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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지루한 지룽이 ㅣ 북멘토 그림책 34
베티나 오브레히트 지음, 율리 푈크 그림, 김서정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26년 1월
평점 :
현대인에게 '지루함'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스마트폰 화면을 1초라도 보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아이들의 "심심해"라는 말에 무언가 대단한 자극을 주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이 책 《너무너무 지루한 지룽이》는 잊고 있던 '텅 빈 시간'의 소중함을 나직하게 속삭여 줍니다.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룽이'는 '지루함'과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합친 듯한 재치 있는 이름입니다. 책을 펼치면, 율리 푈크 특유의 섬세하고 몽환적인 연필 선들이 독자를 나른한 오후의 시간으로 초대합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그 순간, 아이에게 찾아온 '지루함'은 불청객이 아니라 길게 몸을 늘이며 아이 곁을 맴도는 신비로운 친구 '지룽이'로 형상화됩니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치는 과정을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 느릿하고 끈적한 시간을 온전히 통과할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마법 같은 순간들을 보여줍니다. 꽉 짜인 일정과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생각할 틈'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책 속의 주인공이 지룽이와 함께 멍하니 있을 때, 비로소 방 안의 사물들은 말을 걸어오고, 벽지의 무늬는 새로운 세상이 되며, 아이의 머릿속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가 펼쳐집니다.
독자로서 이 그림책은 마치 '마음의 여백'을 선물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심심해도 괜찮아,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라고 다독여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루함은 단순히 견뎌야 할 고통이 아니라, 내 안의 창의성이 깨어나는 인큐베이터이자 나 자신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고요한 시간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2026년의 새해, 바쁘게 달려가는 일상에 지친 어른들에게, 그리고 심심함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책을 덮고 나면, 문득 찾아오는 지루한 시간이 더 이상 두렵지 않고 오히려 설레는 '지룽이'와의 만남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 삶에 쉼표가 찍힐 때, 비로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증명해 낸 수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