는 걸까요? 거기에 더하여 추천사도 붙어있습니다. 누구는 젊은 날에 얀 케르쇼트의 가르침을 만나봤고, 또 다른 사람은 구도의 길을 가다가 토니 파슨스를 만나 체험하고 변화했다고 합니다.
그런 스승들의 가르침을 대화로 풀어갑니다. 묻고 답하는 주고받는 대화인데 상당히 피곤합니다. 질문자는 묻지 않고 대답자는 말하지 않습니다. (두세번 읽으니 그들 스승의 구조가 얼핏 파악이 됩니다. 앗. 파악한다는 생각조차 들면 안되는건데...)
토니 파슨스는 영국 출신으로 아디바이타 베단타 비이원론의 본질을 강의하시는 분입니다. 현실은 비이원적이고 비인격적이라 정의하고 영적인 과정에서 신념의 이분법을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깨달았다고 말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노력하여 얻을 것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해탈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바꾸려는 노력은 장애물이다. 그냥 여기 있으면 된다. 우리는 이미 ‘이것‘을 가지고 있다.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뭔가 글을 읽는데 외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소리없는 아우성인가)
더글라스 하딩은 자신과의 10년간 문답을 끝내고 여러 층으로 둘러싸인 존재를 찾아냅니다. 세상은 개방된 에너지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그것이 되는 데에는 갑자기 되기도 하고 천천히 되기도 한다. 갑자기 되는 것은 문득 나의 본성을 알아보는 것이고, 천천히 되는 것은 서서히 알아본 상태이다고 말합니다. 불교의 돈오와 점수인가 봅니다.
미라 파갈은 23세에 인도로 건너가 마하리쉬의 제자인 슈리푼자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가 결혼(!)합니다. 스승과 결혼이라니. 97년 스승이 가신 후에 삿상을 펼칩니다. (삿상은 뭔가 우산같은 개념일까요. 주로 펼칩니다) 밖에서 찾지 말라, 하려는 집착을 버려라, 노력할수록 혼란에 빠진다, ‘이것‘만 알면 된다.
네이선 길은 막장 인생을 살다가 2008년 토니의 강연을 듣고 ‘디스이즈잇‘에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고 합니다. 14년에 자신의 신체 수명 Life Span을 스스로 끝내버렸다고 합니다. (자살이라는거겠죠) 그런데 본격적인 구도는 2008년부터 하였는데 책의 대담은 2000년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그대로 이것인가 봅니다. 세계는 환상이고, 인간은 배우이니까요. 막장 인생에도 갑자기 구루처럼 연기할 수 있는 거죠. ‘깨달음은 깨달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라고 소리칩니다.
척 힐릭은 ‘진리는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언제나 있으니 당신이 구하는 깨달음은 없다‘고 말합니다. 수행을 하면 행위의 느낌을 강화되고 일상을 부정하게 된다. 언젠가 도달할 것이라는 환상이다. 의식은 있음과 없음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세상 전체가 모두 의식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계속 좋은 대안을 찾는데 주머니 속의 물건을 찾아다니는 코미디에 불과하다. ‘잠들었다‘에서 ‘깨어났다‘고 변화하는 것은 꿈의 전환이고, 나의 깨달음은 본래 없기 때문에 깨달음을 도울 방법도 없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꿈속으로 깨어나는 것이다.
웨인 리쿼먼은 30대에 알코올 중독으로 19년간 온갖 마약을 하다가 어느날 각성하고는 인도의 라메쉬 발세카를 만나 람쭈라고 이름을 바꾸고 세계를 다니며 삿상을 하고 있습니다. 스승 라메쉬는 ‘말은 모두 잊어라. 가리킴을 대상화시켜 물건처럼 가지고 다니면 무거운 짐이 된다‘고 하셨답니다. 깨달아도 호불호가 있어 좋고 싫음을 분간합니다. (그럼 하나도 달라진게 없는건가) 깨달음은 그저 신발 안에 돌이 사라지는 것이고, 돌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어집니다. 깨달음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알아차린 상태라고 외칩니다.
(이쪽의 스승들은 죄다 외치고 소리치는 느낌인데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프랑세즈 루실은 장 클랭을 만나 비이원론을 전수받고 에크하르트의 기독교적 절대성을 바탕으로 삿상을 펼치고 계십니다. 둘이 아니다,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비자이 샹카르는 30년간 자신을 키워준 데이브가 사망하자 깊은 사색에 들어가 삿상과 저술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말고 보아라, 난 한마디도 안했으니 추측하지 말라고 합니다. 침묵 역시 마음에 일어나는 물결이고, ‘그것‘이 일어나면 모두 침묵에 빠지게 되며 일생에 한번만 보면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마크 맥클로스키는 수십년간 찾으러 돌아다녔지만 그것은 침묵 안에 언제나 존재한다고 말하십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일 때 모든 혼란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는 썩은 동굴에서 7년간 수행을 했지만 모두 똥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세상은 환상이 아니라 보는 눈이 환상이다는 참신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마치 구구단을 끝까지 외울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아있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아니면 둘다 아닌 평행세계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는 환상 속에 있을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생각하는 너와 물어보는 나는 결국 둘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일 뿐이야 하고 속삭이는 듯한 저 까마득한 알 수 없는 정신의 세계를 엿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