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으로 기억합니다. 도서 대여점의 최전성기였고 아직까지는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가 나오기 전이었죠. 흔히 1세대 판타지 작가들이라고 말하는 이영도, 전민희, 홍정훈, 김민영, 이수영, 임경배 등등.. 다들 글 재밌게 잘 쓰는 작가들입니다. 어중이떠중이 전문 양판소 작가들과 한데 무리지어서 같은 판타지 작가라고 부르기 참 미안한 분들이기도 하구요. 위의 작가들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지만 작품이 그만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네임벨류에서도 떨어진 작가가 있습니다. 그 뒤로도 꾸준히 활동을 하던 이 작가는 <하얀 늑대들>이라는 작품을 내고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폭넓게 알리게 됩니다. 작품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좋았구요. 그리고 신작(<라크리모사>)이 나옵니다. 어라!.. 한 권짜리네요. 어라라!.. 판타지도 아니네요. 그동안 꾸준히 판타지만 쓰던 작가가 전혀 다른 장르를 쓰다니요. 이 작가 도박을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도박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작가에 대한 평이 더 올라가게 만든 작품이었죠. <라크리모사>를 내고 한 걸음 더 내딛은 작가는 이제 판타지란 이름의 새장에 갇혀 있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이번에 나온 신작 <살해하는 운명카드>는 서스펜스 심리 스릴러입니다. 자신의 의사로, 또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빚을 진 다섯 명의 남녀가 위치를 알 수 없는 저택에 모이게 된다. 이곳에서 이들이 해야 하는 건 단 하나의 게임.. 일명 '운명을 거스르는 게임' 이다. 게임의 규칙은 아주 간단하다. 각자 한 장씩 고른 카드 뒷면에 적혀 있는 자신의 운명을 그저 거역하면 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다섯 명 모두가 승자가 될 수도 있고 모두가 패자가 될 수도 있다. 기간은 일주일. 탈락하면 빈털털이.. 자~ 게임 시작!! 서른이 넘은 나이에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종민은 소심합니다. 나약합니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결국 이런 성격 탓에 빚을 지고 이 게임에 초대받게 됩니다. 게임의 방식은 쉬워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조건이 너무 좋다 보니 계속해서 의심합니다. 이런 캐릭터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객관적인 시선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그의 시점과 생각에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독자의 시야는 더 좁아지구요. 장소와 공간도 한정되어 있어서 특별히 머릿속에 담아 두어야 할 정보의 양도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편하게 읽히기는 하는데 좀 더 머리를 써서 읽고 싶다는.. 장점과 단점이 공유하는 부분이지요. 언뜻 봐선 소재와 설정이 참신한 거 같지만 이런 류의 소재를 가진 작품이 너무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중요한 건 비슷한 소재와 설정을 가지고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느냐 인데 이야기는 잘 풀어냈습니다. 쉽게 읽히고 점점 긴장감이 고조되는 전개도 상당히 괜찮구요. 다만.. 결말까지 가는 길이 너무 잘 닦여져 있네요. 험난한 코스가 거의 없어요. 굳이 지름길을 택하지 않아도 목적지가 눈에 확 들어와 버리니 도착하고 나서의 희열과 만족감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소설 <인사이트 밀>과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 <라이어 게임>이 적절하게 조합된 듯한 설정. 거기다 카드 게임과 밀실살인이라는 추리 요소의 결합. 좋은 흡인력은 큰 장점입니다. 쓰고 보니 까는 리뷰가 되어 버렸는데.. 만약 작가가 윤현승이 아니었다면? 더 만족했을겁니다. 그동안 작가가 보여준 조금씩 발전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너무 당연시했나 봅니다. 윤현승이니까 더 기대를 가졌고 그 기대에 살짝 못 미치니 더 아쉬워서 그런가 봐요. 꾸준히 윤현승의 작품을 읽어 왔던 독자들에게는 평작. 처음 보는 독자들에게는 추천해도 괜찮을만한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