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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볼 ㅣ 밀리언셀러 클럽 106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남희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2월
평점 :
아... 이 작가의 책을 다 읽고 나면 거의 틀림없이 기분이 갑갑(찝찝)해 진다는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로테스크>의 충격만큼이나... <아웃>의 처절함만큼이나...
그에 못지 않은 임팩트가 있군요. 기리노 나쓰오의 글은 왜 이리 쑤시는 걸까요.
왜 이리 후벼 파는 걸까요. 왜 이리 아픈 걸까요.
1999년작이자 20세기 마지막 나오키 상 수상작인 이 책 <부드러운 볼>속으로 살짝 들어가
봅시다...
[ 카스미... 20대 중반의 나이에 자신이 일하던 회사의 사장과 결혼해서 나름 행복한 생활을
하던 그녀는 한순간에 새로운 사랑에 빠져 버린다. 상대는 다름 아닌 남편의 지인이자 사업상
파트너인 이시야마... 물론 이시야마도 행복한 가정이 있는 유부남.
그러나 봇물이 터져버린 이들의 사랑은 그 끝을 모르고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시작하고,
급기야 양쪽의 가족들을 모두 초대한 별장에서까지 애정행각을 벌이는데... 다음 날
다섯 살 난 그녀의 딸 유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데...]
"그럼 뭐가 목적이야?"
"목적은 없어요" "그저 꿋꿋이 살아가는 거죠..."
이 소설이 조금 묘한 것은 추리 미스터리물의 형식을 갖추고 추리 미스터리물처럼 진행되지만
정작 사건 그 자체의 해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사회파의 특징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저.. 마치 미미 여사의 그 방식처럼 거의 모든 등장 인물을, 그들 각자의 시점에서 철저히,
그러나 차갑고 냉담하게 바라봅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바라보는걸 보여주지요.
진득하고 끈적한..
어찌보면 이 소설은 캐릭터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인물 하나 하나에 비중을
두고 그 비중에 걸맞게 설명을 해줍니다. 설명.. 보다는 그 사람의 삶과 인생을 보여준다는게
더 맞겠군요.
카스미와 이시야마... 각각의 가정이 있음에도 우연히 찾아온 그 순간을 거부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크게 불을 붙여버린 두 사람...
영원하게 만들려던 그 순간이 불과 한 걸음 물러난 걸로 무너져 버린...
카스미와 우쓰미...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지만 마지막을 앞에 두고는 너무나도
닮아버린...
거센 파도가 쉴 새 없이 부딪쳐 오는 방파제에서 맨 몸으로 그 파도를 다 맞고 있는 두 사람...
카스미와 미치히로...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부부면서 서로에 대해 가장 모르고 있는
두 사람...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이 소설에선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카스미의 남편 미치히로...
이외에도 서로의 인생에 얽히고설킨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정상적인, 그리고 비정상적인
사람들... 복잡하지만 단순한 이들의 관계는 서로를 격렬하게 위로해주고 서로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줍니다.
소설을 읽는 독자를 참으로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하는 부분이죠.
절대 필요하지만 결코 필요없고 가족이지만 언제라도 남이 되어 버릴 수 있고 사랑하지만
가장 증오하는 이 아이러니한 관계들...
기리노 여사의 책치고는 비교적 적막한 고요함 속에 진행되지만 설마 마지막까지 그렇지는
않겠죠. 여사의 책이 거의 늘 그렇지만 다 읽은 후 책을 덮고 다시 한 번 책 속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에휴..
뭐라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기분 나쁘고, 뭔가 치고 올라올 거 같고, 괜히 입 맛이 없어지고,
꿈꾸면내가 소설 속 주인공이 되서 온갖 더러운 꼴은 다 당하고.. 하여간 절대로 속편한 소설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딸의 실종과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실상 작가는 거기에 둘러싸인
인간들의 모습을 바라보라고 조용히 소리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
기리노 나쓰오 여사는 정말 이런 장르의 장인이라고 불러도 될 거 같습니다.
A형 사람은 맨날맨날 소심하고 내성적. B형은 그 어떤 경우에도 바람둥이, AB형은 무조건 바보
아니면 천재... O형은?
이런 식으로 딱 잘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안 나옵니다. 사실 저런 성격만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달라지는게 사람이고 그게 우리의 모습인데
말이죠.
그래서 기리노 여사가 만든 캐릭터들은 단순하며 복잡합니다.
공감하면서 절대 공감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지만 용서하기 싫습니다.
위로하고 토닥여주며 같이 울고 싶지만 바로 욕을 해 주고 싶습니다.
이 책은 모순, 그리고 아이러니입니다. 미스터리 소설이면서 순수 연애 소설이고 가장 깨끗한
사랑을 속삭이면서 가장 더러운 사랑을 합니다.
인간의 순수함을 그리면서 그 인간의 더러움을 덧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