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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경첩
존 딕슨 카 지음, 이정임 옮김, 장경현 감수 / 고려원북스 / 2009년 1월
평점 :
장르 소설이라면 거의 모든 장르를 좋아하면서도 유독 고전 추리만은
많이 읽질 못 했습니다. 현대적 미스터리 스릴러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도
있을테고 많은 고전 추리 명작들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도 한 이유가 될테지요.
그러다 콜린 덱스터의 <모스 경감>을 시작으로 크리스티여사,
윌리엄 아이리쉬(코넬 울리치), 앨런 포, 로스 맥도널드, 브랜드여사까지...
15~20여 편 정도를 읽게 됐습니다. 거의 모든 작품이 괜찮더군요. 다음 작가로
좀 더 취향에 맞을거 같은 딕슨 카의 <황제의 코담뱃갑>을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딕슨 카의 작품 중 두 번째로 고른게 이 책<구부러진 경첩>입니다.
고전 매니아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고전 추리의 특징들이 일단 전개 속도가
비교적 여유롭다. 옛 구어체가 다소 어색하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다.
글에서 구수하면서 매혹적인 향이 난다. 현대적인 소설에 익숙한 분들에겐
조금 지루할 수도 있고 트릭이 엉성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정도...
<구부러진 경첩>도 위에서 말씀드린 단점 아닌 단점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고 무엇보다 초반부터 치고
나가는 두뇌싸움에 묻힐 정도입니다. 시작해서 얼마되지도 않아 스토리가
정신없이 몰아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진짜 "판리 경"이라고 주장하는 것부터,
계속해서 머리 아플 정도로 끊임없이 나타나는 수수께끼와 아주 미미한 단서,
그리고 독자들을 거의 배려해 주지 않는 추리... 주인공이 신구 선생님도
아닌데 말이죠~ (니들이 추리를 알아?)
"대체 이 작가는 왜 내 지적 수준을 자꾸 의심하게 만드는걸까?" 생각이 들어
잠시 검색~ 이 작품이, 일반인도 아니고 영미권 추리소설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역사상 최고의 밀실 미스터리 4위로 뽑혔다네요. (참고로 1위도
딕슨 카의 <세 개의 관>) 딕슨 카는 '불가능 범죄'(밀실 트릭)의 대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특유의 괴기스럽고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도 많다고 알고 있구요. (<화형 법정>이 그렇다고...) 확실히 단 두 작품만
읽었지만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분위기란게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마법사와 마술사의 차이같습니다. 마법사는 말 그대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반면 마술사는 좀 다르죠, 마술사는 관객에게 불가능하게
"보일 뿐인" 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딕슨 카가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트릭과 장치가 바로 프로 마술사의 그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펠 박사의 능수능란한 수사 기법도 마찬가지로 관객(독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 아무 힌트도 안 주면서 심리분석에 예측이
난무하는 바람에 더 헛갈리게 만듭니다.
딕슨 카는 독자들에게 그 어떤 예측이나 섣부른 범인 맞추기는 절대 금물이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타이타닉호와 관련된 비밀에 20여 년이 지난 사건,
이해 안 되는 범행 도구, 오컬트적인 자동인형, 범인과 펠 박사의 두뇌싸움에는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본격 하나만으로도 이야기를 재밌게 구성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외에도
수 많은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놓고 그 하나하나의 맛을 빠짐없이
맛보게 해주는 능력이 대단합니다. 과연, 크리스티여사, 엘러리 퀸과 함께
추리소설 매니아들이 뽑은 3대 추리소설 작가답습니다.
분명히 종착지가 어딘지 알면서 놀이기구를 탔는데 놀이기구가 움직이는대로
몸을 맡기다 보면 정신이 없어지고 여기가 대체 어디쯤인지 분간도 안되고
그러면서도 놀이기구는 재밌을뿐이고...
올해는 딕슨 카의 다른 작품은 물론이고 반 다인의 작품을 비롯해 고전 추리의
명작들이 많이 나올거 같습니다. 모쪼록 팬이 아니었던 분들도 팬이 될 수 있는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